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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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삼김시대의 일원이었으며 김대중과 함께 대한민국 민주화에 삶을 바친 민주화 운동가이다.[5]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하고 민주당 구파에서 출발한 보수 우파 정치인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인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6] 자유당에서 정치에 입문해 9선 의원을 지내면서 3공화국~ 5공화국 치하의 야당 지도자, 통일민주당 총재 등으로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까지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으며,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자유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퇴임 후 자택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2015년 11월 22일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 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급성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으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경상남도 거제 출신이며 호는 '거산(巨山)'이다. 태어난 고향인 '거제'와 정치적 기반이 된 곳(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한 글자씩 따서 지었다. 이름의 영문자 이니셜을 딴 '''YS'''로도 유명하다.
2. 일생
일단 김영삼은 정치가 이외에는 별 다른 이력이 없다.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자유당 정치인이었던 장택상의 비서가 되었고 그 이후 자유당에 입당해서 만 25세에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달성하며 당선되면서 정치경력을 시작했으며 그 이후에는 평생 정치인으로 지내왔다. 자유당 국회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으나 이승만이 장기 집권을 위해서 대통령 3선 제한 철폐를 추구하자 거기에 반대했고 마침내 사사오입 개헌이 통과되자 자유당을 탈당하고 민주당에 합류하였다.
김대중[7] 과 더불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생을 바쳐 헌신한 한국 민주화 역사의 양대산맥이었다. 또한 고위 공직자 재산 공개를 도입한 청렴한 정치의 선구자이자 수많은 개혁을 단행한 개혁가라는 평가도 있다. 1993년 금융실명제를 시행하기 앞서 본인의 재산 내역을 공개했을 정도였다. 반면 국가 및 집안 경영에 실패해 1997년 외환 위기를 막지 못한 지도자라는 평도 있다. 과감한 개혁 조치로 한국 갤럽 조사 기준으로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는 역대 최고 지지율을 기록했으나, 임기 말 외환 위기로 지지도 조사에서 6%를 기록해 역대 최하 지지율을 기록한 대통령으로 오랜 기간 남아있었다. 이후 2016년 박근혜의 지지율이 4%를 기록하며 경신되었다.
하지만 2015년 사망한 이후 시간이 지나면서 IMF의 원인을 온전히 김영삼의 잘못으로 평가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지적에 동의하는 사람이 늘었고, 금융실명제 실시와 하나회 해체, 역사 바로 세우기 같은 긍정적 업적들이 재평가를 받기 시작하면서 지금은 말년을 제외하고는 괜찮은 대통령이었다는 평가가 조금씩 늘어가고 있다. 뭐 그렇다고 전임 대통령 지지도 조사에서 크게 높게 나오지는 않지만[8] 2000년대 초반에는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었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재평가 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례로 김영삼은 2012년 대선을 즈음하여 박근혜의 집권을 영 마뜩찮아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주었는데, 김영삼이 신랄한 독설을 퍼부으면 박근혜가 "역대 최저 지지율 기록한 분"[9] 운운하며 맞받아치는 식으로 한바탕 난타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영삼 하면 실패한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201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 정도로 강했다.
이렇게 김영삼이라는 개인의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은 여러 의견들이 갈리나, 군사정권 대통령의 시대를 마치고 본격적인 (실권을 가진) '''문민 대통령'''의 시대가 이 사람을 시작점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 적지 않은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인물임은 분명하다.
3. 평가
4. 사상과 신념
김영삼의 정치철학은 자유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있었다. 야당에서 활동하였지만 정치학자 김용욱에 의하면 그의 노선은 보수주의 성향이었다고 한다.즉 자유보수주의자이자 자유민주주의자, 스펙트럼은 중도우파 성향이다.[10]
4.1. 자유주의
자유가 없는 세계가 잘못하면 공산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았다. 한국의 보수정당 중 민주계 역시 자유주의를 지향하는 운동권 혹은 냉전의 붕괴를 겪고 자유주의로 노선을 바꾼 민주화 운동가 출신이 많았고, 김영삼은 그들을 데리고 초기 신한국당에서 군부 TK 기반의 민정계들을 견제하였다. 또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는 실현 가능성도 없고,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탄압하는 체제라고 지칭하며 매우 비판적으로 보았다.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PD/NL 등 좌파 성향 운동권들과는 끝까지 선을 그었으며, 극좌 성향 대학생 단체인 한총련에 대해 강경하게 통제하는 모습을 보였다."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수 있는 가장 강한 무기는 자유의 유보가 아니라 자유의 신장이며 인권의 탄압이 아니라 인권의 보장이고 언론의 통제가 아니라 자유언론의 창달이며 민주체제라는 것을 인식해야한다"#
그에 의하면 자유가 전부 없어지고 그런 구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되면 공산주의에 호기심을 갖는 사람이 생길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버나드 로 몽고메리 원수의 <지도자가 가는 길>을 감명깊게 읽었다고 한다. 존경하는 인물로는 한국 사람 중에서는 개인적으로 성격이라든가 지도력이라든가 정치가로서 조병옥을 지목했고, 외국 사람으로서는 전 미국 대통령인 존 F. 케네디를 지목하였다.
