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족

 


Royalty, 王族
1. 개요
2. 상세
3. 경칭
3.1. 조선 · 대한제국
4. 창작물에서
5.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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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군주국에서 의 가족이나 왕의 혈통이 이어진 친척을 말한다. 왕실의 일원이다. 군주가 황제일 경우는 황족이라고 쓴다. 군주국이 아닌 공화국은 황족/왕족의 존재를 법적으로 부정하고 금지하므로 공화국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2. 상세


동양권에서는 중국 기준으로 부계혈통의 경우 군주의 5대손까지, 모계혈통의 경우 딸의 자녀, 즉 외손자 정도까지만 왕족의 일원으로 치고 있다. 한국에서는 고대에는 그나마 계층구분 기록이 명확한 신라의 경우 성골~진골이 일단은 왕족 개념에 해당하지만 그 범위는 중국이나 후대 조선에 비해 굉장히 넓었던 것으로 보인다.[1][2] 부계와 모계가 모두 왕족이어야만 했다는 설도 있지만 가야계 진골 문명왕후처럼 이래저래 예외가 있어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니다. 이후 조선시대부터는 위 중국과 똑같은 범위의 왕족개념을 받아들여 정착시켰다.[3]
서양권에서는 남녀 구분없이 계승권이 가까운 사람[4]을 왕족으로 쳐주지만, 여기서도 기본적으로는 부계혈통을 더 쳐주는 일이 많다.[5] 모계혈통의 경우 직계후손이 아니면 따로 왕족으로 지정을 해줘야 하는 관습이 있다. 왕의 혈통을 받았으나 왕족의 범위에서 벗어나면 귀족의 대우를 받는다. 다만 현대까지도 왕실이 남아있는 국가들 중에는 21세기 들어 부계혈통을 우선시하기보다 절대적 장자상속제를 택하는 국가들이 늘고 있는 추세라 이 부분에서도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도 있다.
왕족이나 황족은 다른 신하들과 구별되어야 하므로 작위를 받게 되어있는데, 신라 때는 고유의 작위인 갈문왕 등이 있었으며, 중국 역대 왕조와 대한제국의 경우는 가까운 황족에게 친왕의 작위를 수여했다.[6] 대한제국 이전의 조선에서는 왕과의 촌수에 따라 대군, [7], 수[8], 정, 부정의 칭호를 수여했다. 원 간섭기 이전의 고려에서는 , . 서양의 경우는 프린스프린세스를 수여.
왕족 자체가 혈통이라는 이름의 지원을 타고났다고도 할 수 있다. 때문에 엄청난 호강을 누릴 것 같지만, 예나 지금이나 항상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왕권체제이던 옛 시대에선 그야말로 군주란 모든 것이었기 때문에, 남자 왕족이면 90%의 확률로 왕위에 관심이 있었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거의 모든 것을 걸었다. 말하자면 왕의 자리는 항상 누군가 노리는 목표였고, 왕의 암살시도가 일어나면 항상 제일 먼저 의심의 화살은 주위 왕족들에게 향했다. 실제로 반란시도는 왕족들이 많이 했기 때문에 아주 틀린 것도 아니다. 물론 몰살당하면 끝장이다. 또한 왕위에 관심없던 왕족 입장에선 재수없게도, 전혀 모르는 이들이 그의 이름을 팔아서 역모를 꾸몄다 들키도, 운이 좋아야 유배형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사였다. 이 경우 다른 역적들이 거열형/참수형(+효수)에 처해진다면, 왕족은 사약이나 교수형으로 그나마 사지를 보존해주는 정도였다.
