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플라티니

 


'''미셸 플라티니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프랑스'''}}}
{{{-2 20대



'''클럽'''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
마리우스 트레소르
(1976~1979)

'''미셸 플라티니
(1979~1987)'''


루이스 페르난데스
(1987~1988)

'''미셸 플라티니의 수상 이력'''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83 · 1984 · 1985
1983 · 1984 · 1985
1984 · 1985
1984 · 1985
1982-83 · 1983-84 · 1984-85



'''베스트팀'''
1982 · 1983 · 1984 · 1985
1977 · 1982 · 1983 · 1984 · 1985 · 1986




<color=#373a3c> '''1977 Ballond'or'''
수상
알란 시몬센
2위
케빈 키건
3위
'''미셸 플라티니'''
<color=#373a3c> '''1980 Ballond'or'''
수상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2위
베른트 슈스터
3위
'''미셸 플라티니'''
'''1977 Onze d'Or'''
<rowcolor=#000> '''Onze d'Or'''

'''Onze d'Argent'''

'''Onze de Bronze'''
케빈 키건

'''미셸 플라티니'''

알란 시몬센

'''Player of the Year 1983'''
수상
지쿠

2위
'''미셸 플라티니'''

3위
호베르투 파우캉

'''Player of the Year 1983'''
수상
호베르투 파우캉

2위
지쿠

3위
'''미셸 플라티니'''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1984'''

'''미셸 플라티니의 기타 정보'''


''' 프랑스의 축구행정가 '''
''' 이름 '''
'''미셸 플라티니'''
'''Michel Platini'''
''' 출생 '''
1955년 6월 21일 (69세) /
프랑스 제4공화국 그랑테스트지방 뫼르트에모젤주 죄프
''' 국적 '''
프랑스
''' 신체 '''
178cm
''' 직업 '''
축구선수 (미드필더[1] / 은퇴)
축구감독
축구행정가
''' 소속 '''
''' 선수 '''
AS 죄프 (1966~1972 / 유스)
AS 낭시 (1972~1979)
AS 생테티엔 (1979~1982)
'''유벤투스 FC (1982~1987)'''
''' 감독 '''
프랑스 대표팀 (1988~1992)
''' 기타 '''
유럽축구연맹 (2007~2016 / 회장)
''' 국가대표 '''
72경기 41골 (프랑스 / 1976~1987)
1경기 (쿠웨이트 / 1988)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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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명 '''
축구 예술가, 유럽의 왕

1. 개요
2. 선수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2.1. 선수
5.2.2. 감독
5.3. 수훈
6. 플라티니에 대한 말말말
7. 어록
8. 은퇴 이후
8.1. 몰락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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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 행정가. 2007년부터 2016년까지 유럽축구연맹(UEFA) 회장을 역임했다.
선수 시절 유벤투스에서 최전성기를 보내며 수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국가대표팀에서는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와 함께 '마법의 사각형'을 구축하여 두 차례 월드컵 4강 진출과 한 차례 유로 우승을 이뤄냈다. 또한 발롱도르를 3년 연속 수상했던 유이한 인물.[2]

2. 선수 경력



2.1. 클럽



2.1.1. 프랑스 리그


[image]
'''AS 낭시 시절'''
플라티니는 모국 프랑스의 디비지옹 1[3] 소속의 AS 낭시에서 데뷔하여, AS 낭시를 2부 리그 우승을 시키며 1부 리그로 승격시킨다. 1978년 니스와의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서는 결승골을 넣어 1:0 승리, 낭시에 우승컵을 안겨 주었으며 발롱도르도 3위에 오른다.
플라티니는 1979년에 AS 생테티엔으로 이적한다. 플라티니는 생테티엔을 이끌고 1980-81 시즌 첫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였고, 쿠프 드 프랑스 결승전에 2번이나 진출시켰으나 둘 다 준우승에 그쳤다.
이렇게 10년 간 내공을 쌓고 있던 플라티니에게 손짓한 클럽이 바로...