4.2. 대북관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에 의하면 "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선장이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라는 것이다. 그는 야당활동과 대통령 재직 기간 내내 공산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지 않았다. 사실 공산주의 국가들이 하나같이 탄압적인 정국을 가졌다는 것도 민주화 운동을 하던 김영삼에게 부정적으로 보이도록 한 몫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당연하게도 6.25 전쟁을 몸소 겪었던 인물이었던데다가 어머니를 무장공비에게 잃기까지 했으니[11][12] 공산주의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동안 반공을 내세우거나 강력한 반공 분위기를 만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반공기조는 약해져, 90년대 초반까지 공공장소에 비일비재하던 반공구호는 1995년을 전후하여 국제사회의 탈냉전시기와 더불어 죄다 없어지고, 반공교육도 공교육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던 게 이 시기이다. 일단 김영삼의 '''어머니가 북한 공비의 총탄에''' 사망했다는 걸 부울경 사람들도 다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공과 사를 구분해 북한과 대화를 추진하는[13] 모습을 보였다. 미워도 동족이라 어쩔 수 없다면서 말이다. 대북 경수로 사업(KEDO)[14] 과 비전향 장기수의 첫 송환이 이루어진 시기도 이때이다. 첫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으나, 김일성의 사망 이후 북한의 혼란으로 인해 무산된 바가 있다[15] . 하지만 입장을 선회하여 1996년 신년연설을 보면 "북한 경제난의 근본원인은 과다한 군사비와 공산주의 경제체제의 비능률에 있다. 북한이 동족을 위협하는 군사력 유지에 모든 국력을 쏟아넣으면서 구호를 바라는 것은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죄악이다. 북한이 화해와 협력이라는 세계적인 추세를 직시하고 對南 자세를 바꿀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보수세력의 주요 대북 담론인 '북한 붕괴론'이 등장한 건 김영삼 정부 시기라고들 한다.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하자 정부 당국자들은 북한 붕괴를 기정사실화 했다고한다. 당시 정종욱 안보보좌관은 백악관 안보담당 보좌관(앤서니 레이크)에게 "북한이 6개월 내지 2년 안에 붕괴할 것"이라고 말했다고『두 개의 한국』의 저자 오버도프가 전했으며, 갈루치·위트·폰먼의 공동 저서 『북핵 위기의 전말』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은 ‘김정일의 건강뿐만 아니라 정신 상태도 정상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의 최측근 참모였던 이원종 전 정무수석은 "YS는 김일성의 건강이 나쁘다는 정보부의 보고를 워낙 많이 들어서 사실 북한의 붕괴를 기대하고 있었다. 김일성이 죽으면 북한은 무너진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김영삼 대통령은 94년 8월 “남북의 체제 경쟁은 끝났다”며 “언제 갑자기 통일이 눈앞에 닥쳐올지 모른다”고 말해 북한의 붕괴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 # #
또한 2004년에는 다음과 같은 발언도 하였다. "북한은 인권이 없는 나라다. 김정일을 제거하지 않으면 북한에 자유를 가져올 수 없다", "북한 정권과 대화를 통해서 뭔가를 해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김정일 멸망 이외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한반도에) 평화는 없다", "북한에선 56년동안 김일성, 김정일 두 사람이 정권을 잡아오지 않았느냐. 그런 독재정권이 어디 있느냐."#
4.2.1. 한반도 평화와 남북 협력의 4대 원칙 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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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15일, 광복절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통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 원칙으로 무력포기와 상호존중, 신뢰구축 그리고 상호 협력을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날 광복절 경축식 연설에서 이같이 강조하면서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제시했다. 김 대통령은 이를 위해 북한에 경제 전반을 회생시킬 수 있는 민족개발 공동계획을 남북대화를 통해 추진하자고 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어 우리는 북한이 변화의 길로 나온다면 얼마든지 협력할 의지와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고 북한 당국의 호응을 촉구했다.[16]
4.2.2. 6.25 전쟁 만주 폭격 발언
1996년 6월 24일 전방부대를 시찰한 자리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북한은 세계의 모든 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고 있지만 마지막으로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동족인 우리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고 발언하여 여야간 극한 언쟁이 오갔다.
당시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해당 발언에 대해 국가안보를 해치고 4자회담[17] 성사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라면서 "국가이익을 현저하게 해칠 우려가 있는 발언을 한 것은 대통령의 직무와 관련해 탄핵소추도 가능한 발언이라고 본다"는 논평을 냈고,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측에서는 "대통령 자신이 북을 자극하여 찬물을 끼얹고 있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논평을 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어느 쪽의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는 점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회의는 북한에 대해 그렇게 미안하고 조심스러운지 묻고 싶다"는 논평을 냈다.[18]
당시 공방의 발단은 김영삼 대통령의 지난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으로 김영삼 대통령은 심각한 북한 상황과 한국전쟁의 참상을 회고하고 당시 맥아더 장군이 주장했던 만주폭격이 가능했더라면 이미 통일 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면서 철저한 안보태세를 당부했다. 그러자 국민회의 측은 어제와 오늘 잇따라 비난공세에 나섰고 신한국당 측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양쪽 공방은 김영삼 대통령의 발언이 과연 우리 국민의 안보의식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줬다.
국민회의 정동영 대변인은 만주북폭 지지발언은 국가안보를 위태롭게 할 수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고 규정을 했다. 그러자 신한국당 김철 대변인은 전방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 과거의 통일의 기회를 아쉬워하면서 젊은세대들에게 안보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이같은 회상을 한 것은 매우 자연스럽게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논평으로 김영삼 대통령을 비호했다. 또 이번 발언이 지금은 우호국(?)이 되었다는 된 중국과의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도 논란이 됐다. 정동영 대변인은 한중 우호에 악영향을 초래하고 간접적으로 외환을 불러올 수도 있는 중대한 발언이라는 것이라고 논평했고 신한국당의 김철 대변인은 반세기전의 전쟁 상황을 기준한 대통령의 발언이 어떻게 해서 현재의 한중 한러 관계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논평을 냈다.
