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마 전투

 


'''제2차 포에니 전쟁 순서''' 기원전 218년 ~ 기원전 202년
바그라다스 전투기원전 203년
'''→'''
자마 전투
'''→'''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
'''자마 전투'''
라틴어: Proelium Zamense
그리스어: Μάχη της Ζάμας
'''시기'''
기원전 202년 10월 19일
'''장소'''
북아프리카 튀니지 실리아나
'''원인'''
제2차 포에니 전쟁기 후반, 로마의 대반격.
'''교전국'''
[image] '''로마 공화국'''
[image] 마실리
[image] '''카르타고 공화국'''
[image] 마사이실리
'''지휘관'''
'''[image]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image] 가이우스 라일리우스
[image] 마시니사
[image] '''한니발 바르카'''

'''병력'''
총원
35,500 명
총원
45,000 명
로마 보병
23,000 명
보병
41,000 명
로마 기병
2,500 명
카르타고 기병
2,000 명
누미디아 보병
6,000명
누미디아 기병
2,000 명
누미디아 기병
4,000명
전투코끼리
80 마리
'''피해'''
전체
4,000 ~ 5,000 명
전체
33,500 명 ~ 전멸
로마군 사망
1,500 ~ 2,500 명
사망
20,000 명
누미디아군 사망
2,500 명
포로
20,000 명
'''결과'''
로마 공화정의 승리,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1]
'''영향'''
로마, 지중해 패권 장악.
1. 소개
2. 배경
3. 양군의 배치와 전력
4. 진행
5. 후일담
6.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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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그대들의 과거의 전투를 가슴에 새기고, 그대들 자신과 그대들의 조국에 부끄러움 없이 용감히 싸우라. 그대들의 눈앞에 이것을 그려라. 만약 그대들이 적을 무찌른다면 그대들은 의심의 여지없는 아프리카의 지배자가 될 뿐만 아니라, 그대들 자신과 조국을 세계 위에 군림하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가 그렇지 않다면, 조국을 위해 용감히 쓰러져간 사람들은 영원히 영광 속에 묻히고, 살아남은 자들은 그들의 남은 인생을 비참함과 치욕 속에 보낼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그대들이 안전한 곳은 없다. 그리고 만약 카르타고군 손에 떨어진다면 그대들에게 어떠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들 너무나 잘 알 것이다. 그대들 중에 누구도 그런 운명을 맞지 않기를 나는 기도한다. 지금 운명의 여신은 우리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의 대가를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단지 생에 대한 애착으로 이 엄청난 선물을 거절한다면, 우리는 겁쟁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바보에 가까울 것이다. 이제 나가서 적과 싸우라. 우리 앞에는 승리가 아니면 죽음뿐이다. 목숨을 버릴 각오로 전투에 나가는 군대는 항상 승리한다."

전투를 앞둔 스키피오의 연설[2]

BC 202년 10월[3] 19일, 카르타고의 장군 한니발 바르카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가 격돌한 결전이자 2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짓는 전투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모두 고대를 통틀어서 최고의 명장들인 데다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벌인 포에니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중 하나로, 실제 활용된 전술 역시 명장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전투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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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한니발은 BC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로마를 벼랑 끝까지 몰아붙였으나, 전략적 목표였던 로마 연합[4]의 와해는 이루지 못한다. 게다가 로마가 정면대결을 피하고 지구전 양상으로 전략을 바꾸면서 전황은 지지부진해졌다. 본국에서의 보급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적지에 고립된 한니발은 거듭된 소모전으로 초반의 기세를 잃어가며 점점 이탈리아 남부 끝으로 몰리기 시작했다. 한편,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바르카 가문의 이베리아 거점인 카르타헤나를 점령하고 일리파에서 카르타고군을 격파하는 한편, 시칠리아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 카르타고의 본거지인 아프리카로 진격하기에 이른다.
스키피오에게 카르타고 본국이 침공 당하자 카르타고 본국은 급히 한니발을 소환했다. 한니발은 15000명의 정예부대와 함께 귀환한 뒤,[5] 최대한 카르타고와 가까운 곳에서 스키피오와 싸우려 했다. 그러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의 동맹시들을 압박해 들어가자 카르타고 의회는 한니발을 닦달하여 동맹시들을 구원하러 출동시키게 된다. 결국 한니발은 카르타고에서 5일 거리 떨어진 자마에서 스키피오군과 마주친다. 전투 전, 한니발과 스키피오는 평화협상을 시도했으나 의견차를 조율하지는 못하여 전투는 피할 수 없게 되었다.

