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카쿠사 덴노

 


[image]
'''시호'''
고후카쿠사 덴노(後深草天皇, 후침초 천황)
''''''
히사히토(久仁)
'''능호'''
사가남릉(嵯峨南陵)
'''생몰'''
1243년 4월 1일 ~ 1304년 3월 17일
'''재위'''
1246년 2월 16일 ~ 1260년 1월 9일
'''연호'''
호지(宝治)→켄초(建長)→코겐(康元)→쇼카(正嘉)→쇼겐(正元)
'''황거'''
레이제이토미노코우지도노(冷泉富小路殿)
칸인(閑院)
冷泉万里小路殿
1. 개요
2. 생애
3. 가족 관계


1. 개요


일본의 제89대 천황. 휘는 히사히토(久仁).[1] 고사가 덴노의 4남이며, 사이온지 깃시의 장남.

2. 생애


1246년, 부친 고사가 덴노의 뒤를 이어서 4세의 나이로 천황에 즉위하였고, 재위하는 동안 고사가 상황이 인세이를 했다.
고후카쿠사 덴노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는데, 고사가 상황은 고후카쿠사 덴노의 동복동생인 쓰네히토 친왕(훗날 가메야마 덴노)을 더욱 총애하였다. 쓰네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옹립된 이듬해 17세의 고후카쿠사 덴노가 양위한 것도 고사가 상황의 의도였다.
고후카쿠사 덴노의 황자를 놔두고 가메야마 덴노의 황자 요히토 친왕을 황태자로 정한 것으로 볼 때 고사가 상황은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에게 황위를 계승시키고자 했던 것 같으나, 정작 황위 계승에 관한 명확한 의견을 밝히지 않고 이에 대한 결정을 가마쿠라 막부에게 위임하는 유언을 남기고 임종하였다. 이에 따라 고후카쿠사 덴노와 가메야마 덴노 중 어느 쪽이 통치권자가 될 것인지를 두고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결국 태후인 사이온지 깃시가 고사가 덴노의 의중을 막부에 전달하면서 가메야마 덴노가 정권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러한 처치에 깊은 불만을 품은 고후카쿠사 덴노는 고우다 덴노가 즉위한 후 태상천황(상황)의 칭호를 버리고 출가하려고 결심하였다. 당시 조정과 막부의 교섭을 담당하고 있던 사이온지 사네카네와 막부의 집권 호조 도키무네가 고후카쿠사 상황의 처지를 동정하여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 히로히토 친왕을 고우다 덴노의 황태자로 세우게 되었다.
1287년 히로히토 친왕이 후시미 덴노로 즉위하고 고후카쿠사 덴노의 인세이가 개시되었다. 이어서 후시미 덴노의 황자 다네히토 친왕이 황태자로 정해지고 고후카쿠사 상황의 황자 히사아키 친왕이 가마쿠라 막부의 제8대 쇼군이 되었다. 형세가 역전되어 고후카쿠사 상황에게 유리한 세상이 되자 가메야마 상황은 출가해버렸다.
1290년, 고후카쿠사 상황은 출가하여 법명을 ‘소지쓰’로 하였다. 그의 일기 『고후카쿠사인신기(後深草院宸記)』가 전해지고 있다. 고후카쿠사 덴노는 지묘인(持明院)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혈통을 지묘인 계통이라 하였고, 가메야마 덴노의 자손은 고우다 덴노가 다이카쿠지(大覺寺)에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 혈통을 다이카쿠지 계통이라 하였는데, 황실의 분열은 남북조 시대까지 이어졌다.
추호(追号)인 고후카쿠사(後深草)는 54대 닌묘 덴노의 별호인 후카쿠사노미카도(深草帝)에서 따온 것이다.

3. 가족 관계


- 중궁 : 사이온지 기미코(西園寺公子, 1232년 ~ 1304년)
- 후궁 : 도인 인시(洞院愔子)
- 후궁 : 산조 후사코
- 황자 : 히로히토 친왕(熈仁親王, 후시미 덴노)
- 황자 : 히사아키 친왕(久明親王, 1276년 ~ 1328년, 가마쿠라 막부 제8대 쇼군)
- 황녀 : 레이시 내친왕(姈子内親王, 1270년 ~ 1307년, 고우다 덴노의 비)

[1] 27대손인 히사히토 친왕과 발음이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