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손찬
[clearfix]
1. 개요
한나라 말의 군벌. 사서에서는 자가 백규(伯珪)라고 하나, 185년에 건립된 《태위유관비(太尉劉寬碑)》에 따르면 공손찬의 자는 伯圭(읽는 법은 똑같이 백규)인데, 공손찬이 이 비석의 건립에 돈을 기탁했으므로 그의 바른 자는 伯圭이다.[2]
2. 정사
2.1. 초기
대대로 봉급 2천 석을 받던 태수급의 지위를 가지던 고관의 가문이지만, 모친의 신분이 낮았기 때문에 적자#s-2가 아닌 서자#s-1로서 차별받았다. 때문에 가문의 작위를 이어받지 못했으며, 문하서좌라는 말단 관리로 관직을 시작했다.
문하서좌는 공문서를 베껴쓰는 관리로 공손찬은 비서역의 말단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에 걸쳐 각 부처의 견해가 종합적으로 수렴, 보고되어야 하는 넓고 포괄적인 태수의 사무를 단 한 차례의 보고만으로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짧게 정리, 요약하면서도 항상 논리정연하며 핵심이 전부 들어가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대입하면 시청 비서실에서 잡무나 보던 9급 공무원이, 3급 공무원인 시장 비서실장 및 부시장 수준으로 전체적인 시정 현황을 면밀하고 정확히 파악하고 즉석에서 완벽한 브리핑이 가능한 수준으로 일을 처리했다고 보면 된다. 고대의 행정체계가 현대보다 훨씬 단순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엄청난 능력이었고, 여기에 더해 잘생긴 외모에 크고 또렷한 목소리까지 갖췄기 때문에 총명함과 말솜씨, 당당한 태도가 더욱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를 눈여겨본 후태수는 딸 후씨를 그에게 시집보내 공손찬을 사위로 삼았고 이때부터 공손찬의 인생이 펴기 시작했다.
후태수의 적극적인 후원 아래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s-3했으며, 학업을 마친 후에는 군의 계리[3] 를 지냈으나, 이후 유기가 비리에 연좌되어 면직되고 낙양으로 소환되자, 곧 벼슬을 버리고 낙양으로 가는 내내 병졸로 행세했으며,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유기가 일남으로 유배되자, 그를 수발하기 위해 다시 일남으로 갔다. 이때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겨 북망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그 비장함에 한탄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에서 일남으로 유배가 된다는 것은, 사형선고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도 따라가려고 했으니 젊은 시절에는 의리가 있었다.
하지만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사면령이 내려지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고, 곧이어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을 지내다가 요동속국의 장사로 임명되었다.
2.2. 동부의 맹장
공손찬이 요동속국의 장사로 부임하자 동북의 기마민족들은 공포에 떨었다. 언젠가는 만리장성 밖을 수십 기를 이끌고 나갔다가 수백기의 선비족 기병과 맞닥뜨렸다. 마침 근처에 사람이 없는 역참이 있었는데 공손찬과 일행은 거기로 피신했다. 공손찬이 일행들에게 "지금 여기서 탈출하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전멸이다."라고 말했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공손찬의 일행도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지만 공손찬 스스로 창검을 쥐고 돌진하여 적 수십 기를 살상하여 겨우 도망할 수 있었다.
이후 전 중산국상을 역임한 장순#s-3과 전 태산태수 장거가 삼군오환 및 선비족과 연합하여 10여 만명을 이끌고 187년 6월 반란하고 하북(우북평, 요동이 침탈되고 유주와 기주가 피해를 입었다)을 휩쓸자, 공손찬은 미친듯한 전공으로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이어가며 기도위가 되었고 그들을 진압하며 이후 188년 11월 석문에서 반란군을 대파한다.
공손찬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삼군오환은 처자를 버리고 만리장성 밖으로 도주했는데 공손찬은 남녀를 모조리 잡아들였다. 공손찬은 장성 밖으로 깊숙히 추격했다가 요서관자성에서 구력거에 의해 포위되었다, 식량이 떨어져 말을 먹고, 말이 떨어지자 노, 방패를 삶아먹었으며 상대가 되지 않자 분산해서 탈출했으나 비나 눈이 내려 물웅덩이에 빠져 죽는 자가 절반쯤 되어가며 탈출한다. 구력거는 공손찬 추격을 포기하고, 장성 이북으로 도주한 오환들은 더 이상 공손찬과 상대하는 일을 포기하고 유성에 틀어박힌다. 후한서 공손찬전에서는 200일을 공손찬이 포위당했다고 하는데, 대충 계산하면 189년 4, 5월 이후에나 복귀했을 것이다.
한편 이 때쯤에 조정에서는 반대로 이민족들에게도 인망이 높던 유우를 유주목으로 파견해 장순을 치게 했는데 원굉의 후한기 효령제기에 따르면 189년 3월 유우가 유주목으로 와 공손찬으로 하여금 장순을 치게 하니 크게 싸워 깨트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공손찬은 요서관자성에서 구력거에게 포위당하는 중이었으므로 이 기록은 맞지 않는다. 유우는 후한서에 따르면 계현에 이르자 그곳의 주둔군을 해체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189년 2월 유주목 유우는 선비족에게 사자를 보내 이익과 해로움을 알리고 장거, 장순의 목을 보내 항복할 것을 종용한다. 구력거와 오환족은 유우가 부임한다는 소식에 기뻐하며 자발적으로 통역하는 사람을 각기보내 귀순해왔고, 장거와 장순은 요새를 빠져나가 도주했으며 나머지는 항복하거나 흩어졌다. 유우는 더 나아가 여러 둔병을 해산시키고 다만 항로교위 공손찬에게 보병, 기병 1만명을 거느리고 우북평에 주둔하게 하자고 올렸다
189년 3월, 반란수괴였던 장순은 빈객인 왕정에게 살해당하여 그 목이 유우에게 전달되어 전쟁은 끝난다. 유우는 이 공으로 이내 태위에 임명되고 양분후(襄賁侯)에 봉해졌다. 후한서에 따르면 실제로 이 전쟁은 삼군오환과 장거, 장순의 기습적인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으며, 2년만에 종결되었다. 자치통감의 서술도 후한서와 비슷하다.[4] 후한서에 따르면 공손찬은 항로교위와 도정후에 봉해졌으며,[5] 또한 속국장사를 겸했다. 오환족은 얼마나 호되게 당했는지 당시 백마의종을 만들어 다니던 공손찬의 백마장사들을 피해서 다녔으며, 공손찬의 얼굴을 그려 과녁으로 활을 쏴서 이것을 맞히면 모두 만세를 외쳤다고 한다.
공손찬은 본디 선비과 오환 등의 북방민족들에게 강경책을 고수했고 반란을 일으킨 삼군오환족[6] 을 소탕해서 없애려 하는게 목적이었는데 죽을 고생을 하며 돌아온 후에는 자신이 평정한 오환에게 유화책을 쓰며 은혜와 신의를 가지고 그들과 화의를 맺으려 한 유우를 시기하고 탐탁지 않게 생각해 두 사람 사이는 틈이 생겼다. 그래서 공손찬은 귀순을 청해오는 오환의 사신을 죽이며 전쟁을 계속 이어가려는 계획까지 세운다. 오환의 사자가 그 정황을 알아채고 샛길을 통해 유우에게로 나아갔다고 한다. 사실 이것도 공손찬 입장에서는 이해가 가는 것이 죽을 힘을 다해 삼군오환을 물리치고 돌아온 공손찬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1만명만 데리고 우북평으로 가라는 지시와 여러곳의 주둔군을 해체하라는, 사실상 더 싸우지 말고 그만 푹 쉬라는 유우의 명령이었다.
이런 유우의 지시들과 관련해서 유우를 정치꾼인 것처럼 깎아내리고 공손찬이 위협을 느꼈을 만하다라는 생각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딱 그런 시각에서만 벗어나서 바라본다면 보이는 것은 공손찬이 유우를 허접으로 봤던 기록뿐이다. 또한 유우의 실제 통치가 공손찬과의 트러블만 제외한다면 유주 백성들의 삶과 경제를 안정시키고 멀리 국경너머 수많은 이민족들까지 안정시켰는데 기껏해야 변방의 장수 주제에 무슨 사냥이 끝나니 사냥개가 운운할 여지 같은 건 없다. 유우의 행적, 인격과 더불어서 유우를 끝끝내 허접으로 보면서 등처먹기를 일삼던 공손찬의 시각까지 더하면 공손찬이 피해의식이나 위협 같은 것을 느꼈을 가능성은 없다. 공손찬의 저런 반발에는 당연히 공손찬 본인의 포학함이나 야심을 느껴야 한다.