3. 양군의 배치와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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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은 카르타고군 보병대열을 3개 대열로 정돈했다.1열은 리구리아(지금의 이탈리아 북서부 지역의 갈리아인), 켈트, 이베리아인에 마우레타니아 인까지 여러 인종으로 이루어진 용병부대로 12,000명, 2열은 리비아와 카르타고 시민병 14,000명, 3열은 한니발 자신의 최정예인 15,000명의 병력으로 구성되었다.
기병은 좌우로 나누어서 우익에는 카르타고의 시민기병 2,000명, 좌익에는 누미디아 기병 2,000명을 배치시켰다. 여기에 추가로 코끼리 80마리가 있었다고 한다.
보병 숫자는 이렇게 보면 4만 명이지만 기록들이 좀 들쑥날쑥한 관계로 대체로 36,000~50,000명으로 추산된다(그래도 이 정도면 고대 기록치고는 꽤나 정확하게 일치하는 편이다).
카르타고 1열의 리구리아인과 켈트인들은 모두 켈트식 무장과 전술에 익숙하였고, 이베리아 용병 역시 투창과 검을 사용하는 병사들로 켈트계와 본질적으로는 유사한 전술을 사용하지만 멀리서 온 용병들이다보니 로마군의 맞수로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물론 전부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현대의 역사가들은 로마군이 알프스 이남의 이탈리아 북부를 공격하는 동안 켈트족이 자주 로마군을 패배시켰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마우레타니아인은 아프리카 서부의 병사들로 전체적으로 누미디아군과 비슷한 투창을 든 경보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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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열의 카르타고 시민병과 리비아 보병은 둥근 원형 방패와 창을 이용해서 밀집 대형을 구사해서 싸우는 보병들로 그리스의 호플리테스와 유사하게 싸우는 병사들로 구성되는데, 카르타고 시민병은 로마 시민병과는 전혀 다르다. 카르타고는 피로스 전쟁 이후부터 2차 포에니 전쟁 이전까지 시민병을 그다지 동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카르타고인 사령관의 경호를 위해 따라붙는 극소수의 호위병을 제외하면 카르타고인의 실전경험이 있을 수 없었던 것. 리비아 보병들은 그래도 무장상태나 훈련에서는 나았지만 여전히 산전수전 다 겪은 로마 베테랑을 상대로는 무리가 있었다.
3열의 병사들이야말로 한니발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부대로, 리비우스에 따르면 '브루티 인', 즉 이탈리아 남부인으로 구성된 부대라고 한다. 하지만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많은 수는 처음부터 한니발을 따라왔던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이들은 무려 16년 동안 피레네를 넘고 알프스를 넘고 이탈리아를 휘젓고 다닌 괴물들이다. 종합하면 한니발의 3열은 한니발이 로마 원정을 나설때 따라나선 베테랑 용병에 남부 이탈리아 출신 병사들이 섞인 구성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기병들은 카르타고 시민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이 각각 2,000명씩이었는데, 카르타고 시민기병은 원래 하급 귀족들에게서 징집되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역시 오랫동안 제대로 된 전쟁을 치러보지 못한 기병들이었다. 누미디아 기병은 친 시팍스파 파벌이 끌고 온 병력인데, 시팍스도 누미디아의 두 왕 중 한 명이었던 만큼 나름대로 위력을 발휘했겠으나, 왕이 직접 참전한 마시니사 측 병력보다는 수적으로 열세였다.
코끼리는 80마리나 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때까지 한니발이 써왔던 코끼리 중 가장 많은 숫자라고 하지만, 원래대로라면 2년 이상 조련시켜야 하는 부대를 급조한 것이다보니 훈련이 잘 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고 성장조차 끝나지 않은 개체들이 수두룩했다고 한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생물 자체로서의 전투력도 상당한 코끼리를 80마리나 모았던 만큼 최소한의 역할은 해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카르타고의 이점은 병력의 양과 핵심 보병진의 풍부한 경험, 그리고 코끼리 부대의 존재였고 단점은 베테랑 병력을 제외한 카르타고 시민병들의 형편없는 질과, 지나치게 경험이 많은 베테랑들의 체력 문제라 할 수 있다.
로마군은 4개 군단과 이탈리아 및 기타 동맹군으로 이루어졌는데, 아피아누스에 따르면 보병 23,000명 기병 2,500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여기에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가 보병 6,000명, 기병 4,000명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따라서 로마군의 숫자는 보병 29,000명, 기병은 6,000~6,5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스키피오는 로마의 전통대로 1열은 하스타티, 2열은 프린키페스, 3열은 트리아리를 배치했다. 좌익에는 로마군 기병이, 우익에는 마시니사 휘하의 누미디아 기병이 배치되었다.
로마군의 1열의 하스타티는 주로 젊은 신병들로 구성되고 2열의 프린키페스는 보다 나이를 먹은 고참들로 구성되는데, 일반적으로 둘의 무장은 큰 차이가 없었으나 굳이 따지자면 적을 지치게 만드는 하스타티보다 지친 적을 본격적으로 격멸하는 프린키페스 쪽이 조금 더 중무장을 갖추는 경향이 있었다. 3열의 트리아리는 규정 상 숫자도 하스타티나 프린키페스보다 적은 편이고 나이도 많은 편이라 전면전에 투입되지는 않았고, 대신 노련한 경륜을 살려 전투의 향방을 결정짓는 국면에 투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은 3m에 이르는 긴 창을 들고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체력을 보충하다가 적이 끈질기게 버티거나 아예 아군이 패배했을 때 최후의 방어부대로 투입된다. 당시 로마 속담 중에 '트리아리까지 왔다'는 사실상 패배의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을 나타낼 때 쓰는 말이었다고 한다.
로마군의 기병전력인 4,000명의 누미디아 기병은 뛰어난 기병으로 이름 높았지만 자마 전투에서 주력끼리 격돌해서 이베리아 기병과 갈리아 기병을 쳐부순 쪽은 로마 기병이었고 누미디아 기병은 보조전력에 가까웠다.
로마의 이점은 기병의 양과 질, 병력들의 실전 경험이 고르게 쌓였다[6]는 점이라 할 수 있고, 단점이라면 코끼리 부대의 부재, 병력의 숫자도 더 적음, 한니발의 정예병처럼 압도적인 경험을 쌓은 병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라 할 수 있었다.[7]

