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드룬
'''Guðrún'''[1]
1. 개요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니플룽가문(Niflunga)에 속한 여성으로 니벨룽의 노래의 여주인공 크림힐트(Kriemhild)의 원형에 해당되는 인물이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모든 인물이 그렇듯이 구드룬도 전승마다 행적이 제각각인데, 여기서는 볼숭 사가에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정리했다.[2]
구드룬 전설의 기원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학자들은 훈족의 왕 아틸라의 마지막 부인이었던 일디코(Ildico)를 구드룬 캐릭터의 기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구드룬의 원형에 해당되는 캐릭터가 좀더 이전부터 있었는데 일디코가 캐릭터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3] 구드룬의 둘째 남편인 훈족의 아틀리왕이 아틸라를 모델로 한 인물이 거의 확실하다는 점에서 이런 추정은 나름 근거를 갖는다.
또한 6세기 메로빙거 왕조의 여왕들이자 전설적인 앙숙이었던 브룬힐다(Brunhilda of Austrasia)와 프레데군다(Fredegunda)도 구드룬의 전설, 특히 구드룬과 브륀힐트의 다툼과 같은 부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2. 신화에서의 행적
2.1. 시구르드와 결혼
구드룬은 규키(Gjuki)왕과 그림힐드(Grimhild)의 딸로 아름다운 미모를 자랑하는 여인이었다. 구드룬은 부르군트에 온 시구르드를 사모하지만 그는 약혼녀 브륀힐트가 있다면서 구드룬의 구애를 거절한다. 이에 구드룬의 엄마이자 마법사인 그림힐드는 기억을 잃게 하는 약을 시구르드에게 몰래 먹이고, 브륀힐드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린 시구르드는 결국 구드룬과 결혼하고 이후 아들 시그문드(조부와 이름이 같다)를 얻었다.
한편 구드룬의 큰 오빠 군나르는 브륀힐트와 결혼하고 싶었으나 브륀힐트가 있는 힌다르피알 산에 오르려면 산 정상의 성을 둘러싸고 있는 불의 장벽을 넘어야 했는데 군나르는 그럴 능력이 없었다. 시구르드가 브륀힐트와 약혼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군나르는 시구르드가 기억을 잃고 동생과 결혼한 후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시구르드는 장모인 그림힐트의 도움을 받아 군나르로 변장을 하고 불의 장벽을 뛰어넘어 브륀힐트에게 대신 청혼한다.
우여곡절 끝에 결국 군나르는 브륀힐트와 결혼하여 왕궁에 오게 되는데, 브륀힐트는 자신의 옛 연인이 구드룬과 결혼한 것을 보고 분노했으며, 자신과 약혼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때문에 구드룬과 올케 브륀힐트는 매우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강에서 함께 목욕을 하다가 언쟁이 붙으면서 결국 사건이 터진다.
브륀힐트는 구드룬에게 당신의 남편이 내 남편보다 아랫사람이니 나와 같은 물에서 목욕하면 안된다고 주장한다. 이 모욕적인 주장에 크게 화가 난 구드룬은 시구르드가 기억을 잃고 자신과 결혼했으며 이후 자기 오빠 군나르로 변장을 하고 불의 장벽을 넘어서 당신과 군나르가 결혼한 것이며 군나르는 시구르드 근처도 못가는 찌질이라고 조롱을 한다.
이런 치욕을 당한 후 브륀힐트는 시구르드에게 복수심을 품었고, 기억을 되찾은 시구르드가 브륀힐트에게 함께 떠나자고 하지만 브륀힐트에게 거절당한다. 브륀힐트는 결국 시구르드가 자신의 처녀성을 범했다는 거짓말로 구드룬의 질투심을 불러일으킨 후 시구르드를 죽이도록 한다. 하지만 군나르는 의형제를 맺은 시구르드를 직접 죽일 수 없었기 때문에 동생 구토름(Guthorm)에게 마법을 건 후 살인청부를 맡긴다.[4] 시구르드는 자다가 영문도 모르고 구토름에게 일격을 맞는데, 죽기 전에 구토름을 반격하여 함께 죽는다. 시구르드가 죽은 후 브륀힐트는 그의 아들 시그문드까지 죽이고 시구르드 시그문드 구토름을 함께 화장할 때 자신도 불길에 뛰어들어 죽는다.
2.2. 시구르드 사후
남편와 아들을 잃은 구드룬은 자신의 일족을 저주하며 왕국을 떠나 덴마크왕 할프(Half)에게 의탁한다. 하지만 모친 그림힐드는 다시 구드룬에게 약을 먹여 자신의 일족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심을 없앤 후 구드룬을 브륀힐트의 오빠인 훈족의 왕 아틀리(Atli)와 억지로 결혼시킨다.
