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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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1 · 31대 국무총리
김종필
金鍾泌 | Kim Jong-pil[1]
'''
<colbgcolor=#003478> '''출생'''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2]
'''사망'''
2018년 6월 23일 (향년 92세)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남동 순천향대병원
'''묘소'''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3]
'''본관'''
김해 김씨 안경공파 16세손[4]
'''호'''
운정(雲庭)
'''재임기간'''
초대 중앙정보부장
1961년 5월 20일 ~ 1963년 1월 6일
제11대 국무총리
1971년 6월 4일 ~ 1975년 12월 18일
제31대 국무총리
1998년 8월 18일 ~ 2000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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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3478> '''부모'''
아버지 김상배, 어머니 이정훈[50]
'''형제자매'''
형 김종호, 김종익, 김종락, 김종소
동생 김종관
'''배우자'''
박영옥
'''자녀'''
김예리, 김진
'''학력'''
부여공립보통학교 (졸업)
공주고등보통학교 (졸업)
주오대학 (예비과정 / 중퇴)
대전사범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 중퇴)
미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육군보병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 / 학사)
'''종교'''
개신교
'''신체'''
170cm, A형
'''의원 선수'''
'''9'''
'''의원 대수'''
'''6''', '''7''', '''8''', '''9''', '''10''', '''13''', '''14''', '''15''', '''16'''
'''경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기획과장
육군본부 정보참모부 정보처장
육군본부 정보국 행정처장
초대 중앙정보부장
제6~7대 국회의원 (충남 부여군)
제8대 국회의원 (전국구 / 민주공화당)
제9대 국회의원 (통일주체국민회의)
제10대 국회의원 (충남 5)
제10대 국무총리
제13~15대 국회의원 (충남 부여)
제31대 국무총리
제16대 국회의원 (전국구 / 자민련)
'''약칭'''
'''JP'''
'''취미'''
수필, 그림, 서예
'''군사 경력'''
'''임관'''
육군사관학교 (8기)[51]
'''복무'''
대한민국 육군
1949년 5월 ~ 1963년 1월
'''최종 계급'''
준장 (중앙정보부)
'''병과'''
보병
'''참전'''
6.25 전쟁

1. 개요
5. 여담
6. 매체에서
7. 소속 정당
8. 선거 이력
9. 저서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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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上善若水).[5]

-

김종필 총재의 좌우명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에게(Once, only once and for one only)

-

영국 시인 로버트 브라우닝 시구절 인용[6]

대한민국군인 출신 정치인.
약칭은 JP. 일본유학시절 일본인들이 발음이 어려워서 붙여준 별명이 한국에서도 그대로 별명으로 굳어졌다.
임해군, 광해군 형제의 외조부이며 공빈 김씨의 아버지이자 안경공 김영정의 증손인 해녕부원군(海寧府院君) 김희철(金希哲)의 12대손이다.[7] 1926년 1월 7일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운정(雲庭)이다. 40년 이상 정치가로 활동하며 여러 정부에서 국무총리만 6년 반을 지냈다. 헌정사 최장인 정일권과 더불어 6년 이상 총리로 재직하였다.
한고제 유방에게 장량이 있었고 이방원에게 하륜이 있었듯, 박정희에게는 김종필이 있었다 할 정도로 5.16 군사정변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데 깊이 관여하면서 군사정권을 만드는 데 일조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박정희와는 인척이자 최측근이자 "제2인자"로 손꼽히는 인물이었으나 장기집권 유지를 위해 견제를 당하기도 한 미묘한 사이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의 암살로 유신시대가 막을 내린 후에는 이른바 삼김시대의 '''3김(三金)''' 중 한 명으로 대표되는 거물급 정치인이자 '''3당 합당''', '''DJP연합''' 등 2000년대 초반까지 중앙 정치계 주요 사건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충청권 보수정당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고, 삼김 중에서는 제일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인물이다. 김대중이 2009년, 김영삼이 2015년에 사망한 후에도 3년을 더 살았다가 2018년에 향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 생애




