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사히토

 

'''이름'''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
(秋篠宮悠仁親王)
'''출생'''
2006년 9월 6일 (17세)
일본 도쿄 아이이쿠 병원(愛育 病院)
'''학력'''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 (수료)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초등학교 (졸업)
국립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 (재학 중)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皇嗣 秋篠宮文仁親王, 황사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
'''어머니'''
키코 비(皇嗣 秋篠宮紀子妃, 황사 아키시노노미야 키코 비)
'''형제자매'''
1남 2녀 중 셋째(고명아들)
큰누나 마코, 작은누나 카코
'''신장'''
165cm, 50kg
'''계승서열'''
2위
1. 개요
2. 상세
6. 불안한 미래
6.1. 황실의 장래 구성
6.2. 후사와 자녀
6.3. 결혼 가능성
6.3.1.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와 결혼?
8. 기타 등등
8.1. 성격
9. 관련 문서


1. 개요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 친왕(秋篠宮悠仁親王). 현재 일본 황실의 유일한 남자 황손으로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 비의 늦둥이 막내 고명아들이다. 형제로는 15살 위의 큰누나 마코 공주와, 띠동갑인 작은누나 카코 공주가 있다.
2019년 5월 1일 부로 큰아버지 나루히토가 일본 제126대 천황에 오르면서, 아버지 후미히토에 이은 '''황위 계승 서열 2위'''가 되었다. 히사히토는 후미히토의 유일한 아들이며 3남매 중에서 청일점이자 최연소로, 막내다. 아버지인 후미히토 친왕 3남매 중에서 고모인 구로다 사야코홍일점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반대되지만, 최연소로 막내라는 것에 있어서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황실전범이 바뀌지 않는 한 '''훗날 일본천황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이다.''' 하지만 본인의 가족들에 의하여 천황 후계를 여러 가지로 논란이 큰 상황이고,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일본 내의 평가가 좋지 못한 것도 있어 아직은 더 지켜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2. 상세


일본 황실로부터 받은 문양은 '''금송(金松)'''. 언론에선 주로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秋篠宮悠仁) 친왕전하(親王殿下), 뉴스에서는 보통 히사히토사마(悠仁さま)라고 불린다. 본래 친왕가를 이을 아들에겐 '와카미야(若宮)'라는 칭호가 붙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아키시노'''와카미야'''(秋篠'''若宮''')가 될 것이나 공식적으로는 미야케#s-3와 관련된 경칭은 부여되지 않았고 편의상 아키시노노미야라는 미야명을 성씨 대신으로 쓰기 때문에 '아키시노노미야 히사히토'라고 불리는 것이다. [1]
1965년 아버지 후미히토가 41세인 2006년에 태어난 남성 황족이기 때문에, 태어난 직후부터 황태손에 준하는 예우를 받고 있다. 좀처럼 남성 황족이 태어나지 않는 상황이었던 탓에,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때 여성의 천황 승계와 미야케 창설을 허용하도록 '''황실전범(皇室典範)'''을 개정하려 했으나 자민당 내 보수파벌들이 강한 반발로 포기했었을 정도라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나루히토 황태자의 무남독녀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가 장래 천황이 된다.
하지만 히사히토가 2006년 9월 6일 태어나면서 이러한 시도들은 흐지부지, 무산되어 버렸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황위의 남성 승계를 골자로 하는 현행 제도를 견지하겠다.'고 밝혔고# 일본 정부도 황실전범 개정을 사실상 단념해# 여성 승계는 물 건너간 듯. 여성 천황 관련 논의가 완전히 폐기되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 때 여성 천황 허용하려고 하던 기조에 선두에 서서 반대의견을 내세워서 결국 포기하게 만든 경력이 있는 아베 신조 총리는 "일본 황실은 '''부계(父系)'''로 잇는다."라고 아예 못박았다.
후미히토 내외가 나루히토 일가를 10년 이상 괴롭힐 수 있었던 이유는 남자황손이었던 히사히토였지만, 이로 인해 큰누나 마코 공주와 작은누나 카코 공주성차별편애에 시달리고 억압과 방임으로 인해 이기적인 성격이 되었다.[2] 그리고 히사히토가 태어나지 않아 황실전범이 개정됐다면, 당시 황태자 나루히토의 외동딸이었던 아이코 공주가 아예 처음부터 천황 후계자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3] 결과적으로 본의 아니게 황실에 많은 혼란을 가져온 존재.
2017년 황실에서 정식으로 황위 계승 서열을 확정해 나루히토 - 후미히토의 뒤를 이어 천황이 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후미히토가 안 되면 히사히토가 황위를 계승할 수 있다"는 애매한 결론도 내렸다.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유치원과 부속소학교를 거쳐 2019년 4월부터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중학교에 다니고 있는데,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학교는 중학교까지만 남녀공학이고 고등학교여고다. 그래서 히사히토의 진학에 대해 논란이 있었는데, 쓰쿠바대학 부속중학교에 진학한다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유치원부터 소학교까지 부정입학 의혹이 많아, 이 중학교에도 뒷문 입학할 것이라는 논란이 심했다. 히사히토가 입학하기 전 학년도부터 히사히토가 입학하는 그 해까지 추천 전형이 도입되는데, 이게 히사히토를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히 떠돌고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어머니 키코 비가 예전부터 히사히토를 명문대학교인 도쿄대학에 보내려고 기를 쓰고 단단히 벼르고 있기 때문에, 욕심을 버리지 않는다면 지금 도쿄대에서 추진 중인 특별 추천 전형(?)으로 히사히토를 도쿄대에 넣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18년 이후 아키시노미야 家에 대한 대대적인 반발 때문에 결국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중학교에 내부진학하기로 했다.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본모습을 본 일본인들이 "애비부터 자식들까지 하나같이 부정입학이 아니면 학교를 갈 수 없는 거냐", "천황 부부(가쿠슈인 대학 대학원 + 하버드대학, 도쿄대학)와 아이코 공주(도쿄대도 가능할 정도의 최상위 성적)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진학하는 게 아니라면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발하여, 그냥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중학교로 보낸 것이다.
히사히토의 학업과 진학에 대한 묘사는 한마디로, '''뒷문 입학을 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학업 성취도가 현저히 떨어지는 아이''' 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일본 국민들도 잘 알고 있다. 이전에는 그냥 알고 있어도 황실의 유일한 승계자인 만큼 어쩔 수 없이 대충 눈감아 주던 수준이었지만, 큰누나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가 발생한 2018년 이후에는 '학교를 갈 거면 제대로 공부해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시험치고 정정당당하게 가라. 사촌누나 아이코 공주도 자기 능력으로 공부해서 도쿄대학 갈 수 있는 수준의 성적을 달성하는 거 봤지? 안 그러면 절대로 인정 못 한다.'로 여론이 바뀌었다고 보는 게 맞다.

