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 뮌헨 올림픽

 


19회

20회

21회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1972 뮌헨 올림픽'''
1976 몬트리올 올림픽
''' 1972 뮌헨 올림픽 '''
제20회 올림픽 경기대회
1972 뮌헨 올림픽 경기대회
Olympische Sommerspiele 1972
Games of the XX Olympiad Munich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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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회기간 '''
1972년 8월 26일 ~ 1972년 9월 11일
''' 개최국 '''
독일 연방 공화국 뮌헨
''' 마스코트 '''
발디(Waldi)
''' 참가국 '''
121개국
''' 참가선수 '''
7,134명
(남자: 6,075명, 여자: 1,059명)
''' 경기종목 '''
21개 종목(198개 세부 종목)
''' 개회선언 '''
구스타프 하이네만
서독 대통령
''' 선수 선서 '''
하이디 슐러
''' 심판 선서 '''
하인츠 폴라이
''' 성화 점화 '''
귄터 찬
''' 개·폐회식장'''
올림피아슈타디온 뮌헨
1. 개요
2. 대회
3. 특징
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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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에서 두 번째로 열린 20회 하계 올림픽.

2. 대회


1972년 하계올림픽 투표 결과
국가
도시
1차
2차
'''독일'''
'''뮌헨'''
'''29'''
'''31'''
스페인
마드리드
16
16
캐나다
몬트리올
6
13
미국
디트로이트
6
-
(1972년 당시에는 분단으로 인하여 서독이긴 하지만) 독일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올림픽이었던지라[1] 독일은 이 대회를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와 새로운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전번의 대회였던 1936 베를린 올림픽이 히틀러의 나치 체제선전의 장이 되어버린 흑역사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 더더욱 의식을 했다. 대회의 공식 모토는 "행복한 경기"이며, 엠블럼 "밝은 태양"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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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스훈트를 모티브로 만든 발디(Waldi)라는 마스코트가 역대 하계올림픽 최초로 채택되었다.[2]
심판의 올림픽 선서가 최초로 실시되었으며, 핸드볼과 양궁이 다시 정식종목으로 부활하였으며, 배드민턴과 수상스키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경기이다.
그리고 미국의 '마크 스피츠'의 경우는 수영에서 7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올림픽에서만 총 9개의 메달을 따는 진기를 세우게 된다. 이 기록은 마이클 펠프스가 36년만인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8관왕에 오르면서 깨기 전까지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또한 체조에서는 16세 소녀 올가 코르부트가 4관왕에 오르며 '민스크의 참새'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위의 설명들이 전부 빛을 잃게 된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고 마는데 그 유명한 '''뮌헨 올림픽 참사'''다.

3. 특징


남북 대결의 시작. 국호 문제 때문에 이 올림픽부터 공식 참가한 북한[3]은 사격 소구경 복사종목에서 리호준이 세계 신기록까지 세우며 첫 금메달을 따냈다.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인 탈북자 강명도에 따르면, 올림픽 후 귀국하자 사격을 취미로 즐기는 김정일의 직속 호위군관이 되었다고 한다. 수상 소감이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다."고 해서 파문을 일으키키도 했다.[4]
북한은 첫 출전에서 금메달과 은메달 각각 한 개, 동메달 세 개를 따면서 종합 22위를 기록, 은메달 한 개를 따는데 그쳐 종합 33위[5]에 머물렀던 한국을 압도했다. 그나마 이 은메달도 일본에서 유도를 배웠던 재일교포 오승립의 것이라서, 순수하게 한국에서 육성된 선수들은 메달을 전혀 따지 못했다. 특히 북한이 사격에서 첫 금메달을 따자, 당시 대한사격협회 회장이자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는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빈 후에 당시 대기업들의 협조를 받아 태릉에 사격장을 지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국제 규격 사격장인 태릉사격장이다.
복싱 라이트플라이급에서 은메달을 획득한 김우길 선수는 한국의 이석운 선수를 상대로 2라운드에서 '''4-1'''로 완승했다. 그리고 동메달을 딴 레슬링선수 김광형도 김영준 선수가 경기에서 진 터키 선수를 꺾고 동메달을 땄다. 김용익 선수가 동메달을 딴 남자 유도 63kg에선 은메달이 비어 있는데 그 이유는 원래 은메달 수상자인 몽골 선수 바크베인 부야다가 경기가 끝난지 몇 일 후 도핑 테스트에서 ''' 유도 선수로서는 최초로아나볼릭 스테로이드 양성 반응'''이 나와 메달이 압수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배구에서는 3,4위전에서 한국과 북한이 동메달을 놓고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북한의 3-0 완승. 북한의 주포인 김증복[6]에게 털리면서 패한 것이었다. 패배를 믿을 수 없던 한국 선수단은 '''김증복이 남자라고 주장하면서 성 검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내 신문 기사를 보면 요구해서 재검사를 했다는 기록만 나와있고 그 뒤 기록이 없는데, 북한의 메달이 박탈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한 마디로 진 것을 인정할 수 없던 멘붕의 현장(...) 어쨌든 이 주장으로 패배의 책임은 모면했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게 되어서 지금은 예전에 그런 해프닝이 있었지 정도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어쨌든 동계 올림픽의 첫 메달도 그렇고[7], 하계 올림픽도 북한이 먼저 금메달을 따자[8]한국 정부는 작심하고 엘리트 스포츠를 키우기 시작한다. 물론 한국이 작심하고 키우기 시작한 뒤로는 한국이 북한에게 메달에서 뒤진 적이 없다. 어차피 스포츠 육성도 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대한민국 하계올림픽 성적