새정치국민회의는 김영삼 대통령이 전국민 한테 이 발언을 해명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신한국당은 당시 공산당을 제외한 대다수 국민이 맥아더의 주장을 지지했으며 지금도 대다수 국민들이 그대로 했다면 통일이 됐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서 국민회의가 6.25에 대한 기본적 이해도 결여되어있을 뿐 아니라 어느쪽 안보를 지키려는 정당인지 의심이 들 정도라고 반박했다.[19][20][21]
4.3. 종교
김영삼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 일찍이 할아버지 김동옥의 대에 장로회를 받아들이고 대대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1975년 손세일과의 접견에서 국민이면 누구나 모든 문제에 참여해야 된다며, 종교인의 현실 참여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런데 그 방법을 어디까지 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한정하였다. 2015년 그의 사후에도 종교적 예식에 맞추어 장례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5. 다른 정치인들과의 관계
6. 기타
-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박정희 - 전두환 등 군사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우는 일에 써왔던 인물이라 그런지 육사와 군인들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것 같다. 대통령 퇴임 후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육사는 공부도 안 하고 사람 죽이는 것만 배우는 집단"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육사는 바보들의 모임"이라는 등 과격한 발언들을 아끼지 않았다. 자세한 내용과 인터뷰 영상은 다음 영상으로. #
- 서법에 따르지 않고 나름대로 독창적인 글씨체를 구사했다고 한다. ‘大道無門’(대도무문)은 그의 필체 특징을 잘 보여주는데 붓만 왔다 갔다 한 듯 필획이 약하다는 평. 여백을 거의 두지 않고 굵은 체로 종이 전체를 메우고 있는 것에서 ‘통 큰’ 사람임을 드러낸다고 한다. 또한 글씨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라 실제로도 일을 빠르게 결정하고 좌고우면하지 않았을 성격으로 보인다고. 글씨의 기교가 거의 없고 정확한 정사각형 형태로 쓰고 있는 것은 세련됨과는 거리가 멀고 올곧은 사람임을 드러낸다는 분석이다. 나름 마니아층이 있어서 그의 글씨는 한 점당 300~400만 원까지 꾸준히 경매에 낙찰된다고 한다. 최고 기록은 560만 원.
- 단식 투쟁 하던 시기와 관련해 김영삼 보름달 사건이라는 유명한 도시전설이 전해진다. 그리고 보름달 사건보단 유명하진 않지만 또 도시전설이 있는데 노태우 대통령 시절 김영삼이 노태우의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막말을 퍼부었다는 소문이 정가에 암암리에 퍼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노태우 전 대통령은 회고록을 통해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해명한 바가 있다.
- 퇴임 후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총 5번 대만을 찾았다. 대만을 방문하여 천수이볜 당시 총통과 면담하고 대학에서 강연을 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그의 대만 방문은 단순한 외유일 뿐만 아니라 1992년 단교 이후 끊겼던 한국-대만 직항을 되살리고자 한 것이기도 했는데관련 기사 이는 2004년에 성사되었다. 중국은 김영삼의 대만 방문에 불편한 기색을 보였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관련 기사
- 김영삼의 아버지 김홍조(金洪祚, 1911~2008, 향년 97세)와 김영삼 본인(향년 89세)은 모두 80이 넘게 살았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김태향(金泰香, 1910~1999, 향년 89세, 노태우의 어머니), 강한옥(姜韓玉, 1928~2019, 문재인의 어머니)은 어머니가 아들의 대통령 취임식을 본 사례다. 매일 아침 조깅과 배드민턴을 하면서 젊은이 같은 건강함, 활력을 유지하였으며, 대통령 시절 국빈이 방문해서 청와대에 머물면 같이 조깅을 하기도 했다. 지미 카터나 빌 클린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민주화 투쟁을 하던 80년대에는 가택 연금 해제 후 민주 산악회를 조직해, 민주화 동지들이 건강을 유지하고 뜻을 모으는데도 도움되는 일석이조 효과를 거두기도 했다.[22] 이런 철저한 관리 덕분에 단식 투쟁 후에도 회복이 빠른 편이었으며 만 88세까지 장수하였다.[23] 김영삼은 생전에 질산 테러 및 조폭, 경찰들과 부딪히며 위험한 고비를 수차례 넘겼으나, 심적으로 움츠러들지 않고 다음날 김대중과 함께 국회에 등원해 여권의 잘못을 지적하는 배짱을 발하였는데, 이러한 기백 저변에는 타고난 건강 체질 + 철저한 관리 + 용기가 있었던 것.
- 선친 김홍조는 거제도에서 멸치 어업을 했다.[24] 그냥 동네 어민 수준이 아니라, 어선 수십여 척에 멸치 가공 공장을 여러 개 갖춘 업계의 큰손이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김영삼은 야당 정치인 시절부터 주요 정치인들과 재야민주화운동가들에게 명절때마다 꾸준히 멸치 박스를 선물로 보냈다. 이때문에 정치인과 재야인사들 중에 YS 멸치 혹은 민주멸치를 받은 사람이 허다했다. 김종필이 김영삼을 조문하면서 이 멸치 박스 이야기를 언급했는데, 김영삼은 여당, 야당, 정치적 대립 관계 여부를 신경 쓰지 않고 설 선물로 멸치를 보냈다고 한다. 지금도 깨끗한 멸치는 귀한 선물이지만 당시엔 꽤나 이색적인 선물이었을 것이다.
- 박근혜와 함께 금수저 출신 대통령으로 자주 언급된다. 바꿔 말하면 한국에선 부잣집 출신 대통령은 이 둘뿐이고 나머지 대통령들은 전부 가난 속에서 태어났다. 물론 이 시기에 잘 사는 사람은 거의 없다시피했던 것도 이유지만. 거기다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이런 부유한 집안 출신인데도 불구하고 학생 때 전쟁에 징병되어 군복무를 수행했다. 더군다나 김영삼은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이였다. 집안의 대를 이어줄 아들을 낳는데 집착했던 과거에 외동아들이 군대에 끌려간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을 것이다.[25] 또한 가진 돈도 다 털어붓고 목숨 걸고 민주화 운동을 했기에 금수저에 대한 반감이 강한 유권자들에게도 인정받았다. 더구나 김영삼 본인은 부잣집에서 살아서 그런지 오히려 비리를 저지른 적도 없고 재산도 깔끔하게 공개했었다.
- 김영삼이 빌 클린턴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대뜸 "Who are you!"(너 누구야!) 라고 인사를 건넸다. 화들짝 놀란 통역관이 대통령이 "How are you?"(잘 지냈어?)를 잘못 말한 줄 알고 정정했는데 나중에 왜 그러셨냐고 물어보니 경상도에선 반가운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면 "이게 누꼬?" 라고 인사한다며 그래서 Who are you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26] 그러나 통역관이 영남 방언을 모르자 "배아라(배워라)"라고 돌직구를 날리기도 했다. 그 외에도 YS 관련 유머를 보면 이 영남 방언과 관련된 유머가 많으며 실제 사례도 적지 않다.