3. 탄생



히사히토의 탄생부터 유치원 입학 전까지의 행보를 서술해 놓은 문서이다.

4. 소학교



히사히토의 국립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 소학교 진학부터 현재까지의 행보를 서술해 놓은 문서이다. 본래 일본 황족들은 전통적인 황족/귀족 학교인 가쿠슈인에서 공부하는 게 오랜 관습이자 전통이었는데, 2008년 9월 다카마도노미야 쓰구코 공주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에 입학한 후부터 그 전통이 슬슬 깨지고 있다.
히사히토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그러나 이전까지 가쿠슈인 유치원을 다니지 않은 공주들은 몇 있었지만, 소학교(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는 쭉 가쿠슈인을 다녔고, 그 이후에야 가쿠슈인 대학이나 가쿠슈인 여대가 아닌 다른 대학에 진학했다. 의무교육[4]을 가쿠슈인이 아닌 다른 학교에서 받은 황족은 히사히토가 처음이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5. 중학교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 중학교에 진학했다. 다만 오차노미즈 여대 부속학교 중 남고는 없기 때문에[5], 고등학생이 될 시점에는 다른 학교로 진학해야 한다. 가쿠슈인 고등과(남고)로 갈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갈지 불분명한 실정.

6. 불안한 미래


2019년 아키히토 천황이 고카쿠 덴노이후 202년 만에 생전 퇴위로 물러나고 맏아들 나루히토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는데, 후미히토가 황사가 되고, 그 아들인 히사히토가 황태손 지위에 걸맞는 차기 황위 계승자가 되어 황실 적법에 따라 황위를 물려받기로 확정되었다. 여기까지야 황실전범이 바뀌지 않았으니 자연스러운 흐름인데…히사히토가 정말로 즉위한다면, 천황 역할 수행은 힘들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6.1. 황실의 장래 구성


일단 남성 황족이 사실상 거의 없어진다. 할아버지 아키히토 상황(90세)과 작은할아버지 마사히토 친왕(88세)이야 말하면 입만 아프고, 히사히토의 큰아버지 나루히토 덴노도 현재 만 64세, 아버지 후미히토 친왕은 58세다. 17세인 히사히토가 즉위한 이후로도 이들이 대외활동을 왕성하게 하리라고는 기대할 수 없다. 아니, 그쯤이면 아키히토 상황과 마사히토 친왕은 노령과 노환 등으로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에 그나마 존재하는 여성 황족들도 모두 히사히토보다는 나이가 많으니, 공주들은 평생 독신으로 살거나 나루히토 덴노가 황실전범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모두 결혼으로 인하여 황적에서 이탈하고 평민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즉, 히사히토가 즉위할 때가 되면 '미카사노미야 궁가를 지키기 위해 독신으로 남겠다'고 선언한 7촌 고모 아키코 공주 한 명만이 남아서 히사히토의 공무(公務)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런데 일본 황실의 공무량은 상상을 초월해서 지금도 성인이 된 공주들도 공무로 머리를 싸매고 있고 황실에서도 공무 부담이 너무 큰 까닭에 2019년 5월 이후로는 사실상 황실과 의절한 상태였던 노부코 비에게마저 어떻게 설득해서 황실 공무를 맡기는 상황이다, 달랑 두 명의 황족이서 이 엄청난 공무를 모두 감당할 수 있을지도 불분명하다. 결국 시집간 공주들에게도 공무를 맡기기로 했고, 극단적인 가정으로 현재 미혼인 모든 공주들이 모두 다(!) 결혼을 포기하고 평생 처녀로 늙어죽는다 해도 결국 시간벌기밖에는 안 되는 미봉책일 뿐,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독신으로 살면 자식을 낳을 수가 없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도 현재의 황실전범상 그 자식은 평민의 자식이지, 황족이 될 수 없기 때문. 즉 현 상태로는 당장 공무를 맡을 사람들의 수가 유지되거나 줄어들망정 늘어나는 것은 못 해도 10년 이내로는 꿈도 못 꾸는 상황이라 이쪽이나 저쪽이나 조금 더 버티냐 덜 버티냐의 문제일 뿐, 한마디로 한식에 죽으나 청명에 죽으나 이다. 그런 고로 황실전범을 어떻게 하지 않는 이상 결국 대를 이을 수 있는 사람은 젊은 피, 어린 히사히토뿐이다.
이대로 가면 아예 황족의 씨가 마르다시피 할 형편이다. 일본에는 황실에 중대한 일이 날 때 이를 결정하는 황실회의(皇室会議)[6]가 있는데, '''히사히토 치세에는 황실회의에 참여할 황족이 아무도 없어서 황실회의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할 판이다'''. 현재는 고인이 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이 살아생전 90대 중후반의 오늘내일하는 고령에도 은퇴하지 못하고 황실회의 참석 의원으로 불려갔을 정도로 황족회의 구성이 불안정했고 2020년 기준으로 생전퇴위 등에 의하여 황실회의 참여 황족이 줄어들게 되어 현 시점에서 그나마 젊은 게 후미히토 부부와 히사코 비 정도로 고령화된 상태이다. 거기에 원칙상 황실회의에는 내친왕과 여왕은 참석이 불가능하기에 현 시점에서 추가 유입은 히사히토가 결혼해서 아내를 얻는 것 외에는 불가능한 상황.
2019년 5월 1일 새로운 천황이 된 나루히토의 즉위 행사 때, 성인 남성 황족만이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 참석 가능한 남성 황족은 마사히토 친왕과 후미히토 단 둘 뿐이었다. 히사히토는 아직 미성년[7]이어서 공식석상에는 불참했다. 1989년 아키히토 상황이 천황에 등극했을 때 동일 행사에는 남성 황족 6명이 참관했던 것[8]과 너무 비교되어서, 지금 일본 황실의 불안정성을 잘 보여주는 상징으로 취급받고 있다. 이 때문에 즉위 행사 때 공항에서 황족이 외국 손님들을 맞이하는 의전 행사도 인원 부족으로 취소해야 했다. 이런 맞이 행사 역시 성인 남성 황족만이 해야 하는데, 마사히토는 나이와 건강 때문에 일일이 의전을 수행하기엔 무리가 있고 후미히토 혼자서 다 떠맡자니 이 또한 무리여서 아예 의전 자체를 취소한 것.
이러한 모습에 그동안 '황실에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 여기던 일본 국민들도 충격을 받은 나머지, 빨리 정치권에서 여성 미야케나 여성 천황을 허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촉구할 정도였다. 일본 정치권 내에서도 2019년 3월달 아베 총리를 불러서 '''생전 퇴위 특례법(ご生前退位特礼法)'''에 근거하여 명시되어 있는 황실의 안정 후계 계승을 위한 조사를 당장 실행하라고 했지만 2019년 하반기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자민당 내 보수파의 눈치를 보면서 조사를 차일피일 미루느라 아베가 이를 계속 무시하고 있는 상황. 자민당과 연립 정권을 수립한 공명당조차도 여성 미야케 및 여성 천황에 대해서 호의적이고 야당은 일제히 여성 미야케 및 여성 천황에 대해서 호의적인 입장[9]인 걸 감안하면 선거 후에는 어떻게든 돌아갈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후미히토아베 신조 총리에게 '나의 두 딸 마코 공주카코 공주가 결혼해서 미야케#s-3(황족 가문)를 창설할 수 있게 하여, 히사히토의 공무 부담을 덜어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마코 공주의 결혼 상대로 거론된 코무로 케이와 그의 집안에 대한 논란이 한창 극심하던 시절이라, 아베는 그 제안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둘의 사이가 많이 안 좋아진 상태… 라는 의견이 많으나, 아베가 여성 미야케 창설을 허용하고자 하더라도 천황이 반대하면 아베 입장에서도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노릇인지라, 이 문제로 두 사람의 사이가 나빠졌다 운운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마코 공주 및 카코 공주가 이상하게 황실을 나가고 싶어하는 주요한 계기도 히사히토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건 히사히토 본인의 문제 때문은 아니고, 원래는 키코 비가 두 딸은 언젠가 하가할 몸이라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공무에 돌리면서도 공무 이외의 부분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지내도록 했는데, 문제는 히사히토가 태어나는 시점 즈음해서는 한동안 남성 황족이 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키코 비가 두 딸들을 되도록 황실에 남도록 하려고 강요에 가깝게 두 딸을 압박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은 것.

