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등
上大等
1. 개요
신라시대 귀족 권력을 대표하는 최고 관직이다. 상대중등, 상신이라고도 불렸다.
오늘날로 치면 국회의장이나 상원의장과 비슷하다. 최고 관직이지만 이벌찬과는 다른데, 비유하자면 이벌찬은 1급 공무원 같은 관등명이고 상대등은 국회의장 같은 관직명이다. 물론 상대등 자체가 최고위 관직이므로 상대등을 역임하는 인물은 관등 역시 높은 사람들이 맡았다.
귀족의 대표자로서 왕권을 견제하는 신권을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며, 국왕을 보좌하며 행정을 맡는 시중과 성격은 좀 다르지만 서로 겹치는 부분이 있었다. 따라서 왕권의 변화와 함께 상대등과 시중의 파워는 엎치락 뒤치락했다. 왕권이 가장 강했던 시기에는 거의 형식적인 정도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신라에서 '대등'을 다른 말로 '신(臣)'이라 표기하기도 했는데 일본 측 기록인 속일본기에 따르면[1] 상신(上臣)이라는 신라 관등을 소개하고 이를 훈독해 마카리타로(萬加利陁魯, 만가리타로)라고 써 놓았는데[2] , '등'의 당시 음이 '타로'에 대응하는 것을 보여주며, 이를 통해 발음이 비슷한 고구려의 관직명 대로(對盧)와 같은 어원으로 짐작하기도 한다. 신라의 '등'이 앞에 클 대(大) 자가 붙어 '대등'으로 발전한 것처럼 고구려의 '대로' 역시 앞에 大를 붙여 '대대로'로 발전한 부분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상신과 상대등이 음운상 일치하기는 해도, 속일본기에 등장하는 상신은 상대등과는 '''다른 관직이다.''' 일본서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이사부와 김춘추, 속일본기에서 상신으로 나오는 김순정와 김옹 중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상대등 임명자와 겹치는 사람은 하나도 없으며, 성덕대왕신종에서 대각간 김옹이 상상(上相)으로 등장하는 것과 다르게 그 당시 상대등이었던 김양상은 김옹보다 낮은 각간의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서도 선덕왕 말년 김경신이 상대등이라 하였으나 삼국유사에서는 김경신은 이재(二宰)이고 김주원이 상재(上宰)라고 기록되어 있다.
2. 역사
상대등 이전에 대등(大等)이란 관직이 존재했는데, 주와 군에 파견된 행사대등, 소경의 장관인 사대등, 중앙정치기구의 차관인 전대등 등으로 분화되어 국정을 담당했다.
'''법흥왕 때(531년) 처음으로 철부가 상대등으로 임명되어 시작'''되었는데, 그 이전까지 왕이 직접 주재했던 화백회의를 대신해 주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적당한 왕위계승권자가 없는 상황이 닥치면 상대등은 왕위를 계승할 후보 우선순위로 여겨지기도 했다. 화백회의는 만장일치 합의제로 신라 성립 초기부터 존재하였으며 왕권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견제, 심지어 특정 왕(진지왕)마저 폐위시킬 수 있었을 만큼 권한이 막강했다. 이런 화백회의의 장(長)이 상대등이다.
진흥왕시기인 단양 적성비(赤城碑)에는 "대중등大衆等"이란 이름이 보이고 있으며, 그후에 만들어진 진흥왕 순수비 또는 삼국사기에는 비슷한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마운령비와 황초령비에는 7(또는 8)명의 대등이 보이고 있고, 창녕비에는 20(또는 21)명의 대등이 나타나고 있다.