3. 사건사고 및 논란




4. 평가




5. 여담


  • 1997년 대선 당시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남북통일주한미군 주둔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 뒤 땅의 소유권은 북한 주민이 우선이며 남북통일 이후 미군의 한반도 주둔에 대해 주한미군을 외세라 논하며 우리에게 도움이 되거나 되지않는 상황에 따라 철수까지 가능하다는 견해를 보였다.[8]
  • 삼김 중 유일하게 90대까지 장수하다 작고했다. 다만 나머지 삼김 멤버들도 각각 85세와 87세의 나이로 별세했기 때문에 꽤 장수했다고 볼 수는 있다.
  • 5.16 군사정변의 경우, 김종필이 전체적인 계획을 짜고 박정희를 밀어주었다는 게 정설이다. 이후 민주공화당 창당 과정은 전적으로 김종필의 설계대로 흘러갔다. 박정희는 굳이 여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식 정치에 매료를 느낀 김종필은 창당과정에서 일본의 사례를 최대한 참고했다고 한다.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는 박정희의 뒤를 이어서 직선 대통령이 될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1980년 이후로 대권에서 멀어지면서 이를 포기하고 끊임없이 의원 내각제를 추진한 정치인이기도 하다. 의원내각제를 추진한 까닭은 김종필의 지역 기반인 충청도가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지역이기 때문에 소수의 의원으로도 "캐스팅 보트"를 쥘 수 있는 내각제 쪽이 유리했기 때문이었다.[9] 위에도 나와있듯 그와 연대한 다른 정치 세력 모두 자신이 당선된 후 내각제 개헌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최근 들어 현행 대통령제의 개선 방향으로 대통령제에 내각제를 결합한 이원집정부제나 순수 의원내각제가 언급되고 있는데, 김종필로서는 소회가 남다를 듯. 장도리 같은 만평에서도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매번 김종필을 속이고 뒤통수를 때리는 일을 묘사하기도 했다. 부인 박영옥의 묘를 찾은 이명박 전 대통령에게 의원 내각제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기도 했다.[10]
  • 김영삼, 김대중과 함께 3김으로 불리는 인물이며 이들의 정치 시대를 삼김시대라고 부른다. 3김 중 유일하게 대통령에 오르지 못했던 인물이지만, 박정희 정권부터 김대중 정권까지 장기간 정권의 핵심에 있기도 했으며, 김영삼 및 박준규 등과 함께 최다선 국회의원(9선)의 기록을 가진 인물이다.[11]
  • 다만, 당시에도 이러한 김종필 대망론에 회의적이었던 이들은 김종필 대망론 자체가 실제의 정치적 상황을 기반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라 삼김시대라는 조어에 의한 착시현상을 통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삼김시대라는 표현 못지 않게 양김시대라는 표현이 널리 사용된 것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애초에 김종필 자체가 김대중이나 김영삼과 동등한 지지기반이나 영향력을 가진 대선 수권후보였던 적이 없다는 것. 실제로 3김과 노태우가 대격돌하여 전체 표의 99.8%를 나눠가졌던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보더라도 김종필은 득표율 8.1%로 득표율 0.2%의 신정일 후보를 제외하면 꼴찌나 다름없는 4위를 기록했고, 이는 각각 28%, 27%의 득표율을 기록한 김영삼, 김대중 후보의 1/3 수준에 불과했다. 더구나 양 김의 경우 민주화 운동 지도자라는 공통점에 기반하여 단일화를 거쳐 지지기반을 통합할 경우 안정적인 1위도 가능할 수 있다는 기대를 받았던 데 비해, 김종필에게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었다[12]. 김종필 자신도 이런 현실을 인식하여 13대 대선 이후부터는 직접적인 대선 도전을 포기하고 캐스팅보터로써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하였으나 결국 자민련(과 그 후계격인 정당들)이 사실상 몰락하여 거대 양당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점까지 생각해야 한다[13]. 즉, 세 명의 대권 수권후보를 묶어 3김이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수권후보였던 양김과 수권후보는 못 되지만 캐스팅 보터의 역할을 하던 김종필을 묶어 3김이라고 부르다 보니 같이 묶여 불리는 김종필까지도 나머지 둘과 같은 주요 수권 후보라는 착시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김종필은 박정희 집권 시기 2인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3김 중에서는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에 올라선 인물이다. 하지만 YS, DJ와 달리 대통령이 되지는 못했다. 1960년대만 해도 김영삼, 김대중보다 인지도로 보나 지명도로 보나 훨씬 높은 편이었고, 1970년대 국무총리 사임 이후 존재감이 많이 희석되었다 하더라도 여전히 박정희의 잠재적 후계자, 잠재적 라이벌로 보일 정도로 영향력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10.26 사건 이후 박정희의 뒤를 이어 민주공화당 총재로 올랐으며, 10대 대선에 출마와 함께 포스트 박정희가 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렇지만 여당도 아닌 야당도 아닌 상황에서 민주화 운동을 치열하게 해온 김영삼, 김대중이 5.17 이전까지 왕성하게 활동하면서 삼김시대가 확실하게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5공화국 시절에 김영삼, 김대중 양 김은 여전히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하며 국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낸 반면 김종필은 미국에 있었으며 어쩌면 자신의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민주화 참여를 거부하면서 완전히 3김이긴 하나 레벨 떨어지는 급으로 인식될 수 밖에 없었다.