6.2. 후사와 자녀


황실의 다른 황족 남자 인원들은 현실적으로 더 이상 자식을 보기 어려운 나이이므로, 오직 젊은 히사히토만이 다음 세대(후대 황위를 계승할 남자 황족 후손)를 이어나갈 자식을 다 만들어야 한다. 히사히토가 천황의 친딸을 제치고 황태손 취급을 받는 명분부터가 Y염색체 때문인데, 정작 그렇게 해서 어거지로 덴노의 자리에 오른 히사히토가 아들을 못 본다면? 2천여 년의 역사를 가진 일본 황실의 유일한 독자이며 2021년 이후에도 별 다른 문제 없이 현상 유지가 되어서 사실상 황실의 유일한 황족이 되어있을 히사히토[10]가 적자를 못 얻어서 벌어지는 다양한 방면에서의 압력과 논란은 상상 이상을 초월할 일이 될 것이다.
원래 천황의 방계는 적당한 세대가 지나면 분가를 해서 황적에서 나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천황 직계의 대가 끊어질 수 있다는 문제 때문에 후시미노미야가츠라노미야아리스가와노미야간인노미야의 4대 세습가문을 정했고, 후시미계 방계 9개까지 총 13개 궁가가 유지되었다. 그런데 가츠라는 1881년, 아리스가와는 1923년 대가 끊겼고 후시미 직계도 후손이 없어 문을 닫을 예정이다. 간인(真院)은 그나마 보험으로서 작동해 지금의 천황 계통인 직황족(直皇族)을 배출했지만, 그건 방계 이야기고 직계는 1842년에 나루히토(愛仁)대로 적통이 끊어지고 후시미에서 양자를 들였지만[11], 그마저도 1988년에 단절되었다.
족보를 뒤져서 듣도 보도 못한 구 황족의 방계 자손들 중 그나마 적당한 인물[12]을 잡아와 천황으로 삼을 생각이 아니라면, 히사히토 친왕이 반드시(!) 아들을 낳아야지 일본 황실의 대를 이을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야만 만세일계(万歳一系)를 지금 헤이세이 시대에서 나루히토가 즉위해서 시대가 넘어가는 현대까지도 일본인이 표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훗날 히사히토의 비(妃)가 될 여성은 '''하늘이 두 쪽 나더라도 아들을 1명 이상은 꼭 낳아야 한다.''' 그렇게 어려운 게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둘 중 한 명이 불임이거나, 진평왕마냥 결정적 순간에 딸부잣집을 차리거나 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한편 그 아들이자 차기 천황을 성인이 될 때까지 건강상 문제 없이 잘 키워야 하고, 또 미래를 위해서는 그 아이(들)도 반드시 아들을 낳아 후사까지 계속 확립해야 하는 건 덤.
하술하듯, 이런 이유로 '''아예 결혼하는 것 자체가 상당히 힘들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남동생이란 안전빵이 있고 그나마 아키히토 부황이 막 즉위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남자 친척들이 여럿 살아있었던[13] 나루히토 황태자 때만 해도, 그가 결혼 적령기에 이르자 황태자비로 물망에 오르던 명문가의 미혼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결혼을 서두르거나 외국으로 빠져나가느라 난리가 났었다. 장래의 황후라는 중압감, 개인적 삶의 상실, 미치코 황후가 수십 년간 당한 악독한 시집살이를 비롯한 황실의 오랜 인습이 황실로 시집가는 일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주었던 것. 실제로 마사코 황후가 맞이한 현실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남동생이 있는 나루히토 천황의 아내 마사코 황후조차도 상상 이상의 남아 출산 요구를 궁내청, 황실, 그리고 일본 국민들[14]로부터 받아야만 했는데, 한 술 더 떠서 사실상 하나뿐인 남자 후손인 데다 안전빵 친척 역시 단 1명도 없는 상태에 있는 히사히토라면 그 중압감을 표현하기에는 헬게이트란 말로도 모자랄 지경. 게다가 위에서 말한 대로 히사히토가 성인이 된 이후에 현 황실전범이 수정되지 않은 상태라면, 일본의 황족이라고는 사실상 부모님이나 집안을 지키기 위하여 영구 독신 선언한 아키코 공주 정도이고 여기에 운이 좋다면 그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황실에 남아있는 몇몇 공주가 여기에 추가되는 정도로 대폭 줄어들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그러니 히사히토의 아내로서 수행해야 할 황족으로서의 의무에 따른 중압감에, 실제 수행하는 공무들은, 현재 모든 여성 황족들이 해야 하는 거의 모든 공무들을 한데 모은 어마어마하게 많은 양이 될 것이다. 시집살이는 고되고, 반드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야만 하며 낳지 못하는 순간 황실 자체가 사라진다는 사실에서 오는 상상을 초월하는 강한 부담도 있는데, 육체적으로도 수많은 공무들을 수행하여야 하기에 여러가지로 고생해야 하는 것. 실제로 갓 결혼한 마사코 황후(당시 황태자비)도 이러한 것 때문에 유산을 반복했고 도시노미야 아이코 내친왕을 낳은 이후 황후가 되기 전까지 매우 긴 시간 동안 요양을 하게 된 원인을 제공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인데 2001년 기준으로 나루히토 황태자를 제외한 4명의 남성 황족들이 40대 전후라서 그나마 무리 없이 자녀를 더 낳을 수 있는 연령대였음에도 이러한 상황이 펼쳐졌는데 과연 히사히토 이외에는 남성황족이 존재하지 않는 시점에서의 상황은 마사코 황후가 겪은 그것 이상이 될 게 뻔하다.
장래에 히사히토가 결혼할 때가 오면, 히사히토 또래의 딸을 둔 일본 고위층들 사이에서 히사히토와 결혼하지 않기 위한 일대 붐이 더욱 큰 규모로 일어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되면 궁내청일본 황실은 여태껏 말이 평민이지 특급 신부감-재벌 2세에 다재다능한 엄친딸 쇼다 미치코[15], 아버지를 이어 외교관이 된 촉망받는 인재이자 동시에 외교관 + 부호 가정 출신인 오와다 마사코, 당시 기준으로 황실에 시집을 온 여성들 중에서 격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일본에선 세레브의 상징인 귀국자녀에다 80년대에 연봉으로 800만 엔을 받던 경제학계 거물 학자의 딸로[16] 문무를 겸비한 가쿠슈인 대학의 우등생 가와시마 키코 등과 같은 부유층, 능력자 출신 여인들만 혼인시켰던 콧대를 낮추어,[17] 진짜 평범한 사람을 골라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히사히토가 맞이할 아내가 최소 2명 이상의 아들을 낳거나, 아들이 하나뿐이더라도 '''손자를 둘 이상'''은 두어야 적어도 황실이 끊기지 않을 상태다.[18] 즉, 늦으면 '''2060년대2070년대'''까지 일본 황실은 매우 불안한 상태를 맞을 가능성이 높다. 즉 히사히토의 손자, 손녀가 태어날 무렵을 예상했을 때. 대한민국으로 치면 대통령이 열 번 이상 바뀌는, 약 '''31대~33대 대통령''' 취임 무렵까지 일본 황실은 불안정한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그때까지 누가 그 많고 무거운 황실 공무 중 일부를 대신할지도 문제고.[19][20]
그나마 이건 후계를 낳을 때까지 무사히 아무 일 없다는 전제다. 아무리 철저한 경호와 의료 서비스를 받는다지만 사람 일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심지어 불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불임의 원인은 남자 쪽이 될 수도 있으며 신체적으로는 문제가 없더라도 이렇게 압박감이 심한 상황이라면 스트레스성 불임이 발생할 확률도 무시할 수 없다.