2.1.2. 유벤투스 FC


[image]
'''발롱도르 수상 기념 사진을 찍는 플라티니'''
세리에 A의 명문구단인 유벤투스였다. 1980년대 초반 당시 전설적인 명장 조반니 트라파토니가 지휘하던 유벤투스는 리그 내에서 언터처블 그 자체였고[4], 이탈리아의 자존심 그 자체라고까지 불렸으니 이방인 선수에 대한 텃세가 심할 것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으며 또 실제로 플라티니가 합세한 1982-83 시즌 초반에는 아니나 다를까 제법 견제가 따랐다고 한다.
그러나 플라티니는 여러 슈퍼스타들이 있었던 유벤투스에서 에이스 자리를 꿰차고, 1982-83 시즌 세리에 A유러피언컵에서는 준우승에 그쳤지만 코파 이탈리아 우승과 더불어 리그 16골로 세리에 A 득점왕을 차지했다.
당시 세리에 A에는 내로라하는 슈퍼스타들이 즐비한 리그였고, 플라티니는 SSC 나폴리디에고 마라도나, 우디네세 칼초지쿠와 경쟁을 펼쳤는데 적어도 1985년까지는 플라티니가 리그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었다.
1983-84 시즌에는 리그에서만 20골을 넣으며 득점왕에 올랐고, 스쿠데토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1984년 유러피언 슈퍼컵에서 리버풀를 2:0으로 물리치고 우승을 차지했으며, 1984-85 시즌에는 18골을 넣으며 세리에 A 득점왕 3연패에 성공했고, 비록 리그에서는 6위에 그쳤지만, 플라티니는 유러피언컵에서 7골을 넣으며 득점왕을 차지했고,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페널티 킥 결승골까지 넣으며 마침내 유벤투스의 오랜 숙원이던 빅 이어를 팀에 안겨준다. 하지만 이 경기 직전 그 유명한 '''헤이젤 참사'''가 일어났고, 플라티니가 우승을 전혀 자축하지 못했다고 잘못 알려진 것과 달리 플라티니는 그 참사에 불구하고 격하게 우승을 자축하여 비판받았다. 본인의 해명에 따르면 그 당시에는 사건이 그렇게나 심각한지 몰랐다고...
어쨌든 플라티니는 '''발롱도르 3연패(1983, 1984, 1985)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2연패(1984, 1985)[5]'''로 유럽을 넘어 전 세계를 쓸어버렸다.
발롱도르를 3회 이상 수상한 선수는 단 5명으로, 최초 요한 크루이프에 이어 '''플라티니''', 그리고 마르코 판바스턴이 있었으며 최근 리오넬 메시, 그리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이들을 추월했다. 그리고 '''발롱도르 3연속 수상'''은 메시가 나타나기 전까지 3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플라티니만의 유일한 기록이었다. 발롱도르라는 상의 파급력과 그 상징성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기록. 이 양반이 괜히 전설이 아니다.[6][7]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후보 1순위로 꼽혔으나 서독에게 패하고 우승에 실패하며 상실감이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회 종료 후 유벤투스에서 예정된 1시즌을 더 소화한 후 1987년에 불과 32세에 은퇴를 했다. 지금보다 선수 생명이 짧았던 시절이긴 하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조금 이른 감이 있다. 당시에도 전성기를 넘기면 조금 낮은 레벨의 팀이나 리그로 이적해서 뛰다가 은퇴하는 경우도 많았는데, 플라티니는 문자 그대로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을 실천했다.