다만 공손찬계 군벌인 유비는 대규모 오환기병을 운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공손찬이 이민족을 증오했다는 사서의 기록과 대치되는 부분이라 의구심이 드는 부분인데 사실 공손찬도 오환기병을 운용했고 자신에게 적대적이지 않은 오환족은 받아들였다. 후한서 공손찬전에 따르면 중평 연간(184~189)에 공손찬이 오환돌기병[7] 을 감독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고 후일 역경성에 갇혔을 때도 아들 공손속을 파견하여 장연에게 구원병을 요청하고, 자신은 돌기병을 이끌고 출진하여, 서산연에서 원소군의 배후를 차단하려 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유우전의 기록은 유화책을 구사하며 공손찬과 대립하던 유우의 입장에서 공손찬의 포악성을 강조한 것일수도 있고 영웅기의 기록도 공손찬의 적극적인 이민족 퇴치노력을 생각한다면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공손찬이 이민족을 증오하고 오환족을 적극적으로 토별했다는 사실과 대규모의 오환기병을 운용했다는 사실이 딱히 대치되는 것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애초에 중국 등의 정주제국이 유목민을 상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략 중 하나가 바로 이이제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오환족도 말하기 편하라고 오환족이라고 퉁쳐서 부르지만 기본적으로 북방 유목민의 사회는 각각의 씨족과 부족이 종횡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섥혀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통일된 조직으로 묶여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오환족'을 구성하는 각각의 씨족 및 부족들의 입장과 이해관계는 항상 일치하는 것이 전혀 아니고, 이들 사이의 갈등과 알력, 경쟁구도를 조장하는 것이 정주제국의 대 유목민 전략의 핵심인 것. 뿐만 아니라 상대적으로 정주제국에게 우호적인 입장인 유목민 씨족은 정주민이 직접 양성하기에는 큰 비용과 오랜 시간이 소모되는 숙련된 기병의 중요한 공급처이기도 했다. 결국 오환족 중 적대적인 씨족 및 부족을 적극적으로 토벌하는 동시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씨족 및 부족을 끌어들여 기병 전력을 확충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며, 오히려 공손찬이 이런 수단을 병행하지 않았다면 단시일 내에 대규모 기병전력을 확보하기도 힘들었을 것이고, 오환족 토벌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또, 공손찬이 적대한 오환부족들은 한나라의 반란군과 손을 잡은 삼군오환이었으며 따라서 공손찬의 목적인 오환 전멸이 이들의 전멸이었다고 보면 이상할 게 없다.
2.3. 유우와의 불화
이후 유우와의 불화는 끝없이 이어졌는데, 이 명목은 북방민족에 대한 강경책과 유화책이라는 정책적인 이유이지만 더 노골적인 원인을 살펴보면 결국 돈 문제로 보인다. 유주는 한왕조의 변경으로 국경지대라는 군사적, 정치적 중요성에 비해 인구는 적었고, 인구=경제력이 되는 농경사회의 특성상 과도한 군비지출이 감당이 안 되는 곳이었다. 하지만 국경지역에 군대를 유지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에 후한 정부에서는 청주, 기주의 예산을 빼서 유주의 재정적자를 메꾸는 데, 유우는 유화책을 통해 북방민족을 관리하며 군축사업을 통해 필요성이 없는 군대는 해산하고 공손찬이 1만의 군대만 유지하며 우북평에 주둔해 변고에 대비토록 하며(군사예산 투명화), 남는 예산은 난민의 정착(복지)과 어양의 철광, 소금정 채취(지하자원 개발) 및 상곡에서 북방민족과의 교역에 투자(상업 인프라)할 것을 주장했고, 이에 맞서 실질적인 군사 책임자였던 공손찬은 북방민족 위협론과 군비 확대를 주장하고 확전을 위해 위에서도 나왔듯이 오환족 사신 암살까지 시도해 가며 격렬하게 반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우열전에 따르면 북방 경계의 실무를 맡던 공손찬은 단지 자신을 위한 무리를 모으는 데 힘쓰며 병사들이 멋대로 민간을 노략질하도록 방치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절차에 따라 산출된 예산이 공손찬 개인의 사적 군벌을 위해 불투명하게 운용되었고, 그 결과 병사들이 노략질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묵인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누리며 사적인 군벌을 형성하고 있던 공손찬에게 유우의 개혁은 엄청나게 민감한 문제였던 것. 왕보는 후한서집해에서 공손찬열전에서는 오환족을 멸종시키려고 마음먹었으나 유우는 은덕과 신망으로써 항복시키려고 하였으므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기록됐는데 유우열전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양쪽 열전에서 제각기 미화하면서 내용이 상호 충돌하니 둘 다 역사적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다만 원굉의 후한기를 근거로 공손찬에서 패한 유우가 거용으로 달아나 오환, 선비족을 불러들였기에 이때 유우와 공손찬이 틈이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정책의 표면적인 이유와 그 이면의 실제 이유라는 측면에서 살펴보면 두 열전의 내용이 꼭 충돌한다고만 볼 수는 없다. 더욱이 유우가 거용으로 달아날 때는 이미 공손찬과의 사이가 틀어질대로 틀어진 이후의 시점이기에 앞뒤가 맞는 해석이라 보기 어렵다.
예산을 투명화하여 유주의 군벌로 떠오른 공손찬을 견제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겠다는 유우의 개혁은 부분적으로는 성과를 이뤘으나 곧 동탁의 집권으로 여기에 힘을 실어줄 중앙정부 자체가 박살나 버리면서 공손찬에게는 활로가 트이게 된다. 동탁 역시 이 지역을 신경쓰고 있었는지 낙양에 도착해 정권을 잡자 유우에겐 대사마, 공손찬에게 분무장군의 직위를 내리고 계후에 봉했다.[8]
2.4. 반동탁 연합군 시기
190년, 동탁#s-1이 황제를 갈아치운 것에 반발한 원소는 반동탁 연합군을 결성, 명망이 높은 유우를 황제로 추대하며 동탁에게 도전했다. 이때 공손찬은 유우 추대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면서 연합군의 정세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는데, 사승의 후한서에 따르면 이때 유우 추대의 소식을 듣고 군사를 모아 원소를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진수의 삼국지 장홍전에서도 장초가 유우를 추대하기 위해 장홍을 유주로 보냈으나 공손찬이 병란을 일으켜 하간국(기주와 유주의 경계지역) 일대에서 기주와 유주의 군사들이 싸우는 바람에 유우에게 이르지 못하고 원소를 만났다는[9] 구절이 있는데, 공손찬이 유우 추대를 반대해 군사를 일으켰다는 사승후한서의 기술과 동일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나 삼국지의 기록은 이 뿐이고 사승후한서는 이미 원문이 유실되었기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원술이 그랬듯 동탁을 비난하는 입장을 취하긴 했지만 라이벌(원소/유우)의 영향력 확대를 막는다는 정치적인 이유에서 유우 추대는 반대했고, 동탁이 옹립한 헌제와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호했다는 것. 한편 유우는 황제 추대를 거절했고 한복이 다시 사자를 보내 영상서사로 추대하는 등 협상[10] 을 시도하자 한복의 사자를 참수하는 등 단호한 태도로 반동탁 연합에 협조를 거절하고 장안 조정의 정통성을 옹호하며 원소와 장안 조정의 사이를 중재하고자 했다.
유우가 전주, 선우은 등을 사자로 보내 장안 조정에 조공하자 헌제는 크게 기뻐하며 다시 벼슬을 올려 유우를 (동탁이 죽인) 원외의 후임 태부로 삼고[11] 아예 장안을 탈출해 유우를 후원자로 삼으려 했기에 시중으로 있던 유우의 아들 유화를 보내 유우에게 알리고 자신을 맞이하도록 했으나, 유화는 무관을 통해 장안을 벗어나 남양을 경유하며 북으로 향하던 도중 원술에게 붙잡혔고, 전모를 파악한 원술은 유화를 사실상 인질로 붙잡은 채 유우에게 사신을 보내 유우가 군사를 보내면 자신이 유화와 함께 서쪽으로 가서 탈출하는 천자를 맞이하겠다고 알린다. 유우는 원술에게 수천의 기병을 보냈지만 원술은 기병을 빼앗아 차지했을 뿐 서쪽으로 가지 않았다.
