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벌 전투

 

<colcolor=#000000> '''황산벌 전투
黃山野 戰鬪'''

'''시기'''
660년 7월 9일 ~ 10일
'''장소'''
백제, 황산벌 (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1]
'''원인'''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공
'''교전국'''
백제 [image]
신라 [image]
'''지휘관'''
<^|1>계백
충상(忠常)
상영(常永)
그 외 미상
김유신(金庾信)
김흠순(金欽純)
김품일(金品日)
김관창
김반굴
그 외 미상[2]
'''병력'''
5,000명
50,000명
'''피해'''
방어군 궤멸
포로 20여 명[3]
피해 규모 불명[4]
'''결과'''
신라군의 승리 및 당(唐)군과 합류 성공
'''영향'''
백제 수뇌부 붕괴 및 멸망
1. 개요
2. 백제의 내분
3. 들판에서 싸웠다?
4. 전투의 성격
5. 백제군의 규모
6. 관창, 그리고 패배
7. 후폭풍
8. 그 외
9. 미디어

[clearfix]

1. 개요


[image]
▲오천결사대 출정상, 충청남도 부여군 출처
660년 음력 7월 9일 ~ 10일, 현재의 충청남도 논산시 황산벌에서 벌어진 백제신라 간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백제군은 신라군의 사비진격을 막아내지 못했다. 이후 당나라군과 신라군은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사비성을 공격, 백제는 멸망한다.

2. 백제의 내분


660년 당군이 황해를 건너 덕물도[5]상륙하면서 나당 연합군의 본격적인 백제 공격이 시작된다.[6] 백제 조정의 전략은 성충, 흥수의 말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당, 신라군을 동시에 모두 저지하려는 전략과 당군의 상륙을 일단 허용한 뒤 좁은 길목에서 당군에게 공세를 가하려는 전략이 맞서게 된다. 백제 조정은 성충과 흥수의 1안 대신, 조공으로 신라군의 전진을 저지하는 한편, 수도 주력군으로 기벌포[7]에 상륙해서 백강을 거슬러오르는 당군을 요격하는 전략을 채택한다.
성충과 흥수의 1안은 단순한 전략적 판단 외에,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면서 기존 귀족세력과 화합하여 나당연합군의 공세에 맞서자는 의도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미 백제 왕실과 귀족 세력은 극도로 깊은 골이 파여있었고, 이 상황에서 재결합하기 위해서는 백제 왕실로서도 파격적인 양보가 필요했으므로 이러한 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1안과 2안 모두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거나 최소한 지연시키는 것을 기본적인 전략으로 삼고 있으며, 백강에서 당군을 요격한다 해도 나당연합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면 최소한 탄현 근처에서 신라군을 잡고 있어야 하므로, [8] 백제의 기민한 초기 대응이 이뤄지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3. 들판에서 싸웠다?


[image]

至黃山之'''野''', 設三營, 遇新羅兵將戰。

황산의 '''들판'''에 이르러, 세개의 군영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조우하자 장차 싸웠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

결국 김유신 휘하 신라군 5만[9][10]이 탄현(대전광역시 식장산 동쪽 부근)을 넘어 충남의 평야지대로 진출하자 백제 조정은 좌평 충상, 달솔 계백상영에게 5천명[11]의 군사를 주어 황산벌에서 신라군을 저지하게 한다.
그런데 신라본기에는 계백이 들판에 진을 친 것이 아니라 험지를 선점했다고 적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10배가 넘는 적과 허허벌판에서 교전하면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포위돼서 붕괴해버릴 것이다. 이는 손자병법에도 잘 나와 있는데, 적보다 병력이 10배의 열세일 때 취해야 할 행동으로는 일단 튀어라(...)라고 적혀있다(以一擊十,曰走).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손자도 예상했던 모양인지, 약한 군대가 제 분수를 모르고 이런 상황에서 결전을 하겠다고 나서면 '''좆됨'''(將不能料敵,以少合衆,以弱擊強,兵無選鋒,曰北)이라고 친절히 적혀있다.[12] 이걸 계백이 몰랐을 리 없으나 전투를 피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평지보단 야트막한 산이나마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잡으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13][14] 한편 일본서기에는 신라군이 노수리산에 진을 쳤다고 한다.
[image]

신라의 춘추지가 병마를 거느리고 노수리산(怒受利山) 에서 주둔하였다.

