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

 

[image]
'''계백 표준영정'''
'''관등'''
<colbgcolor=white,black> 달솔(達率)
'''이름'''
계백(階伯)
'''사망지'''
백제(百濟) 황산벌(黃山벌)
'''생몰연도'''
미상 ~ 660년 7월 9일[1]
1. 개요
2. 생애
2.1. 초기 일생
2.2. 신라의 침공
2.4. 죽음
2.5. 사후
3. 평가
4. 5천 결사대 논란
5. 그 외에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1. 개요


백제 말기의 장군이자 정치인. 흔히 계백 장군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군인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백제에서 좌평에 다음 가는 관등인 달솔까지 지내는 등 정치판에서 주로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대의 고위 귀족들은 전시에 군인으로써 전공을 올리는 것이 출세를 위한 필수 요소였으므로 군인 겸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고 고위 귀족들 자체가 군인이 아니면 권력을 누리기가 힘들었다.

2. 생애



2.1. 초기 일생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천등산 일대가 출생지라고는 하나 명확한 것은 아니다. 생년은 알려져 있지도 않다. 대부분의 백제 인물들이 그렇듯 기록이 부족해 행적은 베일에 싸여 있다. 관련 기록은 남아있는 것이 적어 황산벌 전투 이전의 삶은 알 수 없는데 그나마 남아있는 삼국사기의 계백 열전에 따르면 벼슬길에 올라 달솔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달솔이라는 벼슬은 백제 16관등 중에서도 1등급 좌평에 이은 2등급에 이르는 벼슬이었으니 신분은 높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김정호가 지은 대동지지에 따르면 계백은 백제의 수도인 부여현 출생이며 이름은 승(承)이고 성씨는 백제 왕실과 동성(同姓)인 부여씨였다고 전한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이와 같은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는데 기록이 사실이라면 계백의 본명은 부여승이며 계백이라는 이름 자체는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있다. 다만 대동지지는 계백 사후 훨씬 뒤에 적힌 기록인지라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데 지리서라고 해서 마냥 받아들이지 않은건 아니다. 고려 말엽 이전까지 역사국가흥망성쇠군주의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 거의 전부였고 일부를 열전이라 하여 다른 인물을 기록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때문에 정사에서는 비중있게 다루지 않는 고을 읍현의 옛 지명이나 향족, 거족 등의 인물은 지리서에 주로 기록되었다.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海東雜錄, 1670년 편찬)을 인용하여 계백이 백제 왕족인 부여씨 출신이며 본래 가잠성의 성주로서 신라의 명장인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부터 두각을 드러내었다고 하였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을 부여씨라고 하였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일본 측 기록, 금석문 등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야사라 신빙성은 매우 낮다.

2.2. 신라의 침공


660년 신라와 당나라가 각각 육지바다를 통하여 동시에 공격해오자 백제 조정은 혼란에 휩싸이고 말았다. 본래 국경을 맞대고 투닥투닥대던 신라라면 몰라도 당나라가 고구려를 내버려둔 채 황해 바다를 횡단해서 백제를 침공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2] 신라군도 최단거리 경로가 아니라 북서쪽으로 향해 서해안가의 덕물도까지 우회해서 마치 고구려를 공격하려던 것과 같이 경로를 위장했기에 백제로서는 예측하기 어려운 공격이었다. 달솔 벼슬을 지내던 계백은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장군이 되어 죽음을 각오한 5천 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북동쪽에서 내려오는 신라군을 막게 되었다. 그러나 계백은 이미 전황이 절망적으로 돌아가고 있어 나라를 지킬 수 없음을 직감하고는 노예로 전락할 처자식에 대해서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쾌히 죽는게 낫다"(與其生辱 不如死快)라고 하며 출진하기 전에 처자식을 모두 자신의 손으로 베어 죽였다.[3]

2.3. 황산벌 전투


660년 음력 7월 좌평인 충상, 상영 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벌에 진을 친 계백은 "옛날 구천은 5천의 군사로 오나라부차의 70만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마땅히 각자 분발해서 승리를 쟁취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리라!"라고 말하며 병사들을 독려했다. 이렇듯 비장한 각오 속에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그대로 황산벌에서 신라의 영웅이자 최고의 명장이었던 김유신이 이끄는 5만 신라군을 맞이하였다. 하루 동안 4번의 전투가 이어졌고 백제는 4번 모두 신라군을 격퇴하는 기적에 가까운 전과를 올린다.
백제군이 엄청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번번이 승리하는 바람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자 신라의 장군 김흠순[4]이 아들 반굴에게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공격하게 했고 반굴이 죽자 장군 김품일이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을 마찬가지로 적은 수의 병사들을 이끌고 적의 진영으로 돌격하게 했다.[5][6] 관창은 백제군에게 사로잡혔고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다.[7] 그러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으며 계백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싸우는 관창의 목을 잘라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러자 신라군은 어린 관창의 용맹한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그 기세를 막지 못하고 백제군은 패퇴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佐平) 충상(忠常)과 상영(常英)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三國史記 卷第五 新羅本紀 第五'''

