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영
생몰년도 미상
1. 개요
신라 중기의 장군. 삼국통일전쟁에서 활약했다. 삼국사기에서는 성을 생략하고 문영(文穎)으로 기록된 곳이 더 많다. 혹은 영(永)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2. 생애
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독군(督軍)으로 참전했는데, 신라군은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의 결사대가 신라군의 발을 묶었던 바람에 당나라 군대와의 합류 예정일보다 늦게 도착했다. 당군의 지휘관 소정방은 김문영의 목을 베어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자[1] 김유신이 반발하며 "이런 식으로 할 거면 백제보다 너희 당나라부터 치겠다!"라고 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항의해서 김문영은 겨우 살았다. 이 일화는 신라와 당나라가 결국 연합이 깨지고 나당전쟁까지 가게 되는 전조 중 하나로 보기도 한다. 전쟁에서 정당한 이유 없이 기일을 어기는 건 목이 달아날 수 있는 큰 죄이기는 한데, 처절한 황산벌 전투를 치른 탓에 어쩔 수 없이 기일에 늦은 것인데도 불구하고[2] 장수의 목을 베겠다고 나서는 건 신라 입장에서는 큰 모욕이였으니까.
661년 7월 17일에는 지금의 강원도 일대인 수약주(首若州) 총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668년까지 고구려 방면 전선에 있었는데, 664년 7월에는 김인문, 김품일, 김군관 등과 함께 고구려의 돌사성(突沙城)을 점령했다. 668년 고구려 총공격 때 비열성주행군총관(卑列城州行軍摠管)으로 참전해 평양 남쪽 사천(蛇川)에서 고구려군을 크게 격파하고(사천 전투) 평양성을 포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평양성 전투)
670년, 나당전쟁이 터지자 김문영은 당나라 휘하에 있는 백제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공격, 670년 7월의 대공세에서 김군관 등과 함께 12개 성을 빼앗고 7천명을 목베고 수많은 말과 병기를 노획했다.
이후 한동안 기록이 없는데 전쟁공신으로서 주요 귀족의 반열에 올라, 신문왕의 공신 숙청도 피해서 683년에 신문왕의 왕비 간택에 참여하고, 효소왕대인 694년에는 선임자 진복에 이어 상대등에 임명됐다.
[1] 전쟁에서 약속 기일보다 늦게 도착하는 것은 굉장히 큰 죄다.[2] 아무리 고대 사회라 해도 이런 경우는 대개 정상 참작이 되었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로 기일을 어겼다면 죄를 묻지 않거나 경감을 시켜 주는 대신 '어쨌든 늦은 건 늦은 거니 열심히 싸워 공을 세워 죄를 갚으라'는 식으로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삼국지를 예로 들면 기일을 어겨 단곡 전투 패배의 원인이 된 호제가 이후 큰 처벌 없이 벼슬 살이를 계속할 수 있었던 이유가 '위군이 길을 막아서 기일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는 식으로 넘어갔다는 해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