  • 실질적인 권력에서야 당연히 박정희 정부의 2인자였던 김종필의 권력이 박정희 정부로부터 탄압 당한 김대중, 김영삼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고, 5.16 군사정변을 통해 단숨에 정권의 핵심에 진입한 김종필이 3김 중에서 가장 먼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YS와 DJ 역시 야당의 주요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김대중은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와 경쟁을 했고, 김영삼은 그 제7대 대선의 대선후보 경선에서 김대중과 결선투표까지 가는 팽팽한 대결을 벌인 바 있다. 즉 제3공화국 후반기 시점부터는 김영삼과 김대중이 야당의 지도자급 인물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김대중, 김영삼의 양김씨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서 활동한 바 있는데, 조갑제는 "그때는 두 사람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고 회상할 정도로 확고한 상징성을 확보했다. 10.26 사건 이후 제5공화국 시절에는 JP는 강제 정계은퇴를 당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은둔생활을 보냈는데, 이에 반해서 1983년 김영삼은 김대중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조직하고 단식투쟁을 전개한 바 있으며, 1984년에는 이민우, 김대중 등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창당하여 전두환정부에 대항하였다. 제5공화국기 김대중은 미국에 있었기 때문에 국내활동은 제한적이고 전면에서 활동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1985년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 1986년 신민당 상임고문으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그의 계파라고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정치인들은 현직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 박정희와는 정말 친했고 군 복무도 같이 했으며 심지어는 박정희의 셋째 형인 박상희의 장녀 박영옥과 결혼했다.[14] 그리고 상당한 애처가였고 아내가 세상을 뜨자 정말 크게 슬퍼했다. 그리고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내와 같이 한 자리에 묻히겠다고 하면서 현충원 안장을 거부하기도 했다.[15]
  • 이회창의 선배격인 인물로 대통령 빼고 다해본 사람이라는 매우 적절한 별명을 갖고 있다. 다만 이회창과의 관계는 냉랭했던 편. 김종필은 9선 국회의원에, 대한민국 행정부 2인자인 국무총리를 2번 역임했으며[16], 군사정권 시절 최고 권력기관이었던 중앙정보부[17]초대 중앙정보부장까지 했던 것을 감안하면 대통령이 아닌 사람으로는 최고 권력을 휘둘러본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18]
  • 일본어에 능하여 일어로 연설이나 인터뷰를 소화한 적도 많았다.[19] 한 예로 한일 수교 40주년을 맞아 2005년에 일본 NHK에서 제작한 한일협약에 대한 다큐멘터리출연일본어로 인터뷰한 사례가 있다.[20]
  • 르네상스적 인간이라는 별명이 있을 만큼 인문적 소양이 풍부한 인물로 공직생활을 하면서도 틈틈히 그림을 그렸고[21] 만돌린, 아코디언 등을 연주했다. 또한 패셔니스타[22]이자 미식가로 알려져 체스타필드 맞춤 양복을 입고 전국 각지의 맛집을 찾아다니며 식도락을 즐겼다. 미식가라고 해서 늘 사치스러운 산해진미를 고집한 것은 아니지만 90년 대 초반에 한 끼 20만 원어치의 중식정찬을 즐겨 화제가 된 적도 있다. 그것도 여럿이서 먹은 거라 테이블당 계산 가격은 백만 원이 넘었고 술도 두주불사였는데 발렌타인 17년을 특히 좋아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또 아래 단락에도 나오지만 취미도 부유층 스포츠라는 인식이 있는 골프였다. 국민의 정부에서 국무총리로 재직하고 있던 시절 외환위기 상황이였음에도 꿋꿋하게 골프를 쳤는데 그럼에도 JP가 워낙 거물이다보니 감히 시비를 거는 이가 없었다고.[23] 우스갯소리로 JP는 고급 취향 때문에 대통령이 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 한학에 조예가 있었으며, 심계도 깊은 김종필이었기 때문에, 취재하는 기자들이 JP의 말을 나름 유추했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한다. 말을 운치있게 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의미가 여러가지로 해석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 또한 김종필의 멋들어진 휘호 정치와 예술에 대한 일가견 있는 면모가 중국 언론이나 정가에서 줄곧 호의적인 시선으로 다뤄졌기 때문에, 중화권 외교에도 도움이 되었다는 후문.
  • 조갑제의 증언에 의하면 JP는 만남이 기다려지는 인물로 사석에서 만났을 때 정치 이야기는 일절 하지 않는다고 한다. 문화예술로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사람과의 관계가 아주 부드럽고 남에게 싫은 소리도 하지 않는 인물로 정치가라기보다는 예술가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아무래도 일본 문화에 영향을 많이 받은 인물인지라 일본의 상류층 사회에서 중시하는 풍류(風流)[24]가 체화(體化)된 것 같다는 평. 일례로 박관용 前 국회의장은 야당 의원이던 시절 국무총리였던 JP에게 항의를 하러 찾아간 일이 있었는데 JP가 국무총리실 입구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다가 자신의 손을 꼭 잡고 다독거리는 바람에 끝내 항의를 못했던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 2015년 아내가 세상을 떠났을 때, 거물급 정치인답게 오자와 이치로를 비롯, 한일 양국의 정치 거물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 2015년 4월에는 국정원이 정치에 개입하는 현상의 원인은 자체 수사권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자체 수사권을 검찰에 양도하고 대북정보 수집 등 정보기관 업무만 수행하도록 조직을 개편할 것을 제안했다.
  • 중앙일보에서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25]이 연재되고 있다. 보러가기 만화도 있다.