이때 공손찬은 원술의 말이 거짓말임을 알아채고 유우에게 진언했지만 유우가 원술에게 군사를 보내자 따로 은밀히 공손월과 기병 1천기를 원술에게 보내 유화를 인질로 붙잡고 유우가 보낸 기병을 빼앗아 차지하게 했다는 모순적인 기록이 전해지는데, 앞의 내용에 따르면 공손찬은 애초부터 원술이 서쪽으로 갈 생각이 없이 유화를 인질로 붙잡아 군사를 먹튀하겠다는 생각을 간파했지만, 뒤의 내용에 따르면 원술을 부추기며 유화를 인질로 붙잡아 군사만 먹튀할 것을 결정지은 원인이 공손찬이다. 굳이 모순되지 않게 해석하자면 원술은 유화를 붙잡아 유우에게 사신을 보낸 시점에도 정말로 유화와 함께 '헌제 구출작전'을 시도하여 헌제 구출의 공에 숟가락을 얹을 것인지, 혹은 헌제 구출의 리스크 감수 없이 그냥 유화를 연금하고 유우에게서 군사만 먹튀할 것인지를 두고 전자에 무게를 둔 채 후자도 가능성을 열어둔 상태였으나 공손찬이 기병 1천과 인질(=공손월)이라는 선물의 조건으로 먹튀할 것을 부추기자 태도를 결정지은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으로 유우는 거하게 엿을 먹었고 이 일이 공손찬에게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알자 유우와 공손찬의 사이는 더욱 나빠진다.
그리고 이때 쯤 노식 휘하에서 같이 공부하던 유비가 반동탁연합군에 종군하다가 적에게 격파되어 그의 수하로 들어간다.
2.5. 계교 전투
191년, 공손찬은 원소와 밀약을 맺고 한복을 공격하여 격파하지만, 그 사이에 원소는 기주의 여론을 장악하고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의 자리를 빼앗았다.[12] 학경 속후한서는 이를 191년 6월경, 자치통감은 같은해 7월 경의 기사에 붙여 넣었는데, 아무튼 대충 이 시점에 원소는 기주목이 되었다.
그런데 원술에게 파견되어 있던 공손월이 양성에서 친원소 성향의 주앙을 공격하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자 공손찬은 모두 원소의 책임이라고 하며 군대를 남쪽에 배치시켰다. 원소는 이를 무마하기 위해 공손찬의 다른 사촌동생인 공손범에게 발해태수의 지위를 양도하여 자신과 공손찬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지만 공손범은 오히려 발해의 군사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가세하였다.
191년 11월, 청주의 황건적 30만이 하북으로 올라와 발해군의 경계를 침입했는데 공손찬은 보기 2만을 이끌고 이를 요격하여 별다른 전력 손실 없이 30만을 거의 몰살시킨 것에 가까운 엄청난 대승을 거뒀으며 이로 인해 공손찬의 위명은 전국을 뒤흔들었다. 그러면서 원소군과 몇차례 소규모 교전을 펼치면서 군을 계교까지 전진시켰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전해를 청주자사로, 추단을 병주자사로 삼아 각기 파견했으며 기주, 병주, 청주 모든 군현의 태수, 현령을 모두 자기 사람으로 임명했다. 형식상으로야 어디까지나 장안 천도 이후 연락이 끊긴 중앙정부의 부재 상황에서 부적임자를 대신해 임시로 적임자가 취임한다는 형식이었지만, 3개 주의 주, 군, 현에 배치된 기존 관리들을 모조리 실력으로 몰아내고 점거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 노골적인 야심을 표출한 것이다. 또한 장안의 헌제에게 원소의 10가지 죄상을 알리는 상주문을 작성하고 포고한다. 이때 수많은 군현이 원소를 버리고 공손찬에게 투항했다고 한다.
공손찬이 내세운 원소의 10개 죄상은 다음과 같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원소가 마침내 192년 1월에 출정한다. 공손찬은 군사의 양, 질, 장비, 보급 모든 면에서 원소를 압도하였으나, 계교에서 벌어진 일대 회전에서 원소군의 선봉장 국의가 보병방진을 통해 공손찬의 기병을 유인, 교란시켰고 이어진 노의 사격을 통해 백마의종을 격파하자 공손찬군은 대패한다.
공손찬은 탁군의 고안으로 달아났고 원소는 부장 최거업을 보내 공손찬을 추격했으나 공손찬은 거마수에서 최거업의 군사를 대파하고 다시 남진, 각 군현을 공략하면서 평원을 중심으로 청주에 영향력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청주 자사 전해를 파견하여 제(濟) 땅을 점거시켰다. 원소가 공손찬을 공격하니 유비와 전해는 동으로 가 제(齊, 청주 제국)에 주둔했다(삼국지 선주전). 그러나 후한서 원소열전과 삼국지 원소전 영웅기 주석에 따르면 바로 이후 공손찬이 192년 겨울[13] 용주[14] 에서 원소와 격돌하여 또다시 크게 패한다. 이 시점에 유비는 연주(兗州) 자사로 공손찬에게 임명된 선경, 서주목 도겸과 함께 싸우게 된다. 유비는 자신의 임지인 청주(靑州) 평원군(平原郡) 고당현(高唐縣)에 주둔하면서 원소와 원소 휘하 군벌인 조조와 싸웠고 패배한다(192년 겨울 삼국지 무제기).
193년 1월. 한편 장안에서 동탁이 죽고 이각 등이 권세를 잡자 장안 조정에선 태부 마일제와 태복 조기를 관동으로 보내 관동지역의 관리들이 서로 싸우는 것을 중재하도록 했다. 불리한 상황이었던 공손찬은 이를 명분삼아 원소에게 화의를 권했고 원소 또한 이를 받아들이면서 원소와 공손찬은 화의를 맺는다.
2.6. 유우 살해, 몰락의 시작
193년 3월. 원소가 장연#s-1의 뒤치기에 본진인 업을 함락당해 위기에 몰렸을 때, 공손찬은 화친을 깨고 다시 원소를 공격한다. 이 상황은 한진춘추에 남은 원소의 편지에서 유추가 가능하다.
한편 유우는 공손찬은 이미 원소에게 여러차례 패배를 거듭하였는데 그러면서도 오히려 원소를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으니 유우는 이렇듯 그가 군사의 강함을 믿고 오만하게 행동함을 재앙으로 여겼다. 또한 뜻을 얻어 그대로 본뜨지 못하게 하고(且慮得志不可複製), 행동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그의 녹봉을 줄였다.
이에 유우는 유주목으로서의 권한을 동원, 유주 각 군에 공손찬에게 협조하지 못하도록 하며 군사와 군량의 징발을 막았고 대노한 공손찬은 물리력을 동원, 강제 징발을 실시한다. 유우는 장안 조정에 공손찬의 노략질을 알렸으나 공손찬 또한 장안에 사람을 보내 유우가 급료와 군량을 대지 않았음을 비난했다. 장안 조정에서는 공손찬과 유우 중 어느 쪽의 편을 들어야 할지 판결을 내리지 못한다.
공손찬은 유우가 있는 계성 옆에 성을 쌓으며 유우를 견제했고, 유우가 여러 차례 만나고자 공손찬을 불렀으나 공손찬은 병을 핑계대며 유우를 만나지 않았다. 193년 겨울, 위협을 느낀 유우는 마침내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선공을 가한다. 이때 유우의 종사 공손기는 공손찬과 종씨라는 이유로 공손찬이 평소 후하게 대우했기에 밤을 틈타 공손찬에게 먼저 이 사실을 알렸다.
공손찬은 유우의 본진 앞에다 성을 쌓고 유우의 교섭 시도를 모조리 무시하면서도 주력병력은 전부 밖으로 돌렸을 정도로 유우를 만만하게 보고 있었다. 유우가 군사행동에 나설 것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공손기를 통해 유우의 움직임을 파악하고서도 반격에 나설 병력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처음에는 달아나려고 했지만 곧 유우군이 오합지졸인 것을 파악하자 정예병 '''100명을 선발해''' 화공을 펼치며 역공에 나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유우는 관속들을 데리고 거용현으로 달아났고, 오환과 선비에게 원군을 요청했으나, 공손찬은 불과 3일만에 거용성을 함락시키고 유우를 산채로 붙잡아 버렸다.