황산벌로 함께 출진한 장수들 중 계백보다 상위 관등인 좌평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아닌 계백이 지휘를 맡았다는 것은 계백이 왕족이었거나 혹은 고위 귀족 출신에 속하는 인물이었다는 것을 짐작가게 하는 부분이다.[8]

2.4. 죽음


결국 계백 휘하 5천 결사대는 거의 전멸하였으며 계백 본인 역시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다만 계백과 함께 전투를 지휘하였던 좌평 충상, 상영 등을 비롯한 20여 명은 살아서 포로로 붙잡혀 신라에 항복했다. 계백이 황산벌 전투에서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백제의 수도사비성이 당나라군과 신라군의 협공을 받아 함락되었고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이 부하인 예식진의 배반으로 인해 사로잡히면서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다.

2.5. 사후



일본에서는 백제 멸망이라는 소식을 들은 사이메이 덴노가 병으로 죽어감에도 불구하고 백제를 구하라고 일본 전토에서 싹싹 긁어모아 1차 원군으로 5000명(661년)의 군대를 파견[9]했으며 2차 원군은 663년에 출정했는데 그 수가 2만 7천명에 달했다. 백제 멸망 후 봉기한 백제 부흥군은 한때 백제 전역에 영향을 끼치고 웅진도독부를 수세로 몰기도 했지만 내부 분열과 신라군의 지원 등으로 인해 663년 2월 기점으로 열세에 밀리고 말았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663년 8월 백강에서 백제와 연합군은 나당연합군백강 전투(백촌강 전투)라는 결전을 치렀지만 결과는 '왜군의 로 강이 붉게 물들었다'라는 기록이 말해주듯이 참혹한 패배였다. 살아남은 왜군과 백제 부흥군 수뇌부는 그대로 일본으로 도주했고 남은 임존성을 제외하면 백제 부흥군들은 나당연합군에 대거 투항한다. 임존성의 지수신이 663년 11월까지 농성을 벌였으나 끝내 임존성이 함락되면서 백제부흥운동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백제부흥운동 실패 후 백제 전역은 당나라와 신라의 각축장이 되어 결국 신라가 671년 당나라의 괴뢰 정부인 웅진도독부를 요동으로 축출하면서 완전히 신라 영역이 된다.

3. 평가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계백에 대한 기록은 고작 황산벌 전투에 국한되어 있으며, 그나마도 백제본기나 계백열전에 나와있는 내용보다 신라측 기록에서의 관창열전 등에서 오히려 계백에 대한 묘사가 더 자세한 편이다. 즉, 계백에 대한 기술은 철저히 신라의 입장에서 쓰여진 기록으로써, 신라인들 역시 비록 적대국인 백제국의 장수이지만 계백의 인품을 꽤 높이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10]
역사기록엔 이처럼 계백에 대한 내용이 부족하지만 신채호가 쓴 조선상고사에서는 해동잡록에 계백에 대한 기록이 좀더 남아있었다며 많이 인용하였는데, 정사로서 인정받지 못하긴 하나 계백은 백제 왕족인 부여씨로써[11] 가잠성의 성주가 되어 김유신과의 싸움에서 승리, 그때부터 두각을 나타내 신라와의 싸움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백전백승의 전적을 자랑하던 김유신을 이긴 유일한 백제 장수가 계백이라는 것... 인데 사실은 알려진 바와 달리 김유신은 백제에 여러 번 패배를 당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만큼 김유신을 상대로 강했다는 것이고, 그러한 사실을 의자왕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소정방의 13만 대군을 막는 것이 아니라 김유신의 5만 대군을 막으라고 보낸 것으로 보인다. 본래 백제는 무역을 통해 당나라와의 관계가 좋은 편이었기 때문에,[12] 신라군만 안정적으로 막아낸다면 당군은 협상을 통해 회군시킬 승산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던 것.[13] 이런 상상은 영화 황산벌에서 자세하게 묘사된다.[14]
짧은 일화와 황산벌 전투로 후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평가를 했는데 대체적으로 충신이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최부서거정 등은 계백만이 백제충신이라고 극찬했다. 다만 권근은 일가족을 죽인 것을 가지고 냉혹하다며 비판했다. 안정복은 그런 권근을 역으로 비판하며 계백의 충의로움을 칭찬했다.

