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Marcus Claudius Marcellus(BC 268– BC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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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3. 창작물에서


1. 개요


'''“오오, 신[1]

이시여. 저 사람한테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나이다……. 이기면 기세가 오르고, 지면 수치라고 생각하는 저 사람한테는, 승리도 패배도 전의를 자극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까?”'''

한니발 바르카

'''로마의 칼'''[2]

당대 마르켈루스를 가르키던 별명

고대 로마 공화정의 정치가이자 장군.

2. 생애


5회에 걸쳐 집정관을 지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 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고, BC 222년에 최초로 집정관에 당선, 갈리아로 원정을 나가 인수브레스족을 정복하였다. 이때 갈리아의 부족장 비르도마루스와 일기토를 벌여 승리하였다.
전형적인 성공한 신참자 귀족으로 당대 가장 두각을 나타낸 주류 귀족인 파비우스 막시무스와 인척 관계를 맺는 등 군사 외적으로도 주류에 편입하는 데 성공하여 처신에도 능한 모습을 보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한니발에게 로마 장군들이 전패하는 동안 기원전 216년 '''놀라 공성전'''에서 두 번이나 한니발의 공격을 저지함으로써 로마 시민의 주목을 받는다. 놀라 공성전은 로마인이 한니발을 상대로 승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최초로 보여주어 분발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승리였다.
때문에 놀라 방어전 이후 마르켈루스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올라갔는지 전쟁 직후 두 차례나 연속해서 집정관에 당선된다.[3] 세 번째 집정관 때, 마르켈루스는 카푸아 인근서 그 지역에 머무는 한니발을 상대하는데, 훗날 '''로마의 검'''[4]이라고 불리는 그는 집정관에 선출된 파비우스와 함께 요충지 카실리눔을 연합 공격해서 점령했다. 그 이후엔 교대로 한 명이 한니발을 상대하면 다른 이는 삼니움족의 영토를 유린하는, 궁합이 꽤 좋은 모습을 보이며 성공적인 군사활동을 수행하였다.
그해 시라쿠사의 정세가 악화되자 원로원은 마르켈루스를 시칠리아에 보냈다. 그는 레온티노이를 공략하고, 칼리사나 성채나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기계로 방위하는 시라쿠사를 함락시켜 로마에 방대한 전리품을 안겨주었다. 마르켈루스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 로마군의 약탈 속에서도 많은 그리스 문화재와 미술품을 보호하여 로마로 옮겼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시라쿠사 함락 직후 아르키메데스를 절대 죽이거나 다치게 하지 말고 산 채로 데려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하며[5], 아르키메데스가 그를 몰라본 한 로마 병사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매우 애석해했다고 한다. 그리고 크게 분노하여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아르키메데스를 죽인 그 병사를 무자비한 채찍형에 처했다고 한다.[6][7][8] 이때 마르켈루스가 한 말은 '''"네놈이 저지른 죄는 무엄하게도 햇빛을 가린 죄다."'''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후 마르켈루스는 시칠리아의 군대를 법무관에게 넘기고 홀로 귀국하여 원로원을 만나 개선식을 요청했는데 원로원은 시칠리아 전쟁이 계속되는 점, 한니발이 있는 점, 승리한 병사들이 모두 시칠리아에서 복무하여 개선식에 동행못하는 점을 들어 한 단계 아래인 오베이션을 허용한다.
그 해에 다시 집정관에 선출된 마르켈루스는 또 시칠리아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마르켈루스의 약탈로 피해를 입은 시라쿠사의 사절단이 원로원에게 제발 그렇게 해주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하자 담당 지역을 동료와 맞바꿔 이탈리아를 담당한다.