  • 2009년 8월 18일 김대중 대통령이 사망하고, 2015년 11월 22일 김영삼 대통령도 사망함으로서 이제는 3金의 마지막 남은 한 명이 되었지만, 2018년 6월 23일에 그도 세상을 떴다. 이로서 3金은 모두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 하하무한도전 짝꿍 특집에서 주장한 바에 의하면 독일에서 한창 잘 나가던 아버지가 귀국한 건 김종필이 불러서 온 것이라고 한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아마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 추진하던 해외 유학 간 인재들을 귀국시켜 국가발전에 이바지하게 하려는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다만, 하동훈이 독일에서 태어나 대한민국으로 온 것 자체는 사실이다. 박명수가 하하에게 눈총을 준 뒤 하하를 애써 옹호했다가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26]
  • 그 뒤로 무한도전에서 간간이 언급됐으며,[27] 박명수는 김종필 이야기가 나올때마다 김종필의 성대모사를 했다. 내각제, 3김정치는 이어져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는데, 워낙 성대모사를 잘하는데다가 말투가 웃겨서 유재석도 제지를 안하고 같이 웃는다.
  • 초록색을 좋아한다. 신민주공화당과 자유민주연합의 당 색이 초록색인 것도 이 때문이다.
  • 농협중앙회 한우개량사업소와 연관이 있는 인물이다. 김종필이 1968년 잠시 정계를 떠났을 당시, 정부로부터 현대의 서산시 지역의 토지를 불하받아서 ‘삼화목장주식회사’라는 대규모 축산 농장을 개발하였다. 그런데 제5공화국 시절 신군부에게 부정 축재라는 명목으로 재산을 강제 헌납할 때 이 농장도 포함된 것. 그리고 농장의 부지 및 설비는 한우 종자를 개량하는 한우개량사업소로 바뀌었다. 민주화 이후 소송을 통해 개인 재산으로 돌려받을 기회가 있었으나 포기하였다.[28]
  • 골프를 매우 좋아했는데, 1999년 국민의 정부에서 총리를 맡으면서도 계속 골프를 쳤다. 당시 외환위기 상황임에도 아무래도 정치적 끗발이 대단하신 분이라 여기에 대해서 토를 달기 힘들었던 듯. 특이한 점이, 그 당시만 하더라도 국산 골프채의 성능 및 품질수준은 조악했는데, 당시 김종필 총리는 드라이버 및 페어웨이 우드는 국산 랭스필드 제품만을 고집했다. 당시 랭스필드는 국내에서도 낮은 브랜드였는데, 김종필의 비서를 통해 국산 골프채 사용을 촉구하면서 자사의 최고급 골프채를 협찬한 후 한동안 "김종필 골프채"로 유명세를 떨쳤다. 아이러니한 것은 김종필은 혼마 회장으로부터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5스타 드라이버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인데[29], 아마도 당시 국산을 장려하는 풍조에 동조하는 의미에서 사용한게 아닌가 생각된다. * * 또 98년 7월 US 오픈에서 우승한 박세리를 격려하기 위해 그녀의 부모, 동료 프로골퍼들을 함께 삼청동 국무총리공관으로 초청해서 노고를 치하한 바 있다.
  • 축구계와도 의외로 인연이 있는데, 1966년도에 자신의 약칭을 따서 JP컵 쟁탈 한중일 축구대회라는[30] 축구대회를 만든 적도 있었다. 당시 한국, 대만, 일본의 실업축구 우승팀이 맞붙어서 치르는 대회였다. 하지만 JP의 약칭을 딴 축구대회에 대해 박정희가 불쾌감을 표시하는 바람에 대회는 딱 한 번만 개최되고 그 이후로 열리는 일이 없었다.
  • 김종필의 사망일인 2018년 6월 23일에는 서울특별시 공개 경쟁 임용 시험이 치러졌는데, 그 중 9급 한국사 과목에서 김종필에 관한 문제가 출제되어 우연의 일치로 화제가 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을 위해 김종필이 먼저 일본에 특사로 파견되었는데 이를 이후락으로 바꾼 선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 시험을 끝내고 휴대폰을 켜니 김종필이 실시간 검색어 1위에 있는 것을 보고 그날 시험 문제 때문인 줄 안 수험생들도 많았다고 한다.
  • 정부에서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하였다. # 여담으로 무궁화 대훈장 추서란 오보가 퍼졌었는데, 이는 정진석 측에서 낸 이야기였다.
  • 평생의 한이 하나 있다. 박정희쿠데타대통령이 되었기에 김종필 본인이 깨끗하게 지도자가 되어 이를 만회하고 싶어했다[31].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에 염증을 느낀 국민들이기에 전직 장성급 장교라는 신분, 그리고 한국 정치의 지역주의는 김종필에게 큰 핸디캡으로 작용했고, 대선 때마다 당락을 좌우하는 킹메이커로서의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나 끝내 킹은 되지 못하고 80살을 넘겼다.[32][33] 평소 선거제도 개편과 개헌을 통한 양원제, 다당제, 내각제의 확립을 주장했고 그러면 본인도 수상(首相)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근본적으로 국민들이 내각제에 부정적이라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 본격 시사인 만화에서 김종필이 사망한 이후 그에 대한 에피소드를 다룬 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전통 장례식으로 패러디했는데, 처음에 그가 맡았던 직위들, 뒤이어 그가 받은 훈장들과 그가 쌓은 업적들, 마지막 단계에서는 그가 쌓은 악업들을 소개한다.
  • 국민의 정부 국무총리 시절 국무총리실에서 근무하던 공무원 한 명이 현재 모 대학 교수를 맡고 있는데, 이미지와는 다르게 굉장히 부드러웠고 농담도 자주 던졌다고 했다고 한다. 기분좋은 날에는 저녁을 사기도 했다는 듯.
  • 한때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었는데, 1937년 당시 개구장이였던 시절 은사였던 이종순 선생님을 그리워하다가 선생님이 1972년에 위암으로 작고하셔서 선생님의 장녀와 차녀를 대신 만났다고 한다.
  • 자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커서 한 번 자기 사람으로 들이면 어지간해서는 내치지 않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1997년 대선 어간의 한 신문기사를 보면, 운전기사로 20년째 한 사람이 맡았는데, 그 사람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사임하겠다는 이야기가 실려있었을 정도. 실제로 JP를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의 정치적 공과는 엇갈린 평이 나올지 몰라도 인간 김종필에 대한 평 자체는 그리 크게 나쁘지 않다고 한다.
  • 은근히 백제와 인연이 있다. 부여에서 태어나 중학생 시절까지를 보냈고 공주의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두 도시 모두 백제의 수도였던 곳이다.