6.3. 결혼 가능성


여기서 앞에 언급한 결혼 여부도 다시 생각해 볼 문제다. 히사히토가 '나는 천황 자리를 포기한다.'라고 공개선언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사실상 연애결혼은 아주 많이 힘들 것이다.'''
히사히토는 2006년생이므로, 보수적인 일본 사회에서 결혼적령기는 2030년대정도로 한정 된다. 당연히 그 혼사가 일본 사회에 큰 파란을 불러일으킬 것이라 예상된다. 그러나 전술한 대로 히사히토의 아내가 되어 미래의 황후로서 일본 황실에 시집가기를 원하는 여성을 '''정말 찾기 힘들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당장 히사히토의 할머니인 미치코 상황후, 큰어머니인 마사코 황후, 어머니인 키코 비가 황실로 시집와서 겪었던 고난들을 생각하면[21], 부유한 상류층이면, '황실에 편입되어 자녀를 황족으로, 미래의 천황으로 만드는 모후가 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보다는 평민이라도 마음 편하게 사는 생활이 더 낫다.
황위 계승서열 '''2위'''라서 서열 1위인 아버지 다음으로 황위에 오르는 건데, 아버지가 요절하지 않는 이상 최소한 2040년대쯤은 돼야 황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황태자비가 되는 바람에 불행한 삶을 살게 된[22] 큰어머니 '''마사코 황후의 비극이, 현대 일본인들에게 황실로 시집가는 일에 대한 신데렐라 판타지를 산산조각낸''' 판이다[23]. 그나마 큰어머니는 여러가지 일들이 있었지만 상황을 역전시켜 국민들의 호평 속에서 무사히 황후가 되었지만, 본인의 어머니인 키코 비는 고생은 엄청 하면서도 본인에 대한 평판은 남편 후미히토 친왕 탓에 상당히 나빠진 편이다.
이런 선례 및 키코 비의 성격과 각종 안 좋은 소문들을 생각해봤을 때''' '그 수십년을 남편 보필하며 지독한 시집살이 견뎌가며 반드시 아들을 하나 이상은 낳아야 하고 장성할 때까지 잘 키울 각오가 되어 있는 여자' '''는 거의 없을 것이다. 상류층으로 한정하지 않고 범위를 넓힌다 해도 말이다. 야마토 나데시코들도 감당못할 일을, 그것도 히사히토 또래면 2000년대에 태어나 자란 여성 중에 그걸 감당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 지는 알 수 없다.
설령 키코 비가 예상보다 오래 못 살아 시어머니 노릇을 못 한다 해도, 궁내청이 히사히토의 아내를 한시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궁내청은 심각하게 전근대적이고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집단으로, 마사코 황후에게 가혹하게 대해서 나루히토 천황과 자주 충돌해 당시 나루히토 황태자가 자신에게 큰 피해가 있을 걸 알면서도 대놓고 궁내청 내에 자신의 아내를 비방중상하는 존재가 있다는 말을 했을 정도이며, 이러한 발언 이후에도 여전히 황태자비를 괴롭히는 상황일 정도로 상당히 꽉 막힌 것으로도 유명한 집단인데. 만일 나루히토나 후미히토가 생전에 히사히토의 안정을 위해 젊은 나이일 때의 히사히토에게 황위를 물려줘서 천황이 되게 된다면, 히사히토의 미래 비 또한 빨리 황후가 될테니 키코 비 또한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수 있다. 그러나 나루히토가 아버지인 아키히토 상황처럼 후미히토와 히사히토에게 순순히 생전 퇴위를 선언할 만큼 저들과 사이가 좋은 사람도 결코 아니다.
자발적으로 히사히토에게 시집오기를 원하는 여성이 없다면, 히사히토의 결혼은 나루히토 천황과 마사코 황후의 경우처럼 황실에서 적합한 여성을 골라 정략결혼시키듯 거의 강제 결혼하는 형태로 이루어지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경우 황실의 눈에 든 여성과 그 집안의 입장에서는 대재앙이 아닐 수 없다. 말이 '요청'이지, 황실의 결혼 요청을 감히 끝까지 거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본인 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엄청난 압박과 구박을 받을 게 뻔하다.
실제로 미치코 상황후마사코 황후의 경우가 그랬다. 쇼다 가문은 황태자였던 아키히토의 청혼을 정중히 거절하며 몇 개월 동안 미치코를 미국유럽으로 여행보냈는데, 미국 여행 중에 미치코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바라보며 '여기서 뛰어내리고 싶다'는 충동적인 생각을 했다고 한다. 미치코의 친정인 쇼다 가문은 1950년대에 딸을 장기 해외여행 보낼 정도로 어마어마한 재벌이었음에도 고준 황후는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 하나만[24]으로 큰며느리 미치코 황후를 '''심하게 무시했던''' 것이다. 심지어 미치코 본인이 원한것도 아니었음에도 하루 아침에 시대가 바뀐 탓에 풍전등화가 된 황실의 안위를 생각해 반강제로 혼인시켜놓고 말이다. 마사코 황후 역시 마찬가지로, 신분이 평민일 뿐이지 본인과 아버지가 외교관 출신인 부호 + 엘리트 집안으로서 결코 한미한 출신이 아닌데다, 남편인 나루히토 천황이 오와다 마사코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진심으로 사랑하고 책임감 있게 행동하는데도, 황실 내에서 적응 못 한다고 심각한 왕따(갈굼)를 당했다. 사실 고준 황후 역시 심각한 시집살이를 당한 인물이었다. 그의 시어머니 데이메이 황후서녀 출신이라, 적녀 출신인 며느리 고준 황후에게 열등감을 느껴 고준 황후를 심하게 괴롭혔었다. 