일본서기

이 3개의 영은 각각 현재의 황령 산성, 산직리 산성, 모직리 산성으로 추측된다. 이 중 계백의 본영은 산직리 산성에 위치했을 것으로 비정된다. 계백이 열세에 있는 군을 셋으로 나눈 이유는 신라군이 산직리 산성을 우회하여 공격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하는 한편, 세 산성은 어느 한 곳에 공격을 집중할 경우 배후를 노출시키는 형세였으므로, 지세를 활용하여 병력을 유기적으로 활용하여 군을 분산시킨 약점에 대비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추가로 깃대봉-국사봉-귀명봉 주위의 보루에 소규모 병력을 배치하여 신라군의 우회를 감지하는 방식의 반원형 진을 짰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산직리 산성의 고도는 30~50m이고 모직리 산성도 150m에 위치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 산성은 석성도 아니고 작은 토성에 불과하다[15][16][17]. 산직리 산성은 석성일 가능성이 크긴 하지만 '''애초에 고도 때문에 평저성과 차이가 없다.''' 따라서 본격적인 공성전이라기보다는 구릉지대의 작은 토성과 목책을 세워 신라군의 공격을 저지하는 식의 전투가 벌어졌을 것이다.

4. 전투의 성격


황산(黃山)에 군진을 펼치니, 적들고슴도치올빼미처럼 모여들어 (우리의 진군을) 가로막고자 하였다.

列陣黃山蝟聚▨[18]

張欲申距

'''『문무왕릉비』'''

신라군의 목표는 진격로 상의 교전이 아니라 수도 사비성 도착, 당군과의 합류였기에 불필요한 교전은 피하고 곧장 진격하려 했을 것이다.[19] 그러나 계백의 백제군은 신라군과 반드시 싸워야만 했기에 성이나 방어에 용이한 장소에 틀여박혀 방어를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라군을 도발, 합전(合戰)을 해야만 했다. 이는 나당연합군이 일정한 영토점령이 아닌 애초부터 수도 사비성 함락, 백제 멸망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황산벌이 벌판이 아닌 산성이었다는 견해와 험준한 곳에 목책을 둘러 방어했다는 의견은 일부 사실일지 모르나, 이 전투는 기본적으로 공격군을 방어로서 요격하려는 성격이 아니었다. 백제군 지휘부는 이미 신라군의 진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단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를 황산벌에서 최대한 저지, 지연전을 펼치는 동안 후방에서 전력을 추스르겠다는 계획이었고, 결국 그것은 5천 결사대 전멸(全滅)이라는 결과로 나타난다.

5. 백제군의 규모


이 때 백제군의 규모에 대해서는 적게는 5천 명에서 많게는 1만 5천 명으로 본다. 1만 5천 명설은 달솔 계백보다 상위 직급인 좌평 충상, 상영이 존재했음을 이유로 이들이 계백과 대등하거나 더 많은 병력을 통솔하여 3군을 배치하였다고 추측하는 입장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명시적으로 백제군 5천 명이라고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고, 지휘관도 좌평 충상, 상영 대신 계백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충상, 상영은 명목상 지휘관이고,[20] 실제 지휘는 계백이 맡았을 것이다.[21]