6. 매체에서


  • 이정길제2공화국 이래 여러 차례 이 역할을 소화하여 간판 연기자로 꼽을 수 있다[34], 단 제4공화국에서는 한인수가 맡았는데, 이정길이 동시기의 라이벌 드라마인 코리아게이트에 출연했기 때문이었다. 단 한인수의 경우 체격도 목소리도 너무 중후해서, 이 시기보다는 노년기의 JP에 더 닮았다. 이정길은 이후 제5공화국에서 다시 한번 김종필 역으로 출연한다.
[image]
(이정길이 연기한 김종필, 드라마 제5공화국 당시.)
[image]
(한인수가 연기한 김종필, 드라마 제4공화국 당시.)
  • 야인시대에서 등장한 청년기의 김종필은 배우 한창호가 맡았다. 다만 실존인물과는 외모에서 그다지 닮지 않았다는 평가다.
  • 삼김시대에서는 정동환이 맡았다. 외모는 나쁘지 않았지만 배우 특유의 허무주의적 인텔리 느낌을 지우지 못해서 잘 어울리지는 않았다.[35]
  • 영웅시대에서는 정재곤이 맡았는데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박정희의 참모 역할로 나왔다. 너무 젊은 느낌이라 별로 닮아보이진 않았다.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이인임은 김종필의 얼굴을 따서 그렸다고 한다. 대놓고 이인임이 '원조보수' 드립을 치는 장면도 있다. 줄타기의 명수였다는 것도 공통점.

7.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1960 - 1963
정계 입문

1963
창당

1963 - 1973
합당[36]

1973
탈당

1973 - 1978
입당

1978
탈당

1978 - 1980
복당

1980 - 1987
정계 은퇴

1987 - 1990
정계 복귀
창당

1990 - 1995
합당[37]

1995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1995 - 2004
창당

2004 - 2007
탈당[38]
정계 은퇴

2007 - 2012
입당[39]

2012
당명 변경

2012 - 2018
탈당[40]

8.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63
제6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41]

'''45,999 (68.2%)'''
'''당선 (1위)'''
'''초선'''
1967
제7대 국회의원 선거
'''69,961 (91.1%)'''
'''재선'''
1971
제8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5,460,581 (48.8%)'''
'''3선'''
1973
제9대 국회의원 선거
[42]

-
'''당선'''
'''4선'''[43]
1978
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5[44]

'''42,946 (66.6%)'''
'''당선 (1위)'''
'''5선'''[45]
1987
제13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1,823,067 (8.1%)
낙선 (4위)

1988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충남 부여
'''53,967 (81.9%)'''
'''당선 (1위)'''
'''6선'''[46]
1992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42,358 (72.5%)'''
'''당선 (1위)'''
'''7선'''[47]
1996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35,292(66.4%)'''
'''당선 (1위)'''
'''8선'''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전국구
'''1,859,331 (9.8%)'''
'''당선 (1번)'''
'''9선'''[48]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600,462 (2.8%)
낙선 (1번)
[49]
'''역대 선거 벽보'''
<^|1>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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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대통령 선거
제13대 국회의원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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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정치경력을 자랑한 정계의 거물답게 대부분이 당선으로 도배되어있다. 낙선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정계은퇴의 계기가 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의 2번 뿐. 역시 제 13대 대통령 선거와 제4대 국회의원 선거를 제외하고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당선된 김영삼과 비슷하다.

9. 저서


  • <새 역사의 고동>, 서문당, 1987년 8월 1일 #
  • , 서문당, 1987년 10월 1일 #
  • , 사공, 1997년 4월 9일 #
  • 공저, <신문인 방우영: 미수 문집>, 21세기 북스, 2016년 1월 28일 #
  • <김종필 증언록: JP가 말하는 대한민국 현대사>, 와이즈베리, 2016년 3월 4일 #
  • 저서, <남아 있는 그대들에게>, 스노우폭스북스, 2018년 7월 2일 #

