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강헌

 


<colbgcolor=#000><colcolor=#DDDDDD> 이름
지강헌(池康憲)
출생
1954년 2월 8일
출생지
광주광역시[1]
사망
1988년 10월 16일 (향년 34세)
사망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본관
충주 지씨
신체
170cm, 68kg
범죄유형
절도, 상해, 탈옥, 인질극
1. 성장 과정
3. 여파
4. 미디어 믹스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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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장 과정


1954년,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출생한 지강헌은 불우한 집안에서 5남매 중 막내로 자라났다. 어린 시절 장래희망이 시인인 만큼 섬세한 사람이었으나, 아버지,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만 졸업하게 되었다. 이후 공부를 할 기회가 없는 그에게 배운 것이라곤 주먹질과 도둑질뿐이었다. 결국 상습 절도로 체포돼 17년(징역 7년+보호감호 10년) 징역선고를 받게된다. 당시 그는 이미 이전 전과가 잡 전과까지 합해 총 11범이었다.

2. 유전무죄 무전유죄 사건


지강헌: "이 바보들아! 나는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어! 국민학교밖에 못 나왔지만, 개XX들. 난 그동안 생각했단 말이야! 이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 자기 인생을 버렸단 말이야! 그런데도 결국 오늘 이 사회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서 노태우 대통령, 국민을 위한! 국민을 위한 노태우 대통령! 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고있어!"

(더 자세한 내용은 표창원의 사건추적 -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의 절규 편을 참고할 것.)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2]에서 대전과 공주 교도소, 공주치료감호소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탈주하여 서울시내로 잠입했다.[3]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 달리, 이들은 본래 흉악범이 아니라 잡범이었다. 하지만 사회보호법에 의한 보호감호제도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보호감호처분을 받아야 한다는 것과 560만 원 절도를 저지른 자신은 무려 17년을 살아야 되는데, 알려진 것만 70여억 원을 횡령전경환(전두환의 막내동생)은 겨우 7년(실제론 3년 3개월 만에 풀려남)을 선고받은 사실에 불만을 가지고 탈출한 것이다. 나중에 탈출 과정에서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권총을 탈취하면서 흉악범이 되긴 했지만 맨 처음 교도소에 수감됐을 땐 흉악범이 아니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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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이 중에서 최후까지 잡히지 않던 5명 중 4명은 경찰의 검문을 피해 서울시에서 은신처 여러 군데를 전전하다 10월 15일 밤 9시 40분경 서대문구 북가좌동[5] 고모 씨의 집에 잠입해서 고 씨의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이 인질극은 당시 TV로 생중계되었으며, 인질극을 벌인 범인 4명은 다음과 같다.
  •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 사살
  •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 자살
  •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 생존
  •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 자살
인질로 잡혀있던 고 씨가 새벽 4시쯤에 탈출하여 인근 파출소에 신고했고, 곧바로 경찰 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했다. 인질범들은 새벽 4시 40분부터 경찰과 대치하여 실랑이를 벌이다가, 낮 12시경 강영일이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와있을 때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가지고 있던 호송교도관 김○○ 교사(당시 54세), 김○○ 교사(당시 36세)의 총을 빼앗아 각각 자살했고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 지스홀리데이 카세트테이프를 요구한 뒤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 유리조각으로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했다. 자살 시도 직후 경찰특공대원들이 집으로 진입해 인질로 잡혀있던 가족들은 모두 무사히 구출되었다. 그리고 지강헌은 깨진 유리로 자신의 목을 찔렀는데 이를 지켜본 인질이 비명을 지르자 경찰특공대가 인질이 위험한 걸로 판단하여 즉각 진입하여 무방비 상태의 지강헌에게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발사하였으며 몇 시간 뒤 세브란스병원에서 수술도 못받고 사망했다.#
당시 '홀리데이'를 요구한 지강헌의 요구에 경찰이 실수로 스콜피온스의 홀리데이를 전달했다가 급하게 비 지스의 홀리데이를 다시 전달했다는 소문도 있다. 일단 사건 당시 현장에서 지강헌이 들었던 노래는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맞다. 비지스의 홀리데이가 울려퍼질 때 지강헌이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이 당시의 방송 녹화테이프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실은 2006년 SBS의 영화프로그램 'TV박스오피스'의 '영화비하인드' 코너에서 확인되었고, 또한 관련 영상은 유튜브 등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6]
당시 검거되지 않았던 5명 중 인질극에 가담하지 않은 마지막 탈주범 김길호가 탈주한 지 1년 9개월 만인 1990년 7월 1일에 체포[7]되면서 탈주극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유념해야 할 것은 지강헌 일당이 무죄가 아니라는 것. 1989년 개정 이전의 사회보호법에서 보호감호 기간을 최대 10년으로 규정한 탓에 이들에겐 10~20년에 이르는 매우 과중한 형량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은 무려 수십억 원대 사기와 횡령으로 1989년 징역 7년을 선고받았으나 실제로는 고작 2년 정도 실형을 살다가 풀려났다. 지강헌 등은 돈 있고 권력 있는 자는 특혜를 받고, 돈 없고 권력이 없으면 중형을 받는 대한민국의 불평등한 현실에 분노한 것이라는 게 명분이었다.
다만 지강헌 탈주사건의 경우, 여타 범죄자들의 자기 합리화만으로 몰 수가 없다. 일단, 당시 인질 및 경찰들이 증언한 바로는 그들은 예상 밖으로 대단히 신사적이었으며, 그들의 요구는 '방송'이었지 '탈주'가 아니었다. 사실 지강헌 일행은 숨어 살다가 집주인이 몰래 도망친 탓에 인질극을 벌인 것이고, 그러다 보니 방송을 탄 것이다. 지강헌의 노트
인질극을 벌이기는 했지만 범인들은 "죄송하다 조금만 참아달라", "금방 끝날테니 이해해달라." 면서 두려워하는 인질들을 달랬고, 경찰들 앞에서 인질의 목에 칼을 들이대며 고성을 지르면서도 인질에게 귓속말로 "절대로 다치지 않게 할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최대한 인질들을 배려하려 했다. 그런데 실제 영상에서 보면 같이 탈주한 동료에게는 과격하게 대했는지 강영일만큼은 권총 한발을 위협 사격 하면서까지 자수를 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8]
탈주극을 벌인 12명 중 사망한 사람을 뺀 9명 중에 현재 수감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마지막에 잡힌 김길호와 지강헌 인질극 중 유일한 생존자인 강영일이고 나머진 출소 후 재범으로 다시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2014년 9월 기준)