조선의 경우, 경국대전의 종친사환금지법에 따라, 왕족은 과거를 볼수 없고, 실권직도 받지 못했다. 벼슬길에 오르더라도 명예직이나 한직으로, 청요직이나 당상관, 정승에 오를 수 없었으며, 5대 이상 지나야 종친에서 벗어나 과거를 볼 수 있었다. 조선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왕족도 정치인이나 공무원이나 하원의원이 될 수 없는데, 되고 싶다면 신적강하나 왕족 포기나 평민이 되어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왕족들은 예술가, 군인이 되거나 학자가 되는 길을 걷는게 다반사다.[9]
이렇듯 군주의 가족이나 친척이므로 왕조 자체에 대한 충성심은 가장 높으나,[10] 군주의 계승권을 가지고 있으므로 반란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보통 군주의 관리를 받으며 생활한다. 원래 신라-고려-조선 초까지는 왕족들도 다른 신하들처럼 일반 관직에 나갔으나,[11] 조선 성종 때의 구성군 사건 이후 '종친사환금지법' 이 생기며 왕으로부터 5촌까지는 명예직 외의 관직은 하지 못하게 되고, 왕실에서 주는 봉록으로 먹고 살게 되었다. 고려의 경우는 왕족들의 힘이 가장 약했는데, 초기는 제법 강했으나, 이후 절간에 승려가 된다던가,[12] 반란군의 얼굴마담이 된다던가, 원나라에 사신으로만 간다던가, 볼모로 잡히는 신세가 되는 등, 그야말로 안습이었다. 특히나 대령후 사건의 경우는, 왕족의 권위가 문벌귀족이 비대해짐에 따라 얼마나 추락했는지 여실하게 보여준 사건이라고 볼수 있다.[13] 그로 인해 의종 시기를 거쳐 무신정권 때는 왕족의 권위가 더욱 바닥으로 추락했다. 왕의 권위가 실추됨과 동시에 왕족들의 권한도 덤으로 실추될 수밖에 없었다.[14]
그리고 관직에 나가지 못하니, 왕위에서 먼 왕족들은 달성할 목표가 없다고 공부를 열심히 안해서, 심하면 왕족임에도 자기 이름조차 쓰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왕위 계승권이 있는 사람이 매우 똑똑하다거나 열심히 공부한다거나 하면 왕위에 욕심이 있는게 아닌가 해서 왕과 신하들에게 찍힐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차피 왕족의 경우 무식해도 먹고 사는건 보장되었기에 별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15] 관직에 제한을 당하고 그렇다고 왕족이라는 지위 때문에 평민의 업종을 할 수도 없는 마당이라 왕족들은 한마디로 특권을 누리는 백수라고 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기에 그만큼 사고를 많이 쳐 실록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건을 보면 하나같이 왕족이 끼어있을 정도이다. 태생부터 꿈도 없이 그저 자기 본능대로 살기 알맞은 환경에서 살아와 난봉꾼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일부러 역모에 휘말리지 않기 위해 적당히 자기 평판을 떨어뜨리는 경우도 있었다. 특히 역모가 발생할 경우 역모 세력이 자기 멋대로 어느 왕족을 왕으로 추대하는 바람에 그 왕족이 영문도 모른채 사약 배달을 받는 경우가 많았기에 아예 왕으로 추대조차 못받을 정도로 사고를 치되 그렇다고 왕에게 보고되어 유배될 정도의 선을 넘는 사고를 치면 그것도 곤란하니 적당한 수준의 사고를 쳐놔 평판을 떨어뜨려놓는게 왕족들의 보신책이었다.
현대 대한민국민주공화제를 추구하기에 황족/왕족의 존재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부정하고 있다. 대한민국뿐만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채택한 웬만한 공화국들은 법적으로 황족/왕족의 존재를 부정한다.