4. 5천 결사대 논란


신라가 한강 유역을 공략해 성왕을 전사시키며 그때까지의 나제동맹(羅濟同盟)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했다. 고립상태에서 위기에 처한 신라는 중국과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했는데, 당 고종은 소정방을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원병을 이끌게 했다. 660년에 나당연합군 18만명(당군 13만명, 신라군 5만명)의 공격이 백제를 향하게 된 것이다.
의자왕은 백제를 사수하기 위해 병력을 총동원하려 했지만 의자왕과 지방세력 간의 악화될 대로 악화된 관계[15]로 인해 중앙 조정이 모을 수 있었던 병력이라곤 고작 5천 뿐이었다는 이야기가 한국에서 꽤 널리 퍼져있는 내용이다. 어린이용 역사책이나 연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시절의 오래된 역사서에선 의자왕 말년의 향락과 사치 때문에 백제가 쇠락해서 군대가 5000명 밖에 없었다고 단순하게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괴멸시켰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때 당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오고,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

'''《삼국사기》권제이십팔 백제본기 제육 의자왕'''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전군이 전멸하였다는 기록이 없는 가운데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했다는 기록만 존재하기 때문에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으나 부상병, 포로, 패잔병 등을 고려했을 경우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이유는 어쩌면 의자왕이 진짜 막장이었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주력군이 당군을 막아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왜 이러한 다른 기록이 생겼는지에 대해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정은 가능하다. 우선 통일 이후 신라가 당나라보다는 신라의 전공을 더욱 부각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록을 누락시켰거나, 혹은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삼국사기 수록과정에서 당서 기록을 백제본기에서 수록해주었으니 충분했다고 보는 등의 수록과정의 문제일 가능성이 있다. 또는 계백이 동원한 5천은 국왕이 즉각 자신의 권한으로 빼올 수 있는 직속군대여서 바로 급파하였고, 백강 방어전은 인근 지방세력과 5천 병력을 급파한 후에 지방에서 끌어모은 병력이 꾸준히 투입되어서 보강되었을 가능성이다. 이 경우 위의 지방세력과의 갈등 문제도 설명이 가능하다. 지방 병력의 동원이 아주 불가능하진 않더라도 갈등으로 인해 동원이 지체되는 것 자체는 피할 수 없자, 의자왕은 5천이라는 적은 병력이나마 국왕 직속 부대를 빨리 보내서 일시적으로라도 신라군을 저지하고 그 사이에 동원 시간을 벌어서 당나라 군을 막는게 낫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5. 그 외에


[image]
충남 논산시 부적면에 있는 계백 동상[16]

당시 황산벌로 불렸던 지금의 충남 논산시에 무덤이 남아 있는데, 죽었을 당시 백제 유민들의 손에 의해 무덤이 만들어진 이후, 그냥 계백의 무덤이라는 게 구전으로만 내려오면서 동네 주민들에 의해 돌보아지고 있었다. 그러다 6.25 전쟁이 발발하여 그 이후, 도굴꾼에 의해 유해는 물론이고 같이 들어 있던 물품들이 모조리 도굴당하고 말았다.참고 기사 이래서 안타깝게도 진짜 계백의 무덤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서고서도 한참 뒤에서야 충청남도 기념물 제74호로 지정되어서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충남 논산시육군훈련소가 있기 때문에 육군훈련소가 1절에서도 계백을 언급[17]한다. 이 노래는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훈련병[18]과 기간병[19]이라면 퇴소 또는 전역 때까지 질리도록 부르기 때문에 계백이라는 이름은 적어도 논산 땅에서 매일 들을 수 있다.
한편 논산에는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는데 익산대로 최북단에서 이어진다.

6. 대중매체에서의 모습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1절 마지막 소절에 등장한다. '''황산벌의 계백, 맞서싸운 관창, 역사는 흐른다''' 이 부분은 그 자체로 훌륭한 대구를 이루고, 노래 전체에서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부분이어서 강렬한 임팩트가 있다. 그래서 당시에 이 노래가 한참 보급되던 시절에 학창시절을 보낸 국민학교 생들은 이 노래 소절을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인지도가 매우 높다. 덕분에 계백, 관창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진 것도 덤.
그 외에도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을 쓴 박문영이 작사·작곡한 계백장군이라는 노래가 있다.
백제 멸망기를 다루었지만 의외로 의자왕이 출연하지 않은 드라마 천년지애에서 단 한 컷 나온다. 물론 전쟁에서 전사하는 안습한 역할인데다가, 그나마도 연출의 허접함으로 인해 전혀 비장하지 않게 묘사되었다.
글동산에서 나온 그림으로 엮은 한국의 역사에서의 계백편에서는 어떤 근거에서인지 젊어서 불교에 귀의했다가 의자왕이 직접 부르러 와서 돌아온다는 설정으로 나온다. 이후로는 계속 중머리. 이후 신라와 고구려를 상대로 연전연승하다가, 의자왕이 사람이 변하자 이에 실망해 다시 절로 들어간다. 이 때 계백을 따르는 친위대 역시 함께 스님이 되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들이 이후 5천 결사대의 중심이 된다. 그림으로 그려진 이미지는 중머리를 한 관운장. 긴 수염에 청룡도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 당시에 계백에 대한 이미지는 주로 거룩한 희생을 하는 수도승같은 이미지로 그려졌다.