마침 장안에서 단훈이 공손찬과 유우의 중재를 위해 파견되어 유우의 봉읍을 더하고 공손찬에게 전장군, 역후에 하북 4주의 도독을 겸하게 하는 조서가 내려오자 공손찬은 유우가 원소와 짜고 천자를 사칭하려 했다고 모함하였고 이를 빌미로 그를 처형했으며, 단훈을 사실상 억류하며 유주자사로 삼도록 상표해, 유주의 행정을 장악하기 위한 바지사장으로 만든다.
공손찬은 오랫동안 쌓아놓은 막강한 군사력과 자금을 통해 군벌을 형성했고 중앙정부의 부재를 틈타 관리들을 압박하며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어디까지나 중앙정부의 혼란을 틈탄 조치로 장군호나 도독으로서의 감찰권이라는 군권에 대한 합법성을 내세울 수 있었을 뿐, 자사나 태수의 직함을 통해 한 지역의 행정을 직접 장악할 수는 없었다. 행정력이 부재한 중앙정부 대신 부적임자를 내쫓고 임시로 적임자를 내세운다는 명목으로 태수를 갈아치우며 자기 사람들을 자사나 태수로 임명했지만, 자신이 스스로를 자사로 칭하는 것은 너무나 속이 보이는 행위였고 더구나 자신의 핵심 근거지인 유주에서는 유우의 명망이 워낙 높았기 때문에 쉽게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 참에 유우를 죽이고 단훈을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면서 비로소 공손찬은 유주에 대한 절차적 지배권을 굳혔지만 대신 민심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더불어 북방민족들과는 원래 사이가 나빴던 판국에 북방민족과 한족(漢族) 양쪽에 신망이 높던 유우를 죽이는 바람에 공손찬은 하북 전체에서 완전히 공공의 적이 되어 버렸다. 물론 여기에 원소의 선동이 더해졌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유우를 처형할 때 공손찬은 유우를 저잣거리에 세워놓고 그가 천자가 될 인물이라면 비를 내리게 해달라고 빌었다고 한다. 비는 오지 않았고 공손찬은 유우를 처형했다. 나름대로는 유우를 죽일 정당성을 확보하려 한 듯하기도 하지만, 당시 11월은 비가 거의 오지 않는 시기인 것을 감안할 때, 공손찬의 잔인한 성격상 죽음을 앞에 둔 유우를 조롱하려는 의도로 한 말일 수도 있다.
유우를 죽였을 때 이에 대한 반대 세력이 조성될 것을 두려워해서인지 유주의 관리와 이름이 알려진 사대부의 대부분을 숙청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공포통치에도 불구하고 유우의 관속들 상당수는 공손찬의 휘하로 들어가기를 거부하여 군대를 조직해 저항했으며, 여기에 원소가 유우의 아들 유화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기폭제가 되어 안팎으로 수만 명이 가세해 공손찬을 공격하게 된다.
계교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에도 원소보다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던 공손찬은 유우를 죽이고 불과 2년 사이에 병주, 청주, 연주가 모조리 원소 혹은 원소계 군벌들에게 각개격파당하는 형태가 되어 수세에 몰리게 되었고, 또한 민심의 이탈로 인하여 공손찬의 부하들도 그에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유비는 이때 쯤 전해를 따라 서주 대학살 구원을 가 다시는 공손찬에게 돌아오지 않았고, 조자룡도 이맘때쯤 형 장례 치른다는 핑계로 낙향했다. 완전히 민심을 잃고 고립되었던 것. 즉 유우 처형이 공손찬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패착이었던 것이다.
2.7. 불타는 역경루
유우의 종사였던 어양출신 선우보 등이 유주의 병력을 규합하여, 공손찬에 복수하려 하였다. 선우보는 염유가 늘 은애신의를 갖고 있었으므로 (그를) 오환사마로 삼았다.
염유는 호족, 한족 수만 인을 모아, 공손찬이 배치한 어양태수 추단과 노 북쪽에서 싸웠는데, 추단을 비롯하여 사천여 수급을 얻었다. 오환의 초왕은 유우의 은덕을 기억하고 있어, 동족 및 선비족 칠천여기를 이끌고 선우보와 함께 유우의 아들 유화를 맞아들여, 원소의 장수 국의와 합류, 군세 십만이 일제히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195년. 포구에서 원소, 선비족, 오환족의 연합군에 거하게 털리고 2만 명의 전사자를 낸 공손찬은 아예 나가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고 우주방어 용도로 세우고 있던 역경성에 칩거한다. 역경성은 10중의 참호가 있고 참호 뒤에 각기 5, 6장 정도(12~14m) 높이의 벽이 있었고 그 위에 망루만 수십 개에 이르렀으며, 공손찬 자신이 거주하는 중앙의 망루는 특별하게 건축하여 벽의 높이가 10장(23m)이 넘었고, 그 위에 고층 누각을 세웠다고 한다. 군량미 3백만 섬을 쌓아두고 장기전에도 대비했기 때문에 성 안에서 둔전까지 가능했다. 당대의 건축기술과 공사 기간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초월적인 규모의 요새였다.
항간에는 ‘연나라의 남쪽, 조나라의 북쪽 가장자리, 중앙은 맞지 않지만 가치는 숫돌과 같은 곳, 오직 그 가운데서만 난세를 피할 수 있으리’란 동요가 있었다. 공손찬은 하간국 역현이 그곳이라 여겨 역경성을 지은 것이다.
원소는 부하들을 보내 역경성을 공격했지만 몇 년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국의 역시 1년 대치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병력 수천명이 도망가고 공손찬이 이를 공격해 치중을 손에 넣었을 정도.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성을 세운 것부터가 공손찬의 대표적인 악행으로, 역경성을 쌓기 위해서 백성들을 무제한적으로 수탈하고 노역을 부과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공손찬이 역경성에 칩거할 무렵엔 황충이 창궐하고 곡물값도 비정상적으로 올라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할 지경이다.
이때 공손찬은 확실하게 기존 지방세력 및 관리계층의 뜻에 반하는 독단적인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는 '자기 능력에 자만해, 백성들에게 자비가 없었고, 타인의 좋은 점은 잊고 나쁜 점만 기억해 작은 원한도 반드시 보복했다. 당시 공손찬 영지 휘하의 명사, 선비들이 공손찬보다 명성이 높으면 법률을 악용해 그들을 괴롭히며 말하길 "모두 자기 재주로 부귀해졌다고 여겨, 타인의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른다"고 했다.' 라고 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일반적으로 사서 기록자가 유가적, 문관적인 서술방향에서 인물의 쇠망을 기록하며 됨됨이가 못되었음을 이유로 깔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어떤 이가 역경성을 지은 까닭을 묻기에 답하기를, "내가 과거 만리장성 근방에서 반역을 일으킨 호족들을 쫓고, 맹진에서는 황건적을 격파하였는데, 당시 생각키로는 천하를 평정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 오늘에 와서 돌아보니, 싸움은 이제야 시작된 것으로, 전쟁은 내 결정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세를 쉬게 하고 농사에 힘써, 이를 통해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다. 병법에 이르기를 백 개의 누각은 공격치 않는다고 하였는데, 지금 내 진영에는 누각이 천리에 걸쳐 있고 식량은 삼백석이나 쌓아두었다. 이걸 먹고 앉아있으면 천하의 변화를 기다리기에 충분할 것이다."라 하였다.[15]
역경성 칩거는 전략적인 측면에서 원소를 꽤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었던 방법이기는 했다. 공손찬이 역경에 틀어박힌 196년 무렵 조조는 황제를 봉대하여 슬슬 원소를 견제하고 있었는데, 아무리 공손찬이 찌그러들었다곤 해도 군사력만큼은 결코 무시할 세력이 아니었던 터라 당시 원소는 조조에게 신경을 쓸만한 여유가 별로 없었고, 실제로 원소는 조조에게서 대장군 관직을 빼앗은 것 외에는 특별한 견제도 하지 못한 채로 황제를 옹립하지 않아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을 후회했다. 심지어 원소 쪽에서 먼저 공손찬에게 화친을 제의하기도 했다. 다음은 한진춘추에 실린 원소의 서신을 요약한 내용이다.
