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위(삼국지)

 



'''악래(惡來)
典韋
전위
'''
'''최종직위'''
교위(校尉)
'''성씨'''
(典)
''''''
(韋)
'''생몰 기간'''
?년 ~ 197년
'''고향'''
연주(兗州) 진류군(陳留郡) 기오현(己吾縣) 
역임한 관직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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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司馬)→교위(校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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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정사
2.1. 초기 생애
2.2. 장막 휘하
2.3. 조조에게 임관
2.4. 복양 전투
2.5. 조조 휘하
2.6. 완 전투
2.7. 사후
3. 연의
4. 기타
5. 미디어 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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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한 말의 인물. 조조 휘하의 장수. 진류군 기오현 사람.

2. 정사



2.1. 초기 생애


용모가 우락부락하고 근력은 다른 사람들을 뛰어넘었으며, 곧은 의지와 절개와 협기가 있었다.
양읍의 유씨(劉氏)는 저양의 이영(李永)과 원수지간이었는데, 전위는 유씨를 위해 복수했다. 이영은 과거에 부춘현의 장(長)을 역임했으므로 집안을 매우 삼엄하게 경계했다. 전위는 수레를 타고 닭과 술을 싣고 방문객으로 가장해서 문을 열게 한 후,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 이영과 그의 아내를 죽인 연후에 조용히 수레 위의 칼과 화극을 갖고 걸어 나왔다. 이영의 집은 저자 가까이에 있었는데, 시장 사람들은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를 추격하는 사람이 수백 명이 되었으나 감히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고, 4~5리쯤 달려가서야 그의 동료를 만나 태도를 바꿔 싸우면서 탈출했다. 이 일로 말미암아 호걸로 인식되었다.[1]

2.2. 장막 휘하


초평 연간(190년 ~ 193년)에 장막이 의병을 일으켜, 전위를 사병으로 삼아 사마 조총(趙寵)에게 소속시켰다. 아문(牙門)의 깃발이 매우 컸으므로 일반 사람들은 들 수가 없었는데, 전위는 단 한 손으로 깃발을 일으켜 세웠으므로, 조총은 그의 재주와 힘을 매우 기이하게 생각했다.

2.3. 조조에게 임관


후에 하후돈에게 귀속되어 여러 차례 적을 죽이고 공을 세웠으므로 사마로 임명됐다.

2.4. 복양 전투


조조는 복양으로 가서 여포를 토벌했다. 여포는 복양에서 서쪽으로 4~5리쯤 되는 곳에 부대 하나를 주둔시켰는데 조조가 밤에 여포의 주둔군을 급습하여 날이 밝을 때를 기다렸다가 적을 격파시켰다. 미처 돌아가지 않았는데, 마침 여포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삼면에서 조조 군대를 공격했다. 이 당시 여포는 직접 격투에 참가하여 아침부터 날이 저물 때까지 쌍방이 대치하여 수십 차례 교전을 벌이고 격렬하게 싸웠다.
조조가 적진을 뚫고 나갈 병사를 소집하자, 전위가 제일 먼저 참가하여 응모한 수십 명을 통솔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두꺼운 옷과 두 겹의 갑옷을 입고 방패도 들지 않고, 단지 긴 창과 화극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때 서쪽에서 또 긴급하게 고하자 전위는 병사를 이끌고 적을 감당했는데, 적은 화살과 쇠뇌를 어지럽게 쏘았고, 화살은 비가 내리듯 쏟아졌으므로, 전위는 바라볼 수도 없어 병사들에게 말했다.

적군이 열 발짝까지 접근해오면 나에게 보고하라.

병사가 말했다.

열 발짝입니다.

또 명령했다.

다섯 발짝일 때, 다시 보고하라.

병사들은 두려워하며 긴급하게 외쳤다.

적이 왔습니다.

전위는 손에 십여 개의 화극을 들고 큰소리로 고함지르며 일어났다. 화극이 닿은 적은 고꾸라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여포의 군대는 퇴각했다. 마침 날이 저물었으므로 조조는 병사를 인솔하여 떠났다.