6. 관창, 그리고 패배


처자식을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출발한 계백은 전투가 시작하기 전 "지난 날 구천(句踐)은 5천 명으로 오(吳)나라 70만의 무리를 격파하였다. 지금 오늘 마땅히 각자 힘써 싸워 승리함으로써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자.”라고 말하며 사기를 올리려 했다. 한명이 천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봐서 백제군의 사기가 매우 높았다는걸 알 수 있다.
7월 9일부터 10일까지 하루동안 신라군은 4차례나 백제군을 공격했으나 백제군은 4번 모두 신라의 공격을 패퇴시켰다.[22] 이에 신라군은 사기가 떨어지고 당군과의 합류 날짜를 맞추기 어렵게 되자 화랑 반굴관창을 백제군을 향해 돌격시킨다.[23] 반굴은 처음 돌격 때 전사하고, 관창은 한번 사로잡혔다가 풀려났으나, 다시 돌격하여 결국에는 사로잡히고, 계백도 이번엔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돌려보낸다. 이에 분노한 신라군이 백제군을 향해 마지막 공세를 펼친다. 그 전까지 4차례의 전투로 병력이 크게 소모된 백제군은 마지막 5번째 공세에는 끝내 버텨내지 못했다. 3영이 붕괴되고 충상, 상영을 비롯한 20여 명은 사로잡혔으나 계백을 위시한 결사대 5천은 전멸한다. 백제군이 신라군의 진격을 저지한 시간은 하루에 불과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방어진지도 아닌 3개의 산성에서, 당군과의 합류를 위해 최대한 공격적으로 나왔을 신라군을 상대로 4차례나 승리한 것은 그만큼 계백의 지휘가 탁월했고 백제군이 분전이 눈부셨다는 방증이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이 입은 피해는 알 수 없다. 백제군의 분전으로 인해 피해가 적지 않았으리라는 추측도 있으나, 반굴관창이 이끈 별동대 이전에 있던 4차례 전투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없다. 반굴과 관창은 소규모 별동대를 이끌었으리라 추정되며 사상자가 대거 발생했다면 수습에도 그만큼 시간이 오래 걸리기 마련인데 전투 직후 바로 신라군이 진군을 계속해 소정방과 합류했다는 점까지 감안하면 큰 피해 없이 압도적인 전력차의 신라군이 포위섬멸 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 대부분의 전근대 전투에서는 교전 자체보다는 승패가 결정 되고 패배한 측이 전장에서 이탈하는 과정에서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황산벌 전투 전투서열을 정리한 대전대 군사학과 윤일영 교수는 아예 백제군이 4차례에 걸쳐 신라군을 저지한 후에 반굴과 관창의 공격이 이뤄진게 아니라 반굴과 관창의 공격이 그 4차례 공세에 포함 되어있다고 주장한다. 삼국사기 계백 열전에선 신라군을 4차례 걸쳐 격퇴했다고 서술했고, 반굴이나 관창이나 단기로 공격하지 않았다. 이들의 공격이 4차례 공세에 포함되지 않았다면 4차례 공세에 이 둘의 공세까지 더해(관창의 공세는 2번이니까) 7차례에 걸쳐 저지하고 8차례째에 무너졌다고 서술해야 한다는게 윤교수의 주장.
이는 《삼국유사》 태종 무열왕 본기와 《삼국사기》계백, 관창 열전의 기록이 상충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인데 무열왕 본기에선 4차례에 걸친 공세가 실패한 후 반굴과 관창을 투입했다고 적었으나 관창 열전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리고 계백 열전에는 4차례 걸쳐 신라군을 저지했으나 힘이 다하여 죽었다고 적고 있다. 흔히 반굴과 관창이 단기돌격한걸로 알려져 있다보니 의문을 갖는 사람이 적은데 상술했듯 반굴이나 관창이나 혼자 돌격했을 가능성은 없다. 병력을 이끌었는데 이들을 격퇴했다면 이를 세지 않을 이유가 없다.