풀이하자면
라는 뜻이다.
공손찬은 이를 무시하고 군비를 더욱 비축하면서 관정에게 "지금 사방에서 범이 다투듯 쟁탈하나 내 성 아래로 와서 버티며 해를 넘긴 자가 없었는데 원본초가 나를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역경성에 들어가도 정상적으로 활동하면 농성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을 텐데, 이때부터 공손찬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겼는지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벌인다. 중앙의 고층 누각에 철제문을 세우고, 좌우의 측근들을 모두 만나지 않았으며, 7세 이상의 남자는 아예 공손찬이 사는 곳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또한 오직 첩들만이 공손찬을 시중들었는데, 모든 공문서는 누각 위에서 끌어올리는 식으로 받거나 내렸으며 첩들에게 목소리를 크게 내는 훈련을 시켜 수백 보 밖에서도 들릴 수 있게 하여 지시사항을 전달하기도 했다. 이처럼 상식을 벗어난 은둔과 편집증 증세를 보인 데다가 나중엔 직접 출격해서 싸우는 일도 거의 없어지며 완전히 히키코모리가 돼버렸기 때문에 측근들도 공손찬을 볼 기회가 없었다. 결국 공손찬의 말도 안되는 행동에 그나마 남아 있던 맹장과 모신들도 그를 배신하고 원소에게 투항하거나 도주해버린다.
여기에 공손찬이 총애했던 자들은 평소에 제멋대로 구는 자들로, 점쟁이 출신의 유위대, 옷감 상인 출신인 이이자, 큰 상인이었던 악하당 등 세 명으로, 형제의 맹약을 맺어, 공손찬 자신은 백伯이라 칭하고, 세 사람을 각각 중, 숙, 계라고 칭하였다. 이는 고대의 곡주, 관영의 사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공손찬은 장연과 공동전선을 펼치고, 원소군 내부의 불만세력들을 영입하며, 반원소 세력를 결집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미 강성해진 원소를 상대로 성공한 결과를 보지 못하였다. 198년, 원소가 편지를 보내에 화친을 제기했지만 공손찬은 거절하고 이에 원소는 군사를 일으켜 공손찬을 공격하였다. 공손찬의 한 부하가 원소군에게 포위되자 공손찬은 "한 사람을 구하면 다른 사람들은 구원병만을 기다리며 힘써 싸우지 않을 것이다"라며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았고 이에 계교에 주둔했던 각 영들은 도망가거나 배신하였다. 원소군이 성문에까지 다다르자 공손찬도 요격에 나서 아들 공손속을 보내 장연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자신도 돌기병을 거느리고 출진해 흑산적과 연계하여 원소의 배후를 칠 계획을 세운다. 하지만, 참모 관정#s-1이 이를 제지하자 단념했다.[22]
공손찬은 원소군에게 참패하여 퇴각을 거듭해 역경루에 틀어박혔고, 마침내 199년 3월에 원소에 의해 역경루가 함락당하여 원소의 병사들이 성으로 난입하자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분신자살했다. 사후 시신이 원소의 병사들에 의해 참수된다. 원소가 공손찬의 머리를 허도로 보내자 조조는 정신이 아득해져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3. 가족 관계
4. 능력
4.1. 용병술
북방 이민족들은 모두 공손찬의 이름을 알았고, 그 무용을 두려워하여 침범하는 자가 없었다. '''정예 100명을 뽑아서 유우의 10만을 와해시켰다'''든지 스스로 전장을 휘젓고 이민족을 수도없이 베어버린 전적을 보면, 군사적인 능력으로 폄하할만한 인물은 절대로 아니다. 게다가 계교전투와 국의와의 대결 외에는 잘 싸운 편이고, 역경에서 농성하다가 국의에게 역습을 가해 격파하기도 한다.
중국 최강이었던 공손찬의 세력은 원소의 정치 선전술 때문에 자동적으로 찢어져버렸지만, 공손찬이 고립된 이후의 상황만을 보고 폄하하는 대다수의 주장에도 무리가 있다. 조조마저도 헌제와 순욱이 없었으면 고립당했을지 모를 정도로 원소의 정치술 자체가 엄청났던 것이다. 또한, 완전히 전세가 역전되어 고립된 상황에서도 게릴라로 국의와 원소를 괴롭히고 '''심지어 역습으로 죽일 뻔했던''' 전적을 보면 용병술만큼은 분명히 뛰어났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 밖에 당대 중국의 기병들은 등자가 없었으며, 당대의 중국에 중장기병을 이용한 충격전술이 들어왔는지도 명확하지 않았다. 특히 기록으로 추측하건대 적어도 공손찬은 기마궁수를 운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실제로 바로 아래 있는 백마의종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기병들에 대한 설명이다. 공손찬은 경기병이 강한 오환, 선비족 등과 대결하다보니 경기병 편제를 주로 갖춘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형태의 기병들은 피아 쌍방 기병전력이 강할수록 경무장의 경기병에 치중된 편제를 갖추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23] 기마민족을 상대할 때에나, 무장 자체가 미비한 황건적 같은 도적떼를 상대할 때에는 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하지만 충격력은 확실치 못했고, 대기병 맞춤형 전술을 갖춘 정예보병을 상대하는데는 효과적이지 않았다.[24]
공손찬 부대의 이러한 특징이 원소와 국의를 포함하여 보병과 지형 전술을 활용하는 데 능숙한 한족 군벌들에게 패퇴한 이유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공손찬이 활동하던 북방지역이나 국의가 활동하던 서량주 지역 한족병사들은 농경민족의 창병+강노병 조합의 중보병진으로 이민족들의 경기병을 공격하는데 이골이 나 있었는데 공손찬의 주력은 경기병이었으므로 이를 상대하는 경험이 부족했다고 할 수 있다. 이후에도 공손찬은 이를 극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원소군과는 한때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는 점에선 용병술을 높이 살 순 있다. 결국엔 원소가 오환족과 연계해 보병과 기병의 유기적인 진영을 구축하여 군사 부분에서 우위를 잡고 한편으론 교묘한 정치술로 공손찬을 고사시켜 버리지만.
4.2. 백마장사
공손찬은 항상 뛰어난 궁수 수십 기를 데리고 다녔는데, 모두 백마에 기승하여 좌우로 날개처럼 펼친 진형으로 다녔고, 이를 '''백마의종'''으로 자칭하였다. 이들을 이끈 공손찬은 '''백마장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백마의종은 유주의 유명한 특수부대로 좌익과 우익을 합쳐 교차사격을 행하는 전술을 이용했다. 전장에서는 국의가 이들을 격파하기 전까지 병귀신속의 전형으로 손꼽혔다.
여담으로 한때 최고의 기마부대라 할정도로 손꼽혔던 백마의종을 기른 공손찬과 그 백마의종을 대파한 국의 둘 다 원래 (서)양주 출신으로서 유목민족인 강족과 싸워오고 마찬가지로 기병을 키워오면서 이 방면 전문가나 다름없는 사람들이었다. 맹상군의 유명한 명언인 '장군의 가문에 장군이 나오고 재상의 가문에 재상이 나온다.'는 말대로 양주에 있어서 기병에 빠삭했던 둘이기에 최고의 기병대를 생산/격파하는데 성공했다.
4.3. 미창술
후한서의 기사가 말하듯 공손찬은 요동속국장사시절 실전 '''미창술'''을 해내고 말았다. 요새를 순찰하다가 선비족을 만나 10배가 좀 안되는 적을 상대로 2개의 창을 잘라 날을 양쪽으로 붙여 세우고 무쌍난무를 시전해 버렸다. 마구잡이식 개돌같기도 하지만 마상창의 진화한 형태라고 할 만하다.除遼東屬國長史。嘗從數十騎出行塞下,卒逢鮮卑數百騎。瓚乃退入空亭,約其從者曰:「今不奔之,則死盡矣。」乃自持兩刃矛,馳出衝賊,殺傷數十人,瓚左右亦亡其半,遂得免。<공손찬 전>
5. 평가
공손찬의 저평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숙적인 원소가 연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삼국지 관련 창작물에서 폄하받는 것과 관계가 있다. 조조에게 쳐발리는 역할인, '소인배' 원소한테 발린 군웅이므로 쩌리라인이다는 논리인 것이다.