2.5. 조조 휘하


조조는 전위를 도위로 임명하고, 자기 옆에 두고 친위병 수백 명을 다스리게 하고 항상 큰 천막을 돌게 했다. 전위는 건장하고 위용이 있었으며, 그가 통솔하는 장수들은 모두 사졸들 중에서 선발되어 매번 전투에서 항상 먼저 적의 진영을 함락시켰다. 전위는 교위로 승진했다.
그는 성품이 충성스럽고 근신하며 항상 날이 새면 하루종일 서서 모시고, 밤이 되면 큰 장막 부근에서 잠을 자고, 집으로 돌아가 자는 때가 드물었다. 술 마시고 음식 먹기를 좋아하였는데, 주량이 보통 사람의 배나 되었다. 조조는 매번 앞에서 음식을 내려 많이 먹고 마시게 하고, 좌우의 몇 사람으로 하여금 그에게 충분히 먹을 수 있도록 제공하게 하였다. 조조는 그의 호방함을 좋아했다. 전위는 큰 쌍극과 칼 등의 병기를 갖고 다니기를 좋아했으므로 군중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장막 아래 장사 중에 전군(典君)이 있는데, 팔십 근의 쌍극을 든다.


2.6. 완 전투


조조가 형주를 정벌하고 완성에 도착한 후 장수가 투항했다. 조조는 매우 기뻐하며 장수와 그의 장수들을 영접하여 주연석을 만들어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조조가 술을 돌아가며 줄 때 전위는 큰 도끼를 들고 뒤에 서 있었는데, 도끼 날이 한 척이나 되었다. 조조가 한 사람 앞으로 가면 전위는 즉시 도끼를 들고 그를 주시했다. 주연이 끝난 후, 장수와 그의 장수들은 감히 그를 우러러보지 못했다.
장수전에 따르면 조조가 남쪽으로 정벌하여 육수에 주둔하니, 장수 등은 항복을 하였다 한다. 조조가 장제의 처(추씨)를 받아들이니 장제의 조카인 장수는 한이 맺혔다. 조조는 장수가 기뻐하지 않음을 듣고 은밀히 죽이려는 계책을 짰으나, 누설되어 습격을 당했다.
장수전 주석 부자에 따르면 장수는 측근 호거아가 있었는데 용맹이 군을 뒤덮었다. 조조가 그 날랜 것을 아껴 금을 건네주었다. 장수가 이를 듣고 조조가 측근으로 자기를 찌르려 한다고 의심하여 마침내 모반했다.
십여 일 후, 장수가 또 모반하여 조조의 군영을 습격하였으므로, 조조는 나가서 맞아 싸웠으나 형세가 불리하여 가볍게 무장한 기병을 이끌고 물러났다. 전위가 성문 가운데서 맞아 싸웠으므로 적군은 들어올 수 없었다. 적군은 흩어져 다른문으로 공격하여 들어왔다. 당시 전위의 부하는 십여 명이었는데 모두 죽을 각오로 싸워 한 사람이 열 명을 감당해냈다. 적군은 앞뒤로 점점 많아졌고, 전위는 긴 화극으로 좌우를 공격하였는데, 치고 들어가면 십여 개의 창이 부서졌다. 그의 부하는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전위도 수십 군데 상처를 입었고, 길이가 짧은 무기를 쥐고 접전을 벌였으므로 적이 앞으로 와서 그를 잡으려 했다. 전위가 두 명의 적을 양 겨드랑이에 끼워 쳐 죽이자, 다른 적군들은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했다. 전위는 또 적군에게 돌진하여 몇 명을 죽였으나, 상처가 더욱 심해져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로 욕을 하며 죽었다. 적은 그제서야 감히 앞으로 나가 그의 머리를 베었고, 전군이 돌려가며 그의 시체를 보았다.

2.7. 사후


조조는 퇴각하여 무음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전위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으며, 그의 시신을 훔쳐온 사람을 모으고, 친히 그곳으로 가서 그를 위해 곡을 했다.
사람을 보내 전위의 시신을 양읍에 안장하도록 했다. 그의 아들 전만을 낭중으로 임명했다. 조조는 매번 양읍을 지날 때마다 중뢰(中牢)로 그를 제사지냈다. 조조는 전위를 추념하고, 전만을 사마로 임명하여 자기 옆에 두었다. 조비가 왕의 자리에 오른 후, 전만을 도위로 임명하고 관내후의 작위를 주었다.
243년 7월 위나라 건국 공신 20인[2]으로 추대되었고, 244년 11월 순유를 포함해, 다음해인 245년 11월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를 지냈다.[3]