선덕여왕 때 상대등이었던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가(비담의 난) 오히려 털리고 김춘추는 화백회의를 장악한다. 성골 국왕세력과 상대등의 충돌, 그리고 김춘추 김유신 세력이 이를 봉합하는 과정에서 성골 국왕과 상대등의 권위는 동반 하락했고, 김춘추 세력이 사실상 실권을 잡는다. 진덕여왕을 거쳐[3] 결국 김춘추가 진골 중 가장 우위임을 인정받아 왕에 오른다. 원래 진덕여왕 사후 알천을 왕으로 추대했으나 알천이 스스로 사양했는데 이는 상대등의 몰락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김춘추가 권력을 잡은 진덕여왕대부터 중국식 정치제도의 수용을 통해 국왕 중심의 관료제를 강화하면서 상대등으로 대표되는 귀족 권력이 약해졌고, 중대 왕권의 버팀목 역할을 하던 김유신을 상대등에 임명하면서 중대 왕권이 귀족회의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는 이전 시대와 달리 상대등이 국왕 견제가 아니라 역으로 왕권을 보좌하는 위치로 전락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귀족세력의 반발이 전혀 없지는 않았을 것이므로 때로는 타협책으로 귀족세력을 실질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실세 귀족을 상대등에 임명하기도 했는데, 이미 김춘추-김유신계가 권력을 장악하였음에도 김춘추 즉위 후 김유신보다 먼저 상대등이 된 금강이나[4] 680년(문무왕 20년)에 상대등에 오른 김군관이 그러한 부류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대등이 전제왕권에 방해물이 된다고 여겨지면 가차없이 숙청당하기도 했는데, 신문왕 때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반란에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닌 전직 상대등 김군관을 비롯한 진골 귀족들을 대거 숙청한 사건이 그 예다. 이렇게 전제왕권이 강화되고 상대등의 권력도 한동안 물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대신 왕을 보좌하며 실무를 담당하는 직책인 시중의 권한이 막강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전제왕권이 약화되는 중대 후기에는 상대등의 비판적 기능이 다시 작동하기 시작했는데, 경덕왕 15년(751) 상대등 김사인이, 혜공왕 13년(777) 상대등 김양상이 정치상황을 비판한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왕권이 약해진 하대에 들어서 상대등은 다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대의 첫 왕인 선덕왕이 상대등이라는 지위를 바탕으로 해서 왕위에 올랐고, 이후로도 상대등 역임자가 왕위에 오르는 일이 많아졌다. 자연스레 상대등은 유력 왕위계승권자로 인식되었고, 실제로 상대등의 지위를 이용해 찬탈을 시도하는 경우도 생기고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급부상했다. 물론 왕이 되고 나면 자기 자리를 뺏기면 안 되니까 가능하면 가까운 친인척을 상대등으로 임명하는 경향이 생겼다. 그러나 이런 조치는 왕족 사이에서도 작은 집안끼리 분파를 이루는 원인이 되었고 피튀기는 하대 왕위쟁탈전의 원인 중 하나가 된다.
3. 역대 상대등 역임자
법흥왕 때 최초의 상대등인 철부부터 경명왕 3년(919) 김성이 마지막으로 임명되기까지 400여년간 80명의 임명 사례가 삼국사기에 전한다.
- 이후 왕위에 오르거나 추존된 경우 ★을 표시한다.
- ★에 해당하는 인물을 제외하고 국왕과 6촌 이내의 왕족인 경우 ☆을 표시한다.
[1] 케이타이 덴노 23년[2] 중기 신라어-왜어 훈독. 중기 신라어는 지금의 일본어처럼 음독과 훈독이 공존했다. 삼국을 통일한 이후인 경덕왕 시절에 훈독을 폐지하면서 점차 사라졌다.[3] 진덕여왕 시대에 이미 최고 실권자는 김춘추였다.[4] 김춘추 다음가는 2인자이자 정권 실세인 김유신도 무열왕 7년인 660년에야 상대등에 임명되었다.[5] 일본서기에 따르면 529년에 이사부가 상대등을 지녔던 것으로 나온다.[6] 앞서 철부가 534년 사망했다는 기록과 상충한다. 그러나 철부가 죽은 후에 따로 상대등을 임명한 기사가 없는 걸 보아서 그가 죽기 전에 이미 교체된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7] 원문에는 그냥 대신(大臣)으로 나와있으나 "나라의 일을 총괄토록 했다."는 기록에 의거해 상대등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8] 일본서기에서는 647년에 상대등직을 역임하고 있던 사람이 김춘추라고 했다.[9] 나이가 들어 물러나길 청했고(727년, 728년) 이를 성덕왕이 받아들여 물려주었다. [10] 속일본기에서는 726년 당시 상대등이 김순정이라 하였다.[11] 시중 김옹과 함께 사직했다. 향가 중 하나인 원가의 작사가이다.[12] 성덕대왕신종에서는 771년 당시 김옹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양상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 속일본기에서는 774년 당시 상대등이 김옹이라고 하였다.[13] 삼국유사에서는 김주원이 상대등으로 나오고 김경신은 제2재상으로 기록되어 있다.[14] 삼국사기 본기에는 안 나오고 녹진 열전에서만 나온다.[15] 흥덕왕이 죽고 김제륭과 차기 왕위를 두고 싸우다 궁궐에서 벌어진 전투중 화살에 맞고 전사했다.[16] 삼국사기에는 안 나오고 삼국사절요에서만 나온다.[17] 919년대로 추정[18]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명왕편에 919년에 '''상대등 김성'''을 각찬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나와 있는데, 일반적으로 주술구조가 바뀐 것(=즉, 각간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은 것)으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