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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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안후이 성 지우화산에 있는 김교각의 동상. '''높이가 97미터'''로, 중국 불교에서 그 위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름
金喬覺(김교각)
생몰년도
697년~794년
1. 개요
2. 생애
3. 그의 정체에 대한 몇가지 설
3.1. 성덕왕의 장남 김중경이라는 설
3.2. 반론
4. 현재


1. 개요


통일신라신라 왕족 출신의 승려. 중국으로 건너가 오랜 기간 승려로 활동했고 입적 후 지장보살과 동격으로까지 추존됐다.

2. 생애


신라는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 이후 독실한 불교 국가가 되었고, 의상이나 진흥왕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왕이나 왕족이 직접 머리를 깎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김교각의 출가 이전의 정체는 아직 확인된바 없다.
그가 어린 시기에 왕실에서 권력 싸움이 크게 일어났고, 환멸을 느낀 김교각은 당나라로 건너가 지우화산(九華山:구화산)에 자리를 잡고 사람들을 구제하며 불법을 베풀다가 794년 입적했다. 사후에는 지장보살과 동격으로까지 추존됐다.
중국 4대 불교명산들은 각기 모시는 보살들이 있다. 쓰촨 성에 있는 어메이산(峨眉山:아미산)은 보현보살도량[1](普賢菩薩道場)이고, 저장 성 푸투오산(普陀山:보타산)은 관음보살도량(觀音菩薩道場)이고, 산시 성 우타이산(五臺山:오대산)은 문수보살도량(文殊菩薩道場)이다. 그런데 이 세 산의 보살들은 모두 인도 불교에서 따 온 부처님 제자들을 모신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지우화산의 김교각은 역으로 신라에서 건너온 사람이 지장보살의 현신으로 인식되어 김교각이 곧 지장보살이 되는 구조다.

3. 그의 정체에 대한 몇가지 설



3.1. 성덕왕의 장남 김중경이라는 설


일반적으로 이렇게 가장 알려져 있으며#### 813년 중국 당나라 비경관(費冠卿)이 쓴 구화산화성사기(九華山化城寺記) 등에 근거한다. 비경관의 기록에도 신라의 왕자라고만 되어있고 정확히 어느 사람인지는 써 있지 않지만. 그곳의 출생 연대로 유추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을 참조해 볼 때 김교각은 서기 697년 신라 제32대 효소왕 4년 서라벌 궁궐에서 태어난 김중경(金重慶)이라는 것이다. 주로 한국과 중국의 불교계에서 이 설을 믿고 있다.
그렇지만 김교각의 본국 측 기록이랄 수 있는 『삼국사기』에서는 김중경이 717년에 사망했다고 나와있다.[2] 사망년도가 분명한 인물이 당나라의 승려가 된다? 납득이 어렵다. 게다가 김중경의 시호에 포함된 상(殤)이라는 글자는 일찍 죽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실 죽지 않고 살아서'''라는 가정 자체가 틀리게 되어버린다.

3.2. 반론


성덕왕 시절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김수충(金守忠)이라는 설이 있는데 유교적 관료의 성격을 띄어서 당에서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살아갔을까 모르겠다.[3][4]
이와 관련해서 중앙일보 1995년의 어떤 기사

[謝교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김지장이 성덕왕의 다섯아들중 맏이인 김수충으로 보았다.이는

김수충이 성년인 18세(성덕왕 13년.714년)에 당나라에 건너가 숙위가 되었고 뒷날 귀국한 뒤

사서에 그의 기록이 나오지 않는 점으로 미뤄 추정됐다.특히 謝교수는 김수충이 성덕왕이 왕이 되기 전에 맞은 성정왕후 소생이었기에

신라 하대의 복잡한 왕위 계승에서 적자로 인정받지 못해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승려가 됐을 것으로 보았다.

이런 점을 고려해 謝교수는 김수충의 생몰연대를 696~794년으로 잡았다.