조이온(HQ Team)이 개발한 국산 전략시뮬레이션 게임 '천년의 신화'의 후속작이자, 지금은 완전히 잊혀진 게임인 '''천년의 신화 2 : 화랑의 혼'''이라는 게임에서 백제측 영웅 유닛으로 등장하였다. 두 갈래로 갈라진 검을 사용하는데, 원거리 공격이 무려 전기충격(…). 특수기술을 사용할 경우 맵 전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주변에 적이 있을 경우 하늘에서 해당 적에게 번개가 내려꽂힌다. 일정 '''횟수'''를 모두 소진하면 비가 그제서야 그친다. 횟수를 강조한 이유는 이 '''횟수를 모두 소진하지 않으면 비가 무한대로 내리기 때문'''. 비가 내리는게 뭐가 어떠냐고 물어보면 '''자원과 관련이 있다'''. 동사에서 개발한 게임인 임진록과 본 게임의 전작에서는 비가 내려도 자원인 쌀이 다시 자라지 않았지만 본 작에서는 주 자원인 쌀이 자연상태에서도 매우 조금씩 다시 자라며 비가 내릴 시 더욱 빨리 자라게 설정이 되어있었다.
웹게임인 콜로니 오브 워에서 69레벨의 HCS 시리즈 기체 중 하나로 염동기체이다. 건곤감리코어 구현이 완료된 무휼을 토대로 강화된 기체들이며 그 중 이름을 따와 '''계백'''이며 3기체 중 가동률이 가장 짧은 편으로 대략 1시간도 안 된다.[20] 대신 마의 구간 후반기 기체인 만큼 강력한 무장들이 있으며 공유도 가능하다.[21]
두사부일체에 "계백장군이 계씨면 똘이장군은 똘씨냐??" 라는 개그가 나온다. 여담으로 계백 장군의 성씨는 위 항목에도 언급되어있듯 대동지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부여 씨라고 기록 되어있다. 고로 계백은 또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많다. 다만 이러한 기록은 삼국사기 등의 정사에는 언급 되지 않으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영걸전 시리즈의 외전 작품인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 계보명으로 '''결사계백의 패'''가 유출됨으로 인해 추가 미래무장으로 등장이 확정되었다.

바람의 나라에서도 황산벌 지역이 추가되면서 나오는데 여기선 아예 미청년 이미지로 나온다. 여기 가면 볼 수 있다.