- YS 시리즈 내용 中에 김영삼 대통령이 재임 시절 빌 클린턴과 만나서 빌이 "I'm Hillary's husband." 라고 하자, 김영삼이 그걸 'nice to meet you' 비스무리한 인사말로 알아듣고 "Me too." (사실은 nice to meet you too 또는 you too 라고 해야 맞은 문법) 라고 답변했다는 유머가 있다. 한때 이 일화가 사실인 것처럼 항간에 퍼졌지만, 사실 이건 일본의 전 총리 모리 요시로의 일화를 차용한 것이다. 나중에 일본 모리 요시로 총리의 일화가 구설수에 오르자, 일본 측 관계자들은 "한국의 어느 대통령의 일화가 와전된 것."이라 해명하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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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전에 칼국수를 매우 좋아했다.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칼국수 집 단골이었다. 단골 국숫집으로 알려진 모 점포에 매년 연하장을 보낼 만큼 가깝게 지냈다고 한다. 2013년 뇌졸중 증세가 악화되기 직전에는 고생 많이 했다고 따로 돈을 주고 갔는데, 이게 마지막 만남이었다고. 대통령 재직 당시에도 칼국수가 청와대 주력 메뉴로 완전히 자리잡은 바 있었다. 이 시절 청와대에 초청받은 손님들은 꼭 칼국수를 대접받았으며, 이에 대해 면을 싫어하는 사람은 초청받기를 질색했고, 또 국수의 특성상 먹어도 배가 빨리 꺼지기 때문에 YS와 함께 칼국수를 먹었던 사람들 중에는 식사가 끝나면 몰래 다른 식당에 가서 또 식사를 한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후문이 전해지기도.[27] 나중에 문재인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곰탕을 메뉴로 내놓은 부분을 이와 관련해서 개그로 연결시키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칼국수 먹고 나온 사람들은 다 배고파서 곰탕집에 모여서 2차를 했는데, 그런 일이 없도록 곰탕을 차렸습니다!" 라고 페북에 적은 것. 이러나저러나 당시를 겪은 사람들에게는 감회가 남다른 듯도 하다.
김영삼 관련 유머에도 칼국수가 단골로 등장한다. 당시 유행하던 김영삼 시리즈에는 칼국수 관련 유머가 하나씩은 들어 있었다. 임기 말에 터진 IMF 사태로 인해 인기가 바닥을 찍었을 땐 '먹으면 먹을수록 머리가 나빠지는 음식'이라는 조롱도 돈 적이 있었다. <고바우 영감> 만평에서 자꾸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면서 '4년 동안의 임상 실험 결과'라고 확인사살을 하는 장면이 나올 정도. 원래 김영삼은 서울대 출신이지만 머리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있다 보니 더더욱 그랬다. 칼국수 애호에 대해서도 '일부러 청렴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조작한 거 아니냐'라는 비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이런 이미지 구축의 의도가 없지는 않았겠지만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 것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 김영삼의 단골 칼국수 식당들마다 김영삼이 남긴 휘호나 기념사진들이 걸려 있을 정도. 다만 김영삼이 생전에 가장 즐겼던 칼국수는 멸치 육수나 바지락으로 국물을 낸 해물 칼국수가 아니라 쇠고기와 사골 육수로 끓인 형태의 안동식 칼국수, 일명 안동국시로, 시중에서 먹으려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해물 칼국수에 비해 좀 더 비싼 물건이다. 그렇다고 아주 사치스러운 음식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니고, 보통 서울 시내의 매장에서 한 그릇에 1만 원 안팎 수준으로 판매하는 편이니 일반인들도 쉽게 먹을 만한 가격대이다. 즉 일반인들이 먹는 음식 중에서 좀 비싼 물건 정도. # 따라서 결론을 내리자면 '이미지 메이킹을 할 필요가 있었는데 마침 좋은 소재가 김영삼 본인에게 있었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스케일은 다르지만, 이명박은 배고픕니다를 비롯한 각종 이명박의 먹방처럼 이해하면 될 듯 하다.
당시 청와대의 칼국수 대접에 대해 정치적인 전략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는데, 3당 합당 이전까지는 김영삼을 열렬히 지지했다고 밝힌 시사평론가 이동형은 팟캐스트 이이제이 김영삼 편에서 "김영삼은 거제시의 아버지 선단에서 잡은 멸치를 자주 선물로 보냈다. 멸치라는 게 금방 먹는 것도 아니고 두고두고 먹는 식재료이기 때문에 선물받은 사람은 먹을 때마다 YS를 생각하게 된다. 칼국수 육수 또한 멸치로 우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이유에서 해석할 수도 있다"는 의견을 낸 바 있다. 다만 YS 임기 당시 청와대에서 나왔던 칼국수는 당연히 평소 대통령이 선호하는 안동식 칼국수, 즉 '육수를 멸치로 우려내지 않은 칼국수'였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진짜 저런 의도가 있었을지는 미지수.
김영삼 대통령이 단골로 찾아 안동국시를 즐겼던 곳 중 한 곳인 성북구 성북동의 '국시집'이라는 음식점은 역사성을 인정받아 김영삼 사후 한 달 뒤인 2015년 12월에 서울특별시 미래유산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기사 그 외에도 서민 음식을 많이 좋아했다고 하며 설렁탕을 먹는 사진이 사후 포털에 올라온 적도 있었다. 신사동에 위치한 '봉희설렁탕'(새절역 인근)이라는 음식점 역시 김영삼 대통령의 단골 식당 중 한 곳이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칼국수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을 때 당시의 대학가에서는 YS를 폄하할 때 칼국수가 아니라 차라리 보름달빵을 먹으라는 대자보가 돌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올림픽 탁구 금메달리스트이자 김영삼의 정적이었던 박철언의 처제이기도 한 현정화는 인터뷰에서 "땀 흘려 뛰고 온 운동 선수들한테 칼국수가 뭡니까?"라고 까기도 했다.