2.2. 국가대표


[image]
[image]
1976년에 국가대표에 데뷔한 플라티니는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 출전해 개최국 아르헨티나 전에서 60분에 동점골을 넣으나 팀은 2:1로 패했고 그 뒤 헝가리를 3:1로 꺾었으나 프랑스는 결국 탈락하고 만다. 이후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출전하였으나 처음에는 프랑스는 생각보다 경기력이 좋지 못했고 플라티니 역시 부상때문에 큰 활약은 하지 못한다.[8] 프랑스는 쿠웨이트, 잉글랜드, 체코슬로바키아와 같은 조에 속했는데 라이벌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전반 1분만에 브라이언 롭슨에게 선제골을 내주었고 이후 전반 24분에 제라르 솔레르가 동점골을 넣었으나 다시 롭슨에게 리드골을 내주며 설상가상 후반 83분에 폴 마리너에게 쐐기골을 내주며 3:1로 패한다. 이후 쿠웨이트와의 경기에서 플라티니가 득점을 하며 4:1로 승리했고 체코슬로바키아와의 경기에선 디디에 디스의 선제골로 앞서가나 후반 84분에 안토닌 파넨카[9]에게 페널티킥으로 동점을 내줘 결국 비기고 만다. 이후 2차 조별리그에 진출하여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1:0으로 승리, 북아일랜드를 상대로 4:1로 승리하며 4강에 진출한다. 서독과의 경기에서는 전반 17분에 피에르 리트바르스키에게 선제골을 내주나 플라티니 본인이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동점으로 따라잡고 이후 연장전까지 3:3 동점 등 팽팽한 시합이었다. 그런데 시합 중 최악의 오심이 일어나는데 그 유명한 '바티스통 사건'이다. 플라티니가 환상적인 킬패스로 파트릭 바티스통에게 연결했는데 서독의 골키퍼 하랄트 슈마허가 바티스통을 가격해 바티스통을 기절시켰고[10] 정작 슈마허는 퇴장은 커녕 경고도 받지 않았다. 결국 프랑스는 승부차기끝에 5:4로 패배해 결승 진출이 좌절된다. 이후 3·4위전에서도 즈비그니에프 보니에크가 이끄는 폴란드에게 3:2로 패해 4위에 그치고 만다. 하지만 플라티니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 올스타팀에 뽑혔다.
프랑스 국가대표 미셸 플라티니가 커리어의 정점을 찍었던 시점은 역시 '''유로 1984''' 되겠다. 플라티니가 주장 완장을 걸고 참가했던, 그리고 프랑스에서 열리고 프랑스가 우승했던 유로 1984는 '''플라티니의, 플라티니에 의한, 플라티니를 위한 대회'''라는 이 단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유로 1984 당시 플라티니의 활약상'''
조별리그 1차전 덴마크전에서 결승골로 1:0 승리를 이끌었고, 2차전 벨기에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5:0 승리를 이끌었고,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유고슬라비아전에서도 해트트릭을 넣으며 3:2 역전승을 이끌고, 조1위로 4강에 진출한다.
준결승전인 포르투갈전에서 2:2로 팽팽히 맞서던 연장 후반 14분에 결승골을 내지르며 팀을 결승전에 안착시켰으며, 에밀리오 부트라게뇨가 이끄는 스페인과의 결승전에서도 불꽃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작렬, 2:0 승리를 이끌며, 조국 프랑스에 사상 최초의 메이저 대회 트로피를 안겨주었으니 이젠 마에스트로를 넘어서 국민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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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84 우승을 자축하는 플라티니'''
플라티니는 이 대회에서 '''5경기 동안 9골을 몰아쳤는데, 그것도 모든 경기에서 결승골을 기록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2게임 연속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이 2게임 연속으로 오른발, 왼발, 머리로 1골씩을 넣으며 '퍼펙트 해트트릭'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냈다. 당시 프랑스 공중파에서는 "다음번 플라티니가 보여줄 묘기는"이라는 제목의 TV 프로그램이 방영되기까지 했다니 이 무슨. 게다가 저 중 페널티 킥 골은 벨기에전 쐐기골 뿐이고 프리킥은 두 골이나 넣었다. 더더욱 대단한 것은 유로 1984에 출전한 8국가 중 9골 이상을 기록한 국가는 플라티니의 프랑스(14골)과 준결승에서 좌절한 덴마크(9골)이고 나머지 팀들은 2~4골에 그쳤다. 그리고 조국 프랑스마저 자신이 넣은 골을 제외하면 5골이다. 즉 한 선수가 웬만한 팀 하나보다 골을 많이 넣었다.
한 마디로 얄짤없는 대회 득점왕[11]이었으며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유로 단일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이다. 좀 더 부연하자면, 유로 1984 득점 2위 프랑크 아르네센이 3골, 3위 루디 푈러가 2골이었고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게르트 뮐러마르코 판바스턴도 각각 4골, 5골이 한 대회 최다 득점 기록이다.
게다가 플라티니는 유로 1984 한 대회만 출전해서 9골을 넣은 것인데 이 9골이 '''유로 통산 득점 순위에서도 1위'''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유로 대회에서 3번이나 4번 출전한 선수들도 수두룩한데 통산 득점이 9골을 넘는 선수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12] 그냥 전무후무한 기록 그 자체다.
유로 1984에서의 플라티니의 퍼포먼스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디에고 마라도나와 더불어 역대 최고였다. 팀 득점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그렇다고 골만 넣은 선수도 아니고 중원에서 패스, 플레이메이킹을 다 하면서 기록한 스탯이다. 그만큼 임팩트가 어마어마했다는 뜻. 다만 대회 특성상 월드컵유로보다 한 수 위의 대회이기 때문에 후대의 평가나 언급에서 자주 밀리는 것뿐이지...
플라티니가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넣은 스탯은 72경기 41골. 2007년 티에리 앙리가 추월하기 전까지 프랑스 국가대표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플라티니는 대회전 부상을 입고 진통제를 먹으며 뛰고 있었는데 캐나다와의 조별리그 1차전은 장피에르 파팽의 골로 1:0 승리, 이고리 벨라노프,올레흐 블로힌,리나트 다사예프소련과는 1:1로 비기고 헝가리를 3:0으로 승리하여 조별리그를 2승 1무로 순항하여 16강에 진출한다. 16강전에서는 알레산드로 알토벨리가 이끄는 이탈리아를 상대로 전반 15분에 플라티니가 선제골을 넣으며 2:0으로 가뿐히 이기고 8강전 브라질과의 경기에서 카레카에게 선제골을 내주나 플라티니가 40분에 동점골을 넣으며 결국 연장전까지 가게된다. 이때 연장전에서 프랑스에게 위기가 오는데 바로 페널티 킥을 내주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도왔는지 '킥의 달인'이라 불리는 지쿠가 페널티 킥을 실축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가게 되고, 플라티니는 비록 승부차기를 실축했으나 프랑스는 결국 4강에 진출에 성공한다. 이후 4년전 준결승 상대인 서독을 만나게 되나 프랑스는 안드레아스 브레메, 루디 푈러에게 연속골을 내주며 2:0으로 패배, 결국 설욕에 실패하고 결승 진출도 좌절되었다.[13] 하지만 3·4위전 벨기에와이 시합에선 연장전 끝에 4:2로 승리했고 3위를 차지하며 플라티니는 1982년 스페인 월드컵에 이어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도 올스타팀에 선정된다.
은퇴 직전 쿠웨이트 국왕의 요청을 받아 쿠웨이트와 소련의 친선경기에서 쿠웨이트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으로 1경기를 뛴 적이 있다.

3. 플레이 스타일



'''슈팅, 패스, 시야, 조율, 테크닉 등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역대에 손꼽힐만한 전설적인 미드필더'''로 골 기록을 보면 공격수마냥 골을 집어넣어 굉장히 공격적인 위치에서 플레이하는 선수라고 착각할 수 있으나, 오히려 2-3선 사이에 주로 위치해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을 하며 아래까지 내려와 볼 배급까지 자유자재로 했다. 특히 방향전환을 하며 아주 작은 찰나의 순간조차도 틈을 찾아서 찌르는 킥력이 플라티니의 최대 능력. 이는 판단력과 킥의 정교함과 힘이 모두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골 기록을 보면 알수있겠지만, 플라티니는 득점력마저 뛰어난 선수였다. 특히 프랑스 대표팀에서 기록한 41골은 티에리 앙리에 의해 경신될 때까지 역대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또한 찬스 포착 능력과 슈팅 능력은 당대 최고의 리그였던 세리에 A에서 미드필더로서 3연속 득점왕을 수상했다는 사실만으로 더 이상 말이 필요없을 정도. 중원에서 날카로운 패스만 찔러넣으면 공격형 미드필더라는 당시의 편견과 달리 미드필더에게 필요한 모든 능력을 완벽히 갖추고 뛰어난 프리킥, 득점력마저 겸해 과거 고전적인 플레이메이커의 틀을 벗어나 경기 자체를 지배하는 매우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그나마 단점을 찾자면, 스피드와 드리블 능력은 비교적 평범했다는 것 정도이다.
득점력에서 비유하면, '미들라이커'라는 별명을 가진 프랭크 램파드보다도 월등한 득점기록을 갖고 있다. 게다가 램파드보다 경기 조율 & 패스, 시야 부분에서 훨씬 앞선다. 램파드 역시 경기 조율이나 패스, 시야는 타 잉글랜드 박투박 선수들과 비교하면 상당히 우위에 있는 선수지만 그가 No.10으로서 강점을 보이지 못하는데에는 저런 부분에서 약간은 아쉬운 면모가 있기 때문. 실제로, 장지현은 램파드를 플레이메이커로 보지 않는다.