아틀리가 시구르드의 보물과 안드바리의 반지를 탐내고 있다는 사실을 안 구드룬은 오빠들에게 이를 경고하는 메시지를 보낸다. 하지만 이 메시지를 가지고 간 사절이 몰래 내용을 바꾸어 아틀리 부부가 군나르와 호그니를 초대하는 초대장으로 꾸민다. 군나르의 두 번째 부인 그라움보르(Glaumvor)와 호그니의 부인 코스트베라(Kostbera)는 꿈이 불길하다며 가지 말라고 말리지만 두 사람은 듣지 않고 초청에 응한다.
군나르와 호그니 일행이 아틀리 왕성에 도착하자 아틀리는 부인의 전남편이었던 시구르드의 복수를 한다는 명분으로(실제로는 보물을 빼앗기 위해) 군나르 일행을 공격한다. 구드룬은 싸움을 말리다 결국 갑옷을 입고 오빠 편에서 싸운다. 손님 일행은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모두 죽고 군나르와 호그니만 남는데, 호그니는 심장이 찔려 즉사하고 군나르는 뱀 구덩이에 던져진다. 구드룬이 하프를 구덩이에 던져주자 군나르가 하프를 연주해서 뱀들을 진정시키지만 귀가 먼 뱀 한마리가 군나르를 물어 죽인다.
이에 구드룬은 오빠들의 복수를 위해 아틀리와 자기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여서 그 인육을 아틀리에게 먹인 후 회그니의 아들 니플룽(Niflung)과 함께 잠들어 있는 아틀리도 죽인다. 이어 니플룽을 시켜 밤중에 왕궁에 불을 질러 왕궁 안의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5]
그 후 구드룬 자신도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지만 물에 잠기지 않고 떠내려가서 요낙(Jonak)왕국에 도착한다. 요낙왕의 눈에 띈 구드룬은 그와 결혼한다. 이후 요낙왕과의 사이에 세 아들을 낳았으며[6] 시구르드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스반힐드(Svanhild)와 함께 길렀다.
스반힐드는 예언대로 당대 최고의 미녀로 성장했으며 고트족의 요문렉(Jormunrek)왕[7] 이 이 소문을 듣고 스반힐드와 결혼한다. 하지만 스반힐드는 요문렉왕의 아들 란드베르(Randver)와 사귀고 이에 화가 난 요문렉왕이 란드베르를 죽인 후 스반힐드도 말발굽으로 짓밟아서 살해한다.[8] .
분노한 구드룬은 요낙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자신의 세 아들에게 이부(異父) 누이인 스반힐드의 복수를 의뢰하고 이들에게 칼이 듣지 않는 갑옷을 준다. 세 아들은 요문렉왕을 찾아가서 그의 팔과 다리를 자른다.
여기서 끝나면 참 좋을텐데, 이 세 아들은 요문렉왕을 살해한 후 왕의 후스카를(húskarl)[9] 에게 공격을 받아서 죽게 된다. 요문렉왕의 후스카를은 구드룬이 준 갑옷때문에 칼이 듣지 않아서 아들들을 죽이지 못하는데, 이 때 지팡이를 짚은 애꾸눈의 노인이 나타나서 친위대에게 돌을 사용하라고 알려주고, 이에 친위대는 세 아들을 돌로 쳐 죽인다.
세 아들 까지 죽은 뒤로 구드룬이 어떻게 됐는지는 명확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단 고 에다의 "Guðrúnarhvöt(구드룬의 사주 혹은 구드룬의 경고)" 에 따르면 아들들이 복수하러 떠난 후 구드룬은 전사들을 불러 떡갈나무 장작을 높이 쌓으라고 명하는데, 이때 죽은 남편 시구르드를 부르며 "이제 여기엔 딸(스반힐드)도 없고, 내게 보석을 선물해줄 이도 없다오. 생전에 약속했던 것 처럼 말을 타고 와서 날 명부로 데려가주오." 라고 하는 것을 보면 기구한 인생 끝에 딸까지 잃은 상실감에 자결하고 화장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제가 있다면 저승에는 연적인 브륀힐트가 먼저 가있는데다, 이쪽은 저승 가는 길에 등장한 거인과 말다툼을 하며 "나와 시구르드는 죽어서나마 영원히 함께 할것이다." 라는 각오를 보였기 때문에(브륀힐트가 죽기 직전 구드룬과 스반힐드에게 닥칠 비극을 정확히 예언한걸 보면 단순한 희망사항을 넘어서 진짜 예언일 수도 있다) 구드룬의 인생은 사후에도 평탄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된다.