- 그의 딸 김혜영(김현철의 누나)이 배우 이덕화와 국민학교 6학년때 같은 반이었다. 이덕화에게 김영삼은 친구의 아버지인 셈. 그 인연으로 이덕화는 1992년 대선 때 김영삼을 공개 지지하기도 했고 유세에도 참여했으며, 1996년 총선에 출마하기도 했지만 남궁진과 맞붙어 단 1,400여 표 차이라는 아주 근소한 차이로 낙선하였다. 이때 선거자금으로 돈 엄청 까먹었다고. 이 때의 경험이 상당히 뼈아팠는지 이후 이덕화는 단순한 지지 선언 정도를 제외하면 정계에는 관여하지 않고 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덕화는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 김영삼의 평생의 숙적 중 한 사람인 전두환 역할을 맡았다.
- 김영삼이 평소 가장 아꼈던 차남 김현철은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한다는 설이 돌았으며 본인이 2014년 하반기 재보궐 출마를 시사한 적도 있으나 성사되진 못했다. 원래 무소속이었다 한나라당 소속으로 거제시 지역구에 여러차례 출마하려 했으나, 과거 구속 전례 등 공천받기엔 워낙 여건이 좋지 않아 공천을 못 받았고 2012년에도 새누리당 소속으로 공천받지 못하자 당을 탈당했다. 당초 2016년 총선에 새정치민주연합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점쳐졌고, 이에 대해 구체적인 기사도 나왔으나, 부친의 사망 후 충격 때문에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부친의 기념사업에 전념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하지만 제19대 대통령 선거 때에 김현철은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고 그의 선거운동을 도왔다. 또한, 더불어민주당에도 입당하면서 현재는 더불어민주당 소속 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과 다르다"며 이후 탈당했다.
- 전국 각지의 관공서에 사진이 걸린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1993년 취임 당시부터 걸렸던 사진은 이전 대통령들과 마찬가지로 근엄하게 입을 굳게 닫은 사진이었으나, 1994년부터 국민들에게 친근히 다가가기 위해서 맨 위의 사진처럼 웃는 사진으로 바뀌었다.[28] 그러고나서 후임자인 김대중 대통령이 권위주의 타파라는 이유로 재외공관 등의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통령 사진을 걸지 않기로 했다.
- 상도동에 장기간 거주했다. 김영삼계를 지칭하는 상도동계라는 명칭도 여기서 비롯됐다. 1960년대에는 상도동이 영등포구에 속해 있어서 영등포구로 주민 등록이 되어 있다가 1973년, 관악구가 영등포구에서 분구되고 상도동도 관악구에 편입되면서 관악구로 주민등록이 이전되었다가 1980년, 동작구가 관악구에서 또 분구되고 상도동도 동작구로 편입된 이후 별세할 때까지 동작구로 주민등록이 되어있었다.
- 김두한 의원과 같은 시기에 정치 생활을 했고 그와 같은 당이었던 적도(자유당, 신민당) 있다.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김두한, 두 번째가 김영삼.
야인시대에서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등장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김두한이 3김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궁금해하기도 했다.[30] 위의 사진은 국회의원 야구대회 사진이고, 김영삼이 나중에 퇴임 후 2010년대에 김두한 이야기를 인터뷰에서 언급하기도 했다. 야인시대에서 나왔던 것처럼 김두한은 부하들 끼니를 챙겨주고자 김영삼을 포함한 동료 의원들에게 돈을 빌리곤 했고, 김영삼은 김두한을 '머리랑 언변은 좋은데 글은 못 읽는 사람' 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김두한 의원은 자신에게 온 편지들을 읽을 줄을 몰라 김영삼을 찾아와서 좀 읽어달라고 한 적도 많았다고 하는데, 이는 평소 김두한에게 "이렇게 작고 예쁜 손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느냐?"며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김영삼에게 호감을 느낀 김두한이 YS를 만나고자 그랬을 가능성도 있다.
- 인재를 판단하는 통찰력 및 안목이라는 혜안 면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았고, 동지이자 맞수인 김대중보다 이 방면에서는 한 수 위였다. 3김이 한국 정치 무대에서 퇴장한 뒤 한국 정치를 좌우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김영삼의 손을 잡고 정계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노무현과 이명박. 또한 이회창, 손학규, 이재오, 정의화, 김영춘, 박형준, 안희정, 최기선, 박재호[31] 등의 인재를 발굴해 내었는데, 알다시피 노무현과 이명박은 대통령까지 되어 나름대로의 치적을 남겼고, 이회창 또한 3번의 대선에서 존재감을 보였으며, 손학규 또한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당대표를 역임했다. 이재오는 이명박 정부 시절 이명박의 왼팔 역할을 했고, 정의화는 18대 국회에서 부의장을, 19대 국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했다. 안희정 또한 노무현의 측근에서 노무현을 보좌하다가 이후 충남지사가 됐으며, 민주당의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오르기도 했다. 김영춘 역시 문재인 정부에서 해수부 장관직을 수행하였다. 최기선도 인천시장을 두번이나 역임했다. 박재호는 3전 4기 끝에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또한 당시 변호사였던 문재인과 박원순의 발탁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당시엔 이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어 김영삼의 영입 제안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도 나중에 대통령과 서울시장이 되면서 정치적 거물이 되었다.
