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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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지도와 평양성의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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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고구려 왕조는 장안성(長安城)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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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도

평양성 상상 복원도.

http://contents.nahf.or.kr/item/item.do?itemId=ispy

동북아역사넷의 평양성 설명 링크.

평양성 / 장안성

1. 개요
2. 역사
2.1. 배경 설명
2.2. 양원왕 이전
2.3. 양원왕 이후
2.4. 남북국 시대
2.5. 후삼국 시대
2.6. 고려 왕조
2.7. 조선 왕조
2.8. 대한민국
3. 구조
3.1. 외성
3.2. 중성
3.3. 내성
3.4. 북성
4. 전투 목록
5. 관련 문서


1. 개요


북한 평양직할시에 있는 .
고구려 왕조의 마지막 수도이자 첫번째 일원화된 수도이다. 평양성은 산성의 역할과 평지성의 역할을 동시에 했다. 고구려 양원왕이 지었으며, 평원왕 때 이전했다. 당시엔 장안성(長安城)으로 불렸다.

2. 역사



2.1. 배경 설명


본래 고구려 수도 제도는 평시에 수도 노릇을 하는 평지성(平地城)과 전시에 방어를 담당하는 산성(山城)으로 구성된 이중성 체제였다.[1]
평양 일대는 원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고조선이 멸망하고 난 후 낙랑군 치소가 있던 곳이라고 추정하는 것이 남한 학계의 유력한 학설이다. [2] [3] 후 고구려의 미천왕이 중국 군현들을 축출하고 고조선 남부 영토를 수복한다.
이후 고구려는 평양성을 당시 수도인 국내성 다음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평양성은 고구려의 제2도시이자 제2수도로써 남쪽의 중심지로 자리잡았다.

그래서 백제평양성 전투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목숨을 걸고 막으려고 했던 것이다.

2.2. 양원왕 이전


고구려의 수도는 초기에 졸본성에서 국내성[4]으로 옮긴 이후 계속 국내성이었지만, 국내성은 첩첩산중의 좁은 땅에 있었고[5] 교통이 좋은 지리적 결절점이라고 보기도 어려워서, 영토가 넓어진 고구려에 적합한 수도는 아니었다.
결국 광개토대왕이 평양을 다지고[6][7] 장수왕대에 국내성환도성에서 안학궁대성산성으로 천도했다.
보통 평양성이라고 하면 지금 이 문서의 장안성을 의미한다. 그래서 광개토 - 장수 임금이 장안성에 천도했을거라 생각하지만 처음은 장안성 동쪽의 안학궁 - 대성산성으로 갔다. 장수왕은 해자와 궁성으로 둘러진 안학궁과 대성산에 성을 지어 수도 체제를 잡았다. 안학궁과 장안성은 둘 다 현재의 평양직할시 범위 안에 있으며, 거리도 그렇게 멀지 않다. 정확힌 장안성이 안학궁의 서쪽에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학자들에 의해서 장안성 이전의 평양성의 위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8]. 특히 중국학계에서는 현 집안 국내성이 전기 평양이었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있는데, 이에 따르면 사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국내'와 '국내성'을 구별해야 하며[9], 현 국내성과 전기 평양성의 이름이 혼용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평양 역시 고구려의 도읍을 가르키는 보통명사로서 해석해야 전기 평양성의 위치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다는 입장 역시 주장되었다. 비록 중국 학계의 한계상 장수왕이 현 지역으로 천도했다면 그 지역의 낙랑계 중국 한인들의 세력이 건재했기 때문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었다 등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깔고 가는 학자들도 있지만, 연구에 참여한 동북지역 학자들의 주장에 중국 학계에서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일제시대 연구를 통한 지리적 고증을 반박하여 전기 평양의 위치를 현 평양 이외의 지역에서 찾고자 한 것은 국내 고구려 도성 연구에도 큰 의미를 준다.

2.3. 양원왕 이후


(양원왕 재위) 8년, 장안성을 건축하다.

삼국사기 양원왕 본기. 천년이 넘는 동안 유지될 성곽의 시작이지만 기사는 심플하기 그지없다.

(평원왕 재위) 28년, 수도를 장안성으로 옮기다.

삼국사기 평원왕 본기.

삼국사기엔 양원왕 8년(552년)에 장안성을 쌓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34년 뒤, 태자였던 평원왕 28년(586년)에 드디어 장안성으로 이전한다.
양원왕이 짓기 시작한 이후로 지속적인 수도 이전이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평원왕이 대대적으로 천명, 이후 3대 군주들을 거쳐 보장왕 대까지 수도로서 존재했다.
이곳에서 668년 평양성 전투를 끝으로 고구려가 멸망했다.
양원왕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양원왕 대엔 고구려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귀족 간 내전이 벌어져 국가가 휘청거리고 있었다고 추정된다.[10] 이러한 상황에서 양원왕은 평양 서쪽으로 가 평산성을 새로 지어 국정을 다잡으려 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리하여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준비를 한 뒤, 양원왕의 후계자인 평원왕이 천도에 성공한다.