즉 4대에 달하는, 여간 짧은 역사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히사히토는 일반인들과 달리 '''연애조차 한번 해보기 힘들 거라는''' 비관적인 예측도 있다. 혹시나 그와 조금이라도 엮이면 안 그래도 신붓감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만큼 힘든 판에 당장 코 꿰여서 결혼'''당'''하는 처량한 신세가 될 수 있으니, 여성들이 철저히 외면할 것이라는 논리. 실제로 쇼다 미치코오와다 마사코 역시 말이 우연이지 황태자를 장가 보내려는 이들의 철저한 기획으로 만났고, 청혼을 거절하기까지 했으나 결국 황실로 시집을 오게 되었다. 이러니 조금이라도 엮이면 매의 눈으로 주시하던 궁내청일본 황실에게 붙잡혀 강제로 결혼당하게 될까봐 가벼운 교제조차 쉽사리 시작할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히사히토가 '''고작 유치원생이었을 때도''' 여학생들에게 친하게 접근하면 여학생의 학부모들이 이에 기겁하고 온갖 핑계로 히사히토와 자신의 딸이 엮이는 것 자체를 피한다는 소문까지 주간지 등을 통해서 나돌았고,[25] 이는 초등학교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26]
이미 큰어머니 마사코 황후 때만 해도 이전에 나루히토의 부인감으로 이름이 거론되던 명문가 처자들이 급하게 후다닥 결혼을 하거나, 공부를 핑계로 해외로 장기간 도망쳐 버리더니 나루히토가 결혼하자 다시 귀국하여 돌아온 적이 있다. 옛날에는 이런 거창하고 번거로운 방법을 써야 황족 남성과 엮이는 걸 피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망발을 일으켜 흠집 꺼리를 내는 방식이 아주 간단해져 쉽게 황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 있고, 설사 혼담 요청을 받아도 마찬가지로 너무나도 손쉽게 걷어찰 수 있다보니 일본 황실 입장에서는 황후 후보 고르기가 한층 더 까다로워진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일본 황실이 다른 해외 왕실들처럼 막대한 재산을 가진 부유한 집안이라면 그나마 사치스러운 생활을 노리는 여자라도 자진해서 들어오겠는데[27] 문제는 일본 황실은 전 세계를 통틀어서 가장 가난한 왕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이리는 것이다. 사실 19세기 말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일본 황실은 에도시대에 쇼군들이 기증한 기존 영지[28]와 상당수의 토지와 국유기업 주식을 황실재산으로 전환하고 메이지 헌법상 정부의 통제도 받지 않는 등 다른 세계 열강의 왕실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후 일본국 헌법1948년도에 제정되면서 기존 황실 재산 중 큰 비중을 차지하던 기업 주식은 전부 죄다 국유화되고 남은 것은 황거, 교토고쇼, 별장, 정창원(正倉院), 사냥터, 능묘같은 정말 영양가 제로인 현금화도 못시키는 상징성만 큰 부동산뿐이라는 것. 그나마도 말이 황실재산이지 철저히 내각 통제하에 있기 때문에 그냥 일본 정부가 황실측이 사용되는 각종 국유시설에서의 임대료를 안 받고 덴노가 사망해서 차기 덴노에게 이러한 토지에 대한 상속세 등을 받지 않는 정도에 불과하다고 봐도 된다.[29] 물론 뭐 급하다면야 정창원에 있는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고대 유물을 팔면 되겠지만 유물이 불러일으킬 역사적 논란을 한 번만 생각해봐도 이 또한 사실상 불가능하다. 결국 현대 일본 황실 인사들이 재산을 만들 방법은 세금에서 나오는 생활비를 아껴 저축하는 것 뿐이며 이조차도 지출이나 상속 등 여러 면에서 통제가 강력하다. '''공화국의 대통령도 이렇게까지 경제적으로 제약받는 신세는 아니다.''' 결국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금으로 먹고사는 집안이다 보니 이걸 이유로 황족을 괴롭힌 경우도 제법 된다. 금수저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인 가쿠슈인에 다니던 시절 학우들로부터 이러한 발언을 들은 것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은 황족도 있을 정도다. 결국 황실로 시집 온 여성은 시어머니를 비롯한 보수적인 일본 황실과 궁내청을 비롯한 보수적 일본 국가조직, 그리고 의무적으로, 무조건적으로 득남(남자아이를 생산)해야 하는 3가지의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며, 특히 득남은 자식을 실제로 낳기 전까진 절대 해결되지 않는 문제이니 더더욱 어렵다. 심지어 득남한다 쳐도 그 낳은 아이가 새 천황이 될 때까지, 조금 더 낮게 쳐서 그 아이가 또 남자 아이를 얻을 때까지, 가장 낮게 봐도 성인이 될 때까지는 무탈해야 하는데 이 기간이 최소 '''20년.''' 결혼하자마자 애 가져서 득남하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는 가장 최소한의 시간인데, 그마저도 20년은 넘는다. 이 기간은 늘어날지언정 절대 줄어들지 않는다. 그나마 운이 좋아 2명, 3명의 자녀를 낳게 된다면 좀 덜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노심초사해야 하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6.3.1. 사촌 누나 아이코 공주와 결혼?