- 5공 때 가택연금을 당하던 시절 상도동 옆집에 살던 당시 국민학생인 이규희와 친해졌다. 당시 10살이던 이규희씨는 운동 중인 김영삼에게 인사하고, 김영삼이 나올 수 없으니 이규희가 놀러 가며 김영삼이 이규희를 '꼬미동지'라 부르고 자신은 '대장동지'라 하며 친해졌다. 이규희가 부모님이 해준 음식을 들고 가기도 하고, 김영삼도 아버지 김홍조 옹이 보낸 멸치를 나눠주기도 했다. 서슬퍼른 5공 경찰들도 10살 꼬마는 수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일하게 김영삼의 집을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던 사람이었기에, 이를 이용해 김영삼의 편지를 숨겨 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김영삼이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에는 이 시절 이야기들을 『꼬마동지 대장동지』라는 책으로 내고, 이 때 인세로 심장병에 걸린 어린이의 수술을 도왔다. 결혼 후 한 때 미국으로 떠났다 상도동의 그 집으로 돌아오고, 어머니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김영삼을 만나기도 하고, 김영삼 서거 후 빈소도 방문하였다.[32] 관련기사
- 상기했던 2003 일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는, 일본에 대한 감정과는 별개로, 통역 없이 일본어로 인터뷰를 진행했을 정도로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다. 하긴 김영삼이 태어날 당시의 시대를 생각해 보면 이상할 것은 없다[33] . 처음에는 약간 머뭇거리는 듯한 말투였으나, 인터뷰가 진행될 수록 예전의 감을 찾아가는지 현지인과 별 다를 것 없는 인토네이션을 보인다.
6.1. 그의 인기
집권 초[34] 반에는 하나회 숙청, 금융실명제 도입, 부정 부패 사정[35] 및 공직자 재산 공개 제도화[36] 등으로 초반 지지율이 90%를 상회했었다. 이러다보니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방송국 코미디 프로에서 뜬금없이 도우미 복장[37] 을 한 김영삼 대통령 캐릭터가 등장하기도 했다.[38]
덕분에 그를 소재로 한 유머집 YS는 못말려도 발간될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원래 이 'YS는 못말려' 시리즈는 유머 1번지 작가 출신인 장덕균이 세간에 떠돌던 유머를 모으고 그 자신도 여러 개를 창작하여 1993년 대전 엑스포에 맞추어 펴낸 것이다. 상단 사진의 2권은 장덕균이 아닌 다른 편집자가 PC통신 유머를 끌어모아 엮어낸 것. 저자의 말로는 노태우 정권 당시 노태우를 주인공으로 한 풍자 유머집을 냈다가 안기부에 끌려가서 심문을 당했다고 한다. 고문이나 밤샘 조사 같은건 없었지만, 출판사까지 압력이 들어가서 광고도 못하고 증쇄도 못했다고 한다. 그와 관련된 여러 유머 시리즈는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다시 회자되기도 했다.
김영삼을 주인공으로 한 무협소설도 나왔다. 그것도 팬픽처럼 대충 쓴 게 아니라 무협 1세대 작가 중 손꼽히는 사마달이 쓴 작품으로 전 12권 분량의 대하소설이다. 대도무문 문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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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도 심지어 PC용 게임(메인 게임은 퍼즐, 보스전은 대전 액션 게임형식...이라기엔 스트리트 파이터 2를 베낀 수준)까지 등장할 정도였으니...
물론 단순히 인기가 많았기 때문만은 아니고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언론 등을 압박하던 이전 정부들과는 다르다면서 김영삼 본인이 자신을 소재로 한 풍자작품등을 만드는 것을 허용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농담이 아니라 이전 정권까지만해도 풍자 한번 잘못하면 코렁탕을 먹을 수 있던 시대였기도 했고. 전임인 노태우 역시 자신의 풍자를 허용해서 여기저기서 노태우를 풍자하거나 하는 모습은 볼 수 있었다. (물태우라는 별명이 대놓고 쓰이는 등..) 그러나 노태우 역시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고, 당시는 민주주의 공화정 체제가 시작되긴 했지만 하나회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등... 전두환과 달리 자신을 비판했다고 잡아가서 고문하거나 하진 않았지만 노태우 정권 때도 심한 풍자를 할 경우 데려가서 심문하거나 하는 경우는 있었다고 한다. 김형곤 문서의 방귀개그 문단으로.
다만 'YS는 못말려'를 비롯하여 당시 나온 풍자작품들의 경우 김영삼을 희화화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호의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고, 김영삼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은 찾아보기 어렵다. 위 대도무문만 해도 사상 초유의 가상정치무협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왔지만 주인공 곡운성(김영삼을 모티브로 한 인물)은 부정적인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인간형이다. 이런 점은 시대적 한계로 볼 수도 있다.
IMF 사태 이후로 시간이 많이 흐르면서 평가가 많이 올라온 편이다. 민주당과 보수정당 사이에 걸친 애매한 행보때문에 과거에는 민주당계에게는 보수 대통령, 보수세력에게는 진보 대통령이라고 비난받았지만 최근에는 오히려 그때문에 민주당계와 보수정당 양쪽에서 진영논리에 얽히지 않고 평가받는 추세다.
6.2. 한자 선호파
사적으로 한자 선호자로 알려져 있어서 항상 친필 사인에도 한글 대신 한자로 사인을 하는 편이다.[40] 하도 많이 뿌려대서 '영삼시계'란 별명을 갖고 있는 청와대 기념품 시계에도 김영삼은 한자로 사인했고 이 사인이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신문을 읽을 때도 한글로 된 신문은 보지도 읽지도 않는다고 조갑제 인터뷰에서 밝혔다.[41]
또한 퇴임 후에도 한자교육은 국민들의 인식능력이 향상된다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면서, 한자 선호에 대한 애정과 자신감을 보이기도 하였고, 한자교육 강연회에도 곧잘 참석하는 행보를 보이기도 하였다. 다만 같이 3김으로 묶여있던 김대중과 김종필도 평소에 국한문혼용체로 글을 썼던것을 보면 사상이나 신념의 문제라기보다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국한문혼용체를 쓰던것이 당연시되었던 시대에 정치활동을 한데다가, 사회전반적으로도 한문학 지식을 가진 인재를 높게 평가하던 시절에 교육받고 활동했던지라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것이 타당할것이다. 즉, 세대차인 것.