4. 평가


프랑스 역대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 중 한 명으로, 같은 공격형 미드필더 포지션의 지네딘 지단, 레몽 코파와 함께 자국 역대 최고의 선수로 꼽힌다. 최근 언론사에서 선정한 랭킹들에서는 지단에 조금씩 밀리는 양상이지만, 선수 시절 플라티니가 이룩했던 성과들은 상대가 지단일지라도 무시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3년 연속 발롱도르 수상, 세리에 A 3연속 득점왕''' 기록은 그가 당대에 얼마나 압도적인 선수였는지 보여주는 것들이다. 1980년대 초 지쿠, 마라도나, 루메니게, 파우캉과 함께 세계 최고의 자리를 두고 다투었으며, 1983~1985년까지는 그들 중에서도 특히 플라티니가 정점에 있었다. 세컨드 스트라이커로도 분류되는 지쿠나 마라도나와는 달리 3선까지도 자주 내려와 완벽한 플레이메이커 롤을 소화하던 선수이고, 미드필더임에도 뛰어난 득점력까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굉장히 유니크한 플레이 스타일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국제대회에서도 맹활약을 보여주었다. 월드컵 올스타팀에 2번 선정되었으며 팀을 두 번이나 월드컵 4강으로 이끌었다. 알랭 지레스, 장 티가나, 루이스 페르난데스와 플라티니가 구성한 중원은 당시 가장 많은 업적을 기록한 중원이었다.[14] 또한 플라티니는 유로 1984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그는 단 한 대회만 뛰었는데, 그게 다름아닌 1984년 대회였다. 해당 대회에서 보여주었던 플라티니의 퍼포먼스는 후대의 평가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의 1986년 월드컵 활약과 함께 '''축구 역사상 단일 대회 최고의 퍼포먼스'''로 늘 언급된다.
현역 시절에 언터쳐블한 기량을 통해 아주 높은 평가를 받았던 선수이다. 일단 25세에 불과했던 1980년, 옹즈 몽디알의 독자 투표에서 이미 레몽 코파에 이은 프랑스 역대 최고의 선수 2위로 평가받았고, 1984년에는 프랑스 풋볼이 선정한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랭킹에서 펠레, 페렌츠 푸스카스, 후안 알베르토 스키아피노에 이어 4위를 차지하며 바비 찰튼, 레몽 코파 등의 위대한 선수들을 눌렀다. 유고슬라비아의 스포츠 언론사 스포르트에서 해마다 선정한 베스트팀에는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부터 1980년까지 계속해서 포함되었으며, 역시 20대 초반이었던 1977년 '옹즈 몽디알'의 유럽 축구 베스트 11을 선정하는 독자 투표에서 90.5%의 압도적인 득표율로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로 인정받았다. 같은 프로그램의 베스트 일레븐에서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추가로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차지하여 총 6회 이름을 올렸다. 아르헨티나 잡지 '엘 그라피코'에서 선정한 1983년 세계 최고의 선수 랭킹에서도 호베르투 파우캉지쿠, 디에고 마라도나 등을 압도적으로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1979년부터 1986년까지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티보'에서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도 1984년, 1985년에 2회 수상해 마라도나와 함께 역대 최다 수상자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현역 시절 받았던 평가의 정점은 발롱도르로, '''발롱도르 역사상 최초로 3연속 수상'''의 영광을 누렸다. 당시에는 크루이프와 함께 유일한 발롱도르 3회 수상자였다. 1980년대의 모든 선수 중 가장 많은 득표수를 기록한 선수임과 동시에 가장 많은 발롱도르 포인트를 획득한 선수이기도 하다. 연도별로 발롱도르 투표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미드필더를 정리해 보면 플라티니가 7회[15]로 가장 많고, 그 뒤를 레몽 코파[16]루이스 수아레스[17], 그리고 지네딘 지단[18]이 각각 4회로 뒤를 잇고 있다
은퇴 이후에도 아주 높은 평가를 받는다. '풋볼 이탈리아'가 2011년에 발표한 1980년 이래 세리에 A 최고의 외인선수 랭킹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에 이은 2위를 차지하며 마르코 판바스턴, 호베르투 파우캉, 루드 굴리트, 지네딘 지단 등을 눌렀다. '프랑스 풋볼'이 2000년과 2004년에 발표한 프랑스 역대 최고 선수 랭킹에서 지단을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유럽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 자격으로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1998년 월드컵 직전 FIFA의 오랜 후원사 '마스터카드'에서 주관한 전문가 선정 '20세기 세계 베스트 일레븐'의 일원으로 선정되었으며 20세기 유럽 베스트 일레븐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선정되었다. IFFHS 선정 20세기 최고의 선수 랭킹[19]에서는 가린샤에우제비우를 누르고 7위[20]를 차지했다. 20세기 말에는 그동안 뛰었던 모든 선수의 랭킹을 매겨보는 활동이 언론에서 굉장히 흥했는데, 그 중 플라티니의 순위를 말하자면 브라질의 '플라카르'에서 8위, 이탈리아의 '구에린 스포르티보'에서 9위, 포르투갈의 '아 볼라'에서 10위, 프랑스의 '옹즈 몽디알'에서 5위, 스페인의 '돈 발론'에서 10위, 잉글랜드의 '월드 사커'에서 8위다. 다른 언론에서 평가한 것까지 포함하여 종합 랭킹을 선정하면 플라티니는 9위[21] 에 해당한다. 리오넬 메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등이 랭킹에 추가된 현재에도 유명 통계사이트나 언론에서 역대 축구선수 랭킹을 선정하면 대부분 10위 내외로 선정된다.
요약하면, 미셸 플라티니는 '''프랑스 축구 역사상 가장 뛰어났던 선수 중 한 명[22]이자 축구 역사상 열 손가락 안에 꼽힐 수 있는 선수'''이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5.2.1. 선수