일본에서는 법적으로 사촌 이상부터 결혼이 가능하며, 황실에서는 오래 전부터 근친혼이 잦았던 만큼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물론 국민정서상 사촌의 결혼이라는 것은 당연히 금기(터부시)[30]지만, 황실은 특별한 경우이니 아주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아닌 셈. 사실 아이코 공주나 히사히토나 즉위한 이후에 문제가 생길 게 자명한 자들인 만큼[31] 황실 입장에서 이 두 사람을 결혼시키는 건 사촌간의 근친혼이라서 약간 꺼림칙했겠지만 황실의 안정이라는 대의적인 측면에서는 그렇게까지 나쁜 방안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근대 군주들 중엔 사촌 또는 그 이상(!)의 근친혼을 한 사례가 꽤 있기도 하고.
만약에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이 지금처럼 대놓고 형의 자리를 빼앗겠다고 덤비는 게 아니라 동생을 몹시 아끼던 나루히토 황태자에게 좋은 동생으로 남고 집안 단속을 잘 해두었다면 형인 나루히토도 방계인 히사히토의 정통성 문제를 직계 천황의 친딸인 아이코 공주과의 결혼을 통해서 해결시켜서 존폐 위기에 직면한 황실을 최대한 안정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볼 여지(?)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장남이 아니라 차남이라는 이유로 방임된 덕분에 황족으로서의 품위 같은 게 일절 없이 커온 남동생 후미히토는 형 나루히토에 대한 질투인지 어쨌는지 대놓고 황위를 노리며 온갖 난동을 부렸는데, 히사히토가 남자 황족이기에 성년이 되면 별 다른 문제없이 미야케 창설이 가능하고 천황 계승 가능성도 높으니까 당시 기준으로 지위가 심하게 흔들리던 황태자 집안과 엮이면 귀찮아진다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아키히토의 생전퇴위 선언에 의하여 아버지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형인 나루히토가 천황에 즉위하는 것으로 완전히 물먹은 꼴이 되었고, 형과 후계 다툼을 벌이는 와중에 자기 자녀들을 방치[32]시키는 바람에 마코 공주코무로 케이가 천황제 자체를 뒤흔들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게 만들었고, 뒤늦게라도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해 위와 같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자기 발로 걷어차버렸다.
현재 천황의 유일한 자녀 아이코 공주의 결혼 상대들을 미리부터 고를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황실에서는 만일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었을 때 그 이후 튀어나올 수 있는 여계 천황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존재인 구 황족들 중에서 쇼와 덴노의 장녀인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와 결혼해서 현 황족들과 가장 가까운 친척[33]이자 현재 일본 황실의 계승 문제를 촉발한 주 원인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집안과의 결혼도 검토하고 있는 와중에도 히사히토와의 결혼을 사실상 배제하는 것도 이러한 영향이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을 하고 있다.
신적강하원흉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메이지 덴노소노 사치코의 딸인 야스노미야 도시코(泰宮聰子) 내친왕과의 사이에서 아들 4명이 있었다. 그들 중 장남인 모리히로(盛厚)는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내친왕과 결혼해서 3남 2녀를 낳았고, 시게코가 1961년 만 35세에 사망하자 데라오 요시코(寺尾佳子)를 후처로 맞아들여 2남을 더 낳았다. 당주 자리는 모리히로와 시게코의 장남인 노부히코(信彦)에게 계승되었다.
현재 히가시쿠니 가문은 2019년 3월 74세에 별세한 노부히코를 이어, 노부히코의 외아들 유키히코(征彦)[34]가 당주직을 맡고 있다. 유키히코의 슬하에는 2010년에 얻은 외아들(14세)이 있는데, 쇼와 덴노의 후손인 만큼 그나마 가장 가까운 혈족이다.[35] 이외에 시게코 3남인 나오히코(真彦, 1953년생, 71세)에게 손자가 한 명 있는데 이쪽은 2004년생(20세)이다. 참고로 아이코 공주는 2001년 12월 1일생(22세)이므로 그다지 나이 차이도 나지 않는다.
이렇게 황실 내에서도 어른의 사정으로 히사히토 쪽은 논의하지 않고 있는 게 확실시되고 있는 상태다. 아이코 공주의 최대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 힘으로는 자식에게 계승권을 부여해 줄 수 없다는 문제는 황족 출신 부마를 들이는 것으로도 해결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히사히토와 결혼시켜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키코 비가 두 딸을 구 황족 가문의 남자들과 결혼시켜 미야케를 창설해 히사히토를 돕게 하려던 계획을 한 층 더 큰 규모로 구현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히가시쿠니노미야 이외에 하마평에 오르는 구 황족 가문은 다케다노미야,가야노미야라는 미혼 남성이 2명 이상 존재하는 가문들이라고 한다.

7. 논란



사실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아직 나이가 어린만큼 히사히토 개인이 저지른 것보다는 가족들의 문제가 더 큰 편.

8. 기타 등등


  • 황실 출입 기자와 궁내청 관계자는 "히사히토가 후미히토의 영향을 받아 식물과 곤충에 관심이 많아서, 종종 정원에 쭈그리고 앉아 가만히 땅을 보고 있는 일이 많다"고 한다. 히사히토가 초등학교 졸업 작문에 "자연과 즐겁게 접촉할 수 있었다"는 글을 적어, 일부에선 "히사히토가 대학 전공을 농학(農学)쪽으로 정하려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하고 있다. 사실 일본 황실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한 나루히토 덴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등 일부 황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생물학 등 자연과학을 전공했다.
  • 소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만 해도 또래보다 키가 작은 축이었다가 12세 전후로 갑자기 급성장을 하여 현재는 또래와 키가 비슷하거나 오히려 큰 수준으로 자라고 있다.[36] 외모나 체격이나 전반적으로 후미히토의 유전자를 많이 물려받은 것으로 보인다.

8.1. 성격


아키시노노미야 궁저에 히사히토와 친한 친구가 놀러오지 않아서[37] 아키시노노미야 일가 시종들이 돌아가면서 놀아주는데 한 시종은 "게임에서 지실 때마다 바로 히사히토 님이 화를 내셔서 눈치껏 져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이에 대해서 여론은 "저런 일로 화를 내다니..."라며 별로 좋게 보지 않고 있다. 사실 자신이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사고방식부터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15세의 사춘기라고 해도 겨우 비디오 게임에서 진 것 가지고 상대방에게 화를 표출하는 모습은 유아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한편 대범한 성격으로 부모인 후미히토 내외처럼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부속중학교의 자유로운 교풍을 좋아하고 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 히사히토가 아버지 후미히토처럼 맹목적인 자유를 추종하는 독선적인 사람으로 보고 앞으로 이러한 사람이 일본의 유력한 차차기 천황 후보라는 사실에 불만을 표출하고 있는 일본인들이 상당하다.
혹자는 차라리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돼서 히사히토는 일반 황족으로서 마음 편히 사는 게 히사히토 입장에서도 좋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도 아이코 공주의 결혼 후 자녀에 대한 문제 등이 여러가지가 있는 상태에서 천황이 안 되더라도 승계서열 2위인 히사히토가 부모 특히 키코 비의 강한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는 여론이 더 많다.
2019년 7월에는 친구 및 가족들을 하대(下對)한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해당 보도에 대해서 일본 내 극우들조차도 우려의 시각을 표시할 정도.[38]
키코 비로부터 사실상 라이벌로 취급받으면서 자라온 아이코 공주와의 관계는 상당히 친밀한 것으로 보인다. 집안 내의 분란으로 심란해하자 아이코 공주가 히사히토와 함께 펑고 1000번을 하면서 건전한 방향으로 스트레스 해소를 시켜주거나 아이코 공주의 책을 빌려받거나 자신의 작문을 보여주고 첨삭을 요구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서 주간지에서는 키코 비가 어느 날 히사히토한테 "현재 황실에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니? 있다면 누구니?" 라는 질문을 던졌는데 히사히토가 할아버지아버지, 그리고 천황 대신 아이코 공주를 말해서 키코 비가 심울해했다는 보도가 나온 상태.