6.1. KBS 사극 삼국기


90년대에 방영했던 KBS의 대하사극 삼국기에서는 유동근씨가 맡아 열연하였다. 그의 라이벌인 김유신 역에는 서인석씨가 참여했다. 여기서는 그의 동생으로 좌백[22]이 등장하며, 본래 산에서 살던 산사람인데,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시찰을 나왔던 의자왕자를 위험에서 구해주면서 그에게 발탁된 산사람으로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사냥꾼이라고 숨겼으나, 사실은 신라와의 전쟁에서 전사한 백제의 장수였던 것. 이후 드라마에서 백제에 설치된 화랑 비슷한 교육기관인 "수사"에 들어가 수련하며 백제를 대표하는 무인으로 성장한다. 극중에서 수사 훈련과정에서 알게 된 한 여인[23]과 서로 사랑하여 부부가 된다.
이후 의자왕자에게 중용되며, 당항성 공격에서 백제 조정의 눈도장을 제대로 받게 되며 극중 백제 최고의 지장이자 맹장으로 부각된다. 의자왕 등극 이후 주로 가잠성 성주로 있으면서 중원성의 김유신과 부딪치며 백제의 신라공격시 김유신이나 알천의 발을 묶어두는 역할을 하며 신라에도 명성을 떨친다. 극 후반부에서는 자신의 스승이자 멘토인 성충성충이 투옥되자, 전방의 군대를 끌고 사비성으로 달려오는 과격함을 보인다. 이후, 성충의 만류로 군대의 포위를 풀었으나, 성충의 실각과 임자의 득세 과정에서 흥수, 복신 등 다른 성충파 정치인들과 함께 좌천되어 수덕사에서 수사들을 조련하는 장수로 지내게 된다. 나당연합군의 공격이 시작되자 의자왕의 부름을 받고 결사대를 이끌고 출전하며, 출정 전날, 잘 알려진대로 아내를 벤다. 다만, 딸은 사당에서 따로 자결하며, 부인은 미리 준비하고 있다가 계백이 직접 벤다. 이 장면의 연출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황산벌 전투 직전의 연설장면이다.
이후 진행된 황산벌 전투는 역사대로 전개된다. 다만, 최근 한국 사극에서 실종된 장면이 많이 등장한다. 제대로 갖춰진 진영 배치와 전방 감시탑이 설치되어 있고, 지휘부가 전략을 마치 장기말같은 것으로 세우면, 이를 감시탑에서 깃발로 전체 군사들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극중에서 이런 장면이 몇 차례 등장하긴 하지만, 황산벌 전투는 이러한 전투의 흐름을 상당히 자세히 보여주며, 보병방진 전투가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사서의 기록대로 네 번 싸워 네 번 모두 이기나, 이후 관창의 분전으로 전세가 역전되어, 계백은 병사들과 함께 총돌격에 나섰고, 직접적인 전사장면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전장을 수습하던 김유신이 마치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 나오는 전위처럼 부릅 눈을 뜬 채로, 온 몸에 화살이 박힌 채 서서 전사한 계백의 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인간관계의 경우에는 앞서 설명했듯, 성충을 스승이자 멘토로 여기며, 성충 라인의 장수로 등장한다. 또한 처음에는 동료였다 정치적인 라이벌로 등장하며 대립하는 임자와의 갈등도 괜찮게 설정된 편. 그 외에도 흑치상지는 친구로, 의직은 수사 시절 자신을 가르치던 교관이자 스승이며, 함께 백제를 지탱해 나가는 장수로 나온다. 그러나 무조건 싸우기만 하는 것은 아니며, 가끔 고구려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고구려의 동명제를 참관하거나 연개소문과 협상을 하는 모습도 나오며 당시 귀족들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24] 여기서도 계백은 김유신의 라이벌로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는 과묵하고 사려깊으며, 충성심이 깊으며, 지략에 능한 백제의 먼치킨 정도의 포지션이다.

6.2. 드라마 선덕여왕의 등장인물




6.3. MBC사극 계백


배우 이서진이 연기했다. 당대 백제의 충신으로 유명한 성충흥수의 의형제를 맺은 걸로 나오며 은고의자왕과의 복잡한 삼각관계를 이룬다(...) 임금님보다도 백성들의 믿음을 한 몸에 받는 그야말로 영웅으로 묘사된다. 굉장한 먼치킨으로 나오는데[25] 신라와의 전투에서 단 2패를 겪었다. 1패는 황산벌 전투이며, 나머지 1패는 당나라에게서 정식적인 왕비조서를 받기위해 신라와 내통한 은고의 세작질로 인한 것.
주인공답게 김춘추와 김유신의 평가는 ''''의자는 별 거 아닌데 계백은 두렵다.'''' 수준.
작중에서 절대 선역으로 그러지며, 때문에 황산벌 전투에 나서기 직전 가족들을 벤 것도 본인은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는데 5천 결사대의 사기가 다 무너진 걸 본 계백 부인이 '''이대로 전장에 나서면 필패다. 나와 자식들을 베고 돌아갈 곳이 없다는 마음으로 사력을 다해 싸워라. 당신이 우릴 베지 않으면 자결하겠다''' 고 강권하여 결국 가족들을 베는 것으로 그려졌다.


6.4. 대왕의 꿈


[image]
'''대왕의 꿈에서의 계백'''
배우 최재성이 연기했다. 최재성은 원래 김유신 역을 맡을 예정이었지만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하차했다가 결국은 계백 역할로 합류하게 됐다. 이를 만회할 생각이기라도 하는지 첫 등장부터 언월도로 무쌍을 찍으며 화려하게 등장. 의자왕으로부터 김춘추를 산 채로 잡아가기 위해 좌평 흥수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왔다.[26] 다수의 사극에서 여러 배우들이 연기한 계백중에서도 최재성이 연기한 계백은 위의 계백표준영정의 초상화에서 나온 계백의 모습처럼 강인하고 기품있는 눈매에 멋진 호랑이 수염등의 모습 덕분에 역덕후들에게 역대 계백 배역중에서도 가장 계백의 표준 초상화 모습에 근접한 외모와 인상과 느낌을 잘 묘사해 주었다는 호평을 받았다.[27][28]
[image]
'''전사하는 계백'''
황산벌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백제편의 최종보스 다운 활약을 보여주었다. 전쟁 전에 김유신(김유석)과 나무 아래서 술잔을 나누는 짠한 장면을 보여주었고 역사대로 반굴관창을 죽이고 김유신 앞에서 최후의 저항을 펼치다 날아오는 화살에 맞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김유신은 명장의 예우로 계백을 장사지냈다.[29][30]
그래도 어찌되었든 결과만 놓고 보자면 목적을 모두 이루고 죽었다. 비록 백제는 멸망했지만 그의 뜻을 이어받은 김유신과 문무왕이 당을 상대로 끈질기게 항전하여 한반도에서 당을 완전 몰아내고, 신라는 외세의 축출을 통하여 결국 전란 없는 진정한 삼한일통의 꿈을 이루어 냈으니 어찌보면 나름 해피엔딩일지도.
활을 맞고 서서히 죽어가면서 "아버지~"하고 달려오는 아들과 딸을 껴안고 무등을 태워주면서 부인과 행복하게 웃는 장면이 오버랩 되고, 희미한 미소를 띄며 죽어가는데, 이 장면과 김유신과 김법민의 안타까운 얼굴이 교차되는 편집은 콧날을 시큰하게 한다. 이 장면을 기억하면서 아래의 영화를 보면 확 깰지도. 편집이 그만큼 극과 극으로 다르다.