3. 경칭



3.1. 조선 · 대한제국


왕자왕녀의 경우, 혼인 전 궁에 살 때는 '아기씨'로 불렸다가, 혼인을 하면서 봉호를 받으면 왕자는 '대군 / 대감', 왕녀는 '공주 / 옹주 자가'로 불렸다.
현대 사극에서는 아무 왕족에게나 마마라는 호칭이 붙는데, 완전히 틀렸다! 만약 어떤 종친을 마마라고 부르면 당장 반역 내지는 역모에 연루되어 목이 날아가도 할 말 없다. 왕족에 대한 경칭들 중 가장 높은 존칭인 마마왕비, 상왕대비, 세자라는 매우 제한된 왕족만 사용했으며, 이마저도 세자빈의 경우 조선 후기에는 '마마'보다는 '마노라'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 경칭에 대한 분류가 모호해져 마마의 사용도 이루어졌다는 얘기가 있지만, 사실무근이며 야사에 불과하다.
1895년(고종 32년)에 조선이 자주국임을 선포하면서 '전하'로 부르던 군주를 '폐하'로 불렀고, 그 때부터 왕족을 부를 때 '전하'를 사용한 듯 하다. 〈독립신문〉을 보면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이전인데도 의화군(의친왕)흥선대원군을 가리켜 '전하'라고 한 기사들이 있다.[16][17]
대한제국 수립 후에 황태자를 제외한 고종의 아들들은 친왕이 되었고, 친왕은 '전하'로 불렸다. 명성황후를 대신해 사실상 황후 역할을 하던 황귀비 역시 '전하'라고 불렸다.
작위를 가진 나머지 방계 황족들(고종 직계가 아닌 사람들)의 경칭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 하지만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이승응이 순종 시기에 사망했을 때 《승정원일기》에 그를 '저하(邸下)'로 적었기에# 방계 황족 들은 '저하'로 불렸음을 추측할 수 있다. 다만 당시 민간 신문들을 보면, 친왕 뒤에는 '전하'를 꼬박꼬박 붙였으나 방계 황족들은 '군호' + '이름' + '씨'순으로 적었다. '영평군 이경응씨', '완순군 이재완씨'처럼.

4. 창작물에서


창작물의 장르에 따라 묘사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가벼운 딸바보물이나 귀족영애물에선 왕권이 왕자/왕녀를 괴롭혔다고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묘사되며 이에 반발을 표하는 이도 적고 왕가 자녀들 간의 사이도 굉장히 좋거나 왕/여왕도 자식들을 굉장히 아끼고 호위무사나 메이드 등 사용인들도 주인공을 어화둥둥하는 등 좋은 모습만 보이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에는 왕자/왕녀들이 특별히 대단한 것을 배우지 않고 호의호식하며 살아가는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지며 로맨스판타지에서 때때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물과 같은 시리어스물에선 현실 이상으로 왕족 사회가 각박하게 묘사되어 왕권을 차지하기 위해 형제들이 서로를 죽이거나 부모도 자식을 왕권을 이을 핏줄로만 생각하고 전혀 정을 주지 않고 특정 자식만 편애하는 등 부정적인 묘사가 심한 작품도 있다. 사실 이쪽이 위보단 현실적인 묘사에 가깝다. 현실에선 형제들이라도 정적에 가깝기 때문에 마냥 사이좋게 지내기도 힘들며 왕/여왕이 일이 바빠서 자식을 직접 키우는 경우가 매우 드물고 왕위쟁탈전으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식들에게 정을 쉽게 주지 않기도 했다. 형제자매나 부모자식간 사이가 좋았던 왕족도 물론 꽤 있었지만 위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적다.