3. 연의


정사 내용과 연의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큼 용맹 일변도의 무장. 전위는 하후돈에게 천거되면서 등장하는데, 하후돈은 "이 사람은 진류 땅의 전위라는 장사입니다. 용력이 남달라 일찍부터 진류 태수 장막에게 몸을 의탁했으나, 그 아랫것들과 뜻이 맞지 않아 수십 명을 때려죽이고 산중에 숨어 있었습니다. 제가 사냥을 나갔다가 산중에서 범을 쫓아 개울을 건너뛰는 그의 모습을 보니 범보다 더 사납고 날랬습니다. 이에 특히 그를 이리로 데려와 주공께 천거하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판본에 따라서는 '''호랑이가 전위의 모습에 무서워 도망갔다.'''는 묘사를 하기도 한다.
80근의 쌍극을 휘두르며 전위가 조조 앞에서 무예를 자랑하고 있는 도중, 바람에 흔들려 깃발이 쓰러지자 여러 사람이 달려들어도 세우지 못하던 것을 혼자서 한 손으로 세우는 괴력을 보였다.[4] 그러자 조조가 그를 옛날의 악래에 비유하며 감탄한다. 참고로 정사에서 조조는 귀순한 허저를 보고 번쾌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전위를 두고 악래라고 한 기록은 없다. 연의에서 전위가 악래에 비유된 것은 허저가 번쾌에 비유된 것과 비슷한 이미지를 부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복양 전투에서의 활약 역시 정사의 내용과 비슷하다. 조조가 여포 군에 패해 사로잡힐 위기에 처하자, 전위가 나타나 길을 열면서 부하들에게 '뒤에 적들이 다가오면 나한테 알려라'고 하는 유명한 장면을 시작으로 등장하는데, 이 장면은 판본에 따라 엄청나게 뻥튀기되기도 한다. 앞으로 돌진하느라 뒤를 신경 쓸 틈이 없었기에 부하에게 뒤의 적들이 다가오면 알리라고 맡겼는데, 부하가 '열 보', '다섯 보'라고 알려줄 때마다 '''단극을 뿌려서 전부 헤드샷을 했다고 한다.'''
이 날 조조는 전위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복양성 부호의 거짓항복에 속아 또 다시 여포 군에 대패하고 사로잡힐 위기에 처한다. 이번에도 전위가 나타나 조조를 덮치려던 고순과 후성 두 명을 상대로 쌍철극을 휘두르며 위맹을 떨치자, 고순과 후성은 두어 번 창칼을 맞댄 뒤 달아났다. 고순과 후성을 쫓아버린 후 복양성을 탈출하려다 불타는 기둥에 깔려 조조가 기절하자 하후연과 함께 불길 속에서 조조를 구해낸다. 참고로 정사에서는 누이가 하지만 연의에서는 전위가 한다.
복양 전투 이후, 황건적 하의를 쫓던 중 하의를 붙잡은 허저와 겨뤘다. 각각 악래와 번쾌에 비유된 맹장들답게 하루 종일 싸워도 결판이 나지 않았으나, 조조의 밀계에 따라 허저를 함정으로 유도하여 허저를 생포했고 결국 허저는 조조군에 등용된다. 다만 허저는 전위가 죽은 뒤에야 조조에게 귀순했으니 실제로는 만난 적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악래 vs 번쾌'라는 드림매치를 만들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완성에서 장수를 항복시킨 조조가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받아들이자, 장수는 이에 분노해 가후의 계책을 빌려 조조를 다시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항상 전위가 조조 곁을 지키고 있어서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자 호거아가 전위에게 술을 먹여 인사불성이 되게 하고 쌍철극을 숨긴다. 장수가 습격하자 전위는 술에 취한 와중에도 조조를 먼저 밖으로 보내고 자신은 영채의 문을 막고 몰려드는 적병을 상대로 싸웠는데, 술에 취해 급하게 나온터라 갑옷조차 입지 못했고, 쌍철극을 도난 당해 병졸의 칼로 싸우다보니 이미 창과 칼에 수십 곳의 부상을 입었다. 칼이 부러지자, 적병 둘을 죽여 무기처럼 휘두르며 용맹을 떨쳤는데, 장수 군은 전위의 그 모습이 두려워 멀찌감치 물러나 활만 쏘아댔다. 전위의 몸에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꽂혔고, 이어 다른 곳을 뚫고 들어온 적병들이 뒤에서 창으로 등을 찔러서 죽게된다. 하지만 전위의 괴력이 질린 장수 군은 한참동안 감히 다가가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5]
연의에서 조조가 장수와의 싸움에서 전사한 병사 및 장수들을 위한 위령제를 허도에서 시작하는데 거기서 자신의 장남 조앙과 조카 조안민을 잃은 것보다 전위를 잃은 것이 더 슬프다고 말한다. 정사에서는 하지 않은 말이다.

