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탑
[image]
1. 개요
金銅塔. 금동대탑 또는 개태사 금동대탑이라는 명칭으로도 알려져 있다. 금동탑은 고려시대 전기인 10~11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 155cm의 금속제 탑 형태로 된 '''공예품'''으로 개태사지[1] 에서 출토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금속으로 작은 불탑을 만들어 절에 바치는 풍습이 있었고, 이렇게 절에 공양된 금속제 탑들은 대개는 크기가 크지 않다.[2] 하지만 본 금동탑은 현존하는 금속제 소형 불탑들 중에서 크기면에서나 미적인 수준에서나 단연 백미이다. 또한 금동탑은 비단 금속 불탑에 한해서 뿐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고려 미술의 정수라고도 평가 된다. 금동탑은 국보 제213호로 지정되었고, 현재는 삼성 리움이 소유 및 소장전시 중이다.
2. 상세
금동탑은 2층으로 된 기단과 그 위에 올려진 5층탑으로 구성된다. 본래는 두어 개 층이 더 있었으리라 추정하므로 높이도 지금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3] 금동탑은 청동으로 만들고 위에 도금을 입혔기에, 만들어진 지 오랜 세월이 흐른 현재는 금빛이 다소 바래긴 하였지만 여전히 화려한 본래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탑의 각 층은 각각 따로 주조한 뒤 합친 것 같다.[4] 금동탑에서는 고려시대 목탑과 석탑 양식이 모두 있다. 기단과 머리장식에서는 석탑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고 난간이나 지붕 등 탑의 전반적인 형태에서는 목탑의 형태가 나타난다.[5]
금동탑이 고려 미술의 정수로 꼽히는 것은 이 탑에서 드러나는 정교한 금속공예 기술 때문이다. 본래의 개태사가 폐사되고 땅 속에 파묻히면서 여기저기 손상을 입긴 하였지만, 금동탑에 있는 장식들은 세밀하고 화려하게 치장되었다. 아래층 기단에는 연꽃잎을 새겼고 상층 기단은 난간으로 둘렀으며 1층 탑 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놓았다. 탑의 1층에는 문과 창을 세밀하게 조형했다. 그 상층부터는 지붕 위에 놓인 난간의 안쪽에 있는 탑신에 불상을 새겼다. 2층의 각 면에는 부처 4좌를, 3층과 4층에는 3좌를, 5층에는 2좌를 새겨서 각 층의 크기에 맞게 불상의 숫자도 줄어든다. 각 층의 지붕에는 기와와 처마, 추녀#s-1마루 위에 놓인 잡상 등을 묘사했다. 추녀의 끝에는 몇 군데에 풍경#s-2이 달렸고 5층 지붕의 한쪽 면에는 용머리 두 개가 있다. 원래는 모든 층의 추녀 끝에 용머리와 풍경이 달렸을 테지만, 현재는 풍경과 용머리가 일부만 남았다. 탑의 머리장식 역시도 일부만이 남았다.[6]
금동탑은 고려시대 금속공예 기술의 수준이 상당하였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귀한 자료로, 장식된 금속 조형물들의 수준과 그 세밀한 묘사 정도가 대단히 높아 예술품으로서 가치가 충분하다. 또한 현재 고려시대 목조 건축물 중 남은 것이 거의 없고, 목탑은 아예 단 한 개도 없으므로 금동탑은 당시 목조 건축의 양식을 추정할 수 있는 대단히 귀중한 자료다. 금동탑은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1984년 8월 6일 국보 제213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금동탑에 관한 논의에서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이 유물이 정식적인 학술 발굴로 출토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금동탑은 1960년대 개태사 옛터에서 도굴꾼이 몰래 도굴했다가 현재로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경로를 통해서 삼성의 이병철 전 회장이 얻었고, 이후 이 전 회장이 리움미술관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호암미술관에 1987년 기증하였다고 한다. 리움에서도 개태사 옛터에서 출토된 것이라고 소장품 전집에서 밝힌다. 이 때문에 개태사 측이 리움 측에 지속적으로 반환요구를 하는 중이다. 현재도 개태사를 방문하면 삼성을 규탄하는 플래카드를 볼 수 있다. 2010년 반환소송을 하기도 했으나 탑의 제작연도, 제작자, 소유자, 보관 장소 등에 관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2011년 대법원에서 최종패소하였다. 리움 측에서는 이병철 전 회장에게 기증받아 정당하게 소유했노라 주장한다. # 하지만 이병철의 골동품 사랑과 전력을 고려해 본다면 아마도 도굴을 지시했거나 도굴된 것을 매입했을 가능성이 크다.
3. 기타
금동탑은 2014년 4월 1일에 발행중단된 2000원짜리 보통우표의 도안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4. 바깥고리
5. 국보 제213호
이 금동탑은 의장이 화려하고 정교한 면에서 법당 내에 모셔둔 사리탑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동탑은 대개 높이가 20∼30㎝ 정도이고, 50㎝가 넘는 것이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규모가 큰 편이다. 더구나 현재 남아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원래 높이는 지금보다도 더 높았을 듯하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지만 조각은 그리 뛰어나지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풍탁(風鐸)을 달았으나 일부는 결실되고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목조 건물 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대형의 금속공예품이면서 세부표현이 정교한 점에서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