9. 관련 문서


[1] 다만, 전후 황실전범에서 이 '와카미야'의 호칭이 빠졌고, 신적강하 이후, 토모히토 친왕 이래로 60년 가까이 와카미야가 토모히토 1명뿐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이 호칭 자체가 사문화되었다. 토모히토 친왕이 아버지 다카히토의 궁호로 자신을 부르는 것과 황족을 さま로 부르는 것을 비난한 적이 있기 때문에 아는 사람은 알긴 하지만... 일본에서 '와카미야(若宮)'라는 호칭을 깍듯하게 쓴다면 매우 높은 확률로 다케다 츠네야스(竹田恒泰) 같은 구황족 출신, 또는 극우계 인물이다. 이 칭호를 쓰는 언론은 산케이신문밖에 없다. [2] 물론 히사히토의 탄생이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지대한 영향을 미친 건 사실이다. 실제로 카코 공주는 아버지가 자신들이 할 땐 혼냈던 행동을 남동생 히사히토가 하면 혼내지 않는 걸 보고 불만을 제기한 적이 꽤 있는 듯하다.[3] 하지만 나루히토 덴노의 즉위와 마코 공주/결혼소동이 겹치면서 일본의 민심은 아이코 공주의 천황 즉위로 돌아섰다. 2020 도쿄 올림픽 후 나루히토 덴노의 결정에 따라 '아이코 덴노' 실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다.[4] 일본의 의무교육 역시 한국과 동일한 중학교까지이다.[5] 부속 여고만 있다.[6] 황족·3권의 대표와 부대표. 즉, 천황 부부를 뺀 친왕·친왕비, 일본 내각총리대신, 궁내청 장관, 참의원 의장·부의장, 중의원 의장·부의장, 최고재판소장, 최고재판소 판사 1명 가운데서 10명을 의원으로 선발하며, 각 부의 서열 3·4위, 의원으로 선발된 인원을 제외한 다른 친왕·친왕비, 관방장관, 궁내청 차관, 참의원·중의원 최다선 각 2명, 최고재판소 판사 2명 가운데서 다시 10명을 뽑아 예비의원으로 하며, 의원의 임기는 4년이다.[7] 만 18세가 되면 성인식, 즉 '''加冠の礼'''를 통해 황실의 관복 소쿠타이를 입고 비로소 정식 남성 황족이 된다.[8] 당시 고령이었던 다카히토 친왕을 제외하고 마사히토 친왕. 나루히토 친왕, 후미히토 친왕, 다카히토 친왕 소생의 토모히토, 요시히토, 노리히토 친왕 삼형제가 참석했다. 그 중 후미히토를 제외한''' 그 누구도 아들을 남기지 못했다. '''현재 생존자는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친왕, 나루히토 덴노,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친왕.[9] 단, 국민민주당은 여계 천황은 거부했으나 그 이외 정당들은 여계라도 허용하자는 입장.[10] 참고로 히사히토가 성인이 되면 아버지 후미히토는 60대 중반대이며, 이때 즈음이면 누나들은 물론 자신과 나이가 5살 차이로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사촌누나인 아이코 공주조차도 결혼했을 가능성이 농후한 상황. 이때까지도 황실전범에 별다른 개정이 없다면 정말 황실엔 히사히토, 후미히토 부부(그리고 그때까지 퇴위하거나 사망하지 않았다면 나루히토 부부) 그리고 가문을 지키기 위하여 독신을 선언한 아키코 공주 정도가 남아있는 전부일 수도 있다.[11] 이 때문에 신적강하 당시 계승순위가 최하위였다.[12] 만일 구 황족들 중 누군가를 새로운 천황으로 삼는다면 쇼와 덴노의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가 시집간 히가시쿠니 가문이 그나마 유력한 후보라고 할 수 있다. 이 집안은 아이코 공주의 부마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는 중.[13] 다카히토 친왕의 아들들인 토모히토,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 삼형제가 건재했고 당시 기준으로 3명 모두 40대~50대 정도로 모두 아직 자식을 낳을 수 있는 멀쩡한 나이였다.[14] 실제로 마사코 황후가 2001년 아이코 공주출산한 직후, 일본 국민들은 "공주의 탄생을 축하한다"는 인사와 동시에 은연 중에 "다시 임신해서 아들을 낳으라"고 강요하는 발언들이 쏟아졌다. 물론 궁내청이나 황실은 국민보다 더 노골적으로 이를 강요했는데, 이러한 것은 마사코 황후가 이후 장기간 요양을 받는 큰 원인이 되었다. [15] 미치코 상황후의 외가 소에지마 가문은 옛 화족(백작)이었다.[16] 더군다나 가쿠슈인에서 재학했다는 점에서, 집안이 못해도 중산층 이상은 된다는 소리다.[17] 시어머니 쇼다 미치코가 재벌가 딸로 워낙 넘사벽이어서 그렇지 큰며느리 오와다 마사코, 작은며느리 가와시마 키코역시 상당한 부잣집 딸들이다.[18] 물론 알바니아조구 1세 왕의 직계 자손이 전부 외동아들로 대를 잇고 있기는 하다.(레카 조구 - 레카 조구 2세) 다만 이 쪽은 공화정이라 왕위 요구자에 불과하니 크게 문제가 안 되는 것일 뿐. 만약 알바니아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진다면 지금의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 될 것이다. [19] 설레발이지만 여성 천황 내지는 여계 천황이 인정되지 않는 상황에서 만일 히사히토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면 결국 천황, 나아가 황실의 혈통이 그대로 단절되어 버리는 결과가 도출됨으로써, 최종적으로 일본의 천황제는 완전히 폐지되고 국체(国体)가 공화정으로 전환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일본의 여성 황족이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신적강하된 일본 황실 방계 후손들은 모조리 황위 요구자로 전락하는 격이다.[20] 실제로 2019년쯤부터 일본 인터넷에서는 히사히토의 천황 승계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나루히토 황태자의 직계 딸인 아이코 공주가 천황을 계속 이어갈 것이 아니면, 그냥 천황제를 폐지해 버리고 차라리 공화제를 도입하자"는 극단적인 의견도 상당히 빈발하게 나오고 있다. [21] 게다가 키코 비의 나쁜 성격은 그 '악명'이 이미 대중에 공개가 될 정도로 정평이 나 있으므로, 이런 사람을 사돈으로, 시어머니로 모시고 싶은 여성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시어머니의 성격이 순한 양과 같아도 어려운 게 황실 생활인데.[22] 촉망받는 엘리트였다가 결혼 이후 강제로 외교관을 그만두게 되어 그때까지 쌓아둔 경력이 전부 단절되고 꿈꾸던 모든 미래를 빼앗겨야 했다. 게다가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불합리하게 비난받아야만 했다.[23] 새삼스러운건 아니다. 