고사가 덴노

 


[image]
'''시호'''
고사가 덴노(後嵯峨天皇, 후차아 천황)
''''''
미츠히토(秀仁)
'''능호'''
사가남릉(嵯峨南陵)
'''생몰'''
1220년 2월 26일 ~ 1272년 2월 17일
'''재위'''
1242년 2월 21일 ~ 1246년 2월 16일
'''연호'''
간겐(寛元)
1. 소개
2. 생애


1. 소개


일본의 제88대 천황. 츠치미카도 덴노의 7남. 미나모토노 미치무네의 딸 미치코(通子)의 3남이 된다. 이름은 구니히토(邦仁). 법명은 소가쿠(素覺). 능묘는 덴류지(天龍寺) 안에 있는 사가노 미나미노 미사사기이다.

2. 생애


1221년 고토바 덴노가 유배당할 때 츠치미카도 덴노가 자청하여 도사(후에 아와)로 유배를 떠나자 어머니의 숙부 미나모토노 미치카타의 손에 양육되었다. 미치카타가 죽자 할머니 쇼메이몬인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집안의 몰락 후 20살이 넘도록 출가도 원복(성인식)도 하지 못하는 불우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그런데 1242년 시죠 덴노가 12살의 나이로 돌연사하면서 행운이 찾아왔다. 가마쿠라 막부의 방침은 고토바 덴노의 혈통을 황위에서 배척하는 것이었으나, 시죠 덴노에겐 형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의 권력자 쿠죠 미치이에는 준토쿠 덴노의 6남 다다나리 왕을 옹립하려고 했다. 준토쿠 덴노는 고토바 덴노의 막부 타도 계획에 적극 관여하여 사도에 유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부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 대신 고토바 덴노의 계획에 가담하지 않은 츠치미카도 덴노의 7남 구니히토 왕을 추대하였다. 같은 고토바 덴노의 손자여도 고토바 덴노의 계획에 가담한 준토쿠 덴노의 아들과 계획에 가담하지 않은 츠치미카도 덴노의 아들은 막부에게 있어 입장이 달랐기 때문이다.
결국 23살의 구니히토 왕이 같은 해 갑작스레 원복을 치르고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당시 조정 귀족들 사이에서는 “천황의 즉위 또한 동이(동쪽의 오랑캐란 뜻으로 가마쿠라 막부를 가리킴)가 결정한다. 말세의 일이니 슬퍼할 만하다”, “여러 사람의 중론이 아니라 이역만류(먼 곳에 있는 오랑캐 무리)의 몸으로 이 일을 결정하니 종묘의 뜻은 무엇일까.”라는 불만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재위 4년 후인 1246년, 고사가 덴노는 4남 히사히토 친왕(고후카쿠사 덴노)에게 양위하고 인세이를 시작하였다. 그해 미치이에의 아들로 가마쿠라에 있던 전 쇼군 요리쓰네가 막부의 정변에 연루되어 교토로 쫓겨났기 때문에 미치이에는 실각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정의 정치에 대한 막부의 간섭은 현저히 강해졌다. 막부가 상황이 주재하는 회의(원평정중)를 만들고는 그 구성원을 막부가 거의 지정했다. 또 원정 자체도 막부의 제약을 받게 되었다. 상황들 가운데 인세이를 하는 상황을 일컫는 ‘치천의 군(君)’이나 천황을 결정하는 일도 막부가 행하였다. 고사가 덴노도 그의 사후 ‘치천의 군’에 대한 결정권을 막부에게 일임한다는 칙서를 남기기도 했다.
고사가 상황의 시대는 전반적으로 막부의 주도 아래 조정과 막부가 긴밀한 협조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251년 요리쓰네가 다시 모반에 연루된 것을 계기로 막부는 황족 출신의 쇼군을 추대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듬해 1252년 요리쓰네의 아들 요리쓰구가 쇼군직에서 해임되고 교토로 추방됨으로써 쿠죠 가문으로부터 쇼군을 보내온 섭가(섭정이나 관백에 임명될 수 있는 집안) 쇼군의 시대는 끝났다. 그리고 고사가 상황의 아들 무네타카 친왕이 최초의 황족 쇼군(이른바 ‘미야 쇼군’)으로 가마쿠라에 파견되었다. 막부의 요청에 고사가가 부응한 것이었다.
고사가 상황이 인세이를 하던 시기는 가마쿠라 막부를 장악한 호조 가문과의 제휴를 통해 정치의 안정을 도모한 시기이기도 했다. 다만, 고사가는 8남 가메야마 덴노를 총애한 나머지 고후카쿠사 덴노의 아들이 아닌 가메야마 덴노의 아들(훗날의 고우다 덴노)을 황태자로 세운 탓에 그의 두 아들의 후손들은 지묘인 계통(고후카쿠사 덴노의 혈통)과 다이카쿠지 계통(가메야마 덴노의 혈통)으로 나뉘어 황위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다. 가마쿠라 말기의 황위 계승을 둘러싼 조정의 알력은 남북조의 동란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고사가 상황은 행복한 사생활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그는 탑을 건립하는 등 불가의 일에 관심을 쏟았고, 시가에도 뛰어나서 『속후찬화가집(續後撰和歌集)』, 『속고금화가집(續古今和歌集)』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1268년에 출가하여 법황(출가한 상황)이 되었고, 다이카쿠지(大覺寺)로 거처를 옮긴 후 1272년 그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