4. 진행


한니발은 자신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정예부대의 활용도를 극대화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제대로 조련되지 않은 코끼리나 처음부터 열세였던 기병, 실전경험이 적은 풋내기들로 구성된 1,2열의 보병들은 어디까지나 로마군의 예봉을 꺾고 지치게 만드는 역할이었고, 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하는 역할은 오직 3열에 배치된 정예병들의 몫이었다. 한니발은 이 날 승부의 열쇠를 맡긴 정예병들을 아예 1, 2열로부터 150m 정도 후방에 배치해 쓸데없이 교전에 휘말릴 가능성조차 없애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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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가 시작되자 한니발은 80마리의 코끼리를 로마군을 향해 돌진시켰다. 한니발이 그 자신보다 뛰어난 장군이라고 평한 에피로스의 국왕 피로스는 코끼리를 좌우익에 배치해서 기병전의 예비대로 활용, 전투를 승리로 이끈 적이 있지만 한니발은 이러한 전술을 펼치지 않았다. 피로스를 그토록 높게 평가한 한니발이 그의 전술을 몰라서 따라하지 못했을 리는 없고, 코끼리들의 훈련 상태가 워낙 엉망이라 코끼리 자체의 힘과 무게를 이용해 보병진을 짓밟을 수는 있어도 기병들, 특히 투창에 능숙하고 재빠른 누미디아 기병을 상대로 체계적으로 전투할 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데르토사의 전투에서 하스드루발이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 기병에게 도전하였으나 로마 기병들은 기동력으로 코끼리를 농락하여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은 바 있었다.