10. 둘러보기





[1] 泌은 '샘물 흐르는 모양 필', '분비할 비' 두 가지 훈음이 있다. '비'는 완성형에서나 입력이 되고, '필'로 입력해서 변환해야 유니코드에서 호환이 된다.[2] 규암면 외리가 출생지라는 설도 있다.#, #[3] 김해 김씨 경파 집성촌이다.[4] 조부 김현택(金顯澤), 아버지 김상배(金相培), 본인과 형제가 각각 경파(京派) 20세손, 21세손, 22세손 항렬자를 사용한다.[5]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의 구절이다.[6] 박영옥 여사한테 청혼할 때 사용했다.[7] 방계가 아닌 직계다. 참조.[8] 통일뒤 땅 소유권 북 주민 우선[9] 내각제는 국회의 다수당이 내각 구성권을 갖게 되고, 그 다수당의 수장이 총리가 되는 시스템이다. 3당 합당 이전만 해도 한 정당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 어려운 시대였으니, JP가 어느 쪽에 붙느냐에 따라 집권 여당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20대 총선 전후로 호남 정가를 중심으로 내각제 개헌 논의가 활성화된 근본 원인이기도 하다.[10] 재밌게도 본인이 군사정변으로 전복시킨 2공화국은 내각제였다. 내각제를 무너뜨린 사람이 훗날 내각제를 추진하게 됐으니 참 아이러니 한 셈[11] 그 가운데 1회는 유신정우회로 임명직에 가까웠다. 전술했듯이 17대 총선에서 10선에 필사적으로 도전했으나 실패했다.[12] 무엇보다 상징적인 것이, 4위 김종필의 8.1% 1,823,067표를 그대로 2위 김영삼의 28.0% 6.337,581표에 더해도 당선자 노태우의 36.6% 8,282,738표에 미치지 못한다. 즉 당시 1노3김의 한국정치 4강 중에서 유일하게 독자적으로 선거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입장에 있는 것이 바로 김종필이었다. 당선자 노태우야 말할 것도 없고, 김영삼-김대중의 양김 역시 '두 사람이 단일화했으면 노태우를 꺾었을 것이다' 라는 단일화 필승론이 당시 한국정치와 한국 현대정치사의 중요한 떡밥으로 자리잡은 입장이다. 당대의 정치적 구도로 보건 득표율이라는 결과로 보건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3인은 그 사람이 선거에 불참한다면(사퇴 등) 선거 결과가 바뀌는(바뀔 가능성이 아주 높은) 입장이었던데 비해 김종필만은 선거에 참여하든 불참하든 선거 결과는 그대로인 셈이다. 결국 민주화 이후 첫 대선이었던 13대 대선의 결과에서 '김종필은 대선 수권후보가 아니며, 캐스팅보터로써의 영향력 역시 제한적이다' 라는 점이 확인되어 버린 것. 김종필 자신도 이 선거 결과를 인식하고 13대 이후의 대선에는 한번도 출마하지 않는, 즉 대권 도전을 포기하는 면모를 보여주게 된다.[13] 13대 대선 이후 3당 합당에 합류하여 거대 여당인 민자당에 합류하였지만 당내 주도권을 두고 치열하게 대립한 민정계/민주계(상도동계)와는 달리 김종필의 공화당계는 당내 주도권은커녕 제대로 된 지분도 인정받기 힘든 처지에서 계파의 핵심인 김종필 자신이 퇴진 요구에 몰리는 처지로 전락했고,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자민련을 세워 독립하게 된다. 다만 캐스팅보터로써의 입지를 다지는 데 매진한 김종필의 노력이 헛되지는 않아서 15대 대선 당시 DJP연합으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면서 캐스팅보터로써 정치적 의미를 증명하는데는 성공하였으나... 이 시점이 되면 그나마 김종필의 잠재적 지지기반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던 (군사정권에 거부감이 없는) 강경 보수층이 신한국당에 완전히 흡수-소화완료되어 그나마 주요대선후보로써 성장할 지지기반 확장력 자체가 거의 상실된 상태였다. 그리고 승자독식형 선거제도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거대양당화의 흐름에 따라 '수권정당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상실하고 캐스팅보터의 입지밖에 기대할 수 없게 된' 자민련과 그 후계정당들은 예정된 쇠락의 길을 걷게 된 것.[14] 법적으로 김종필은 박정희의 조카사위가 된다.[15] 사실 한국 국립현충원은 20년간 함께 한 배우자는 자리 상관없이 합장이 가능하다고 한다.국가원수,국가사회유공자 등 일반 안장되는 무덤은 옆에다 땅을 파고 같이 넣는 형식이며 그 외 화장 후 안장되는 무덤은 분골함을 같이 넣는다.[16] 박정희 정부, 김대중 정부. [17]국가정보원의 시초.[18] 다만 독재정부 시절이었던만큼 상관인 박정희의 견제가 너무 심해서 그 대단한 위세와 영향력에 비해서는 그렇게 큰 힘을 갖지는 못 했다. 내부 요인에 의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당시 김대중김영삼은 박정희의 반대파였고 전두환은 군대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을 뿐 아직 본격적으로 등장하기도 전이었으며 그 외에 그들의 영향력에 대등하게 필적할만한 인물은 드물었다. [19] 한일협상의 기초가 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역시 일본어로 적혀 있다.[20] 다만 이때의 인터뷰를 보면 나이탓인지, 유창하게 곧바로 회화한다기보다 머릿속에서 우리말을 일본어로 번역한 뒤 말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21] 수채화를 주로 그렸다. 유화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이유로 좀체 시도하지 않았다고 한다.[22] 실제로 1995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가 선정한 베스트드레서 10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된 바 있다.