하지만 역사상으로는, 과장 조금 보태서 공손찬에게서 원소가, 그 원소에게서 조조가 승리를 거두는 과정이 삼국지의 가장 중요한 최강 세력의 세대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또 군웅할거의 내전이 아닌 외적에 맞서 싸우는 국제전의 시대였다면 백성들의 삶을 지키는 구국의 영웅이 될 만한 인물이었다. 중국에서 이민족이 가진 위상과 그 이민족을 자신이 맡았던 내내 완벽하게 막아낸 것을 보면 공손찬은 적어도 장수이자 이민족 억지력으로선 무척 빼어난 편이었다. 양주에서 살아온거나 다름없는 동탁과 동탁이 이끌던 군사만 해도 어마어마한 강군이었다.
5.1. 변경의 영웅, 이민족 킬러
당대 중국 문화권에서는 변방 오브 변방에 비한족계 민족들이 다수 섞여 살았던 요서군 출신이라 항상 변경을 침공하는 오랑캐들에게 강경했지만 의외로 휘하 장수인 유비의 기병에서 볼 수 있듯이 오환족 기병을 거느리는 등 유화적인 면도 있었다. 오랑캐들에게 항상 무서운 얼굴로 잔인하게 말하고 부모의 원수 대하듯 대했다는 영웅기의 기록같은 걸 보면 싸울땐 싸우고 자신에게 투항하는 자는 받아주었던 듯 하다. 매우 용맹하여 적군이 움직이는 흙먼지를 보곤 본인이 직접 달려나가 대낮부터 한밤중까지 미친듯이 싸워댔다는 기록이 남을 정도로 죽음을 무릅쓰고 싸우는데 전혀 주저함이 없었다.
동탁이 위관이나 영관급에 해당하는 별부사마나 도위를 지낼 때는 그럭저럭 유능함을 인정받다가 장성급인 중랑장으로 올라간 이후부터는 졸전을 거듭하면서도 윗선에 뇌물을 바치며 지위를 유지하고, 부하들에겐 노략질한 약탈물을 분배하고 이익을 공유하면서 얻은 지지, 혹은 사실상의 공범의식을 통해 군권을 사유화하고 이를 스스로의 정치적 기반으로 삼는 등 야심 많고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군인의 전형적인 행보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공손찬은 군사적인 활약상만큼은 굉장히 화려한 편이고, 간지나는 일화도 제법 많아서 영웅으로 추켜세워주는 분위기도 있다.
공손찬은 서강족을 멸해버린 태위#s-1 단경과 같은 꿈을 꾸었는데 실제로 북방에서는 '''흉노를 써는 자, 요서의 공손백규'''라는 말이 있었다고 한다. 단경은 그야말로 강족을 썰고 또 썰어서 걍 씨를 말려버리고 영제에게 오랑캐 장수의 인새를 수도 없이 바쳐 비단과 금, 부절 등을 하사받았다. 출전은 《후한서》 〈영제기〉.
서진#s-1의 멸망 이후 이민족들이 중원에 들어온 것에는 공손찬이 지배한 하북지방이나 서쪽의 촉한처럼 각 지방 세력들이 몰락한 것에도 원인이 있다. 원소는 최소한의 전투와 선전술만으로 공손찬의 세력을 훼손하지 않고 흡수했지만, 이후에 조조는 위왕조를 세울 때 하북세력의 대다수를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변경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어서, 오호십육국 시대에는 공손찬만큼의 능력과 세력을 양립한 대군벌이 나오기 힘든 상태였다.
공손찬은 변방에서 백성들을 괴롭히는 이민족을 토벌하며 그 지역의 인심을 얻고 세력을 불린 전형적인 변방군벌이었다. 유우의 측근들, 이를테면 위유 같은 사람들조차 공손찬은 군사적으로 명성이 있으니 조금의 흠결이 있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공손찬은 이민족에 시달리던 변경의 주민들에겐 이민족을 물리치는 지역영웅으로의 입지가 있었다. 하지만 지역을 지키는 변방영웅의 사고방식에만 머물러 이 지역을 자신의 관할이라는 생각하에 불법적으로 세를 불렸고 결국엔 원소 같은 중앙정계 인물에 밀렸으며 이민족 문제로 유우과 갈등을 빚다 그를 살해하는 자충수를 두고 모든 명분을 잃어버린채 백성들과 유우, 원소 세력의 공공의 적이 되어 스스로 몰락해 버렸으니 애석하다 할 것이다.
5.2. 괴짜
당시 '''중국 최강의 세력'''이었으며 미칠듯한 무력과 포스를 자랑했던 항우와 비슷한 이미지를 지녔다. 특히 항우가 군주로써의 자질이 부족했던 것처럼 공손찬도 마찬가지였다. 다소 극단적인 평가의 경우, 공손찬은 당대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 도덕 자체를 거부'''하는 파천황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는 해설도 존재한다. 이러한 평가는 과도한 추측이지만, 전체적인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공손찬이 사대부를 비롯한 후한의 지배층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론하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 어쩌면 모친의 신분이 낮았던 것 때문에 차별을 받다가 자수성가하여 실력을 인정받고 출세한 과거에 원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상인들을 관료로 기용했던 것은 속국장사 시절부터 북방의 군권을 점차 사유화하는 과정에서 군납업을 맡았던 상인들과 결탁해 모종의 관계를 맺어오며 이들을 지지층으로 거느렸을 가능성을 감안해야겠지만 사대부를 배제하고 '''그나마''' 관료를 시킬만한 지적능력이 있는 계층이었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단, 대학자인 노식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본인 또한 학문에 능하다고 평가받던 공손찬이 유교적 가르침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고, 대놓고 거부했는지는 미지수에 속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예를 들어 공손찬의 참모 관정은 죽기 전 "군자#s-1는 남을 위태롭게 만들고 혼자 살아남지 않는다."는 말을 했다. 또한 유교의 '충(忠)'은 지배자들에게 더없이 유리한 프로파간다였므로 쉽사리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젊은 시절 장인 유태수가 좌천되었을 때 북망산에 가서 흠향하고 죽음을 다짐하였던 것이나 스스로 의종(義從)[25] 을 이끌고 적(오랑캐)를 친 것은 오상의 하나인 義[26] 에 해당한다.
그렇다 하나 유교적 가르침을 버린다는 것이 곧 모든 도덕관념을 버린다는 얘기는 아니므로 자세한 무언가가 있지 않은 이상 아리송한 지점에 놓일 것이다. 공손찬의 참모 관정이 죽기 전에 남긴 유언은 그가 공손찬이 아니라는 점, 유언이라는 점에서 애매한 부분이 있다. 또한 유교의 충이 지배자에게 더없이 유리한 프로파간다였던 것은 맞지만 공손찬이 딱히 충에 충실했는지 역시 미지수이며, 북해태수 시절 주자사와의 반목은 그가 충에는 별 감명을 못 받았던 것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의종을 구성했던 일이나 장인과의 사건을 통해서 공손찬이 유교적 가르침을 받들었다고 보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다. 장인의 좌천을 두고 분발을 다짐하는 것은 굳이 유교가 아니라도 가능하다. 북망산에 가서 흠향하는 것은 유교적 의례기도 하겠지만 도교와도 관련이 있다. 의종을 구성했던 것이 오상의 하나인 의에 해당한다고 하는 건... 고대 로마 제국에 효자나 효녀가 났다고 했을 때 그게 유교에서 말하는 효에 해당하겠지만 딱히 고대 로마인이 유교를 숭상해서 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든, 공손찬이 괴짜였던 것은 확실하다. 동탁도 무자비하나 점쟁이와 장사치를 참모로 기용하는 괴상한 짓을 벌이진 않았으며, 한족치고는 놀라울 만큼 기병 육성에 투자를 했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인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기병전술에 뛰어났던 국의에게 개돌했다가 털리고 나서, 원소의 정치 선전술에 깨갱하여 자신의 세력이 찢어지자, 아예 역경에 틀어박히는 것으로 괴상함의 절정을 이룬다.
