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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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전형적인 극의 형태
다과극(多果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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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천화극. 해당 유물은 월아가 하나만 있다.
월극(鉞克)
그 외에도 여러 형태의 극이 있다.
1. 개요
2. 역사


1. 개요


戟. 중국의 고대 폴암으로 긴 손잡이 끝에 단검이 붙어있고 그보다 조금 밑부분에 보조날이 달린 무기.

2. 역사


초기에는 서주 이후 폴암으로 개량된 과(무기)를 붙인 형태였다.
춘추전국시대까지는 단순히 하나의 자루에 과와 모의 날을 동시에 결합하여 만든 형태였으나, 양한대 이후로는 두 부분을 일체화시켜 만든 날을 자루에 붙인 형상이 일반적이 되었다. 자전 등에는 '가지창'이라고 하여 해괴한 도해를 소개하고 있으나, 실제의 극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다. 삼국지연의여포 역시 극 계통의 무기인 방천화극을 사용한 걸로 묘사되지만 실제로는 전형적인 초기형태의 극을 사용했고 를 사용한 기록도 있다. 창의 사용이 일반화 되고 월도가 등장한 이후로는, 제식병기의 자리에서 물러나 의례용으로 사용되고 간간이 개인 무장으로 사용되었다.
서로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부분을 조합하여 만들었다는 점에서 서양의 할버드와 유사한 점이 많다. 다만 나온 시대의 차이는 매우 큰 편.
삼국시대엔 극을 대신하여 의 우세가 나타났고, 유목민 방식을 따르는 마상궁술이 확립되었으며 날이 하나 뿐인 도(刀)가 날이 두 개인 검(劍)을 거진 완벽히 대체한 것(장창이든 단창이든, 모든 창이든, 파이크든 사리사든, 나가에야리든 어차피 넓은 의미에서는 전부 창이듯이 넓은 의미에서의 검이 아닌 좁은 의미에서의 검의 분류이다. 일본에서도 일본도로 싸우는 방법을 검술이라 표현했을 정도로 도와 검을 하나의 무기로 대했으며 한자로도 칼 도와 칼 검으로 뜻을 풀이해보면 다를 게 없다.)으로, 이 세 가지 변화는 삼국 시대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시작되었는데, 아직 극은 광범위하게 현역으로 사용되었고, 중국인 마상궁수가 모는 궁기병은 삼국 시대 이전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중국 군대의 한 축으로 활약 중이었다. 즉, 삼국 시대가 진행되는 와중 극의 쇠퇴가 심화되고, 중국인 마상궁수가 유목민 마상궁수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사학자 린보우안은 극(戟)을 대신해 창 사용의 증가가 나타난 현상을, 유목민 기병의 돌격을 막아내기 위한 일환이라 설명한다. 보병을 타격하기 위해, 기병은 말 등에 얹고 다니던 매우 긴 "마상창"을 활용했다. 이에 보병 또한 훨씬 긴 창을 도입해 타격범위를 늘리는 방식으로 대항했다.
다만 삼국시대에 활약한 여러 무장들의 손을 통해, 여러가지 형태와 크기의 극이 여전히 사용되었다. 위나라의 장수 장료는 극 하나를 꼬아쥐고 적 대열 속으로 돌진했고, "수십에 달하는 적을 참살하고 장수 2명의 목을 베었다." 장료가 활용한 극은 표준형 극으로 추정된다. 쌍극 또한 상당히 독특한 무기다. 전위가 사용하던 쌍극의 무게는 약 80근을 헤아렸다고 전한다.
허나 3세기 전장에서 극은 이미 사라지는 추세였는데, 주요 장수들은 물론이고 일반병들 역시 창으로 갈아타던 추세였다. 긴 창을 활용한 창술에 능숙한 관서 지역 병사들의 강력함에 대해, 조조는 경고를 들은 바 있다. 서진시기 하간왕 사마옹 휘하 장수인 진안(陳安)은 큰칼을 왼손에 들고, 사모(蛇矛)를 오른팔에 들었다. 진안은 이 두 무기를 한번에 휘두를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셌다. 타고난 전사이자 장군이었던 공손찬은 말에 탄 채로 양날창을 능숙하게 휘둘렀고, 친위기병대를 이끌고 적 대열에 돌진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허나 능숙한 창술가를 논함에 있어 가장 유명한 사례를 뽑자면, 장판파 건너편에 홀로 서서 추적해오던 적군을 향해 한 자루를 쥐고 조롱을 날렸던 장비를 들 수 있다. 이때 그는 다음과 같이 내질렀다. "내가 바로 장익덕이다, 이쪽으로 와서 나와 생사를 겨눠보자!" 적 중에 일대일로 그와 맞설 자는 없었고, 장비의 군대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연의에서 언급하기를 관우가 조조에게 있었을 때 조조는 안량을 벤 관우의 무예를 높이 사며 칭찬했다. 그러자 관우는 자신의 무예는 아우인 장비에 비해 모자라다며, 장비는 병사들 사이에서 적 장수 목 베기를 주머니 속 물건 꺼내듯이 한다(=낭중취물 囊中取物)고 했다. 그러자 이에 충격을 받은 조조는 제장들에게 장비를 조심 하라며 이름을 옷깃에 써두라고 일러뒀으며, 훗날 장판교에서 장비의 호통 한 번에 하후걸이 간과 쓸개가 떨어지듯이 놀라 낙마했고[1] 겁에 질린 조조는 그대로 줄행랑을 쳤다.
[1] 다만 하후걸의 낙마는 연의의 창작이다. 애초에 가공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