따라서 코끼리들은 로마군의 보병대열을 향해 돌진했으나, 스키피오는 코끼리 부대에 대한 대처법을 준비하고 있었다. 로마군의 통상적인 전법에 따라 체스판 방식으로 부대를 배열하는 것과는 달리 선두에 경보병을 세우고, 그 뒤쪽의 중보병들은 코끼리들이 지나갈 수 있도록 길을 틔워버린 것이다. 몸이 가벼운 경보병들은 재빨리 흩어져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었고, 코끼리는 로마군 대열 사이로 빠져나가 버리거나 투창과 나팔소리에 놀라 카르타고 기병을 향해 달아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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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타고 기병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로마군 기병은 공세에 나서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했고 곧바로 추격에 나섰다. 이 때 카르타고 기병들은 전선에서 최대한 멀리 달아났는데, 이는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격파하고 되돌아오기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늘리기 위한 한니발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이제 양측 모두 보병들만 남은 상황이 되자 한니발은 카르타고 보병 중 1, 2열만 투입했다. 당연히 용병과 민병대 정도로 로마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였으므로 이들은 비교적 쉽게 밀려났는데 한니발의 정예부대가 후방에서 이들의 이탈을 막자 1, 2열 부대는 자연스럽게 정예부대의 양익에 위치하게 되었다. 한니발은 이 시점에서 최후의 부대를 투입했다.
한편, 스키피오의 하스타티들은 비록 1, 2열 부대를 성공적으로 격퇴시키긴 했지만 적을 연달아 상대하느라 지친 상태였다. 이 때 한니발의 정예가 전진해오자 스키피오는 대열을 재편성, 2, 3열의 프린키페스와 하스타티를 좌우로 길게 늘어뜨린 상태로 한니발의 보병들과 교전한다.
이 장면에 대해서는 몇 가지 해석이 존재하는데, 우선 전사가인 리델 하트는 '최대 횡진이 최대 화력을 보장한다'는 명제에 충실한 행동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부대를 펼쳐 일종의 반포위 대열을 형성하여 한니발의 정예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무력화시켰다고 평가한다. 두 번째 해석으로는 한니발의 1, 2열 부대가 재정렬되어 양익으로 펼쳐서 공격해왔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측면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열을 길게 늘렸다는 것이다.
한편 한니발 쪽에서 이런 재편성을 유도했다는 해석도 존재한다. 한니발이 부대를 넓게 펼쳐서 다가온다면 스키피오 역시 대열을 길게 늘리는 것이 최선인데, 적이 당장 150m 앞에서 전진하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최전방의 하스타티보다는 조금이라도 뒤쪽에 배치된 프린키페스와 트리아리가 측면으로 기동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하지만 이런 선택을 할 경우 이미 지칠대로 지친 하스타티가 한니발의 정예병을 정면에서 막아내야 한다. 심지어 로마군은 코끼리 부대에 대응하기 위해 평상시보다 더 많은 공간을 두고 느슨하게 배열된 상황. 그렇다면 한니발은 자신의 정예병들로 얇아진 중앙을 돌파하는것이 목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두번째 해석을 맞다고 가정해 보면 한니발은 후방에 있던 정예보병을 망치로 쓰고, 전방에 흩어져 있던 1,2열 병사들을 늘여뜨려 모루로 쓰려고 했던 것이고 그것을 스키피오에게 강요했다. 스키피오 입장에서는 전열을 늘리지 않으면 한니발군에게 포위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역시 전열을 늘렸고, 최대한 기병이 오는 시간까지 모루의 역할로써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망치인 로마기병의 후방타격이 한니발의 계획보다는 조금 더 빨리 이루어졌기 때문에 한니발의 패배로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어느 쪽 설명에 따르던 스키피오가 예비대를 좌우로 기동시킨 것은 그 상황에서 스키피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하는 듯하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의 전술인 망치와 모루 전술을 시도했다면, 한니발은 로마의 전술인 기병이 열세인 상황에서 보병전의 우세를 통한 중앙 돌파로 대응했다. 결과적으로는 한니발과 스키피오 양 측 모두 실수 없이 자신의 의도대로 최선을 다해 싸운 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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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 전투는 치열하게 진행되었는데, 지친 하스타티들도 한니발의 정예를 상대로 전열을 유지하며 분전했고 반대로 카르타고의 1, 2열 부대도 기대 이상으로 로마군의 공세를 버텼다. 그러나 한니발의 정예병이 로마군의 대열을 돌파하기 이전에 로마 기병이 카르타고 기병을 전멸시킨 뒤 전장으로 복귀해 포위망을 완성했고, 용병들은 항복하거나 도망쳤으나 한니발의 정예는 항복을 거부하며 이 전투에서 모조리 전멸했다.
로마 기병이 적시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카르타고가 이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없진 않지만, 역사에 만약은 없고 실제로도 로마 보병은 한니발의 승부수를 견뎌냈다.
카르타고 측의 전사자는 한니발의 정예 1만 5천 전원이 전사한 걸 포함해 포함해 도합 2만 명. 부상자와 포로까지 합치면 4만 명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로마군의 전사자는 1,500~2,500명이었지만 누미디아군의 전사자와 부상자까지 합치면 손실은 약 5천 명이 달하는 치열한 전투였다.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한니발은 그가 장군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했지만 단지 스키피오가 더 뛰어났을 뿐이었다고 한다. 한니발 자신도 나중에 스키피오와 만났을 때 한 말을 보면 어지간히 아쉬웠던 모양이다. 나중에 한니발이 동방으로 망명하고, 스키피오가 동방 원정을 왔을 때 둘이 만난 적이 있었다. 이 때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최고의 명장을 묻자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스가 가장 위대하고 다음이 에페이로스의 국왕 피로스이며 그 다음이 자신이라고 답했다. 이 대답을 들은 스키피오는 당신은 자마에서 나한테 패했는데 어째서 세번째 가는 장군이라고 자처하냐고 묻자 한니발은 만약 자신이 자마에서 이기기라도 했으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참고로 이 발언은 기록자 리비우스에 의하면 한니발이 스키피오를 무시한 것이 아니라 알렉산드로스보다 뛰어난 자신이 뛰어넘어야했던 '최종보스'로 스키피오를 지목한 카르타고식 화술이었다고 한다. 즉, 나는 위대한 명장이고 그 위대한 명장을 이긴 너도 명장이다는 말로, 한니발 자신과 스키피오를 동시에 칭찬하는 재미있는 화법.