그 후에 BC 208년 베누시아 전투에서 전사할 때까지 이탈리아 각지에서 한니발을 상대하며, 로마 장군들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거의 무조건 승리하던 상승장군 한니발의 유일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평원에서 대규모 회전으로 결판을 내는 것은 피하면서, 행군과 야영을 반복하며 이동하는 한니발 군의 뒤통수에 계속해서 소규모 난전을 걸어대는 방식으로 한니발 측에 엄청난 전사자와 부상자를 발생시켰다. 즉 파비우스가 뜸들이기형 소모전의 대가라면, 이쪽은 물어뜯기형 소모전의 달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한니발이 소규모 접전이라고 호락호락한 지휘관은 아니어서 보통 전사자 교환비는 2대1 정도로 한니발이 우세했고 전투 후 패퇴하는 것은 대개 로마군 쪽이었지만, 구성원들이 용병들인 데다 소규모 정예이고 아예 적국 한가운데서 싸우는 한니발 군은 인적 피해를 바로 복구할 수 없는데 반해 마르켈루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은 보충이 가능한 시민병이었으니 한니발 입장에서는 이겨도 손해가 막심할 뿐이었다. 게다가 한니발 본인이 계속 난전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다른 로마 장수들의 공격을 받는 점령지나 동맹지역을 제때에 지원하러 가지 못하는 문제까지 있었다. 한니발도 이를 알고 어떻게든 마르켈루스를 떨쳐버리려고 계속해서 로마군을 격퇴시켜보았지만, 마르켈루스는 아무리 격퇴당해도 악착같이 쫓아와서 싸움을 걸고 피해를 강요했기 때문에 한니발조차도 하늘을 우러르며 도대체 저 자를 어떻게 해야 되냐고 실제로 탄식했을 정도였다.
사실 파비우스의 승리도 마르켈루스가 미리 한니발의 군대에 큰 출혈을 가했기 때문에 실현할 수 있었다.
불행히도 전쟁 후반기인 기원전 208년에 정찰을 나갔다가 매복당한 누미디아 기병대 300명의 공격을 받아 전사했다고 한다. 한니발로서는 마르켈루스의 군대에 크게 고전하고 있었기에 적의 정찰병이라도 잡아보려 견제 삼아 누미디아 기병대를 매복시킨 건데, 전혀 기대도 안한 상황에서 마르켈루스를 덜컥 잡아버린 셈.
현직 집정관인 마르켈루스는 동료 집정관과 함께 장교단으로 구성된 수뇌부들과 함께 정찰을 나갔다가 기병대에 겹겹히 에워싸이고, 이어진 전투에서 전사해버린다. 한니발 본인도 이 결과를 예상못했던지 시신을 보고나서야 믿었다고 한다. 동료 집정관은 큰 부상을 입고 로마인 부대에 돌아왔으나 몇 개월 뒤 사망한다. 리비우스는 이에 대해 60대의 원숙한 나이에 접어든 장군이 혈기에 넘친 철없는 모습을 보였다는 비판적인 기록을 남긴다. 한니발의 3만군대에도 꿈쩍도 안 하던 그가 300명에 당해버렸으니 안습.
직접 정찰을 나서는 면이나, 갈리아 원정에서 적의 장군과 직접 결투를 행하는 점, 시라쿠사에서 보여준 면모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의 발목을 잡던 용맹한 면모 등을 종합해봤을 때 호전적이고 행동력 있으면서도 문화의 가치를 아는 문무양면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군사적 실력은 아마 스키피오를 제외하고 로마군의 최고 수준이라 할만한 자로 그가 지휘한 로마군은 몇 차례의 작은 손실을 겪을지언정 결정적으로 패배하는 일이 없었고 특히 공성전에서는 공격하면 점령하고 방어하면 격퇴하는 신묘한 솜씨가 있었다.
가에사타이의 왕 워리도멀스를 죽여 세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스폴리아 오피마'''[9]를 달성하기도 했다. 앞선 두 사례가 전설처럼 여겨지는 만큼 역사적인 유일한 사례였다.[10]
적의 우연한 죽음에 대한 애도인지, 숙적에 대한 예우였는지, 한니발은 그의 장례를 치루고 화장한 재가 들어있는 황금함을 로마에 돌려보냈다고. 다만 돌려보내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서 심부름 하는 병사들이 황금함은 자기가 가진다고 다투는 바람에 시신을 화장한 재가 흩어져 진짜 무덤은 없고 후세에 만든 무덤만 있다고 한다.[11] 확인된 건 아니지만 한편 마르켈루스의 반지 인장을 이용해 로마의 동맹시를 속여서 점령하려고 시도했으나 이것은 로마의 발빠른 대처로 실패했다.
이런 인물이 특이하게도 당대 로마 시민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었음은 주목할 만한데, 시민들에게 그는 너무 엄격하다, 무자비하다라는 인상을 주고 있었다. 한니발 전쟁 초기에 파비우스의 지연전 주장이 인기가 없었던 것처럼, 마르켈루스의 물어뜯기형 추격전은 당시 로마군이 야전에서 전멸하지 않고 한니발을 상대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안이었고 또 결과적으로 분명 의미있는 방식이기는 했으나 그만큼의 수많은 패퇴와 막대한 아군피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는 방식이었다. 결국 남부 이탈리아에서 한니발과 맞서는 동안 계속해서 인적 손실을 겪자 그를 탄핵시키려는 움직임이 나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시칠리아 담당 집정관이 되자 시칠리아 시민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러 로마에 방문할 정도였다.
마르켈루스가 사망했을 당시 그에 대한 로마 시민들의 평판이 점점 나빠져 마르켈루스의 업적이 봉헌된 신전이 지나치게 많다, 모두 내려야한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이 일화로 마르켈루스가 능숙한 정치가이기보다는 전형적인 군인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3. 창작물에서