7. 후폭풍


황산벌 전투의 패배로 당군과 신라군의 합류를 저지하려던 백제의 전략은 실패했고, 백강으로 들어오는 당군에게도 대패하면서 결국 당군과 신라군이 합류한다. 하지만 신라군의 출발시점이 너무 늦었던 탓에[24] 신라군의 합류 일정이 늦어지자 당군은 신라의 장수 김문영을 처형하려고 하는 등 압력을 넣었으나 김유신소정방에게 강경대응하면서 일단 알력은 무마되었고,[25] 얼마 되지않아 의자왕은 부여성에서 탈출하여, 방어에 조금 더 유리한 성 웅진으로 달아났으나 결국 예식진의 배신으로 사로잡힌다. 이를 두고 의자왕이 전쟁을 장기전으로 끌고 가려했다는 시각도 있으나, 그럴 가능성은 낮다. 그러려면 위에서 언급한 대로 성충, 흥수의 1안을 따랐어야 한다(...). 거기에 백제의 상비군은 위의 두 전투를 거쳐 거의 와해된 것으로 추정한다. 결국 백제는 황산벌 전투를 계기로 수뇌부가 붕괴하여 멸망한다.

'''적의 수도(首都)에 이르자 그 우두머리가 군문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하였고, 그 좌리(佐吏)들도...[26]

'''

至賊都元惡泥首轅門佐吏...

『문무왕릉비』

그러나 660년의 상황은 백제 전국이 온전히 남아있는 상황에서 오직 웅진, 사비 등 백제의 수도권만 격파 당한 상태였고, 이후 3년간 일본에서 돌아온 왕자 풍왕을 중심으로 나당연합군에 항전했다. 실질적으로 백제의 전력이 완전히 붕괴한 것은 백강 전투로, 동사강목을 쓴 안정복조선시대의 역사학자들은 의자왕 다음으로 풍왕이 마지막 왕이고 백제의 멸망은 663년이라고 봤다. 이렇게 볼 경우 황산벌 전투는 백제의 마지막 불꽃이 아니라 백제 멸망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

8. 그 외


아이러니하게도 후삼국시대후백제 마지막 왕을 자처하던 신검고려와의 전투에서 패해 항복한 곳도 황산벌이다. 어떻게 본다면 황산은 백제와 정말 악연이 있는 장소다.