6.3. 인재 발굴
1968년에는 정치학을 지망하던 서석재를 발탁하여 자신의 비서로 채용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1970년에는 서울대학교 운동권 출신 김덕룡을 발굴하여 정계에 데뷔시켰다. 1971년 유신 선포 이후에는 김동영, 최형우도 측근으로 발탁하였다. 이들은 김영삼의 최측근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김동영과 최형우의 활동은 두드러져 '좌동영 우형우'라는 별칭이 생겼다. 그의 휘하에는 수많은 반군정, 반독재 성향의 정치 지망생들이 모였다. 대표적인 현재 상도동계 현역 정치인으로는 김무성, 김영춘, 정병국 등이 있다.
1988년에는 인권 변호사로 이름이 알려지던 노무현을 발탁하여 정계에 입문시켰고, 안희정 또한 김영삼 측의 통일민주당 보좌관으로 근무했었다. 문재인도 김영삼에 의해 영입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신민주공화당과 3당 야합을 하는 과정에서, 노무현과 안희정은 김영삼과 갈라섰다. 1993년에 권좌를 차지한 뒤부터는, 이명박과 이재오, 손학규[42] 를 비롯한 여러 사람을 민주자유당에 넣었다. 홍준표, 이인제, 홍사덕처럼 굵직한 사람이 많다. 지금 이미지와 달리 홍준표도 당시에는 민주화 투사들과 친했던 검사였고, 이인제도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던 사람이었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YS키즈라고 분류되는 인재들 중 김영삼 대통령 이후 정계 및 정계 계파에 큰 영향을 끼친 인재들을 상당수 발탁해냈고, 현재도 호평을 받는 인물을 많이 발굴했다.
6.4. 각종 타이틀
- 최규하 이후 15년만에 등장한 민간인 출신 대통령
- 삼김 중에 최초의 대통령
- 최초로 전직 대통령을 2명씩이나 구속한 대통령[43]
-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9선)[44]
- 역대 최연소 국회의원(만 25세 5개월)
- 정계 입문부터 대통령 당선까지 최장기간[45]
- 최초로 대선 낙선 이후 당선된 대통령
- 최초로 동향인 영부인을 둔 대통령[46][47]
- 가장 많은 당적으로 선거에 당선된 대통령[48]
- 최초로 전임자보다 연장자인 대통령[49]
- 유일하게 임기 후에 부친상을 당한 대통령
- 유일한 서울대학교 출신 대통령
- 최초로 군내 사조직의 영향력을 실각시킨 문민 출신 대통령[50]
7. 어록
YS는 특유의 거침없는 성격과 직설적 화법으로 유명했다. 거물 정치인 치고 YS에게 비판받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언론 등에서 언급된 주요 어록을 정리. 위의 일생 파트에서 언급이 된 어록들도 존재한다.
어제 한잠도 자지 못하고 여러가지 정신적으로 피로합니다. 여기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이 김영삼이가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51]
'''바른 길, 정의에 입각한 일, 진리를 위한 길, 자유를 위하는 일이면 싸우렵니다. 싸우다가 쓰러질지언정 싸우렵니다.'''ㅡ 1969년 6월 23일 초산테러 당시 국회연설 中
'''"아무리 닭의 목을 비틀지라도 새벽이 온다고 우리는 믿었습니다!"'''
ㅡ 1979년 10월 4일, 국회의원 제명 직후
'''"아주 악재만 아니면, 정치인이 언론에 다양하게 노출되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다."'''
ㅡ 야당 총재시절, 여권에서 일부 언론을 통해 공격을 시도하자 했던 말. 여기에 그치지 않고 기자들과 자주 모임을 가지면서 이야기를 화통하게 경청, 이들 대부분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수완을 발휘한다. 훗날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이 "YS를 대통령으로 만든건 언론"(16:24초부터)이라 평했을만큼 YS의 친화력이 십분 발휘된 것.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해외로 부치면 된다.'''
ㅡ 1983년 5월 29일, 광주 민주화 운동 3주기 단식농성 후
날 감금할 수는 있어. 힘으로. 이런 식으로 힘으로 막을 수는 있어. '''그러나 내가 가려고 하는 민주주의의 길은 말이야. 내 양심은, 마음은 전두환이가 뺏지를 못해!'''영상
ㅡ 1985년 2월 8일 상도동 자택 앞에서[52]
선거혁명을 통한 민주화가 내 지론이었으나, 이 정권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젯밤과 오늘 내내 생각한 끝에 이 정권을 완전히 타도할 것을 결심했다. '''나는 박정희 정권을 타도시킨 사람이다. 기필코 전두환 노태우 정권을 타도할 것이다.'''
ㅡ 1987년 대통령 선거 직후 기자회견에서
ㅡ 3당 합당 후
오늘 탄생되는 정부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불타는 열망과 거룩한 희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ㅡ 취임사 中
우리가 먼저 달라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깨끗해져야 한다. 우리가 먼저 고통을 기꺼이 감당해야 한다. 나는 대통령인 나 자신이 솔선해야 한다는 각오 아래 오늘 나의 재산을 공개하는 바이다.
ㅡ 93년 첫 국무회의 中, 이후 공직자 재산공개 시행
'''개가 짖어도 기차는 달릴 수밖에 없다.'''[53]
ㅡ 하나회 척결시 반발에 일침을 놓으며
이 시간 이후 모든 금융거래는 실명으로만 이루어집니다.
ㅡ 금융실명제 긴급 명령 담화문 中
이에 일본에서는 '버르장머리'라는 한국어 단어 자체가 해석이 안 돼서 당황했었다는 후문이 있다.그래서 이번에 그 버르장머리를 기어이 고쳐놔야겠다.
ㅡ 1995년 한 중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 일본 정치인의 거듭된 망언을 언급하며 영상
공산당을 닮아가는 것이 김대중 정권.''' '"독재자 김대중씨가 벌인 내각제 사기극에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
"부익부 빈익빈,정경유착의 왜곡된 경제구조와 오늘의 경제위기도 박정희의 잘못된 정책에 기인한바가 크다"
ㅡ 1999년 5월 퇴임후 첫 성명서에서
나도 '''전에(제3공화국) 초산테러 등 테러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번 일에 큰 충격을 받았다.