유레카[12]에서 비중있게 등장한다. 만화의 배경이 시라쿠사 공방전을 다루고 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얘기. 기세등등하게 시라쿠사에 도착했다가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각종 기계장치들에 혼쭐이 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이후 주인공 스파르타 사람 다밋포스가 시라쿠사 성의 약점을 알려준 덕분에 승리를 거두는 것으로 나온다.

[1] 카르타고의 수호신 바알에게는 Lord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정황상 바알로 보인다.[2] 반면 지구전 전법으로 한니발을 상대하던 파비우스에게는 '로마의 방패'라는 별명이 붙었다.[3] 단 두 번 중 첫 번째 당선은 그라쿠스와 같이 되었는데 평민 출신 집정관이 둘인 것을 기분 나빠한 원로원이 불길한 전조를 핑계로 취소한 뒤 파비우스를 당선시켰다. 원로원은 미안했던지 역임한 것으로 인정해주었고 따라서 그것도 포함 5회 집정관 역임이 된다.[4] 장기전을 통해 한니발 군을 서서히 말려죽일 것을 주장한 파비우스의 별명이 '''로마의 방패'''였던 것과 묘한 대조이다.[5]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가 비록 적이지만 위대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6] '어라? 장군의 명령을 어긴 것 치고는 죄가 가볍네?'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이 당시 로마에서 처벌 형태로 쓰이던 채찍은 39개의 가닥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이 채찍 안에는 '''쇠 구슬, 날카로운 뼛조각, 쇳조각, 가시 등의 치명적인 흉기 등이 박혀 있었다.''' 거기다가 이 가죽을 하룻동안 물에 담가 불려놓아 무게를 무겁게 만든다. '''피부 밑의 골격 근육까지 찢어져서, 살은 리본처럼 덜렁덜렁 매달려 있게 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로마의 황제였던 네로가 이 채찍형을 받는다는 소식을 듣고 절망해서 자결'''했다.[7] 당연하지만 이런 고어성 때문에 판본에 따라서는 마르켈루스가 명령을 어긴 그 병사를 순식간에 참수하는 형태로 바뀌기도 한다.[8] 다만 이런 형태의 채찍은 십자가형 같이 죽이는 것이 확정된 죄수에게 쓰이는 것으로, 채찍질 당하고 나면 회복불능인 물건인지라 죽이는 것이 목적이 아닌 해당 병사에게는 다른 채찍을 썼을 가능성도 있다.[9] 상대군의 총지휘관을 일대일 전투로 죽이고 그 갑옷을 벗겨 카피톨리누스 언덕 유피테르 신전에 봉헌하는 것. 로마에서 군경력 중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명예로 여겨졌다.[10] 후대의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의 손자인 같은 이름의 크라수스가 바스테르나이족의 왕을 일대일 결투에서 죽여 이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었으나 당시 로마의 지배자였던 옥타비아누스가 허락하지 않았다.[11] 여담으로, 유골이 바람에 날려 사라져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한니발의 반응은 '무덤을 갖지 못하는 것도 그의 운명이겠지.'였다고 한다.[12] 기생수, 히스토리에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 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