■ 1972년 20회 뮌헨 올림픽 (1972 Summer Munich Olympics)
  • 기간 : 8월 26일~9월 11일
  • 규모 : 122개국 7173(여)명 참가. 
  • 종목 :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펜싱, 하키, 핸드볼
  • ▶대한민국 참가 현황 : 임원 22명, 선수 46명 참가.(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수영, 역도, 유도, 육상) - 은메달 1개 획득. 종합순위 33위.
  • 은메달 : 유도(미들급) 오승립
대한민국은 종합 33위의 성적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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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뮌헨 올림픽 참사 이외에도 막장끼가 있는 사건이 두어개 생겼는데, 하나는 '마라톤 선수 흉내사건'이 있으며, 또 하나는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결승전. 전자의 사건은 마라톤 경기중에 한 관중이 러닝 셔츠와 팬티만 입고 마라톤 선수처럼 뛰는 흉내를 낸 사건. 물론 관중들은 처음에 속았다가 나중에 박장대소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남자농구 결승전이 가관인데, 자세한 내용은 1972 뮌헨 올림픽/농구 결승전 문서 참조.
또한 남자 필드 하키 결승전에서 서독에게 1대 0으로 아깝게 패해 은메달에 그친 파키스탄 팀 선수들이 국제 하키 연맹 회장에게 물을 끼얹고(...) 자신들이 받은 은메달을 발로 짓밟았는데 이로 인해 이 선수들은 올림픽 참가 자격을 영구적으로 박탈당하는 징계를 먹었다.
그리스를 제외하고 가장 먼저 입장한 국가는 이집트(Ägypten)였고 개최국 서독을 제외하고 가장 마지막에 입장한 국가는 베트남 공화국(남베트남)[9]이었는데, 이 대회가 베트남 공화국이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었다. 이후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하게 된다.
대만이 중화민국(Republic of China) 국호로 참가한 마지막 올림픽이기도 하다. 1976년 몬트리올 대회는 캐나다 정부가 반드시 대만 국호로 참가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중화민국 정부는 이를 받아들일수 없어 대회 자체를 불참. 1980년은 당연히 공산권 대회라서 불참. 끝에 1984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중화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는 이름으로 복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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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서울 올림픽에 북한이 대회 1년 전 훼방까지 놓으면서 불참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이 대회에서는 동독 선수단이 DDR이라는 이름으로 국기까지 들고 많은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개막식장에 입장했다. 그리고 동독은 이 대회에서 서독보다 더 많은 금메달을 따면서 3위를 기록했고, 4년 후에는 아예 미국까지 압도하고 2위를 차지했다.
대회의 막장성과는 별개로 올림픽 주경기장의 평은 현재까지도 상당히 좋은 편이다. 강철 케이블에 유리덮개를 매단 구조인데, 시공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꼼수성 설계였지만 지금도 기술과 미관 면에서 모두 최고 수준의 올림픽 경기장으로 꼽히는 건물이다. 당장 현대의 시점으로 봐도 전혀 촌스럽지가 않은데 이 건물이 지어진게 1970년대임을 감안해보면 더더욱 대단할것이다. 아무튼 독일의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한 수준 높은 대회였던 셈. 올림픽 이후 분데스리가 바이에른 뮌헨TSV 1860 뮌헨의 홈구장으로 사용됐고, 2005년 알리안츠 아레나가 개장되기 전까지 1974년 서독 월드컵 결승전, 유로 1988 결승전 등 굵직굵직한 경기들도 열리곤 했다. 현재는 이 구장을 사용하는 프로팀은 없지만, 그래도 UEFA가 선정한 5성급 경기장으로 지정돼 있다.
BMW벨트 바로 옆에 올림픽공원이 있고 근처에 U반이 있어 관광하기 편하다. 빙상경기장등 몇몇 건물을 제외하면 대다수의 건물들이 비슷한 양식으로 된걸 볼 수 있다. 빙상경기장은 레드불 뮌헨 아이스하키팀이 사용하지만 경기가 없는날엔 시민들을 위한 스케이트장으로 개방한다. 수영장도 시민들에게 개방되어 있는데 올림픽때 쓰던 시설을 써서 그런지 다이빙대가 있는둥 시설이 좋은편이다. 맞은편에 실내체육관은 콘서트 장소로 널리 이용되는 모양.
그 외에도 수족관도 있고 베를린 TV 타워마냥 타워가 있다. 다만 체제선전용으로 만든 건물이 아니라 그런지 높이가 상대적으로 낮다. 공원 자체의 경치도 좋은편이라 여가를 즐기러 온 시민들이 정말 많다.
주말엔 주차장의 일부가 벼룩시장으로 변신하는데 발품을 잘 팔아보면 가격대비해서 쓸만한 물건이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BMW벨트 뒷편으로 세련된 아파트 단지가 있는데 그게 선수촌이다. 올림픽공원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쇼핑몰이 하나 있는데 그게 올림픽 당시 프레스센터로 쓰던 건물이다. 유감스럽게도 뮌헨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다.
뮌헨 올림픽 기념 문화행사를 위해 작곡가 윤이상이 오페라 '심청'을 작곡해 초연했다.
2차 대전 이후에 열린 올림픽 중 개최 당시 기준으로 UN 비회원국에서 열린 몇 안 되는 하계 올림픽이다. 나머지는 1952 헬싱키 올림픽1988 서울 올림픽.[10]
뮌헨 올림픽 실내경기장 부지에는 1998년 뮌헨 전시장이 들어섰다.