5. 후일담


한니발도 포로가 될 뻔 했지만 살아남은 카르타고 기병과 보병들이 그를 구출하는 데 성공. 후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군대가 패배한 이상 한니발 혼자서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최후의 희망이었던 한니발까지 패배한 카르타고는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이 조약은 카르타고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것으로, 사실상 카르타고의 모든 군사력을 제한하고 해외 식민지를 빼앗은 것이다. 여기서 카르타고의 평화라는 말이 나왔는데, 패자에게 가혹한 평화 조약을 가리킨다.
한니발은 그 이후 카르타고의 통치자가 되는데 카르타고도 로마와 비슷하게 두 집정관이 해마다 선출되었고 한니발이 이것에 선출된 것이었다. 한니발이 자마 회전에서 졌을 때의 나이가 고작 43세였으므로 아직 완전히 활동을 접을 나이는 아니었다.
한니발은 정력적으로 일했으나 정적들에 의해 한니발이 로마에 복수하기 위해 세력을 회복할 계획을 짜고 있다는 사실이 로마에 알려졌고, 카르타고의 귀족들은 로마의 지원을 받아 한니발을 암살할 계획을 세운다. 이로 인해 한니발은 망명길에 나섰고 이후 시리아로 가서 군사고문이 되었다. 시리아 왕인 안티오코스 3세는 로마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었으므로 한니발을 환영했다. 워낙 명성이 높은 장군이라 안티오코스 3세도 반갑게 맞이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육군이 아니라 해군을 맡겼다. 카르타고 장군이 해전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겠지만 한니발은 수십 년 동안 로마를 육지에서 괴롭힌 장군이었다. 그러고 육군을 제대로 지휘해서 이겼으면 모르겠는데, 안티오코스는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처절한 삽질만 거듭하며 동방 최강의 군대를 말아먹었다.. 그렇게 셀레우코스 왕조와 로마 사이에 평화조약이 맺어지자 한니발은 다시 망명을 떠나야 했고, 이번에는 비티니아 왕의 군대를 조련시키는 역할을 맡았으나, 여기까지 들어온 로마군이 비티니아 왕에게 한니발을 넘겨줄 것을 강요하는 지경에 이르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한니발을 격파한 것으로 최고의 명예를 얻었지만, 원로원이 지나치게 위대한 개인을 견제한 때문에 말년은 마음 편하게 살지 못했고, 아예 로마를 떠나 시골에서 살다가 기원전 183년 세상을 떴다. 유언도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을 정도니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짐작이 간다.
카르타고는 계속해서 세력이 축소되던 중에 로마의 사주를 받은 누미디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군사활동을 감행했으나 이는 기회만 노리던 로마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하는 꼴이 되었고, 결국 카르타고는 제3차 포에니 전쟁으로 멸망했다.