[23] 한나라당 의원들도 선배 정치인인 JP한테 함부로 할 수가 없었고 언론에서 종종 수군거리기는 하였으나 "내가 근무시간에 골프 치는 것도 아니고 나이 칠십 넘은 사람이 골프로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내가 몸져누우면 대신 앓아줄 것도 아니면서 왜 간섭하느냐?"고 받아쳤다고 한다.[24] 그냥 멋스럽게 즐긴다는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도 인간의 희노애락 전반을 뜻한다.[25] 笑而不答. "웃기만 하고 답은 하지 않다"는 의미로, 당나라이백의 시 <산중문답>의 한 구절에서 따 왔다.[26] 박명수가 진보 성향 연예인이라 김종필 자체를 옹호한 것은 아니다. 그저 의도는 좋았다 정도로 포장해 하하를 옹호할려 해준 것.[27] 명수는 12살 특집 등.[28] 서해안고속도로를 지나다 보면 서산 근처에서 갑자기 넓은 초원이 펼쳐진 곳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곳이다.[29] 2000년 당시 가격으로 약 2천만 원 수준의 채였다. 현재는 7백만 원 ~ 1천 2백만 원의 가격대[30] 당시 한국에서는 중화민국자유중국이라고 했고, 중화인민공화국중공이라고 해서 교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았다.[31] 이거 때문인지 박정희의 종신집권에도 부정적인 의사를 피력하기도 했다.[32] 이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도 연출되는데, 6.29 선언 이후 정계에 복귀한 JP에게 김영삼 김대중, 노태우 모두 접촉을 시도한다. YS를 대통령의 자리에 밀어올린 3당 합당도 처음부터 JP가 노태우에게 먼저 합당을 제의했고 이후 JP와 YS의 골프회동 끝에 YS가 합당에 합류하였으며 JP가 YS를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YS가 14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기존의 4당 체제에서 YS가 대통령이 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DJP 연합은 DJ가 직접 JP의 자택으로 찾아가 바닥에 주저앉아서 한번만 도와달라고 호소하면서 성사되었으며 DJP 연합 덕분에 충청권의 표를 대거 흡수하고 그동안 DJ를 지긋지긋하게 괴롭히던 사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되면서 TK에서도 나름대로 선전했다. 15대 대선에서 이인제의 탈당은 의도와 다른 결과를 초래한 것이고(이를 두고 유시민은 "꼭 좋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해야만 좋은 결과가 뒤따르는 것은 아니다."라고 비꼬기도 했다) JP는 DJ의 당선 이후 헌정사에 있어서 손에 꼽히는 실세 총리로 활동했다. 물론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박정희 대통령와 대선 주자로 격돌하던 인물인데 비해 김종필은 박정희 정권의 2인자 레벨이었기 때문에, 김종필 자신도 이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잘 알아서 80년대 말 정계에 복귀한 뒤로는 3당 합당이든 DJP연합이든 캐스팅보터 이상의 역할을 하려고 시도하지도 않았다. 즉 변수로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 한계 역시 뚜렷했던 것. 다만 김종필의 위력이 양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과 더불어 자신의 한계를 알고 명확하게 선을 그어 정계의 주요 세력으로 두 번이나 부활하여 할거하며 YS와 DJ를 권좌에 밀어올린 것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그래서 후일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는 말이 많다.[33] 다만 이전 문단들에서도 여러번 언급된 것처럼, 김종필이 한국 현대(특히 민주화 이후) 정치계를 대표하는 '캐스팅보터' 이자 '킹 메이커'라는 이미지를 가진 정치인인 것은 분명 사실이나, 그 위력에 대해 지나치게 과장하는 것도 적절한 분석은 아니다. 앞 주석에서 말한 <6.29 선언 이후 김종필이 정계에 복귀하자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모두 접촉을 시도하고, 3당 합당 역시 김종필이 먼저 노태우에게 제안한 것>은 드라마 제 5공화국의 연출이지 실제 역사가 아니고, 실제 역사에서 3당 합당은 여소야대 구도로 약해진 정국 장악력을 보충하기 위해 민정당이 먼저 야당 지도자들에게 합당을 제안한 것이었으며, 그 핵심 입안자는 박철언이라고 이미 알려져 있고, 제 1 교섭대상은 김대중, 그리고 김대중에게 거절당한 후 제 2 교섭대상은 김영삼이었다. 그 후 합당 전개 과정에서 김영삼과 김종필의 골프 회동이 4차례 있기는 하였으나, 이는 민정당(노태우)의 제안에 응한다는 전제로 그 조건을 교섭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지원하기로 내부 의견을 모으면서 김영삼이 당선되었으며, 기존의 4당 체제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같은 부분은 거의 김종필을 띄워주기 위한 상상에 가까운 부분이라고 보아야 한다. 애초에 김영삼이 노태우의 합당 제의에 응하면서 4당 구도는 이미 깨진 것이다. 그런데, 1강 2중 1약 구도에서 1강과 1중이 손잡기로 결정한 마당에 '거기에 1약이 힘을 합쳐주지 않았다면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라는 분석이 과연 상식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직전 13대 대선의 예를 보더라도 김종필이 확보한 표는 4자 구도에서 어디로 움직여도 승패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14대 대선의 상황에 비교해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김종필의 지지기반은 이념적으로는 강경보수, 지역적으로는 충청지역인데... 