4. 기타


전위는 190년부터 197년까지 불과 7년 남짓 장수로써 활약했기 때문에, 조조군에서 활약한 시기가 10년도 채 되지 않을 만큼 짧았다. 하지만 당대 사람들은 전위의 용맹과 완성에서 자신을 희생해 조조를 구한 공적을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위왕조의 영묘에 제사를 지낼 때, 전위가 하후연, 조홍 등 건국공신들과 함께 배향되었다는 점이다. 참고로 평생동안 조위를 섬겼던 허저는 여기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는데, 이는 겨우 7년 남짓 조조를 섬긴 전위의 공적을 평생토록 조조를 섬긴 허저의 공적보다 높게 기렸다는 의미가 된다. 이를 두고 후대에 주석을 달았던 배송지는 조조의 제묘 앞 정원에서 제사를 지낼 때 전위는 제사를 지내면서, 허저는 함께 제사 지내지 않은 것을 비판했다. 배송지는 서타의 모반과 동관에서 허저가 조조를 구한 것이 전위가 복양이나 완성에서 조조를 구한 것과 비교해도 공이 적지 않다고 했는데, 배송지는 200년 뒤의 사람이라 당대의 인식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위가 처음 맡은 사마라는 직책은 부대에서의 최일선 장교에 해당되며 한 부대 내에도 수도 없이 많이 있는 직책이었다. 전위는 출신 성분 자체가 미천했기 때문에[6] 복양에서 조조의 눈에 우연히 들지 않았다면 잊혀진 존재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당시에는 천거를 통해서 관직에 나가던 시대였기 때문에, 자도 없는 천한 출신의 전위가 정상적인 출세 과정을 밟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 난세였고, 복양에서 조조가 전위의 활약을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이 전위의 인생 역전의 기회가 된 것으로, 이로 인해 전위는 졸병으로 시작하여 경호실장의 자리까지 오른 것이었다.
조조군의 장수들이 대부분 전략가나 지휘관 타입이었던 것에 비해 전위의 기록은 일신의 용맹에 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삼국지연의는 소설의 재미를 위해 무예와 용맹이 뻥튀기 되기 마련인데, 전위는 연의와 정사의 내용이 거의 다르지 않을 만큼 정사에서도 힘과 무예에 관련된 일화로 채워져 있다. 직책부터가 조조의 보디가드였던 것만큼 군대를 지휘하기보다는 일선에 서서 적군과 싸울 일이 많았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완성 전투 당시 적게 잡으면 30대 초반, 많이 잡으면 3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연의에서는 전위와 허저가 하루 종일 일기토한 묘사 때문에, 조조의 좌, 우경호실장 같은 느낌이지만, 실제로는 시기상 전위가 완성에서 전사한 이후, 허저가 조조에게 귀순했다.

5. 미디어 믹스



[1] 현대 기준으로는 중범죄이지만 당시에는 남의 사사로운 원한을 갚아주는 협객들을 의로운 사람이라 칭송했다. 당장 조조의 최측근이자 2인자 하후돈도 10대에 자기 스승을 모욕한 자를 죽이자 주위에서 강직한 기풍이 있다며 하후돈을 추켜세웠다.[2] 하후연, 조홍, 서황, 장료, 장합, 악진, 조진, 조휴, 하후상, 종요, 왕랑, 화흠, 환계, 진군, 주령, 문빙, 장패, 이전, 방덕, 전위[3] 참고로 하후돈, 조인, 정욱 등 핵심 공신들은 이미 233년 제향되었다.[4] 정사에서도 80근의 쌍극과 아문기를 전위가 한 손으로 들어올렸다는 기록이 있다.[5] 정사에서도 전위가 어깨로 병졸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창작물에서는 화살이 강조되는데 화살 관련 묘사는 일본쪽 창작물에서 선 채로 서서 죽은 걸로 유명한 무사시보 벤케이 이미지와 비슷하다.[6] 허저도 가 있지만, 전위는 자도 없다. 둘 다 조조를 최측근에서 보호했기 때문에 서로 이미지가 비슷하지만, 허저는 나름 지역에서 힘있는 가문의 일원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