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칼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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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원전 3세기, 제2차 포에니 전쟁 시기에 활동한 고대 로마의 귀족이자 장군.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종횡무진하는 동안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 반도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와 맞서 싸움으로써,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원을 저지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이다.
2. 생애
2.1. 인수브레스 전쟁
고대 로마의 명문 중 하나인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가문의 일원으로, 기원전 222년에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와 함께 집정관에 선출되어 갈리아 키살피나에 거주하던 인수브레스 부족과의 전쟁을 지휘했다. 그가 아케라이를 포위하는 동안 동료 집정관인 마르켈루스는 클라스티디움에서 인수브레스족과 교전하였고, 아케라이를 함락한 후 마르켈루스와 합류하여 메디올라니움을 점령했다.
2.2. 제2차 포에니 전쟁
이 시기의 로마는 본격적으로 북이탈리아의 갈리아 부족을 꺾고 식민지를 확장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218년에 카르타고의 한니발 바르카가 이탈리아를 침공해오자, 그나이우스는 그해의 집정관에 선출된 동생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의 부관으로 참전하였다. 형제는 마실리아에서 카르타고군의 자취를 쫓았으나, 이미 한니발이 알프스 산맥을 넘어 북이탈리아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에 동생 푸블리우스는 동료 집정관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와 함께 이탈리아를 방위하기 위해 키살피나 속주로 귀환하였고, 동시에 한니발의 본거지인 이베리아를 공략하기 위해 푸블리우스가 마실리아로 데려왔던 2만 보병과 2,200기의 기병은 그나이우스가 이끌고 이베리아로 떠나게 된다.
마실리아를 출발한 그나이우스는 그리스 동맹시인 엠포리온과 타라코를 거점으로 에브로 강 이북의 이베리아 부족들을 격파하기 시작했다. 한니발은 에브로 강 이북의 점령지를 지키기 위해 한노가 이끄는 1만의 보병과 1천의 기병을 남겼는데, 이 부대가 타라코 인근에서 벌어진 키사 전투에서 그나이우스에게 대패한 탓에 에브로 강 이북의 카르타고 세력은 섬멸되었으며, 기원전 217년에 한노를 지원하기 위해 에브로 강에 도착한 히밀코의 카르타고 해군 40척 또한 격파당하고 만다.
이 일련의 전투로 이베리아 전선의 주도권을 잡은 그나이우스는 마침내 동생 푸블리우스와 합류, 기원전 215년에 벌어진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 본대와 격돌한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형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구사했던 모루와 망치 전술로 로마군에 맞섰으나, 스키피오 형제는 전력의 우세로 하스드루발의 군대를 격퇴하는 데 성공한다.
2.3. 최후
기원전 212년, 스키피오 형제는 마침내 카르타고의 주요 광산 마을인 카스툴로를 점령한다. 그러나 지난 몇 년 동안 카르타고의 영토를 점령한 결과 이를 수비하기 위한 병력이 분산되었고, 이에 스키피오 형제는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2만의 이베리아 용병들을 고용하게 된다. 3만에 육박하는 병력이 충원되자 그나이우스와 푸블리우스는 각기 병력을 나누어 그나이우스가 하스드루발 바르카를, 푸블리우스가 카스툴로 인근에 주둔한 마고 바르카와 마시니사의 군대를 공격하기로 한다.
가장 먼저 카르타고군과 조우한 건 그나이우스의 군대였다. 하스드루발 바르카는 이베리아의 족장 인디빌리스와 만도니우스에게 하스드루발 기스코와 함께 카스툴로에 주둔한 마고의 군대를 지원토록 지시하는 한편, 진지를 요새화하면서 그나이우스 휘하에 있는 용병들을 회유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싸움 한 번 하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조건에 혹한 용병들은 대놓고 그나이우스의 군세에서 이탈하였고, 이 과정에서 그나이우스와 떨어져 마고 바르카와 그를 지원한 하스드루발 기스코의 군대를 상대하던 푸블리우스가 전사하게 된다.
푸블리우스가 전사했으므로, 카르타고군은 로마군의 마지막 사령관인 그나이우스를 격파하기 위해 하스드루발 바르카의 군세로 집결하였다. 이베리아 용병들의 탈영으로 군세가 약화된 데다가, 카르타고군의 합류로 동생 푸블리우스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직감한 그나이우스는 즉시 에브로 강 이북으로 철수하여 군세를 재정비하기로 한다. 그러나 마시니사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대에게 따라잡힌 그나이우스는 결국 일로르카라는 언덕에 자리잡은 채 카르타고의 대군과 조우하였고, 로마군은 어설프게나마 수비벽을 세우고 저항하였으나 끝내 전멸하고 만다. 그나이우스 역시 이 전투에서 전사한다.[1]
3. 평가
그는 동생 푸블리우스와 함께 한니발에 대한 카르타고의 지원을 저지함으로써,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지구전으로 일관하는 로마를 상대로 고전하는 데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침공하는 동안 그의 본거지인 이베리아를 침공함으로써 카르타고의 지원 병력이 이베리아 전선에 묶이게 했으며, 이 때문에 카르타고 본국은 물론 이베리아에서의 지원을 받지 못한 한니발은 끝내 자마 전투에서 그나이우스의 조카이자 푸블리우스의 아들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하게 된다. 만약 그나이우스가 푸블리우스와 함께 북이탈리아로 귀환하여 이베리아를 침공하지 않았다면, 이베리아와 카르타고 본국의 지원 병력이 그대로 한니발에게 주어지면서 파비우스의 지구전은 크게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을 것이다.
[1] 리비우스는 그나이우스가 푸블리우스 사후 29일째에 죽었다고 언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