6.5. 이준익 감독의 영화 황산벌


[image]
'''영화 황산벌에서의 계백'''

'''자! 외통수에 걸렸으면 장기판을 싸게 걷어야제! 전군 문열어!!'''

영화 中

앞서 설명한 어떤 드라마보다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기존의 클리셰를 박살낸 작품. 맛깔나는 전라도 사투리 연기를 보여준 박중훈이 열연하였는데[31] 대체로 무척 과묵하고 우직한 성격으로 묘사된다. 영화에서 잔꾀를 잘 부리는(...) 김유신의 모습과 대조된다. 여기에서는 결전을 나설때 자기 아내, 자식을 다 죽이는 장면에서 아내가 '''"사람은 이름 때문에 죽는 것이여!"'''라는 일갈을 듣는다. 정확히는 계백이 아내에게 "호랑이는 죽어서 꺼죽을 냄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냄기는 법이여!"라고 하면서 죽음을 종용하자 아내가 코웃음을 치면서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씨부려야지.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는 것이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것이여, 인간아!!!'''"라고 일갈한다.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장면.[32][33]

김유신의 동생 김흠순이 "니 계백이 작전이 뭔지아나? 그냥 열심히 싸우는거데이, 형님아 니 계백이랑 싸워서 이겨본적이 있나?"라고 할 정도로 별 작전없이 상대방의 작전이 무의미해질 정도로 단순 무식하게 열심히 싸워서 이기는 전법을 구사하는 듯 하다.[34] 병사들을 선발하는 방법 또한 가관인데 자신의 말에 군말없이 대답하면 합격시키고 토를 달면 '''"너는 빠져부러라 실시!"'''라며 발로 차버리는 식이다(...). 신라군 뿐만 아니라 의자왕이나 중신들도 그의 무식함을 잘 아는 모양인지 왕 앞에서 버럭버럭 대들던 중신들도 계백이 칼을 들고와서 '''"느그들 두당 군사 오백식 내놀텨?, 아님 내손에 뒤질겨?"'''라며 협박하자 군말없이 군사를 내어준다. 장수들이나 휘하 병사들에게도 갑옷을 꿰매입고 오라고 하던가 신라군 오만대 우리 오천이면 우리가 명색이 결사대인데 두당 열명도 상대 못하냐며 죽을 때 죽더라도 열명 죽인거 확인받고 죽으라고 하는 등 여러모로 '''헝그리 정신'''이 투철한 모양이다. 이렇게 보면 그냥 무식해보일 수도 있지만 김유신과의 장기에서 통수로 이길 정도로 노련한 전략가인 것으로 보인다.
황산벌에서는 김유신이 훨씬 나이가 많고 계백이 젊은 장수로 묘사되는데, 생년이 확실치 않지만 역사가들은 대부분 최소한 김유신보다는 젊었을 것이라 보고 있다 한다. 참고로 이때 김유신 나이는 66세.[35] 환갑도 넘긴 할아버지다.
[1] 음력 7월 9일 의자왕 21년[2] 백제에서 당나라의 침공을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감옥에 갇힌 성충의자왕에게 당나라가 쳐들어 올 것이라고 조언하기도 하였다.[3]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거나 아들이 어렸을 것으로 보인다. 장성한 아들이 있었다면 신라 측의 김품일이나 김흠순의 아들들처럼 전장에 데리고 나왔을 것. 이런 점과 황산벌 전투 이전의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미뤄볼 때 계백은 황산벌 전투 당시 의외로 매우 젊은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있다.[4] 김유신의 동생이다.[5] 반굴 역시 백제군으로 돌격해서 죽었지만 왠지 관창에 비해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6] 홀로 돌격했다는 말이 자주 보이지만 삼국사기 관창 열전에서는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다고 돼있지 홀로 돌격했다는 말은 없다. 혼자서 돌격하는건 사기 진작이 아닌 그냥 개죽음이라는걸 생각하면 당연한 것이다. 또한 반굴의 돌격과 관창의 2번 돌격을 합치면 5번이 아닌 8번 공격한 것이 되므로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4번의 공격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주장도 있다.[7] 전투의 경험이 없고 부족한 어린아이가 전장에 나오자 어이없고 기가 막혀서 살려보냈다는 해석도 있다.[8] 뚜렷이 기록된 부분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명목상 황산벌 전투의 지휘관은 계백보다 관등이 높은 충상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다만 황산벌 전투의 직접적 지휘는 계백 주도로 된 것으로 보인다.