5. 같이보기



[1] 초기에 외국에서 왔다고 명시된 석탈해 가문이 왕위에 오르기도 했고 이후에도 고구려안승이나 발해대조영, 가야 구형왕 가문 등 신라 밖 출신 외부인을 진골로 인정한 경우도 있다.[2] 둘 다 진골이고 선대-차기 국왕 관계인 선덕왕원성왕이 부계로 21촌 거리다. 중국이나 조선 같으면 이 정도 거리는 너무 멀어서 그냥 왕족도 아니고 성씨 글자만 같은 남남이나 마찬가지다.[3] 조선의 경우 왕자의 딸은 엄연히 왕족이었지만, 왕녀의 아들은 왕족이 아니었다. 설령 조선 왕실의 부계혈통 남성이 전멸했다 하더라도(물론 조선 멸망까지 그런 일은 단 한 번도 벌어지지 않았다.), 선왕과 7촌, 8촌 지간인 부계혈통 여성이 여제로 오를지언정, 왕녀의 아들은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다. 물론 직계 왕녀가 살아 있다면 7촌, 8촌까지 뒤질 필요 없이 왕녀를 여왕으로 세우면 된다. 왕녀들도 모두 사망한 경우를 가정한 것이다.[4] 대략 직계후손이나 현 군주의 형제와 그 자손까지의 범위[5] 일례로 영국 왕실에서 찰스 왕세자,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의 자식들은 태어날 때부터 prince, princess지만, 앤 공주의 자식들은 그런 거 없다. 어머니인 왕녀가 왕의 후계자라서 곧 여왕의 자식이 될 예정이 아닌 한, 왕족으로써의 작위는 주지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귀족이라면 그 작위를 따라간다.[6] 먼 황족에게는 이나 군왕을 수여했다. 다만 대한제국은 애매하게도 제국 선포 이전에 왕실의 후손들이 사용하던 칭호인 을 계속 수여했다.[7] 태조 시대엔 [8] 황진이의 유명한 시조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의 벽계수가 중의적 의미를 가진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이 바로 '푸른 물'과 '벽계수라는 봉작을 받은 종친'이라는 뜻이다.[9] 물론 군인이라 해도 실질적 지휘권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다.[10] 당연한 것이 왕조 자체가 자신이 호사를 누리는 기반이기 때문[11] 그 덕분에 특히 원성왕 이후의 신라 하대는 무열왕계에 비해 밀리는 정통성을 자신들의 결집력으로 상쇄하기 위해, 6~8촌 이내의 가까운 원성왕계 김씨 왕족들이 주요 보직을 독식하다시피 했으며, 그에 따라 시중 등 대신이었던 사람이 왕이 되는 경우가 흔했다. 또한 조선의 영의정 중에서도 가장 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것도 다름아닌 수양대군.[12] 현종이 이런 시절을 보냈다가 극적으로 왕이 된 사례다.[13] 사실 이는 왕족이 쓸데없이 잘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대령후는 독자적인 부(府)를 열어 따로 세력을 가졌고, 인망도 좋아서 추종자도 있었으며, 나름 의종과 왕위경쟁을 했던 몸이다. 그래서 애초에 조용히 살기에는 틀린 사람이었다. 괜히 제안대군유선의 행동이 처세술의 일환이라는 시각이 있는 것이 아니다. 결국 대령후는 고려의 숨막히는 정치속에서 결국 간신들의 모함과 의종의 확신으로 몰락하게 된다.[14] 참고로 고려의 작위에는 개부의 권한이 주어지기도 했다. 대령후 왕경의 대령부 이런 식으로. 왕족들은 작위를 유지하기 위해서 족내혼을 선호했는데, 원간섭기 이후로 족내혼이 제한되면서 작위유지가 힘들어졌다. 왕과 사돈을 맺지 못한 왕족들은 명예직만 받고 말았다.[15] 글 모른다고 사기치고 삥땅쳐도 들키면 그냥 왕에게 쪼르르 가서 알리면 왕이 알아서 족쳐줄 것이 분명하다. 왕족에게 사기치고 삥땅친건 그 왕족들의 맨 우두머리인 왕 자신에게도 연관이 되는 일이다.[16] 네이버 지식백과 〈독립신문〉 1897년 1월 9일 토요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172&cid=51385&categoryId=51385 [17] 네이버 지식백과 1897년 7월 31일 토요일 독립신문: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326265&cid=51385&categoryId=51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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