2.4. 남북국 시대


이후 부흥운동이 일어나자 당나라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점령지를 통치하려 했지만 평양 인근에서 워낙 거세게 부흥운동이 일어나 요동으로 옮기게 되고, 이후 한동안 무주공산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남북국 시대에는 신라와 발해의 국경선이 평양 부근이었기 때문에 변경지로서 과거 수도로서의 번영은 사라지고 한동안 황폐화 되었다. 다만 기록으로 보아 완전히 몰락하지는 않고, 어느 정도 독립적인 세력이 있었다는 설도 있고, 헌덕왕 등이 대동강까지 올라가 성을 쌓기도 했다.
신라 후기 서북방 전초기지였던 패강진의 중심지는 평주라는 것이 통설이나, 평산군이 아닌 평양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설에 따르면 신라 말기에 이르면 옛 고구려의 수도였던 평양성 지역까지 신라가 잠깐이나마 직접 통치했던 것이 된다. 다만 기록이 모호해 확실하지는 않고, 어느 나라의 영향권이었든 당시 평양은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쇠락한 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5. 후삼국 시대


"옛날 신라가 당에게 병을 청해 고구려를 파했다. 이에 평양구도(平壤舊都)가 풀만 무성하게 됐으니, 난 반드시 이를 복수할 것이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평양성이 언급됐다. 901년 때 일이다. 근데 이 땐 아직 평양을 수복하지 못했다.

'''...평양성주장군(平壤城主將軍) 금용(黔用)이 항복했다....

삼국사기 궁예 열전. 성책(聖冊) 원년(905년) 때 일이다.

후삼국시대에 평양성주를 자칭하던 금용이란 호족궁예에 투항했는데 금용이 신라인인지 발해인인지 원래 독립적이던 토착민인지는 기록이 부족해 알기 어렵다.

2.6. 고려 왕조




"평양고도(平壤古都)는 황폐하게 된지 오래지만 그 기지(基址)[11]

는 그대로 남아있다. 그러나 풀과 가시가 무성하고 번인(蕃人)이 그 사이에 와 사냥하니 변읍(邊邑)을 해치고 있다."

고려사 태조 세가 원년(918년) 중 발췌. 당시 평양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초대 태조 신성대왕은 평양을 매우 중시해 성을 쌓고 백성들을 이주해 도시를 채웠다. 고구려의 뒤를 이었다 선포하고 고구려계 호족을 끌어모았으니 당연한 처사였다.[12] 곧이어 평양은 서경(西京)으로 개칭되어 제2수도로 격상된다. 오죽하면 후대 임금들에게 남긴 10가지 중요한 훈수인 훈요 10조 중 5조항에 서경을 중요시하라는 당부를 넣었을 정도.
서경은 제2수도 답게 매우 우대 받았는데 서경에 세워진 장락궁은 평양성 안에 세워졌다고 추측된다. 평양성문의 이름이 장락궁문의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 이 장락궁(평양성?)은 황성, 나성으로 둘러싸여 개경의 본궐처럼 천자식 궁궐 제도를 이루었다. 자세한건 장락궁 문서 참조.
제3대 정종 문명대왕왕식렴을 보내 아예 제1수도로 삼을려고 했지만 무산되었다.
이후 여요전쟁에서 주된 전장터가 되었고, 과거의 명성과 달리 수차례 함락되기도 한다.
제17대 인종 공효대왕은 서경을 매우 중시해 서경 천도가 대세적 주장이 되지만 지나치게 권력이 쏠리는걸 싫어한 인종은 서경 세력을 억제한다. 결국 1135년에 폭발한 묘청이 서경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키면서 분사제도가 폐지되어 서경은 수도의 지위를 잃었다. 이후 몽골 침입 후 동녕부에 속해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지만 충렬왕 때 되돌려 받았다.

2.7. 조선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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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동문인 대동문. 구한말의 모습이며 크게 훼손된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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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 서문인 보통문.
조선시대에도 북방의 주요 요충지로서 중요시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가 조명 연합군이 되찾으며, 1894년 청일전쟁시 또다시 청군과 일군이 평양에서 싸웠다. 외성 부분은 농경지로, 중성과 내성 부분은 평양시의 중심지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북성은 평양에 오면 꼭 가보는 유명한 장소가 되었다.

2.8. 대한민국


평양의 지리적 중요성은 상당해서 역시 후대에도 주요 전장(戰場)이었다. 현 북한의 국보 제1호이며,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남한 사람들은 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평양직할시 문서 참고.

