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고시 라토
1. 개요
1970년대 폴란드 대표팀의 황금기를 이끈 윙어로 굉장한 스피드를 가지고 있었다. 득점력도 뛰어났는데 폴란드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월드컵에서 득점왕을 수상했으며 리그에서도 득점왕에 오른 바 있을 정도. 카지미에시 데이나,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 등과 함께 폴란드 역대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거론된다.
2. 클럽
1966년 자국의 스탈 미엘리츠에서 데뷔했으며 이곳에서 대부분의 커리어를 보냈다. 스탈 미엘리츠에서 2회의 리그 우승과 UEFA 컵 4강을 경험했으며 득점왕도 2차례나 수상했다. 여타 공산국가들 처럼 폴란드 역시 30세 미만의 선수들의 해외 진출을 금지했고 1980년 30세가 된 라토는 해외 진출을 물색했다. 라토의 행선지는 벨기에의 KSC 로케른이었다. 로케른에서 그는 프레벤 엘케어 라르센 등과 호흡을 맞추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로케른에서 2시즌을 뛴 라토는 1982년 멕시코의 아틀란테 FC로 이적했고 그곳에서 2시즌간 뛴 뒤 캐나다의 폴로니아 해밀턴에서 80년대 중반을 보낸 뒤 은퇴했다.
3.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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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부터 1984년까지 대표팀에서 활약했으며 100경기에 출전해 45골을 넣어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에 이은 3위를 마크하고 있다.
총 2회의 올림픽과 3회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1972 뮌헨 올림픽에서는 금메달을 수상했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을 땄다.
라토의 국가대표팀 활약 중 단연 압권은 1974년 서독 월드컵이다. 카지미에시 데이나, 얀 토마제프스키, 브워지미에시 루반스키와 같이 기라성과 같은 멤버들이 모인 폴란드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스쿼드에서도 그는 돋보였다. 그는 조별리그 첫번째 상대인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2골을 몰아치며 팀의 승리를 견인했고 이어지는 아이티전에도 2골을 넣어 팀의 7-0 대승에 일조했다.
2차 조별리그에서 그의 활약은 더욱 두드러졌다. 라토는 1,2차전 상대인 스웨덴과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모두 결승골을 기록하며 팀을 리그 2위로 이끌었고 상대 조 2위인 브라질과의 경기에서도 결승골을 작렬시켜 폴란드의 3위 수성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3] 라토는 총 7골을 기록해 월드컵 득점왕에 올랐고 대회 베스트 XI에 선정되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도 라토는 출전했는데 조별리그에서 튀니지를 상대로 결승골을 넣는 활약으로 팀을 2차 조별리그에 진출시켰다. 2차 조별리그 상대팀은 개최국인 아르헨티나를 포함해 4년전보다 강해진 브라질과 페루였다. 라토는 브라질과의 리매치에서 동점골을 기록하기도 했으나 지난 대회처럼 골을 몰아치지는 못했고 2차 조별리그 3위를 기록하며 1978년 월드컵을 끝맺었다.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도 라토는 주전 윙어로 활약했으며 페루를 상대로 골을 넣기도 했다. 폴란드는 4강전에서 이탈리아를 만나 아쉽게 패배했으나 3, 4위전에서 미셸 플라티니가 버티던 프랑스를 3-2로 꺾으며 3위로 월드컵을 마무리했다. 라토는 3번의 월드컵에서 총 10골을 넣었는데 이는 폴란드 역사상 가장 많은 기록이다.
4. 지도자
은퇴한 직후 친정팀인 스탈 미엘레츠의 감독에 부임했고 여러 팀들을 지휘했으나 큰 빛을 보지는 못했다.
5. 은퇴 이후
2001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서 당선돼 2005년까지 국회의원으로 일했다. 2008년에는 폴란드 축구협회 회장에 되어 2012년까지 직무를 수행했다.
[1] 원래는 올림픽 경기를 제외하면 92경기이지만 올림픽 경기를 포함하면 100경기이기 때문에 FIFA 센추리 클럽에 포함 된다.[2] 올림픽 출전 기록을 제외하면 92경기 42골이다.[3] 1974년 월드컵은 1차 조별리그를 통과한 8팀을 각각 4팀씩 묶어 2차 조별리그를 치루게 한 뒤 조 1위 팀이 결승전에서 맞붙는 시스템이었다. 조 2위 팀들은 3,4위전 직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