  • 발롱도르: 1983, 1984, 1985
  • 발롱도르 드림팀 3군: 2020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82, 1986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득점왕: 1984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84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84-85
  • 세리에 A 득점왕: 1982-83, 1983-84, 1984-85
  • 인터컨티넨탈컵 맨 오브 더 매치: 1985
  • 프랑스 올해의 선수: 1976, 1977
  • 프랑스 20세기의 선수: 1999
  • FIFA 100: 2004
  • FIFA XI: 1979
  •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 1984, 1985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82, 1983, 1984, 1985
  • 옹즈도르: 1983, 1984, 1985
  • 옹즈 드 옹즈: 1977, 1982, 1983, 1984, 1985, 1986
  • 레키프 챔피언 중의 챔피언: 1977, 1984
  • 구에린 스포르티보 올해의 선수: 1984, 1985
  • 구에린도르: 1983-84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골든풋: 2004
  • IFFHS 레전드: 2016
  • 프레미오 인테르나치오날레 자친토 파케티: 2011
  • 글로브 사커 어워드 선수 경력 상: 2012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 유벤투스 역대 베스트 XI: 2017

5.2.2. 감독


  • 월드 사커 올해의 감독: 1991
  • 엘 파이스 유럽 올해의 감독: 1991

5.3. 수훈



6. 플라티니에 대한 말말말


[image]

'''나는 언제나 축구를 즐겨왔으며,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미셸과 비교받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 굉장한 영광이다.'''

지네딘 지단

'''플라티니의 뒤를 잇는 것은 나에겐 너무 무거운 짐이다. 플라티니는 한 사람밖에 없다.'''

지네딘 지단

'''나는 플라티니, 지단과 같은 선수가 되고 싶다.'''

폴 포그바


7. 어록


'''낭시는 나의 고향 클럽이고, 셍테티엔과 로리앙은 프랑스 최고의 클럽이고, 유벤투스는 세계 최고의 클럽이다.'''[23]

'''축구는 실수의 스포츠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플레이를 한다면 스코어는 영원히 0:0이다.'''[24]

'''축구는 합리적인 스포츠가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공은 둥글다.'''


8. 은퇴 이후


[image]
'''제프 블라터FIFA 회장과 함께'''
1987년 은퇴 후 1988년부터 1992년까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하였고,[25]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조직위원장[26], 이후 FIFA 기술개발위원회 의장과 프랑스 축구 협회 회장을 거쳐 현재는 상술했듯이 '''UEFA 회장'''을 역임 중이다.
스타 플레이어가 지도자로 성공하기 힘들다는 속설은 그렇다 쳐도, 행정가로 성공하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데 이 양반은 이마저도 해 냈다.[27] 은퇴 후의 커리어로 이 양반에 견줄 수 있는 사람은 프란츠 베켄바워 정도뿐. 사실상 베켄바워와 함께 제프 블라터 FIFA 회장에게 맞장 뜰 수 있는[29] 둘뿐인 축구 행정가라 할 수 있겠다.
헤이젤 참사 당시 뛰었던 선수로 2010년 벨기에 헤이젤 스타디움에서 참사 25주년 추모행사가 열렸다. 당시 선수로 뛰었던 미셀 플라티니 UEFA 회장은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남겼다.

'''"그 경기는 90분으로 끝난 게 아니다. 아직도 당시 경기는 계속되고 있다. 그날 밤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당시 사건은 우리 인생에 남아있으며, 지금도 또한 앞으로도 항상 우리 인생에 남아 있을 것이다. 당시 경기에 참가했던 선수들이든, 단순히 텔레비전으로 경기를 지켜봤던 사람들이든 그 참사를 목격한 사람들이라면 어느 누구도 기억을 지울 수 없을 것이다. 오늘 우리는 이 자리에서 39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한다. 우리 머리와 가슴은 희생자들과 희생자 가족들과 함께할 것이다."'''