위에서 공손찬과 비교되던 항우 역시 초나라 명문가 출신으로 고대 중국의 정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은 하고 있었을텐데, 자기 성깔대로 전횡을 일삼았단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우는 (이름뿐이긴 하지만) 자기 자신이 초나라 천자로 세운 초의제를 죽이거나 분봉을 개판으로 해서 과장 조금 보태서 중국 전체를 적으로 돌려버리는 정신나간 짓을 해서 스스로의 목을 졸랐다. 지식으로 아는 거랑 그걸 실천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인데, 공손찬 역시 머릿속에 유교적 지식이 있더라도 자기 내키는 대로 움직이는 것을 우선으로 둔 인물이라고 추측할 수도 있다.
5.3. 폭정
나중에는 포악함이 극에 달하여 백성들을 마구 학살하고, 부하들도 영내에서 재주가 알려진 인물들을 시기해서 반드시 트집을 잡아 죽이고, 심지어는 눈을 똑바로 뜨고 쳐다봤다는 이유로 죽여버리는 등 폭군의 모습을 보인다.
《후한서》를 쓴 범엽은 공손찬이 유우와 대립하지 않았다면 천하를 평정할 수 있었을 것이라 하였다. 설사 이런 계책에 유우가 협조하지 않았다 할지라도 일단 사로잡은 이상 조조가 헌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무력으로 협박해 유우를 실권 없는 바지사장으로 만들고 유우의 명분만이라도 가져오면 공손찬의 위상은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공손찬은 그런 정치적 사고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고, 사로잡은 유우를 조롱하며 죽여버리고 만다. 하지만 이로 인해 공손찬은 모든 명분을 잃고 공공의 적이 되어 폭군으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나중에 가면 부하들에게도 관정을 제외하곤 모두 그를 배신하여 버림받았고, 휘하의 대표적인 인재이자 명사였던 유비도 공손찬의 막장성을 보다 못해 서주에 터잡은 이후로는 그를 손절했을 가능성이 높다.[27] 유비가 도겸에게서 서주목을 양도받았을 때 원소에게 진등을 보내 허락을 구하는데, 원소가 유비를 칭찬하며 서주목 취임을 긍정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나마 중기 이후로도 공손찬의 편을 들어주었던 유일한 객장(용병)중의 하나가 유비였지만, 그를 포함해 상당수의 명사들은 공손찬이 막장 행각을 시작할 때 이미 등을 돌려버렸다.[28]
5.4. 원소와의 비교
원소의 또 다른 경쟁자인 조조의 전기인 무제기에 '원소'의 이름이 121회 나오는데 그보다 훨씬 짧은 공손찬전엔 원소의 이름이 105회가 나올 정도로 공손찬에게 원소는 그야말로 숙적이었다. 원소가 연의와 정사를 가리지 않고 가문빨만 있는 무능한 인물이라는 왜곡을 받기 때문에, 공손찬이 원소보다 역량은 뛰어나지만 가문의 힘이 없어서 패배했다는 해석이 종종 있다. 하지만 이건 굉장히 왜곡된 해석이다. 일단, 원소는 절대 가문빨을 가지고 성공한 인물이 아니었다. '''원소는 아예 서자 공손찬에게도 얼자(노비 자식)라고 까였던''' 인물이다.
초기의 공손찬은 군대조차 없었던 원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동북의 제왕이었지만 공손찬은 변방에서 명성을 쌓은 인물이라 당대 명사들과의 교류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믿을만한건 스승 노식의 인맥인데 노식이 원소에게 몸을 맡기면서 남은 노식계 인맥은 유달리 친하게 지냈던 유비밖에 없었고 그 유비도 나중엔 공손찬을 떠난다.[29] 이후 공손찬은 점쟁이, 비단장사, 말장수 같은 인물들을 신임하고 관료로 기용했는데, 이들이 용렬한 데다 난폭하고 부정축재에만 열심이라서 백성들이 싫어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손찬군의 유일한 모사 정도로 알려진 관정#s-1도 원대한 계획도 없으면서 아첨하기만 잘하는 소인배였지만 유독 공손찬에게 신임을 받았다. 애초에 공손찬 휘하에 명사가 없어 이런 인물만 기용할 수 밖에 없다는 한계도 있지만... 유비를 제외하고도 훗날 포텐을 터트리는 조운이나 전예같이 특급 인재도 있었는데 중용되지 못했다. 게다가 조운과 전예가 인격적으로 크게 흠이 없는 좋은 인물인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일이다.
6.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왠지 히로인 포지션이다'''. 역전의 용사 백마장군이라는 식으로 조금 띄워주는 부분도 있지만 여포나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쳐발리면서 위기를 겪고, 그 순간 유비 진영의 주연들에게 구출되는 굴욕씬이 많은 편이다. 소설에서는 공손찬의 능력을 보여준 일화는 완전히 짤려나가거나 약간 언급하는 수준에 그쳤다.
삼국지연의만 본 사람들은 공손찬이 성격이 좋은 호인이라고 믿어버리는 경우가 있지만, 정사에서의 막장 행각들을 보면 괴리감을 느낄 것이다. 유비의 친구라서 인격자가 되었다는 평가가 있는데, 사실은 능력치를 폭풍너프시킨 것 치고는 인격자 버프는 정말 미미하다. 막장스러운 행적이나 폭정이 삭제된 것은 버프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래봤자 조운에게 '''"원소와 다를 바 없는 인물"''' 이라고 까이는 수준이다. "포위된 자들을 구해주면 이후 병사들은 남들이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고 힘써 싸우지 않을 것이다." 라는 정신 나간 의지드립으로 병사들을 버리는 묘사 역시 정사와 크게 다르지 않다. 확실한 성인군자로 버프받은 도겸에 비하면, 공손찬은 아군에게 우호적이지만 여전히 선한 캐릭터는 아니다.
결국, 대충 넘어가는 피라미 수준이라 비중이 낮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소설에서는 유비 3형제와 조운에게 맨날 구해지는 불쌍한 캐릭터가 되었으므로, 오히려 나관중이 공손찬을 조롱하기 위해서 출연시켰다는 해석이 존재한다. 정사에 반동탁연합군에 참여하지도 않았던 공손찬을 일부러 참가시킨 이유도 여포에게 쳐발리는 역할을 맡기 위해서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비중이 줄어든 것도 현실적인 이유가 있는데 일단 이민족 토벌은 유관장 삼형제와 접점이 없는 부분이므로 크게 비중을 두어 적을 수 없다. 또한 주인공의 조력자인 공손찬이 너무 악하면 그와 친한 유비 역시 욕먹게 되므로 메인 악행 중 하나인 유우와의 전쟁 일화를 삭제할 수 밖에 없다. 문제는 이 둘 다 공손찬의 군사적 능력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결국 주연들과 접점이 생길만한 전투는 계교 전투 정도만 남게 되는데 이게 하필이면 정사에서 공손찬이 지는 전투이니.
구체적인 행적을 말하자면 호뢰관 전투에서 방열, 목순, 무안국이 패하자 철삭[30] 이라는 무기를 들고 여포에게 덤벼 몇 합을 싸우다가 패해 도망치는것이 첫 전투씬이다. 적토마를 탄 여포에게 쫓겨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찰나 장비에게 구출되면서 유관장 vs .여포라는 매치를 성사시키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후, 동생 공손월이 원소군에게 살해당한 것에 대한 원수 및 원소가 약속을 어기고 기주를 혼자 꿀꺽한 것에 대한 응징으로 계교 전투를 벌이지만, 서전에서 문추에게 굴욕적인 패배를 당하고, 죽기 직전에 조운의 첫 등장을 위한 장식품으로 활약한다. 이후에는 국의에게 관광을 타는 분위기에서 다시 조운의 활약으로 위기를 넘겨 역공을 시도하나, 이번엔 원소가 앞장서서 병사들을 독려하자 다시 관광을 탄다.
이때 구세주처럼 유관장 삼형제가 나타나 원소를 꾸짖고, 그들에게 가까스로 구출되는 장면으로 또다시 굴욕을 인증한다. 그나마 정사에서 패한 계교 전투는 은근슬쩍 승리하여 이득을 봤지만, 이건 유비 덕분이지 공손찬의 능력과는 상관없으므로, 의도를 보면 절대로 버프가 아니다.