9. 미디어



유명한 전투다 보니 여러 번 영상화되었다. 재미있는 점은 황산벌 전투의 경우 방송 3사 모두 한 번씩 영상화 하였다. 그런데 방송사에서 다룬 황산벌 전투는 삼국기를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군이 쌀배달이니 군수품 보급을 담당했다는 소리로 시작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황산벌 회전에서 신라군이 맡은 역할은 절대로 쌀이나 보급품을 전달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군과의 신속한 합류가 목적이다. 당나라군은 수군 함대로 병력과 물자를 수송했기에 신라군의 군량 보급이 필요 없었다. 신라군이 당나라에 군량 보급을 한 경우는 고구려 정벌시에 겨울철 항해가 불가능한 때에 김유신이 한 번 군수물자를 보급한 것과 백제 멸망 후 백제에 주둔한 당군에게 식량을 제공한 것이 전부이다. 이 두 가지는 "답설인귀서"에 정확히 적혀 있다. 그 외에는 당나라에서 생산되는 넉넉한 군량으로 다 채웠다.[반론]
  • 1992년 삼국기: 이때 계백역을 맡은 유동근과 김유신역에 서인석은 드라마 연개소문과 정도전에서 다시 라이벌로 만난다.
  • 2003년 황산벌: 문서 참고. 고증을 딱히 신경 쓴 영화는 아니지만, 코미디 영화라는 홍보를 보고 찾아온 관객들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전개로 2000년대 사극 영화로는 이례적인 수준의 임팩트를 남겼다. 오히려 사학자들이 좋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역사의 굵직한 면을 비교적 사실적이고 현실적이게 그렸기 때문.[27]
  • 2006년 연개소문(드라마): 극 후반부 백제 멸망을 다루면서 함께 다뤄진다. 그런데 드라마가 드라마인지라 병맛이다.[28]
  • 2011년 계백(드라마): 계백이 주인공인 드라마이니 만큼 마지막을 장식하는 전쟁으로 그려진다. 작중에서는 의자왕도 계백도 처음에는 성충, 흥수의 작전대로 기벌포와 탄현에서 적을 틀어막고 장기전으로 끌고 나가려 하지만 귀족들이 사병들과 함께 죄다 도망가는 바람에 작전에 필요한 병력을 조달할 수 없어져 결국 차선책으로 기벌포와 황산벌에서 당군과 신라군을 요격하는 작전을 택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 2013년 대왕의 꿈
여기서는 계백이 평야에 목책을 세우고 신라군을 저지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관창과 반굴의 전사로 신라군의 사기를 올리고 신라군이 최후의 야습을 감행하며, 두 좌평인 충상과 상영이 배반하여 진에 잠입한 신라군과 군량을 불태우고 진을 혼란스럽게 해 목책이 함락되는 것으로 묘사된다.
[1] 황산벌 전투의 전장이 육군훈련소 근처기 때문에, 육군훈련소가 1절에도 계백관창이 등장한다. 육군훈련소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는 훈련병과 기간병이라면 퇴소 또는 전역 때까지 자주 부르게 된다.[2] 삼국유사에는 장춘랑(長春郞)과 파랑(罷郞)이라는 인물들이 황산벌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3] 그런데 사실 계백의 전사 후 패잔병(?)들이 웅진강 입구를 막고 강변에 주둔했다고 한다[4] 족히 1만 명은 잃지 않았겠느냐는 주장부터, 1천에서 3천 정도로 잡는 경우도 있다. 하여튼 신라군이 무시 못할 피해를 입었다는 것에는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한다. 김유신이 바보도 아니고, 기한에 맞춰 웅진성으로 가야 하는데 열 배나 되는 대군이 사소한 피해를 입었다고 몇 번 씩이나 후퇴할 리가 없기 때문.[5] 지금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도[6] 그러나 덕적도에서 나당연합군이 만났음에도 백제가 이를 자신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라고 완전하게 느끼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수나라부터 서해를 횡단하여서 평양으로 직공하던 적이 몇 번 있었고, 전과는 달리 약간 남쪽으로 오기는 하였지만, 신라왕이 군대를 이끌고 한강유역까지 북상하였기에 황해도를 공격해서 평양으로 갈 것으로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후 덕적도에서 당군이 남하하고, 신라군도 남하하면서부터 백제에 대한 공격이 확인되었다.[7]서천군 장항읍[8] 신라가 탄현을 우회하는 루트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었다는 설도 있다. 이 경우의 우회루트가 익산이나 대전인데 이쪽은 탄현보다 대규모 거점이었다는 문제가 있으나, 신라 병력이 워낙 대규모였다는 것, 국왕직속병력은 모두 차출되어서 백강으로 달려갔을 것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지키는 귀족 병력들이 얼머나 중앙군과 일치단결하여 대처할지에 대해서 백제왕실이 불안해했을 수는 있다.