[9] 일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던 날 사이메이 덴노는 사망했다.[10] 다만 '인품 존중'보다는, 의자왕을 정말 '막장' 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였다는 설명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즉 계백을 띄워주는 것만으로도, '의자왕은 이렇게 훌륭하고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게 만든 폭군' 이라는 결론이 자동으로 나오기 때문. 물론 이에 더해, 충신이라는 점에서 추모받았다는 점도 한 요인이 될 수는 있겠다.[11] 조선시대 지리서인 동국여지승람에서도 계백의 성이 부여씨라고 기술되어 있다. 또한 위에서 기술한 것처럼 당시 의자왕과 귀족들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져 있었고 5천 결사대는 국왕 직할 병력이었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 병력의 지휘관인 계백도 왕족으로 보는 것이 논리적으로도 꽤 그럴 듯 하다.[12] 하지만, 당나라 고위급들은 전에 백제수나라고구려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다 결국 고구려에 붙어버린 사실을 잊지 않고 있었다.[13] 하지만 당태종고구려 침략 때 신라의 요청에 따라 고구려로 군대를 보냈는데 백제고구려를 공격하지 않고 정작 고구려 파병 때문에 방어체계에 구멍이 뚫린 신라의 내부를 기습 공격한 적이 있다. 원래 당은 백제를 어르고 달래서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로 파병하라고 설득 중이었는데, 이 사건 이후 외교관계에 있어 백제보다 신라를 우선시하게 된다. 특히 수나라 때부터 백제는 파병하겠다고 말로만 하고, 실제로는 단 한 번도 고구려로 파병한 적이 없는 반면 신라는 백제가 틈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김춘추의 억지로 군대를 보낸 것이라 당은 백제를 꽤 불신했고 역으로 신라를 더 신뢰하게 된다. 그렇다고 당과 백제의 국력이 비슷한 것도 아니고. 신라가 없었다면 모를까 당시 백제가 당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낼 확률은 낮다고 봐야 한다.[14] 작중 의자왕이 보낸 서신 중 '네가 하루 이틀만 더 거시기 해뿔면 나가 소정방이와 쇼부(…)을 쳐불텐디. 알아먹었제?' 라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작중 소정방의 모습은 'ㅎㅎㅎ 백제 땅도 먹고, 신라 땅도 먹고염 ㅋㅋㅋ' 이런 식이라 어찌됐을지는…[15] 의자왕의 왕권강화 움직임으로 인해 백제 귀족세력과 의자왕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고, 그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 절정에 치달아 있었다.[16] 논산 군사박물관에 있다.[17] 백제의 옛터전에 계백의 정기 맑고/관창의 어린넋이 지하에 혼연하니[18] 사회복무요원 등 보충역을 포함[19] 분대장 등[20] 대략 50분 후반이며 김유신 장군 모티브인 유신과 을지문덕 장군 모티브인 문덕에 비하면 기름먹는 하마, 게임할 때 콜로니밖에 1시간 정도 방치하면 그야말로 우주미아다.[21] 3기 전부 슬롯이 3개고 식별이 HCS로 공유된다.[22] 이 좌백이라는 인물은 실제 기록으로 따져보면 사에키노 고마로가 분명해 보이는데, 여기서는 계백의 동생으로 설정되었다.[23] 극중 "아랑"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배우는 정도전에서 명덕태후 역으로 출연하신 원로배우 이덕희씨. 여기서는 성충과 윤충이 형제로 나오며, 아랑이 여동생으로 집안을 건사하는 것으로 설정되어 있다.[24] 시대가 시대인 만큼 당시 귀족들은 싸움을 이끄는 장수이며 정치가이기도 했다. 최근 사극들이 이런 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일 뿐.[25] 그런데 작중에서 내내 인간흉기로 나오다가, 갑자기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 잡졸 한명의 창에 찔려죽는다. 이런 면에서는 역대 계백 중 최약체. 그런데 이 시점의 계백은 의자왕 때문에 대장군직에서 쫓겨나 무려 12년 동안 시골에서 소일거리로 밭일이나 하는 성주 노릇이나 하다가 개심한 의자왕의 요청을 다시 받아들여 복직한 상태다. 흥수도 계백의 활약이 이제 전설로만 남았다고 푸념할 정도로 계백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가버린 셈. 