이후 연의에서는 조조와 유비의 술자리에서 만총의 보고로 그의 최후가 묘사되는데 역경성에서 부하들에게 신망을 잃어 결국 패망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작 유비는 이런 공손찬의 죽음에 평소답지않게 열을 내며 원소를 무찔러 동문수학한 형의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조조에게 간청했고, 이미 유비가 천둥번개에 벌벌 떠는 모습을 본 조조는 속으로 '지 주제에 무슨 원소를 이기겠다고..'라고 비웃으며 군사를 내줘 출진을 허락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허도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비의 쇼였고, 결국 공손찬의 사망소식은 이렇게 유비가 조조의 손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7. 미디어 믹스
[1] 다르게 백마장사(白馬長史)라고도 한다. 공손찬이 끌고다니는 부대 이름은 백마의종(白馬義從)[2] 사실 圭와 珪는 같은 글자로 취급되는 글자라 구분할 이유가 없다. 珪는 圭의 고자古字로, 圭보다 좀 더 '천자가 제후를 봉하거나 제사를 지낼 때 쓰는 구슬'이라는 원 뜻에 가까운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슬은 주나라 및 춘추시대에 쓰이던 제례 도구로, 한나라 말 기준으로도 역사 속의 물건이다. 일단 공손찬 본인은 圭로 썼다는 근거로는 볼 수 있다.[3] 수도인 낙양으로 가서 해당 군의 군사, 정치, 법률, 행정, 경제, 풍속 등 모든 정책 현안을 종합해 보고하는 관직이다.[4] 다만 자치통감은 정사 삼국지의 기술도 받아들여 유주, 기주, 청주뿐만 아니라 서주까지 피해를 입었다고 기술했다.[5] 삼국지 공손찬전에는 유우가 유주에 오기전에 속국오환의 탐지왕이 종족들을 이끌고 공손찬에게 항복한 후 중랑장이 되고 도정후에 올랐다고 나오나 여기서는 유우가 온 후 항로교위, 도정후가 되었다는 후한서와 공손찬이 유우가 온 뒤에 중랑장이 아니라 항로교위였다고 기록하는 자치통감을 따른다.[6] 우북평, 요서, 요동(속국) 세 군의 오환을 뜻하며 반란을 일으키거나 원소에 협력하기도 하고 후일 위나라의 기병으로도 활동한다. 원소와 가깝고 유우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점에서 삼군오환은 안 그래도 원수인 공손찬을 치기 위해 유우 사후에 반 공손찬 연합에 참가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7] 돌기(突騎)는 '적진에 충돌할 수 있는 정예기병'이란 뜻인데 주로 후한시절 유주 지역이나 오환족과 관련되어 쓰였다.[8] 분무장군의 뜻은 무력을 떨치는 장군이라는 거창한 칭호지만, 실상은 장군직 중 최하위 직급인 잡호장군급의 관직이다. 다만 이건 정사 삼국지 공손찬전 기준이고, 후한서에 따르면 삼국지와 같이 유우가 이 기간에 대사마를 받은건 맞지만 공손찬이 분무장군 관직과 계후 봉작을 받은건 191년 30만 황건적을 잡은 후이다. 그러나 자치통감조차도 이 문제를 확실히 어느 쪽이 맞는지 적지 않았다. 원나라의 대학자 학경의 속후한서에 인용된 영웅기 기록에서는 (190년) 동탁 토벌전에서 적에 의해 격파당한 유비가 '분위장군' 공손찬에게 갔다고 쓰고 있다. 분무장군과 분위장군은 서로 다른 잡호장군 관직이긴 한데 같은 급의 관직인데다가 무(武)자와 위(威)자는 붓으로 써놓으면 얼핏 비슷하기 때문에 학경 속후한서가 인용한 영웅기의 '분위장군'이 '분무장군'의 오기라고 보면 공손찬이 분무장군을 받은건 정사 삼국지에서 나온대로 동탁이 낙양에 들어간 직후가 될 것이다. 본문도 이 기준에 따라서 작성한다.[9] 원소는 당시 하간에서 멀리 떨어진 사예주 북부인 하내에 있었다.[10] 황제는 아니지만 이 시점에서의 영상서사는 사실상 황제의 직무대행에 가깝다.[11] 사실상 헌제 자신이 유우를 스스로의 섭정으로 지명한 것이다.[12] 소설에서는 원소가 공손찬에게 기주를 같이 공격해 공평히 나누자고 제안한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는 무엇을 조건으로 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다.[13] 자치통감에 따르면 12월.[14] 주석에 따르면 청주 평원군과 기주 발해군의 경계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5] 다른 번역: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기에 답하기를, "과거에 이민족과 황건적을 때려잡을 때는 손바닥에 침을 뱉기만 해도 천하를 쉽게 평정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오늘날 병란이 시작되고 보니 내가 해결 가능한 수준이 아니오. 장병은 쉬게 하고 농사엔 힘써 흉년에 대비하는 것이 가장 낫소. 병법에서도 백 개의 누는 치지 않는다 하였소. 현재 우리 진영엔 누로(樓櫓, 지붕이 없는 망루)가 천 리이고 비축한 곡식도 삼백만 곡(斛)이니 때를 기다리기에 충분할 것이오."라 하였다.[16] 주앙을 공격한 일, 후한서와 삼국지 본전에서는 주앙을 공격하고 발해태수의 인수를 주었지만, 한진춘추 이 부분에선 발해태수 인수를 먼저 준 것으로 되어 있다.[17] 조기를 통해 화해한 193년 1월의 일.[18] 업의 북쪽이나 북서쪽으로 장연 등 흑산적이 활동하던 태행산맥 일대를 일컫는 말.[19] 영웅기엔 '국의가 193년 원소, 공손찬이 화해한 후 뒤에 공을 믿고 교만방자하게 굴었는데 이에 원소가 그를 죽였다' 했다.[20] 맹명(孟明)은 춘추시대 진나라의 명신 백리해의 아들이다. 본명은 백리시(百里視), 자(字)가 맹명이다. 효산(崤山)에서 진(晉) 정벌에 실패하였으나 진목공은 그를 등용하였는데 결국 진(晉)의 팽아(彭衙)땅을 회복하여 수치를 갚았다.[21] 여기서 원소는 공손찬을 족하라고 표현한다.[22] 이후 관정은 그나마 충성심은 있었는지 역경루 함락으로 공손찬이 자살하자 공손찬을 말린 것을 후회하고 원소군에 돌격해 싸우다가 전사하고 목이 베여 걸리는 최후를 맞았다.[23] 중기병이 경기병의 기동성에 말려드는 경우가 많다. 중기병은 주로 보병과 궁병에게 강하다.[24] 궁기병은 물론 강력한 병과이긴 하지만 무적까진 아니었다. 잘 훈련된 보병이 대열 흐트러뜨리지 않고 버티면서 투사무기로 대응하면 거기에도 약했다, 창기병 돌격에도 약하다. 흉노식 궁기병 전술은 이미 한나라가 파해법을 마련했다. 실제 이후 유목민 제국들의 군대는 일반적인 인식보다 중장기병의 비율이 높은 편이었다.[25] 양주의종과 같은 것들은 오랑캐 귀순 용사를 의미하나 여기서의 의종은 의로 뭉친 종사에 해당한다. 즉 자원병. 또 <<한서>> 이현의 주에 50세 이상의 즉시 소집가능한 잡색군의 의미로 쓰인 것 등이 있다.[26] 부당함을 참지 않고 일어서는 것을 말한다.[27] 유비는 사실 청주 지역을 정벌할 때 전해의 부관으로 파견되었으며, 서주 구원 역시 전해와 같이 했으나 전해는 유비를 남겨두고 돌아갔다. 유우가 죽은게 193년 겨울의 일이고 유비가 마침 서주에 계속 남은 것이 그 시점 직후라는 점, 조운이 형의 상을 핑계로 낙향했던 것 역시 그 시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의미심장하다. [28] 다른 명사들에 비해 중앙정계와의 커넥션이 적은 대신(유비가 중앙에서 연줄을 갖게 된 건 조조에 의해 헌제에게 소개받고 좌장군 및 황숙 칭호를 듣고 나서다.) 황건동란 이전부터 공손찬과 친했다고 서술될 정도로 공손찬과의 커넥션은 충실했다. 유비 같은 이가 등을 돌릴 정도면 볼장 다본 셈[29] 물론 공손찬 본인이 황족 유우를 죽이고 폭정을 거듭했으므로 이걸 가지고 유비를 비난할 수는 없다.[30] 삭은 서양의 랜스에 대응하는 무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