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태사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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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泰寺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 111[1] 에 있는 사찰이다. 인근 개태사역이라는 역명의 유래가 된 절이기도 하다. 현재 존재하는 개태사와 처음 창건시의 개태사는 위치가 약간 다르며, 현 개태사는 구 개태사지 아래 들판 한가운데에 있는 반면 구 개태사지는 산자락에 위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개태사지는 충남도기념물 제44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역사
고려 태조 왕건이 일리천 전투에서 후백제를 멸망시키고 삼한을 통일한 것을 기념(+덤으로 전몰 장병들을 위문)하기 위해 지은 절이다.# # 태조 19년(936년)부터 짓기 시작해 4년 만인 23년(940년) 완성되었으며, 개태(開泰)라는 절 이름은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泰)를 열었다(開)''''는 뜻이다.
절이 완성된 뒤 절 뒤쪽의 산은 천호산(天護山)이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완성된 해 12월에 낙성을 기념하는 법회가 있었는데, 이 법회에서 '''태조 왕건 자신이 직접 발원문을 지어올렸다'''고 한다. 이 발원문은 <동인지문사륙>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개태사가 위치한 곳은 천혜의 관문이라 지정학적으로도 중요한 지점이었다.
태조 왕건 자신이 발원문을 지은 만큼 고려 왕조가 존재하던 내내 왕실의 존숭을 받았고, 태조 왕건의 어진이 절에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고려 후기의 문인 이규보가 1199년 당시 동경(경주)과 명주(강릉) 일대에서 일어난 농민봉기를 진압하기에 앞서 개태사를 찾고 태조의 어진 앞에서 반란을 진압할 수 있기를 기원하는 글을 올렸으며, 공민왕 때에도 수도를 강화도로 옮겨야 될지 말지를 개태사에 대신을 보내서 점을 치도록 했다고 한다.[2] 지금은 개태사 차원에서 자체적으로 영정을 그려 봉안하고 있는데 이는 태조(고려) 항목 참조.
개태사가 몰락하게 된 원인은 우선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을 들 수 있다. 우왕 2년(1376년) 부여로 해서 침범한 왜구가 공주에서 고려군을 패배시키고 개태사까지 밀고 올라왔고, 당시 양광도원수였던 박인계가 개태사 앞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싸움에서 그만 낙마해 죽기도 했다. 이때 개태사도 왜구에게 함락되어 절이 박살이 났다.[3] 우왕 9년(1383년)과 14년(1388년)에도 왜구가 개태사에 주둔했었다.[4]
또 고려 말 왜구의 침입 외에도 조선 중기 그 유명한 정여립의 난의 주동자로 알려진 정여립이 이 절에 왔다가 "손이 되어 남쪽 지방 노닌 지 오래인데/계룡산이 눈에 더욱 환하여라/무자ㆍ기축년에 형통한 운수 열리거니/태평 성세 이루는 것 무엇이 어려우랴"라는 시를 썼다고 하는 데서[7] 당연히 정여립이 역모죄로 죽임을 당한 뒤로는 역도들의 소굴로 여겨져 개태사가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林回溪轉越橋矼 숲 사이 계곡을 돌고 돌아 돌다리를 건너니
罨戶花光暗似幢 문을 가린 꽃 그림자가 깃발처럼 어둑하네
過客問程登古砌 지나는 손은 길을 물으러 섬돌을 오르는데
居僧紉衲坐晴牕 머무는 중은 창 앞에 앉아 가사를 깁는구나
雲煙此日空遺跡 운연이 스쳐간 듯 오늘은 흔적만 남았지만
棟宇當時信少雙 큰 전각들은 당시에 참으로 둘도 없었다네
堪笑王公眞作俑 나쁜 전례 만든 왕공[5]
이 참으로 가소로워라幾多苗裔信紛哤 수많은 후손들이 그 얼마나 떠들어댔던고
성현(成俔, 1439년∼1504년), '개태사' <허백당시집> 권6[6]
현재 개태사 위치는 세종 10년(1428년)에 옮겨진 것이며, 건물들은 1934년에 김광영이라는 스님이 개태사를 중창할 때 만들어진 것이 대부분으로 개태사가 처음 지어졌을 당시의 유물은 개태사 삼존석불이라고 불리는 석불과 5층석탑이 있다.
현재 논산시에서는 논산 8경의 하나로 개태사를 지정해 관광 코스로 이용하고 있다.
3. 주요 유물
개태사 탐방
3.1. 개태사 가마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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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는 크고 아름다운 가마솥이 유명하다.
개태사의 가마솥은 '개태사 철확(鐵鑊)'이라는 이름으로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1호로 지정되었는데, 직경 289cm, 둘레 910cm, 높이 96㎝, 두께 3cm이다. 현지 전승에서는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죽은 영혼에게 '''이승에 있을 때 개태사 가마솥과 관촉사 은진미륵을 봤느냐'''고 묻고 봤다고 하면 칭찬하고 못 봤다고 하면 살면서 그것도 한 번 안 보고 뭐 했냐며 버럭 화를 낸다고...
일제 시대인 1935년에 시라이(白井)라는 일본인이 이 솥을 탐내서 일본으로 훔쳐가려고 부산항까지 가져갔는데 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솥이 사흘 밤낮을 큰 소리로 슬피 울기 시작했고, 겁에 질린 인부들이 말리는 데도 듣지 않고 솥을 화물선에 실으려던 시라이는 '''번개 맞아 죽었다고''' 한다.
그 해 4월에 경성에서는 조선산업박람회가 있었는데 이 박람회장에 개태사 가마솥도 함께 전시되었고, 전시가 끝난 뒤에도 문화재로써 그대로 경성박물관(지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이번에는 전국적인 가뭄으로 모든 농작물이 말라 죽어가자 주민들은 개태사 가마솥을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니 가마솥을 원래 위치에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고 열차편으로 연산역까지 가져오자 비가 쏟아져 그 해는 풍년이 들었다고 한다.
해방 후에는 연산공원(連山公園)에 옮겨 놓았으며, 1981년 6월 충남문화재위원회가 이 가마솥을 옛 절터로 옮겨도 좋다고 승인, 연산리 주민대표와 신도대표의 원칙 합의하에 1981년 8월 22일 솥은 개태사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도 개태사 철확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3.2. 금동탑
[1] 舊. 천호리 29-1[2] 개태사의 태조 어진에 대한 제사는 공양왕 3년(1391년), 그러니까 고려가 멸망하기 직전에도 있었다.[3] 여담으로 유명한 최영의 홍산대첩이 이때의 전투와 관련이 있다. 박인계가 개태사 앞에서 왜구에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최영이 "내가 가서 왜구를 막겠다"고 자청해 출정했고 홍산에 진을 치고 있던 왜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4] 출처: 고려사절요.[5] 고려 태조 왕건을 가리킨다.[6] 여담으로 '''불교에 너무 빠져서 나라 말아먹은''' 암군의 대명사인(...) 양 무제가 세운 절 이름에도 개태사가 있다 보니...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이걸로도 까댔다.[7] 정감록으로 유명한 '''정도령의 도읍지가 다름 아닌 개태사 자리'''라고 했다...만 세종 때에 연산현의 현청을 개태사로 옮기려는 계획이 있었다가 '''개태사 자리는 현청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이의가 있어서 중지되었기 때문에# 한 고을의 관청 부지로도 못 쓴다고 여겨지던 곳에 정도령이 도읍을 정할 리가... 뭐 계룡산이 가깝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