지네딘 지단과 상당한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30] 지단과 비교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딱히 의미 없는 일이다. 둘이 플레이하는 위치만 비슷할 뿐, 플레이 스타일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펠레 VS 디에고 마라도나, 디에고 마라도나 VS 리오넬 메시 같은 논쟁은 시대가 달라서,[31]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 호나우두 VS 지네딘 지단 같은 논쟁은 플레이스타일과 소속된 환경이 다르므로 의미가 없는데 이건 둘 다에 해당되는 VS 놀이므로 정말 의미가 없는 일이다.
가끔 이름이 비슷하다고 아스날마티유 플라미니랑 헷갈리는 사람도 있는데, 플라티니가 축구선수로는 훨씬 위상이 높다. 다만 수정 전에는 플라티니에게 모욕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플라미니가 승부조작이나 도핑과 같은 중대한 부정행위를 저지른 선수도 아닌데 이름이 비슷해서 헷갈리는 것을 플라티니에 대한 모욕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다. 오히려 후술될 사건들로 이건 플라미니에 대한 모욕이 될 듯 하다.
2012년 4월 UEFA 유로파 리그를 없애고 UEFA 챔피언스 리그에 통합하는 게 어떠냐는 말을 하다가 엄청난 비난을 당했다. 결국 여러 가지 기획 중 하나로 제시된 것이라며 물러서야 했다.
그리고 UEFA 유로 2020 대회부터는 유럽 여러 나라에서 경기를 서로 개최할 예정으로 계획안을 내세워, 조국 프랑스가 개최하는 UEFA 유로 2016 때 프랑스를 지지하면 UEFA 유로 2020 개최를 밀어 주겠다고 약조한 터키를 배신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터키와 그리고 2020 유로 컵 경쟁 후보로 나온 아제르바이잔-조지아(공동개최 희망), 스코틀랜드-웨일스(역시 공동개최 희망)에서도 반발하고 있는 가운데 터키에선 그러지 말고 UEFA 유로 2016부터 먼저 프랑스 개최를 취소하고 분산 개최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터라 그도 난감해하고 있다. 결국 UEFA 유로 2020만 그렇게 시험적으로 열고 2024 대회부턴 종전처럼 1, 2개 나라에서만 개최한다고 뜻을 밝혔다.
그래서 이에 대해서 다른 목적 보다는 '''터키의 유로 개최를 방해하려는 목적''' 아니냐는 음모론이 나오고 있다. 요는 터키가 유럽연합 준가입국으로 가입을 희망하고 있으며, '''터키의 유럽연합 가입을 가장 앞장서서 반대하는 국가가 프랑스'''[32]라는데 있다. 결국 터키는 내부사정까지 더해져서, UEFA 유로 2020 결승과 UEFA 유로 2024 개최를 천명하고 나선 상황.
2014년 발롱도르 투표를 앞두고 "월드컵에서 부진했던 선수가 발롱도르를 수상하는 건 옳지 못하다"라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수상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호날두가 올해 발롱도르를 수상하게되면 총 3회 수상으로 플라티니와 같아진다.'''
2015년 비리가 드러나서 물러난 제프 블라터의 뒤를 이어서 후임 FIFA 회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고 있다. 외신은 이미 차기 회장감이라고 예측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다. 위에서 상술하듯이 블래터의 지지로 유럽축구연맹의 회장이 되었지만 회장이 된 이후, 유로의 참가국을 늘리고 상금을 대폭 올렸고 월드컵에 맞서는 모습을 보여서 블래터와 거리를 두고 있다. 후보로 나서는 정몽준이 플라티니는 블래터의 아들이나 다를 거 없다고 비난하면서 자신이 회장이 되면 개혁을 하겠다고 큰소리를 치지만 정작 외신의 반응은 비아냥중이다.
또한, 유럽 빅리그 팀의 팬들은 대다수가 플라티니를 아주 싫어한다. 이 사람이 적극적으로 주장해서 밀어붙인 재정적 페어플레이 룰(FFP)때문에, 빅클럽들이 이적료를 무한 투입하여 선수를 영입하는데 제동이 걸렸고, 실제로 맨체스터 시티 FC, 파리 생제르맹 FC는 FFP때문에 선수영입 금지의 징계를 먹기도 했다.
하지만 FIFA 회원국 중에서 절반에 가까운 회원국들의 지지를 확보한 상태여서 가장 유력한 차기 FIFA 회장으로 점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8.1.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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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후원자와 같이 몰락하다'''
2015년 9월 스위스 검찰이 플라티니가 제프 블라터 전 피파 회장에게 200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24억 원)을 받은 정황을 포착하면서 도덕성 문제에 큰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했다.
일단 본인은 FIFA로부터 정상적으로 받아야 할 보수를 받은 것 뿐이라며 부인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플라티니는 2001~2004년에 FIFA에서 상근직 임원으로 일했는데, 시작할 때 블래터에게 연봉 100만 스위스 프랑(한화 약 12억 3000만원)을 약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FIFA의 급여 체계 문제로 재직 당시 연간 30만 스위스 프랑(약 3억 7000만 원)만 받았고, 2011년에서야 남은 미지급 연봉을 받을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액수도 그렇고 얼핏 보면 그럴 듯 하게 들리나, 두 가지 이유로 플라티니의 주장에 의구심이 든다.