13대 대선 이후 민정당이 보수 주류의 입지를 차지했음이 명확해 진 상태에서 이미 민정당과 손잡은 김영삼에게 김종필이 몰아다 줄 수 있는 보수 표심이 그리 컸으리라 보기는 어려울 것이며, 지역 표심을 따지더라도 14대 대선에서 지역 기반도 없던 정주영이 충청권에서 돌풍을 일으켰음을 생각하면 김종필은 충청 지역 표심조차도 철저히 확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즉 14대 대선에서 김종필이 김영삼을 '권좌에 밀어올렸다'는 분석은 상당히 과장된 것으로 볼 여지가 있는 셈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꾸로, <만약 김종필이 김영삼에 반대했다면, 김종필이 움직인 표를 받아 이득을 볼 수 있는 다른 후보가 있었는가?>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김종필에 우호적인 표심은 그 성향상 김대중에게 직접 넘어갈 가능성이 낮아보이고, 3위 정주영에게 다이렉트로 넘어갔다 치더라도 10%쯤은 움직여야 선거 결과가 바뀌는데... 김종필이 그 전성기였던 13대 대선 당시 자신이 직접 출마했을때도 그만한 표는 못 받았다. 하물며 김대중에 대한 반감이 심하던 보수층 유권자들이 김대중 당선의 가능성이 높아짐을 뻔히 보면서도 김종필의 의향에 따라 김영삼 지지에서 이탈했으리란 기대는 너무 무모한 것. (이 전제에 따라 보면, 김종필에 의한 표 이동이 10%~15%에 그칠 경우 김대중이 승리하는 구도가 나온다. 다른 후보-이 경우 정주영-이 김대중에게도 승리하게 하려면 김종필이 움직여야 하는 표는 거의 20%에 육박하는데, 이정도면 그냥 자기가 직접 출마해도 괜찮을 수준의 영향력이다.) 그리고 16대 대선의 이회창-노무현 구도에서 이회창이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낙승했을 것이라는 분석은 더욱 허망한 것이, 애초에 16대 대선은 보혁대립구도가 완전히 정착된 상태에서 차리리 노무현/권영길의 혁신/진보진영 내 분열이 있었을 뿐 보수결집은 이미 이뤄진 선거였다. 김종필에 대한 호감으로 표심에 영향을 받을만한 보수주의자가 이회창을 놔두고 노무현이나 권영길을 찍었을 가능성은 정말 희박해보이고, 그 외에 이 선거에서 이회창이 가져가지 못한 보수진영 표는 이한동의 0.3% 뿐이다. 물론 이걸 다 결집시켰다고 가정하더라도 선거결과는 뒤집히지 않는다. "노무현에서 석패한 이회창 또한 김종필과 손을 잡았더라면 그 상징성이 보수결집의 부스터 효과를 내어 무난하게 대선에서 승리했으리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정말 많다면, 그 사람들은 16대 대선 당시의 선거 결과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킹메이커 김종필이 지지하면 반드시 이긴다! 보수결집으로 낙승한다!"는 자신의 믿음을 외치고 있는 것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다. 결국 김종필이 킹메이커, 또는 게임체인저로써의 영향력을 보여준 사례는 딱 한번, 15대 대선의 DJP 연합 뿐이었다. 물론 15대 대선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한국 정치사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김종필이 가진 캐스팅보터로써의 의미를 결코 낮게 평가할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김종필이 가진 게임 체인저로써의 역량은 <적절한 상황이 조성된 경우>에만 그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었지, 그가 활동하던 당시 아무 대선에나 대고 '김종필 덕분에 이긴 것이다', '김종필이 도와주지 않아서 진 것이다' 라고 설명하면 맞아떨어지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6공 초기 한국 정치판에서 김종필의 정치적 역량(캐스팅보터이자 킹 메이커로써의 역량)을 받아줄 수 있던 유일한 상대가 김대중이었다.(15대 대선은 말할 것도 없고, 14대 대선 구도에서도 김종필이 김영삼 지지를 철회하고 다른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선거 결과가 바뀔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경우가 김대중 지지 -5년 빠른 DJP 연합- 이었던 것.) 즉, DJP 연합 성립 당시에도 당장 표가 아쉬운 김대중이 먼저 부탁하고 김종필은 갈짓자 행보를 보이다 결국 그 부탁을 받아들이는 형태로 상황이 진행되었지만 어차피 김종필 역시 김대중이 아니면 자신의 역량을 사 줄 이가 없었기에 연합이 성립된 뒤에는 철저한 2인자로 자신을 낮추는 처세를 보였던 것. 이것이 김종필이 보여준 대세를 파악하는 안목의 예리함인 것이다.[34] 한일회담 때 언저리 사진을 보면 많이 닮은 편이다.[35] 야인시대의 최동열 역할을 생각해 보면 참고가 될 듯.[36] 민주공화당에 흡수 합당[37]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 신설 합당, 이른바 3당 합당[38] #[39]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 지지 선언 #[40] #[41] 현 충청남도 부여군 일대[42] 통일주체국민회의 선출[43]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은 3년 임기로 2번 나눠서 선출한다. 김종필은 1기와 2기 모두 선출되었으며, 1기 당시는 현직 국무총리였다.[44] 충남 부여, 보령, 서천 일대[45] 유신 시절인 9대 국회부터 5공화국 12대 국회까지 중대선거구제였다.[46] 1990년 민주자유당 합류 (3당합당)[47] 1995년 자유민주연합 창당[48] 최다선(9선) 타이틀. 9선을 기록한 인물은 같은 3김 중 하나였던 김영삼박준규 前 국회의장이다.[49] 0.2% 차이로 '''10선''' 도전 실패, 정계은퇴. 탄핵정국 당시이다. '''10선에 성공했다면 앞으로 깨기 힘든 기록이 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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