ㅡ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테러를 당하자 문병을 간 자리에서[54]
만약 내가 하나회를 깨끗이 '''청산'''하지 않았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했을 것이다.[55]
ㅡ 2008년 우석대 초청 강연 中
"나는 경제 걱정을 했는데 부총리가 별 문제 없다고 말해서..", "김대중 전대통령에게 imf의 65%의 책임이 있다"
김대중 대통령하고 나하고 관계는 6대 국회부터 동지적인 관계에 있었고, 오랜 동지적인 관계로 있었지만, 경쟁 관계에 있었거든요. 그래서 애증이 교차하는 관계입니다.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받아들여도 되냐고 묻자) 그렇게 봐도 좋죠. 이제 그럴 때가 된 것도 아닙니까?
ㅡ 2009년 8월 10일, 병상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하며[56]
이어진 오찬에서 전두환이 와인을 찾자, "청와대에 술 먹으로 왔나?"라면서 다시 한 번 면박을 주었다고. 이에 화가 난 전두환은 일찍 자리를 떠났다고 한다. 김영삼 특유의 깡따구와 함께, 재임 중 5.18 특별법을 제정하여 전두환을 단죄하였으며 퇴임 이후에도 결코 학살과 군사독재의 수괴를 용서할 수 없다는 스탠스가 잘 드러나는 대목.전두환이는 왜 불렀노. 대통령도 아니데이. 죽어도 국립묘지도 못 간다.
ㅡ2010년 이명박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들을 청와대에 초청한 자리에서.
그건 사자도 아니다. 칠푼이다.
ㅡ2012년 상도동 자택을 예방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정치도, 대통령도 그 모두가 인간이 되고 난 뒤의 일입니다. 먼저 인간이 돼야 합니다. 2007년 발언. 출처 15.11.22 사망일 SBS 뉴스
김영삼이 어떤 인물인가를 단적으로 가장 잘 보여준 말이다.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김영삼은 전두환과 회담을 가지며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문을 박차고 나오며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로 저런 말을 했다고. 이에 대해선 유시민 작가의 '나의 한국현대사'에 나와있다.헵상은 겔렐되었다.[57]
1987년 6월 24일,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가진 후 했던 말.
'''통합과 화합'''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 사실상의 유언. 아들 김현철이 무슨 뜻이냐고 묻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6.25 당시에 만주를 폭격했으면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58]
(1996년 6월 24일 중부전선 시찰 당시 발언.)
8. 가족 관계
- 아버지 : 김홍조 (1911년 ~ 2008년)
- 어머니 : 박부련 (1907년 ~ 1960년) [59]
- 여동생 : 김호금 (1932년 ~ )
- 매제 : 김상기 (1925년 ~ 2003년)
- 여동생 : 김호아 (1934년 ~ )
- 매제 : 김영모
- 여동생 : 김호임 (1936년 ~ )
- 매제 : 김상한 (1934년 ~ )
- 여동생 : 김두선 (1938년 ~ )
- 매제 : 최영욱 (1933년 ~ )
- 여동생 : 김두아 (1940년 ~ )
- 매제 : 김창원 (1936년 ~ )
- 여동생 : 김호금 (1932년 ~ )
- 배우자 : 손명순 (1929년 ~ )
9. 대중 매체에서
한국 현대사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인물인데다가 민주화 개막 이후 첫 민간인 대통령이다보니 대중매체에서의 등장도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다만 대부분의 작품이 제1공화국이나 군사정권이 배경이라 야당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짧게 나마 대통령으로 등장한 작품은 제5공화국과[63] 국가부도의 날.
영상물에서는 길용우가 김영삼 역할을 독보적으로 많이 맡았다.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삼김시대에서 3번 김영삼 역을 맡았으며, 특유의 능란한 연기를 잘 살렸다는 평이다. 제4공화국에서는 임동진, 제5공화국에서는 김용건이 맡았다. 드라마 코리아게이트에서는 이영하가 맡았다. 무풍지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이인철이, 야인시대와 영웅시대에 나온 젊은 김영삼은 성우 정우석[64] 이 맡았다. MBC 라디오 드라마 격동 50년에서는 탁재인과 이상훈이 맡았다.[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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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용우가 연기한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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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준이 연기한 김영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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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건이 연기한 김영삼)
- 제2공화국(MBC, 1989) - 길용우
- 제3공화국(MBC, 1993) - 길용우
- 무풍지대(KBS, 1989) - 이인철[66]
- 코리아게이트(SBS, 1995) - 이영하
- 제4공화국(MBC, 1995) - 임동진 : 공교롭게도 이후 제5공화국에서는 김대중 역을 맡았다. 김대중 역할이 임팩트가 더 센 탓에 묻힌감이 있다. 원래는 길용우를 캐스팅하려고 했으나, 길용우 본인이 사양하면서 제작진이 임동진을 삼고초려해 캐스팅했다고 한다. 관련 뉴스 이후 길용우는 코리아게이트에서 미사일 기술자 이경서 역을 맡는다.
- 삼김시대(SBS, 1998) - 길용우
- 야인시대(SBS, 2002) - 정명준
- 영웅시대(MBC, 2004) - 정명준
- 제5공화국(MBC, 2005) - 김용건
- 격동 50년(MBC 라디오) - 성우 탁재인, 이상훈
- 그 사람 노무현 (팟캐스트) - 성우 오인성
- 국가부도의 날(영화) - 이호재[67]
10. 수상 내역
- 1993년 해리먼 민주주의상
- 1994년 비폭력평화상
- 1995년 UN협회 세계지도자상
- 1995년 마틴 루터 킹센터 비폭력평화상
- 1996년 제1회 루스벨트 국제장애인상
- 2011년 제3회 대한민국법률대상 입법부문
11. 선거 이력
만 26세 5개월로 역대 최연소 의원이라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선거이력이 긴 것은 라이벌 DJ도 마찬가지지만, 김대중과 달리 낙선 전력이 딱 2번 뿐이다. 선거이력의 절반이 낙선인 김대중과의 엄청난 차이. 김종필과 함께 '''9선''' 의원이란 어마어마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