첫째, 플라티니가 FIFA에서 일했던 시기인 2001~2004년 당시 FIFA는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고, 당연히 이에 따라 재정이 부유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화로 약 25억 원 정도의 돈을, 그것도 플라티니만큼 유명한 인사에게 줄 돈을 수 년 동안이나 체불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둘째, 수 년 동안 체불된 연봉이 왜 하필 FIFA 회장 선거가 있는 2011년에 갑자기 일시불로 지급되었는지 설명되지 않는다. 따라서 이것이 불출마를 위한 대가성 자금으로 의심받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의혹들에 관해서 플라티니는 어떠한 해명도 내놓지 못하면서도 무고를 주장하며 회장 선거에 출마하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았지만, 결국 FIFA 윤리위에 의해서 제프 블라터와 함께 나란히 8년 간의 자격 정지 징계가 확정되었다. 플라티니는 CAS(국제 스포츠 중재 재판소)에 항소했지만, 기각돼서 최종적으로 8년 자격 정지가 확정되었다. 자동적으로 FIFA 회장 선거에 당선은커녕 출마할 가능성조차 희박해졌다.
이에 더하여 사상 최대 조세 스캔들인 파나마 페이퍼즈에 연루된 인물 중 하나로까지 알려져 결국 UEFA 회장직도 사퇴했고, 알렉산데르 체페린(Aleksander Čeferin, 슬로베니아)이 새로운 회장으로 취임했다.
여기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결승전브라질프랑스의 대결로 만들려고 조작했던 사실도 시인했는데# 어차피 끝장나서 자포자기한 것으로 추정된다.[33]
2019년 6월 18일,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개최 관련 뇌물을 받은 혐의로 긴급체포되며 기어이 최하점을 찍었다.# 이에 대해 FIFA는 월드컵 개최지를 바꾸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34]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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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부 컵 축구 외수판에만 등장하는 프랑스 팀의 주장이자 모델이다. 그리고 캡틴 츠바사의 프랑스 청소년 대표팀의 주장 엘 시드 피에르의 모티브이기도 하다.
프랑스에서 여러 말썽을 일으켜서 축구계에서 매장될 판이었던 에릭 칸토나의 재능을 아까워해서 "차라리 잉글랜드에 가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해 잉글랜드로 보낸 사람이다. 그렇게 잉글랜드에 진출한 에릭 칸토나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에서 알렉스 퍼거슨이라는 희대의 명장의 밑에서 포텐셜을 터트려 축구계의 전설로 군림했다.
이탈리아계 혈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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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격형 미드필더[2] 나머지 한명은 리오넬 메시.[3] 현재의 프랑스 리그 1[4] 다른 "북부 3강"이던 AC 밀란은 1980년대 후반 아리고 사키 감독 체제가 되어서야 간신히 부활했을 정도로 막장 가도를 걷고 있었고, 인테르 역시 거기서 크게 다를 것 없는 행보를 걷고 있었다.[5] 잉글랜드 주관 잡지사인 월드 사커는 올해의 선수 및 올해의 팀, 올해의 감독을 매년 발표하였는데 기존의 FIFA 올해의 선수, 발롱도르에 이은 3번째 권위 정도에 해당하는 개인상으로 여겨졌다. 이 1980년대 시기 월드사커 올해의 선수상은 나름 의미를 가지는데 비유럽권 선수에게는 주어지지 않던 발롱도르와 이 시기엔 탄생하지도 않은 FIFA 올해의 선수상과는 달리 남미권 선수에게도 자격이 주어진 상이기 때문에 진정한 올해의 선수로써 좋은 표본이 되는 상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83년 지쿠, 1986년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 사례에 해당한다.[6] 단, 이때는 비유럽인들은 발롱도르 수상 대상이 아니었다. 덕분에 캄페오나투 브라질레이루 세리 A에서 주로 선수생명을 영위한 펠레는 물론이고 SSC 나폴리에서 전성기를 구가한 마라도나마저도 후보조차 될 수가 없었다. 비유럽권 수상제한이 풀린 것은 1995년이다. 이 때문인지 펠레마라도나2000년대에 공로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별도로 받았다. 단 발롱도르 자체가 유럽 국적의 선수들만 자격 대상이어도 정말 받기 어려운 상이라는 것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렇다.[7] 2016년 발롱도르 선정하는 프랑스 풋볼은 1995년 이전의 발롱도르를 받을 수 없던 비유럽권 선수들에 대해 재평가를 했는데 펠레는 무려 7회나 선정되었고 디에고 마라도나도 2회 선정되어 괜히 축구의 신들이라 불리는게 아니라는걸 증명했다. 그리고 펠레마라도나에 비견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스페인 국적을 획득했고 2회의 발롱도르 수상경력(1957, 1959)도 있긴한데, 이 경우에는 선수 경력의 거의 1/3 동안 '''발롱도르라는 상 자체가 없었다.''' 발롱도르의 제정은 1956년인데, 남미시절은 제외하더라도 레알 마드리드의 리그 우승과 디 스테파노의 득점왕 행진은 1954년, 레알 마드리드의 유러피언컵 5연패는 1955년부터 있었다. 