3. 구조


대동강보통강이라는 자연 해자가 둘러쳐져 있고 북쪽에 산을 끼고 있다. 외성, 중성, 내성, 북성으로 나뉘어져 있다. 평양성의 둘레는 17,000m 정도인데 태봉국 철원성이 12,600m, 고려 개경 나성이 23,000m, 조선 한양도성의 둘레가 18,600m이다. 얼추 한양도성과 비슷한 셈.
평양성은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평산성(平山城)이다. 국내성이나 안학궁 시절처럼 전시에는 평지성을 버리고 산성으로 이동하는 기존의 방식과 차이가 있다. 후대의 개경한양의 경우에도 성벽을 이중으로 하는 나성과 도성이 산지로 둘러싸인 평산성 형태가 나타나는데 원(原)모델에 해당하는 장안성은 이중, 삼중의 나성과 평산성 형태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평산성의 구조가 우주방어급의 완벽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고려와 조선의 왕들이 외침 시 수도를 버리고 몽진을 간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따라서 평양성에서 농성전이 발생한 것은 성의 방어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신라와 당나라 남과 북 모든 방향에서 공격을 받아 마땅히 피난을 갈 장소가 없었기 때문으로 봐야 한다.
정치적인 이유 또한 빼놓을 수 없다. 고구려고려조선과는 달리 왕권이 그리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왕이 자신의 세력권인 수도를 버리기는 힘든 일이었다. 고구려의 5부 체제가 고국천왕 이후로는 행정적인 5부로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부족적인 색이 강했기 때문에 수도에 심대한 타격이 있을 경우 왕권 또한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었다. 고려도 초기에는 전제왕권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으나 광종 이후로는 제법 호족들을 제압했기 때문에 왕이 피난하더라도 왕권 자체가 흔들릴 일은 그다지 없었다. 그럼에도 현종은 피난길에 여러 도적 내지는 지방 세력들의 반란을 접했다. 조선의 경우 전제왕권과 관료제가 이미 완성되어 왕이 피난가더라도 별다른 저항은 일어날 수가 없었다.
다만 평양성이 개경과 한양보다는 수성에 유리했던 것이, 둘러싼 지형은 개경이나 한양보다 평탄하지만 자연 해자인 보통강과 대동강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었다. 산은 어쨌든 오르거나 포위해서 무력화가 가능하지만 강은 그러기 어려운 천혜의 방벽이다. 비교적 작은 보통강은 몰라도 대동강은 메우거나 하기가 불가능한 크기라, 그쪽에 면한 동쪽과 남쪽은 성벽 길이에 비해 방어측 부담이 적을 수밖에 없다.

3.1. 외성


가장 바깥에 있는 성이다. 평양성은 나성(외성)→ 황성(내성) → 궁성(궁궐) 순인 중국왕조식 도성제를 따른 성이 아니다. 그렇지만 까다로운 당시 기준이 없는 현대엔 내부 성벽을 뺸 평양성의 외성에 전체 바깥 성벽 길이를 합친 외성을 대충 나성으로 본다. 외성엔 총 4개의 문이 있었다.
  • 다경문: 고려 장락궁에 같은 이름의 누각이 있었다. 외성의 서문.
  • 선요문: 고려 장락궁에 같은 문이 있었다. 외성의 북문.
  • 거피문: 외성의 남문.
  • 고리문: 외성의 동문. 고리문과 중성의 육로문 사이에 대동교가 있었다. 다리의 이름은 대동강에서 따왔다.
외성에는 일반인, 즉 평민들이 살았다. 허나 도성 안에 살 정도의 여유를 가진 나름 고위층들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서울에 자기 집 있는 사람들은 그 땅값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뿐이니까. 삼국사기 기록엔 고구려 - 전쟁 때 보장왕태대막리지 연남산을 내보내 항복을 요청할 때 92명의 수령'을 같이 내보냈다고 한다. 이들은 귀족인지 알 수 없으나 만일 귀족이 아니라면 외성에 살았을 것이다. 크기는 일반인 거주구역인 외성이 압도적으로 넓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고 귀족 거주구역인 중성보다 좀 넓은 수준. 외성 안엔 천연 해자인 대동강을 충분히 활용한 작은 운하가 외성 시가지를 관통했다. 이 운하를 다루기 위해 수구문들도 있었다고 한다.
외성을 쌓을 때 구간을 나누어 담당자를 정했는데 이를 비석에 기록했다. 발견된 비석엔 566년에 11리 구간을 소형(小兄)[13] 상부(相夫)[14] 약모리(若牟利)가 담당했다고 한다. 569년엔 12리 구간을 맡은 자는 물성(物省)[15]의 소형(小兄)이 맡았다고 한다.
이 비석들의 발견으로 이 평양성이 바로 양원왕이 쌓은 장안성이라는 것이 증명됐다. 삼국사기 기록엔 양원왕은 552년부터 장안성을 쌓기 시작해 30년 뒤인 평원왕이 천도하기 때문.[16]