그의 이런 주장은 중국이나 국내학계에 별다른 이론없이 받아들여져 금년을 김지장 탄생 1천3백주년으로 잡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최근 소설가 이순창(李舜彰)씨가 이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김교각은 보질도태자다」논문).

李씨는 謝교수의논문을 수용하게 되면 김지장(김수충)개인의 기록은 연대기적으로맞을지 몰라도 선대(先代)의 기록이 모두 엉망이 된다 고 보았다.

김수충의 출생연대를 696년으로 잡게 되면 아버지인 성덕왕이 8세에 성정왕후와 사랑에 빠졌고 이어 김수충을 낳았다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http://news.joins.com/article/3121334

이 설을 채택하면 생몰년이 689~789년이라고 하는데 삼국유사에 기록된 부분에서 보질도태자인데 오대산에서 보살이 된건 김교각과 유사하다고 한다.
다만 효소왕의 두 동생들 중에 태자가 존재했을까의 의문이 들기도 한다.
아래 주장을 한번 보자.

따라서 李씨는 『삼국사기』의 기록보다는 『삼국유사』의 「오대산 5만진신」의 기록과 중국측 사료를 검토할 때 신문왕의 둘째 아들인 보질도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제안했다.이 경우 김지장의 생몰연대는 689~789년이 된다.보질가 오대산에서 즐겨 차를 부처님께 공양한 점은 오늘날 구화산 차가 김지장이 한국에서가지고 갔다는 점과 상통하며 또 구화산의 암자이름이 오대산의 암자들과 동일하다는 점에서 李씨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해결의실마리를 쥐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무튼 謝교수나 李씨의 새로운 주장이 모두 가설이라는 점에서이에 대한 구체적 연구가 한국 불교계에서 활발하게 제기돼야 한다는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출처: 중앙일보] 등신불 김교각은 신라 보질

삼국유사에 나오는 보질도, 즉 성덕왕의 형이 김교각라고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보질도는 알천과 동일인물로 배정되는 것이 문제.
화랑세기를 토대로 김문왕과 동일인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애초에 위서이므로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4. 현재


한국에는 별로 안 알려져 있지만 중국에서는 '''고선지는 몰라도 김교각은 안다'''라고도 할 정도라고 한다.

Xinhua said inspiration for the Bodhisattva statue has been taken from an ancient Korean prince-turned-monk who resided on Jiuhua Mountain.

Kim Kiao-kak, from the Korean Peninsula's Silla kingdom, is recorded as having retired to the mountain to become a monk in 719AD and spent 75 years there until his death at the age of 99.

According to Buddhist tradition, Bodhisattvas, having attained enlightenment, renounce nirvana in order to help humanity on its pilgrimage.

ㅡ 출처 : 2001년 BBC 뉴스

심지어 세계 최대의 조각상 노산대불도 김교각에게서 영감을 따 왔다고 한다.
2016년 4월에는 대구 팔공산 근처에서 가짜 김교각 등신불 사건이 일어났다.http://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3670667&plink=ORI&cooper=DAUM

[1] 불교에선 場을 '장'이 아니라 '량'으로 읽는다.[2] 성덕왕 16년(서기 717) 6월, 태자 중경이 죽었다, 시호를 효상(孝殤)이라 하였다.#[3] 성덕왕 16년(서기 717) 가을 9월, 당나라에 들어갔던 대감 수충(守忠)이 돌아와 문선왕(文宣王, 공자)과 10철(十哲) 및 72제자(七十二弟子)의 초상화를 바쳤으므로 대학(大學)에 안치하였다.[4] 성덕왕 13년(서기 714) 2월, 상문사(詳文師)를 통문박사(通文博士)로 고쳐 표문을 쓰는 일을 맡게 하였다. 왕자 김수충(金守忠)을 당나라에 보내 숙위(宿衛)하게 하니, 당 현종이 집과 비단을 주어 그를 총애하고, 조당(朝堂,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