[1] 참고로 독일은 1916년 독일 제국 시절에 베를린이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되기도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는 바람에 올림픽 자체가 무산되었다.[2] 그 전에 1968 그르노블 동계올림픽 때 비공식적으로 만들어진 슈스가 동,하계 통틀어 최초의 올림픽 마스코트다. 발디는 최초의 하계 올림픽 마스코트다.[3] 하계 대회만 놓고 보았을 때는 처음이지만 동계는 1964년 대회에 첫 참가.[4] 북한 측 자료에는 "저는 과녁을 조선인민의 철천지 원쑤인 미국놈의 털가슴으로 보고 쏘았습니다." 라고 소개돼있다. 사실 살벌한 내용도 문제지만 이는 올림픽 정신에 위배되는 말이다. 이는 국내 뿐만 아니라 외신에서도 비판받았다. 이후 수상소감이 문제가 되자 북한사격연맹 임원이 IOC 부위원장 소련인 스미르노프와 각국 사격연맹 임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하여 미국사격연맹의 항의문 취소에 찬성하게 만들었고 예정 시간보다 5시간 늦게 금메달 시상식이 열렸다.[5] 이 때 한국은 아르헨티나, 레바논, 멕시코, 몽골, 파키스탄, 튀니지, 터키와 함께 공동 33위를 기록했다.[6] 기사에 따라서는 김정복으로 표기하는 경우도 있다. 발음이 비슷하고, 기자조차 북한 선수단과 접촉하기 힘들었던 시절이라서 그런 듯 보인다.[7] 북한은 1964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에서 스피드스케이팅 여자 3000m에 출전한 한필화가 은메달을 따서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 가서야 메달을 딴 한국보다 28년이나 먼저 동계올림픽 메달을 땄다. 또한 북한의 이 메달은 유럽과 북미를 제외한 국가에서 출전한 선수가 따낸 두번째 동계올림픽 메달이기도 하다.(첫번째는 1956 코르티나담페초 동계올림픽에서 일본의 알파인 스키 선수 이가야 치하루가 획득한 은메달.)이 이후로 북한은 28년동안 한동한 메달을 획득하지 못하다가, 92년 동계 올림픽에서 오랜만에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동메달 하나 달랑 추가하고 26년이 지난, 현재까지 메달을 획득하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한국은 92년 첫 메달획득 이후로, 종합순위 10위권 안에도 몇차례 들어가면서 동계올림픽 기준으로 북미, 유럽을 제외한 지역에서 금메달 포함, 가장 많은 메달을 획득한 국가다. [8] FIFA 월드컵 본선 첫 승과 2라운드 진출도 북한이 대한민국보다 더 빠르고(북한 1966년, 대한민국 2002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서도 북한이 더 메달 획득이 빨랐고(그것도 금메달이다. 1999년 여자 마라톤 정성옥), 대한민국은 2019년에 2011년 대구 육상 선수권 대회에서 남자 경보 20km에서 4위를 차지했던 김현섭이 당시 대회 동메달리스트의 도핑 적발로 인해 뒤늦게 동메달로 승격하면서 간신히 사상 첫 육상선수권대회 메달을 얻었다.[9] 북베트남(월맹)은 올림픽에 참여한 적 없었다.[10] 핀란드는 1955년 12월 14일에, 독일(당시 서독. 동독도 같은 날에 가입했다.)은 1973년 9월 18일에, 대한민국과 북한은 1991년 9월 17일에 각각 UN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