3.2. 중성


중성에는 귀족의 사택과 정부 관사들이 있었다. 외성보다 조금 작았으며 총 5개의 문이 있었다.
  • 정양문: 중성의 서남문.
  • 함구문: 중성의 동남문.
  • 보통문: 중성의 남쪽에 있는 서문. 문서 참조. 보통문과 선요문 사이에 서성교가 있다. 옹성이다.
  • 경창문: 중성의 북쪽에 있는 서문. 보통문과 경창문 사이에 보통교가 있다. 고려 장락궁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다. 옹성이다.
  • 육로문: 중성의 동문. 바로 앞에 대동강이 있다.
고구려 동부[17],서부,남부,북부,중앙부 5부의 귀족들이 살았으며 고구려 정부조직의 관사들이 밀집해 있었다.

3.3. 내성


궁궐은 내성에 위치했다. 내성은 왕궁만 있어서 좁을 것 같지만 거의 중성만한 크기이다.
  • 대동문: 내성의 남동문. 위에 옥류교가 있었다. 고려 장락궁에 같은 문이 있었다. 옹성이다.
  • 주작문: 내성의 남문. 도교 속 남쪽을 상징하는 신령의 이름을 따왔다. 고려 황성에 같은 이름의 문이 있었다.
  • 정해문: 주작문 서쪽에 있는 남문.
  • 칠성문: 내성의 서문. 옹성이다.
  • 장경문: 내성의 북동문.
아쉽게도 중성, 내성은 고려, 조선시대에 시가지로 광활하게 사용됐기에 고구려의 흔적을 찾기 힘들다. 이곳에 평원왕부터 평강공주, 영양왕, 영류왕, 대양왕, 보장왕과 기록되지 않았던 왕족들이 살았을 것이다. 별궁의 흔적이 남아있다. 안학궁은 남아있는 건물터를 보면 매우 크고 화려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평양성 내성의 궁궐도 매우 화려했을 것이다.

3.4. 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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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성의 을밀대
  • 평양성 현무문: 북성의 서문. 이름은 도교 속 북쪽을 상징하는 신령의 이름을 따왔다. 이름을 보면 알다시피 주작문과 대비되는 현무문은 내성의 북문 취급을 받았다. 옹성이다.
  • 전금문: 북성의 동문.
평양성의 산인 금수산을 감싸는 성이다. 부벽루, 을밀대 등 유명한 누각과 대가 있었으며 조천석, 기린굴 등 유명한 전설 속 장소가 있었다. 영명사가 이 북성 밑에 있었다.

4. 전투 목록



4.1. 평양성 전투




5. 관련 문서



[1] 이는 월성명활산성을 구축한 신라, 몽촌토성, 풍납토성을 구축했던 한성 시기 백제도 마찬가지였다.[2] 북한학계에서는 낙랑국의 유적으로 보고 있다[3] 단, '낙랑군이 있던 곳=왕검성'은 아니기 때문에 왕검성을 평양성 부근으로 비정하는 것은 유력한 학설이라기 보다는 그럴거라고 추정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있다.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사료와 고고학적으로 검증이 되지만,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다는 것은 아직까지 명확하게 입증되지 않았다.[4] 국내성은 평지성, 국내성과 연결된 환도성은 산성.[5] 국내성이 있던 지안 땅은 신라의 수도가 있던 경주 분지의 반의 반도 안 되는 협소한 분지다.[6] 삼국사기에는 재위 2년 째 되는 해에 평양에 사찰 아홉 개를 지었다고 하며 재위 14년차때는 평양으로 대대적인 사민정책을 추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7] 광개토대왕이 일군 아홉 사찰 중 하나인 영명사는 구제궁이라 불리며 고려시대까지 이어졌다.[8] <중국 학계의 고구려 도성 연구와 전망> 박시현 저. [9] 국내에선 노태돈에 의해 주장되기도 했다[10] 삼국사기엔 내전의 기록이 없다. 일본서기가 인용한 백제기 기록.[11] 성, 마을 등 옛 터를 이른다.[12] 본인 또한 고구려계 패서 호족 출신이라는 것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13] 고구려의 관등.[14] 고구려의 관직?인 듯하다.[15] 역시 고구려의 관직이거나 정부 부서로 보인다.[16] 고려 개경 나성이 완성되는데 21년이 걸린걸 보면 얼추 기간이 맞는다.[17] 유명한 막리지 연개소문이 동부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