여기에 1956년 발롱도르 첫 수상은 공로상 개념으로 40세 스탠리 매튜스에게 넘어가는 상황까지 있었다. 물론 전설 스탠리 매튜스 역시 자신의 커리어 태반 동안 발롱도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상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다.[8] 이때 팀의 에이스는 플라티니가 아니라 알랭 지레스였다.[9] 그 유명한 파넨카 킥의 창시자이다.[10] 바티스통은 슈마허에게 얻어맞아서 아예 턱뼈가 부서졌다. 결국 경기 도중 교체되어 병원으로 긴급 후송되었고 대수술을 받아야만 했다.[11] 유로 MVP는 공식직으로 1996년 대회부터 수여했다.[12] 2016년 7월 7일(한국시간) 포르투갈크리스티아누 호날두웨일스와의 유로 2016 4강전에서 1골을 넣으며 플라티니의 9골과 타이를 이뤘다. 하지만 호날두는 유로 2004부터 유로 2016까지 네 번의 유로 대회를 거치며 누적된 기록이다.[13] 8강전에서 승부차기까지 갔기 때문에 체력적인 열세 때문에 졌다고 서술되어 있었지만 8강에서 연장전에 승부차기까지 치룬 건 서독도 마찬가지였다.[14] 유로에서도 우승하고 월드컵 4강도 두 번이나 갔으니 이루어낸 업적만 보면 당대 최고지만 일반적인 평가에서 당대 최고의 중원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동시대의 브라질에는 지쿠를 필두로 하여 호베르투 파우캉, 소크라치스, 토니뉴 세레주로 구성된 '황금의 사중주'가 있었기 때문이다.[15] 1976, 1977, 1979, 1983, 1984, 1985, 1986[16] 1956, 1957, 1958, 1959[17] 1960, 1961, 1964, 1965[18] 1997, 1998, 2002, 2006[19] 2000년 이전에 은퇴한 선수만 포함해서 투표를 진행했다.[20] 1위 펠레, 2위 크루이프, 3위 베켄바워, 4위 디 스테파노, 5위 마라도나, 6위 푸스카스[21] 당시 세계 언론에서 발표한 랭킹을 종합해서 순위를 매겨보면 1위는 펠레, 2위는 디에고 마라도나, 3위는 요한 크루이프, 공동 4위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프란츠 베켄바워, 6위는 페렌츠 푸스카스, 7위는 가린샤, 8위는 에우제비우, 9위는 미셸 플라티니, 10위는 바비 찰튼이다.[22] 현재는 지네딘 지단과 더불어 프랑스 역사상 가장 뛰어난 축구 선수로 꼽힌다. 두 선수 모두 대부분의 경우 우열을 가리기 힘든 위대하면서도 뛰어난 선수로 평가받는다.[23] 1987년 브레시아 칼치오의 세리에 A 최종전에서.[24] 간단히 말해 기술의 스포츠라는 의미이다. 모든 선수가 완벽하게 해도 격차가 나게되는 육상 등의 단련의 스포츠, 포커 등의 판단력의 스포츠와 그 점이 다르다.[25] UEFA 유로 1992 예선에서 스페인, 체코와 같은 조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8전 8승으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정작 본선에서는 잉글랜드와 비기고, 덴마크 돌풍의 희생양이 되면서 해임된다.[26] 이 때 프랑스와 브라질이 결승에서 만나도록 대진표를 조작했다고 후일 밝혔다. 조작한 이유는 두 팀이 결승에서 만나야 흥행이 된다고 해서 했다고.[27] 다만 알아둘 점은 그를 블라터가 지지했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전직 UEFA 회장인 렌나르트 요한손은 反 블래터파 수장으로 블래터가 늘 눈엣가시처럼 여겼기에 그를 축출하고자 고른 게 바로 플라티니이다. 선거 결과 아슬아슬하게 이겨 회장이 되었다.[28] 사실 회장이긴 해도 UEFA에서도 FIFA가 관여하는 것에 불만을 가지는 게 많아서 다음 회장 연임을 노리자면 블라터에게 거슬릴 수 있음을 어필해야 했다. 무엇보다 회장직을 겨우 2% 수준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이겼기에 아무리 블라터가 그를 지지하네 뭐네 해도 반블라터, 반피파 세력이 상당한 UEFA에서는 그도 눈치 좀 봐야 한다.[29] 다만 UEFA 회장 선거에 블라터가 지지한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에 베켄바워와 달리 맞장 뜰 처지가 못된다. 하지만 그래도 UEFAFIFA와 별개라면서 UEFA 유로 2016 대회부터 참가국을 24개로 늘리는 것을 강력하게 지지하여[28] 블라터가 불쾌하게 여기기도 했다. FIFA 공인 대회가 아닌 대회에서는 처음이며 유로 대회는 피파와 일절 무관하고 우승상금 규모로는 월드컵에 뒤쳐지지 않는 유일한 국제 축구 대회이기 때문이다.[30] 프랑스 출신 레전드 플레이 메이커, 유벤투스 FC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진출,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등.[31] 마리오 켐페스가 메시와 마라도나를 비교하는 질문에 이런 이유로 의미가 없다고 대답했다.[32] 축구와 전혀 다르지만 경제, 정치적으로 프랑스가 늘 터키에 대하여 반대한다.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서도 터키를 맹렬히 비난하는 게 프랑스이니 말다했지만, 프랑스도 알제리 전쟁 당시 벌여놓은 이에 못지않아 터키랑 그리 사이좋지 않은 알제리도 프랑스가 터키를 아르메니아 학살로 비난하면 프랑스를 비난하고 터키는 좋아라 알제리를 편들어준다.[33]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것은 성공이었다.[34] 사실 카타르가 더운 날씨로 월드컵 개최지로서의 적합성에 대해서 예전부터 논란이 있었는데, 이에 카타르 왕실은 ''''전 경기장에 에어컨을 빵빵하게 틀면 된다.''''로 정면 대응하며 오일 머니로 무장한 산유국의 위엄을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