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위입법회의
1. 개요
1980년 10월 27일 대한민국 국회의 입법권을 대신하기 위해 신군부가 설치한 임시 입법기구이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상임위원장 전두환이 정치가, 기업가, 군인, 언론인, 교수, 종교인 등 모든 상위계층을 총망라해 임명한 81명의 의원들로 구성되었는데, 다음해 1981년 4월 제11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행할 때까지 6개월간 200여 건의 법률안을 의결하였다. 정치활동규제법, 언론기본법, 노동개악 등 다음 항목에서 서술하는 내용들이 바로 국가보위입법회의가 통과시킨 법률들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민주주의의 근본원리를 부정하는 악법들이다. 심지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제5공화국 헌법에 "국가보위입법회의에서 통과시킨 법률안에 대해선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내용의 부칙까지 달아서 군부독재를 확고히 하였다.
2. 주요 활동
아래에 열거한 법률은 †로 표시한 것 외에는 이 문서 최종수정일 현재에도 시행 중인 법률(후에 개정된 것 포함, 폐지제정된 것 제외)이다.
- 1980년
- 10월 27일: 8차 개헌. 제5공화국 성립
- 12월 18일: †사회보호법[1] ,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형실효법) 제정.
- 12월 31일: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에 관한 법률, †언론기본법[2] 제정.
- 1981년
- 1월 29일: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 제정.
- 3월 2일: 온천법 제정.
3. 악법 제정 및 개정
3.1. 정치/사회
형기를 마친 상습범의 경우 죄질과 상관없이 더 감옥살이를 하여 전과 경력이 있는 범죄자의 사회복귀 자체를 원천 봉쇄시키고자 하는 '사회보호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해당 법률은 범죄자가 유사한 죄로 2회 이상 실형을 받고 그 형기의 합계가 3년 이상인 자가 다시 유사한 죄를 저질렀을 경우 등의 사유로 인해 상습성이 인정될 때는 형량과 상관없이 추가로 최대 10년까지의 보호감호처분을 내릴 수 있도록 규정하는 법인데, 1989년 지강헌 탈주 사건과 보호감호 중 사망자 속출 등 장기간 보호감호 처분에 따른 반발과 부작용이 발생하고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자 1989년 사회보호법을 개정해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도록 제한했으나, 이후 사회보호법상의 보호감호가 ‘사실상의 이중 처벌’로 위헌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오다가 2005년 8월4일에 폐지되었다.
그리고 11월 3일부터는 '정치풍토쇄신을 위한 특별조치법'에 따라 만들어진 정치풍토쇄신위원회는 동월 12일부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주요 정치인을 포함한 811명을 정치활동 피규제자로 묶어서 정치활동을 금지시켰다. 심지어 12월 18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도 개정해 그동안 공공장소 시위금지를 '도로 및 기타 옥외장소'로 확대해 종교시설, 대학 캠퍼스 내에서도 시위 자체를 법으로 금지했고, 시위 주최측이 개최 48시간 내에 경찰당국에 신고 후 허가를 받아야 개최가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특히 가장 문제가 된 조항이 제3조였는데, 이 조항에선 보호해야 할 집회/시위 기준보다 금지 기준을 주로 밝혔다. 금지 기준으로 '위반 우려'나 '사회적 불안 야기 우려' 등 추상적 표현을 써 경찰당국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게 만든 것으로, 당시 헌법에서 밝힌 "명백하고도 현존하는 위험이 있어야 기본권 제한이 가능함"을 위배한 것이다.
3.2. 노동계
국보위 산하 국가보위입법회의 측은 1980년 12월 31일에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 근로기준법, 노동쟁의조정법, 노사협의회법, 노동위원회법 등을 개정하여 유니언숍(union shop) 제도[3] 를 없애고 산별노조를 기업별 노조로 바꾸면서[4] 노동조합 설립 요건을 까다롭게 하여 헌법에도 보장된 노동3권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 버렸다.[5]
특히 악명이 높은 것은 제3자 개입금지 조항[6] 으로 이는 외부인사가 노동조합 설립에 대해 조언을 하거나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등의 행위를 전면 금지시켰다. 1986년 12월에는 위 조항에 '노동조합총연맹과 해당 노동조합이 가입한 산업별 연합단체는 제3자로 보지 않는다'는 단서조항을 추가했다.
이 조항은 정부와 기업이 노동운동을 탄압하는 목적으로 계속 사용하였다. 대표적으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당시 처우개선을 요구하면서 시위를 벌이던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가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했는데, 이 사건의 법률자문을 해주던 노무현 변호사를 경찰이 제3자개입 금지 조항 위반으로 구속한 사례가 있다. 이 사건으로 노무현은 변호사 자격을 정지당하고 한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이후에도 노태우 정부, 김영삼 정부 심지어 김대중 정부까지 제3개입금지 조항을 이용해서 노동운동을 계속 탄압하였다.
1993년 국제노동기구에서 정부에 대해 복수노조의 인정 등과 더불어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을 폐지할 것을 권고하자 이를 의식한 정부는 1997년에 OECD 가입협상을 하면서 국제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을 폐지하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을 만들어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삭제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제40조 '노동관계의 지원'을 신설한 것이였다. '제3자개입금지' 조항의 삭제를 계속 요구해 온 노동계와 시민단체들은 '노동관계의 지원' 조항이 기존의 '제3자개입금지' 조항을 교묘하게 또 다른 독소조항으로 대체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반발하였다. 새롭게 삽입된 조항은 노동조합 외부의 개입을 허용하면서도 단체교섭 또는 쟁의행위의 당사자가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당해 행정관청에 신고한 자에 한하며, 이 외의 자는 간여하거나 조종·선동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제3자 개입금지' 조항이 사실상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지원받는 자의 인적사항과 지원받고자 하는 사항, 지원받는 방법 등을 기재한 서류를 지원받고자 하는 날의 3일 전까지 행정관청에 제출해야 하는 등 실질적으로 거의 행할 수 없는 어려운 조항들을 담고 있어 노동자 측에 불리하다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면서 폐지의 목소리가 높아져갔다.
결국 2005년 노사관계선진화방안에서 이 문제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논의한 끝에 2006년 12월 30일에야 폐지되었다.
[1] 2005년 8월 4일 폐지.[2] 신군부가 언론을 탄압하기 위한 악법이었다. 이후 민주화가 이루어진 1987년 11월 28일부로 폐지되었다.[3]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노동자가 회사가 취직하면 자동적으로 노조 조합원이 되는 제도.[4] 기업별 노조 체제는 2000년대 이후 양극화와 맞물려서 정규직 vs 비정규직 노노갈등의 주요 원인이 된다. 단병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훗날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 민주노조 만들면서 산별로 가지 않고 기업별 노조로 간 게 뼈아픈 실책이었다"라는 언급을 하였다.[5] 노동3권은 제헌헌법부터 현재까지 9번의 개헌에도 단 한 번도 헌법에서 빠진 적이 없다. [6] 노동조합법 제12조 2항, 노동쟁의조정법 제13조 2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