6. 그 외


카르타고의 신성 기병대가 도착해서 한니발을 구출했다거나, 한니발을 견제한 정적들의 음모로 자마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라는 소문은 근거가 없다. 카르타고 역사에 신성 기병대, 신성 보병대가 존재했던 적은 있으나 1차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인 기원전 310년 시칠리아 섬의 친로마 도시국가들과 치른 전투에서 전멸당한 이후 이러한 카르타고의 신성 군대는 더 이상 역사에 등장하지 않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의 프롤로그가 끝나고 시작되는 오페라 <<한니발>>의 리허셜 장면이 자마 전투 하루 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주인공 막시무스가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처음 겪은 검투사 경기가 이 자마 전투를 주제로 하였다. 하지만, 막시무스가 속한 검투사 무리는 카르타고군 역할을 맡아 무기와 장구가 열악한 반면, 로마군 역할로 나온 상대측은 휘황찬란한 갑옷과 전차와 궁수까지 동원했기에 보병 vs. 궁기병의 구도로 일방적인 학살극이 연출될 예정이었으나, 막시무스는 뛰어난 지휘력을 발휘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전투가 끝난 뒤 황제 콤모두스가 '이상하군. 원래는 로마군이 이기지 않았나?'라고 경기를 주최한 귀족에게 핀잔을 주자, 귀족은 무언가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며 안절부절 못하였지만 황제는 곧 '괜찮아. 반전이 있어서 오히려 재미있군.'라며 넘어간다. 로마의 검투사 경기에는 과거의 전투를 재현하는 경기들이 있었지만, 고증을 지키기 보다는 관중들의 흥미가 우선이었고, 영화 속 경기장의 관중들도 본래 목적은 카르타고군 역할을 맡은 검투사 무리의 일방적인 학살을 관람하는 것이었다. 작중의 고증오류가 오히려 실제 고증에 충실했던 아이러니다. 그래서 오히려 검투사 무리가 역전해서 승리를 거두며 더 큰 재미를 선사하자 콤모두스도 혀를 내두르며 감탄하여서 직접 검투사들을 치하하러 경기장에 내려간다. 그리고 여기서 막시무스가 자신의 정체를 드러낸다.
역사적으로나 전쟁사 전투전술 연구에도 중요한 전투이기 때문에 많은 연구가 되었고 조지 S. 패튼의 전기영화인 패튼 대전차군단에서도 패튼 장군이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작전 중에 이 자마전투가 벌어진 역사적 지역을 부관과 시찰하며 사라진 카르타고와 한니발의 흥망성쇠를 회고하며 감상에 젖는 장면이 나온다.
[1] 스키피오에게는 '아프리카누스' 라는 칭호가 부여되었다.[2] 출처는 폴리비오스. 리델 하트의 저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서 간접 인용하였다.[3] 같은 그 기원전 202년 10월, 해하 전투에서 항우가 몰락했다. 후일 동서양 고대 제국의 모범이 된 로마 제국한나라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게 만들어 준 전투들이 같은 시기에 벌어졌다는 건 우연이지만 꽤나 흥미로운 사실이다.[4] 로마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군사동맹[5] 원래 수 만이 넘는 부대가 있었으나 상황이 급하기도 했고 전 병력을 배에 태울 수가 없어서 알프스를 넘기 이전부터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던 베테랑들만 데려왔다. 나머지 병사들이 제발 데려가 달라고 배에 들러붙는 걸 억지로 떼어내며.[6] 로마군은 한니발의 정예병들처럼 16년씩 무지막지하게 구르면서 경험을 쌓진 못했지만, 그래도 스키피오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면서 결코 적지 않은 경험을 쌓으며 단련된 부대였다.[7] 자마 전투에 참가한 로마군 중에서 최고참이라고 할 만한 칸나이 전투 패잔병들조차도 한니발의 정예에 비해 실전경험은 부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