왕가에 시집간다는 것 자체가 호강이 아닌 고난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왕실은 일반 가정에서도 보다도 더 엄격하고 매서운 법도를 지켜야 하거니와 행동 하나하나에도 신중하고 근엄해야 하기 때문에 많은 제약이 가해진다. 이건 대한민국 재벌가 역시 마찬가지다. 실례로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주가 살아있었을당시 반드시 아침식사는 정주영 회장 자택에서 모두 함께해야 했었고 이를 어길시 정회장의 무서운 불호령을 피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일개 대한민국 재벌가의 가풍도 이럴진데 하물며 그 나라의 상징과도 같은 왕실의 법도와 가풍은 설명할 필요도 없다.[24] 근데 웃긴 것은 미치코 상황후의 외가는 화족가문이라는 점이라서, 친가가 평민이라도 귀족과 결혼할 정도의 능력을 갖춘 집안이라는 점이다.[25]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이 비등할 때였다.[26] 가능성은 낮지만 극단적인 시나리오를 가정해 본다면, '''궁내청에서 히사히토와 교제하는 여성과 그의 가족까지 동원시키고 온갖 수단을 써서 그 여성에게 강제로 히사히토와 결혼하라고 대놓고 협박할 수도 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경우 만일 언론을 통해 민간에 알려진다면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27] 다만 이렇게 시집오는것과 왕실 생활을 버텨낼 수 있느냐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일본의 왕실은 여타 서구권의 왕실보다도 더 엄하기 때문이다.[28] 도쿠가와 이에미츠시기 황실 고쿠다카가 1만석이었다. 후기쯤 오면 3만석 ~ 20만석으로 불어난다.[29] 나리타 공항 부지나 치도리가후치 전몰자 묘원 부지도 원래 황실 소유의 토지였으나 일본 정부가 강제로 회수해서 만들어진 물건이다.참고로 2020년 현재 임시 센토고쇼로 사용 중인 황족저택도 상황 내외가 임시 거처로 쓰기로 결정되기 전에 빈 집으로 남아서 주기적으로 운영유지비가 소모되던 지라 정부 내에서도 저걸 팔아버릴 생각을 하고 있었고 임시 센토고쇼로서의 가치가 사라진 이후에 높은 확률로 팔아버릴 가능성도 농후하다.[30] 실제로 사촌과 결혼한 간 나오토 전 총리도 결혼 당시 가족들의 반대도 있었으며, 지금까지도 그러한 부정적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간 전 총리를 싫어하는 사람도 제법 있었을 정도다.[31] 아이코 공주는 여자이긴 하나 남계여성인 만큼 전례에 따라 천황이 되도 별 다른 문제가 없지만 문제는 현 황실전범에 근거하면 아이코 공주의 자손 즉, 여계 황족의 자손이 되는 이들 후손의 황족으로서의 처우 자체가 상당한 문제이며, 히사히토는 직계 자손이 여자라는 시대착오적이고 성차별적인 이유로 국민들의 반감 속에서 천황 후계 서열 2위가 되었지만 따지고 보면 방계에다 집안인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의 수많은 추태와 치부가 발목을 잡고 있고 무엇보다도 본인에 대한 과잉 보호 등으로 국민들이 히사히토에 대한 걸 제대로 잘 모르는 상황이다.[32] 사실상 교육 과정에서 후미히토가 기여한 것보다는 아내 키코 비가 주로 기여했는데 키코 비도 사실 자녀 교육 면에서 그렇게 좋은 엄마는 아니라는 게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 등으로 확인되었다. 그에 반해 나루히토 부부는 두 사람 모두 주변에서 온갖 패싱을 당하면서도 아이코 공주에 대한 애정을 바탕으로 이지메 사건이나 거식증 문제 등이 있었으나 적절한 훈육과 칭찬 등으로 아이코 공주를 바른 길로 이끌어서 일본 궁내청조차도 인정할 정도로 황실의 재원으로 키워냈다.[33]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의 직계 자손과는 대략 7촌 정도라고 하는 데 아이코 공주 입장에서는 미카사노미야 가문/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의 아키코 공주, 요코 공주, 쓰구코 공주도 7촌 관계인 걸 따지면 상당히 가까운 편이다.[34] 1973년생. 51세.[35] 히사히토와 아이코 공주의 기준에서 고모할머니 히가시쿠니 시게코 기준의 증손자가 되니 칠촌조카가 된다. 참고로 히사히토에게 미카사노미야 가문도 대략 이 정도 촌수이다.[36] 14세 생일에는 산에서 아버지인 후미히토와 사진을 찍으러 다녔는데 후미히토의 인중 근처까지 성장했다. 후미히토가 나이를 먹고 키가 줄었어도 대략 175cm 정도라고 보면 히사히토는 적어도 160cm 이상은 된다.[37] 사실 히사히토에게는 친구가 없다고 봐도 무방한 게 초등학교 시절은 대부분 집에서 두문불출하는 편이였는 데다가 어쩌다가 학교에 와도 수업은 듣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는 일이 잦고, 경호 등을 이유로 무서운 남자들이 다수 근처에 붙어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사히토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사전에 궁내청 등의 까다로운 조사를 통과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기에, 히사히토에게 무례(결례)를 범하지 않도록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동갑내기들일 가능성이 높다. 만에 하나 이러한 사전 교육을 안 받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진심으로 우정을 느껴서 히사히토를 가까이 할 가능성은 한없이 낮을 것이다. 결국 어느 쪽이든 진정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먼 부류들이다.[38] 사실 극우들 중에서도 그나마 머리가 있는 사람들은 후미히토 일가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제법 되는 편이다. 거의 대부분의 정치 세력이 그렇듯이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얼핏 의견이 완전히 통일된 것처럼 보이나, 이건 어디까지나 주변국이나 정치쪽에 국한된 이야기이고 황실쪽 이슈에 대해서는 극우라고 하더라도 큰 틀에서는 비슷할 지 몰라도 상세한 부분에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제법되는 편이다. 물론 이는 일본회의나 국가 신토와 관련이 있는세력이 아닐 경우이며 일본회의나 국가 신토 관련자라면 얄쨜없이 무조건 후미히토 일가를 옹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