이런 너프를 겪고도 옛날 처럼 다시 무쌍을 찍는 게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다.[26] 그 와중에 비담이 보낸 자객들로부터 김춘추를 지킨다. 계백이 자객들(비담이 골라보낸 최정예 신라군 100명)과 단신으로 붙어 그들을 전멸시키는 장면에서 그의 무력이 작중 최고 수준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사용하는 언월도 또한 엄청난데, 적국인 백제의 장수가 자신의 아버지 김춘추를 호위하는것에 불쾌함을 느낀 김인문이 도전을 하나 작중 상당한 칼솜씨의 소유자들로 나오는 김인문과 김군관이 둘이서 덤비는데도 일격에 물리친 후 자신은 전쟁터가 아닌 것에서 함부로 인명을 살상하는걸 좋아하지 않는다며 아예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여준 후,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무리하게 덤벼드는 김인문에게 자신의 언월도를 던져준 후 내 언월도를 들수 있다면 상대해주겠다하나 김인문은 계백의 언월도를 들기는커녕 쥐고있는것조차도 낑낑대는 모습을 보여준다. 난승은 족히 100근은 되는 언월도라고 평가한다.[27] 멋스러운 수염에 크고 간지나는 언월도덕분에 삼국지관우가 생각난다는 의견들도 있었다. 게다가 언월도도 삼국지연의관우가 쓰는것과 같은 까지 그려진 청룡언월도이기 때문에 더욱 비슷해 보인다.[28] 실제로 최재성이라는 배우 자체가 굉장히 선 굵은 미남상이기 때문에 불멸의 이순신원균이나 천추태후강조 등 무장 역할로 캐스팅 될때마다 호평을 받았다.[29] 김유신은 계백이 적장이긴 하나 너무나도 훌륭한 인물이기에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항복을 권유했으나 계백은 호랑이가 목숨이 위태로워도 여우에게 항복하는 법은 없다고 거부하며 임금과 국가와 백성들에게 의리를 지켜 최후를 맞는다. 계백이 죽음을 앞두고 김유신에게 그대와 정정당당하게 싸우다 패하였으니 여한은 없지만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무너트린후 당나라가 우리민족을 모두 집어삼기려 할 것이라 예측하며 당나라의 야욕으로부터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을 지켜달라고 부탁하고 김유신은 눈물을 훔치며 당나라가 우리 땅과 우리 백성들을 더럽히는것을 용서치 않을 것이라 약속하는 감동적인 모습은 대왕의 꿈 최고의 명장면중 하나로 호평받았다. 그러나 후에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하고 당나라군이 저지른 방화와 약탈과 강간의 참상앞에서 초강대국인 당나라에게 의지하는 약소국이며 속국 입장인 신라는 큰 소리를 칠수 없었기에 김유신은 부모 잃은 아이를 안아주며 위로하면서 이런 꼴을 보려 백제와 고구려로 출전한 게 아니었다며 계백에게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탄식한다. 훗날 토번이 불패의 명장 가르친링의 지휘아래 크게 일어나 당나라를 위협하는 틈을 타서 김유신은 조카 문무왕과 함께 고구려, 백제의 유민들과 힘을 합쳐 한반도 땅의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때까지 살아남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백성들을 지켜냈으니 나름대로 힘이 닫는데까지 계백과의 약속을 지킨 셈.[30] 이때의 죽은 구도는 최재성이 전작 천추태후에서 맡았던 강조의 최후 구도와 유사하다.[31] 엄밀히 말하면 이는 고증오류이다. 계백은 부여 출신인 만큼 충청도 사투리가 더 적절하다. 다만 영화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 대립을 보여주는 만큼 영호남 지역갈등을 부각하기 위해 전라도 사투리로 설정했을 가능성이 높다. [32] 거기다 이 장면 앞에서는 계백이 을 주는데, 이걸 보면서 계백의 부인은 "자식새끼 싸질러놓고 언제 신경이나 한 번 제대로 써봤냐!"면서 악다구니를 쓰자, 계백은 할 말이 없어서 당황하다 칼을 빼들고 곱게 갈지, 아니면 칼 맞고 갈지 선택하라고 한다. 이후 나온 대사가 바로 이 대사들.[33] 작중에서 많은 인물들이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에 집착하는 것과 대비된다.[34] 그런데 정작 영화에서 제대로 된 전투장면은 몇 안나온다. 기껏해야 막판에 신라군이 총공격하는 장면 정도.[35] 그래서, 김유신 배역을 맡은 정진영은 나이가 들어보이고 흰 수염을 기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