3. 기타
읽어보면 알겠지만 폭력이 난무하는 북유럽 신화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여인으로, 많은 전승에서는 본인도 비참한 최후를 맞지만 그나마 볼숭 사가에서는 죽이기는 좀 불쌍했는지 연착륙에 성공하는 것으로 나온다. 문제는 자신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죽었고(또는 본인이 죽였고) 그것도 하나같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것. 게다가 니벨룽의 노래 쪽의 크림힐트가 자기 오라버니들을 죽여서라도 지크프리트의 죽음에 복수하고 말겠다는 태도는 끝까지 간직한 것과는 반대로, 구드룬은 어머니의 마법에 정신조종을 당해서 복수심을 잃어버리고 강제로 웬수같은 오라버니들을 용서했어야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더더욱 안습하다.
헌데 최근엔 구드룬에 대한 이런 평가 외에도 구드룬도 마냥 불쌍한 피해자인 것 마냥 볼 수 없다는 식의 저평가도 존재한다.
일단 구드룬이 주위의 가족들이 부추기고 유도하여서 자기는 그냥 숟가락만 얹는 식이었다고 해도 엄연히 서로 사랑하는 정당한 두 남녀의 사랑을 파토냈다는 것 역시 사실이라며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닌 것이 구드룬은 가족들이 브륀힐드와 시구르드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몰랐던 것도 아니었으며, 이에 죄책감을 느끼긴 커녕 즐길거 다 즐기며 브륀힐드 앞에서도 당당하게 굴다가, 오빠들이 남편을 살해한 뒤에야 가족들이 싫어졌다며 가출한 걸로 봤을땐 시대상과 기구한 운명 때문에 희석되어 보이는 것일 뿐이지 이쪽도 만만찮게 이기적이다.[10] 게다가 자기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북유럽 신화의 고귀하고 강인한 여전사상인 연적 브륀힐데에 비하면, 귀도 가벼워서 쉽게 선동당하는 수동적인 모습이 별로라는 이유도 있다.
북유럽 신화는 철저한 숙명론적 관념, 즉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주어진 운명과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생각이 배경에 깔려 있는데, 오딘이 나타나서 끝내 구드룬과 요낙왕의 세 아들들을 죽게 하는 대목은 이런 관념을 잘 보여주는 예시이다.[11]
4. 관련 문서
[1] 독일식 철자로는 Gudrun.[2] 언급할 가치가 있는 다른 전승은 각주로 언급한다.[3] 아틸라 항목에도 있지만 아틸라는 일디코와 결혼한 다음날 시신으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이를 두고 당시부터 온갖 추측과 루머가 난무했다.[4] 일반적으로는 군나르의 다른 형제인 호그니(Högni)가 청부를 맡는데, 볼숭 사가에서는 구토름이 청부를 맡은 것으로 나온다.[5] 일부 전승에서는 여기서 구드룬도 스스로 홀에 뛰어들어 함께 불에 타 죽는다.[6] 첫째부터 함디르(Hamdir), 소를리(Sorli), 에르프(Erp).[7] 요문렉왕은 실존 인물이었던 동고트족의 지도자 에르마나릭(Ermanaric, ?~376)을 모델로 한 캐릭터이다. 6세기 동로마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가 쓴 게티카(Getica)에 의하면 에르마나릭이 자신의 아내로 추정되는 수닐다(Sunilda)라는 여인을 부정한 행동을 했다는 이유로 말발굽으로 짓밟아 죽였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에르마나릭은 후에 그녀의 두 동생 사루스(Sarus)와 암미누스(Ammius)에게 보복을 받아서 불구가 되었으며 얼마 있다가 죽었다고 한다.[8] 전승에 따라서는 구드룬도 스반힐드와 함께 살해당하고 자신의 아들들이 복수하는 것으로 나온다.[9] 영어로는 housecarl(하우스컬)이라고 하며, 간단히 말하면 북유럽 왕의 근위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10] 일각에선 연적 브륀힐데가 시구르드와 관계해서 낳은 딸인 아슬라우그는 그녀 나름대로의 고난은 겪었을지언정 비교적 안정적인 여생을 보내며 유명한 바이킹들의 시조가 된 것에 비해, 구드룬의 친정 식구들과 그녀가 낳은 자식들이 전부 비명횡사 한 끝에 규키 일족이 멸문당한 것은 전부 그들이 저지른 NTR의 업보가 아니였을까? 하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11] 사실 북유럽 신화뿐만 아니라 그리스 신화를 비롯한 거의 모든 신화가 운명론적 관점을 갖고 있다.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하다면 신의 존재 의미가 사라지기 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