출소한 후 강영일은 이후 인질극 피해자한테 공식으로 사과하려고 채널A 그때그사람에 출연하였다. 범죄의 피해자들 중 가해자들의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사라져버리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봤을 때 출연료를 노린 돈벌이에 불과하다는 여론도 있다.

3. 여파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회보호법의 단점이 폭로되기 시작했는데, 이 사건 이후인 1989년에 사회보호법이 개정되며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게 고정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보호감호 피해자에 의해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2005년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전술했듯이, 당시에 체포되었던 전경환과 비교되어 대한민국 경찰이 '시국치안에는 강하지만 민생치안에는 무능한 경찰'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된 한 계기이기도 하다.
교정직 공무원들에게는 비극이자 희극이 되었는데, 바로 수감자들에 대한 몸수색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주 원인이 과도한 근무시간으로 인한 교도관들의 피로라는 지적이 나왔기 때문이다. 당시 보안과 교도관들은 2교대로 24시간 근무 후 퇴근해 쉬고 다시 24시간 근무하는 살인적인 스케쥴이 일상이었는데, 이걸 계기로 24시간 근무 후 다음날에 휴식 후 다음날은 주간만 근무하거나 하는 식으로 조금이나마 근무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4. 미디어 믹스


  • 1989년 10월 26일 MBC 수사반장의 '10대 사건 시리즈' 편에서 이 사건이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당시 지강헌 역에는 이계인이 출연했다.
  • 2006년에는 해당 사건을 토대로 가공설정을 덧붙인 <홀리데이>라는 영화도 제작되었다.

  • 해당 사건은 1995년 9월 30일자 KBS2 《그때 그 사건》과 2003년 6월 16일자 MBC 《실화극장 죄와 벌》 22회에서 다룬 적이 있다. 특히 죄와 벌은 가해자를 다룬 것이 아니라 인질극 피해자가 국가에 대한 손해 배상에 관한 것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은 피해자의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피해자는 선량한 시민으로 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대인기피증이 생겨서 약국은 문을 닫아야 했고, 달동네에서 가난하게 살게 됐다. 억울한 아버지가 국가의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배상은 제대로 되지 않았고 해당 책임자는 무관심했다. 다행히 배상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이미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의 가난과 그 사건의 공포로 인해 피해자는 아파트 경비원을 하고 있고 가족은 고통 속에 살아간다고 한다.
  • OCN 드라마 <라이프 온 마스>에서도 이를 모티브로 한 에피소드가 방송되었다. 7화에서 인질극 사건이 나오는데, 범인 이름이 강헌이고[9]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요구하는 내용이 나온다.[10]


5. 관련 문서


[1] 전라남도 보성군이라는 말도 있는데 확실하지는 않다.[2] 당시 서울특별시 구로구 고척동 소재. 2011년 천왕동으로 옮기면서 서울남부교도소로 개명되었다. 이후 (구)영등포교도소 부지는 철거되어 주상복합, 아파트로 조성되고 현재도 지어지고 있다.[3] 이송 시 검신을 똑바로 안 해 흉기를 발견하지 못했으니 피습당한 당사자의 잘못은 아닐지 몰라도 교정당국의 책임은 맞다.[4] 맨 윗 사진과 마찬가지로 자세히 보면 지강헌이 든 M1911 권총의 슬라이드가 분리되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상태인데, 저 상태에선 발사가 되지 않는다. 머리에 대고 있는 사진들 외에는 제대로 조립되어 있는걸 보면 저 사진이 찍힐 때 쯤에 총을 잘못 만졌던 듯 하다.[5] 수색로10길 광명빌라 인근인데 그 집은 지금도 있다.[6] 당시 영상을 보면 홀리데이를 요구한 이후 나자레스의 'Please Don`t Judas Me'를 추가로 요구하는데, 공교롭게도 나자레스의 발표곡 중에도 홀리데이란 동명의 노래가 있다.[7] 탈주 당시 김길호가 절대 한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지 않고 주도면밀하게 행동한 탓에 "김길호가 나타났다."는 제보를 받고 잠복하고 있으면 영판 다른 장소에서 또 김길호를 목격했다는 제보가 들어와 경찰 관계자들 사이에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홍길동 같다."며 '김길동'으로 불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경에는 삭발한 야구 선수를 탈주범 김길호로 오인 신고하면서 어처구니 없는 해프닝이 있기도 했다.[8] 강영일은 교도소내에서부터 지강헌과 친했고 이미 도주할 수 없는 상황인 것을 알고 자수하게 만들어 살리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실제로 요구한 승합차를 확인하러 나갔다 돌아오는 강영일의 발밑에 총을 쏴 못들어오게 하며 "너는 내가 살린다. 영일아 내 말 들어라."라고 말한다. [9] 슬기로운 감빵생활의 최종 빌런인 염반장 역을 맡았던 배우 주석태가 명연기를 펼쳤다.[10] 다만 작중에서 탈취한 권총은 자동권총이 아니라 리볼버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