[9] 대체로 신라 안에서도 지금의 경상도 주둔 병력 위주로 구성되었으며 경기, 강원 지역 일대 주둔 병력은 고구려와 대치중인 관계로 편성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어차피 경기강원은 전방지역이자 지정학적 요충지일 뿐 현대처럼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은 아니었으므로 이 당시 신라는 경상도 지역 외에는 딱히 인구 밀집지대라고 할 게 없었다고 보는 편이라(+안정적으로 병력 동원 가능한 베이스) 신라가 동원 가능한 전력의 대부분이라고 볼 수 있었다. 혹여나 신라군은 당나라를 위한 보급부대라는 주장이 있으나 해상을 통한 보급의 우위와 중국측 사료를 보면 맞지 않는 소리다.[10] 다만 앞의 의견에 일부분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는데, 강원지역은 인구수가 많은 곳도 아니고, 태백산맥을 통하여서 충북일대까지 고구려군의 작전이 가능하기에 유지하여야 하고, 경기지역도 비교적 넓은 서남부지역은 백제와의 경계지역이라 많은 인구가 살 지역이 아니였다. 그러나 경상도도 이에 마찬가지로 낙동강 서안지역 일부가 이때까지도 백제가 점유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특히나 이 지역의 백제군이 움직이면 수도 서라벌이 위험할 가능성이 있기에 병력을 뺄 여유가 많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5만명이 보급부대라는 정확한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후에 진행되는 고구려 공격에서 신라군이 주로 보급부대 역할을 하였다라는 것과 13만명이나 되는 병력의 보급물자 소비가 막대하다는 것, 그리고 산동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한반도 지역이 장산곶인데, 이곳은 고구려의 영역이자 수도 평양과 비교적 근접한 지역으로 13만이나 되는 병력을 막지는 못하지만, 보급선을 위협하거나 끊어질 위험도가 있다는 점에서 이때에도 보급부대 역할을 하였을 가능성이 낮지는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11] 병력 5천은 백제의 방군성 체제에서 중앙 5방의 주둔군 1천 병력의 합과 일치한다. 백제왕실이 직접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수가 황산벌에 투입된 병력의 숫자와 일치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적들이 코앞까지 와있는 상황임에도 백제 왕실과 백제 지방 귀족들과의 갈등이 봉합되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 때문.[12] 흔히들 소수의 아군으로 다수의 적군을 물리친것에 "우와~ 대단하네!" 라고 여기곤한다. 하지만 군사운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단한건 맞지만 웬만해선 하면 안되는 행동이다.''' 이상적으로는 이런 상황 자체가 발생하지 않게하는 것이 가장 좋다. 반대로 말해서 상대에게는 그런 상황을 강요하는 것이 이상적이기도 하다는 소리이다. 웬만하면 다수의 아군이 소수의 적군을 그리고 아군이 유리한 곳에서 싸우는게 맞다. '''적군의 피해만큼이나 아군의 피해도 고려해야하기 때문이다.'''[13] 손자병법에 아군 병력이 열 배 많을 때는 사방 포위, 다섯 배일 때는 우직하게 정면돌파, 두 배일 때는 별동대를 조직하여 앞뒤로 양동작전, 비슷할 때는 대치가 정석이라고 보았다. 아군이 두 배 열세일 때는 야전 방어, 다섯 배 열세일 때는 공성을 유도해야 한다고 했으며 열 배 열세일 때는 본문에 언급했듯이 도주 후 유격전이 가장 타당하다고 했다.[14] 거기다 결사항전을 하던 여러 전쟁 영웅이나 인물들 가운데 방어전은 역시 자연 천혜의 요새로 보이는 산지에서 싸우는 것이 가장 적합했다. 적이 가려는 진군로 앞에 험준한 산지가 있다면 누구나 방어전에 알맞은 자리인데다가 계백도 젊었을 적에 이름 날린 장수임을 생각하면 이런 판단이 가장 정설로 보인다.[15] 사실 고대사에서 토목 공사 기술이 그렇게 발전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토성을 쌓았던 것이 일반적이긴 하다. 고구려의 석성도 사실상 긴 시간 동안 토목 공사를 해서 그렇지 계백은 재빨리 결사대를 꾸려서 방어전을 했기에 시간이 급급해서 토성을 쌓았을 가능성이 높다.[16] 비록, 토성이 석성에 비해 방어가 부족하긴 하나 목책이나 여러 방어 시설을 설치하면 왠만한 석성 못지 않게 방어할 수 있고 추측하자면 계백이 그만큼 상황이 긴박했음을 볼 수 있다.[17] 앞에서 나오듯이 흔히 성이라고 하면 돌이나, 벽돌로 쌓여진 성곽을 가진 것을 생각하지만, 사실 원래는 토축으로 만든 토성이 튼튼하였다. 애초에 우리나라에서는 돌로만 만든 성들이 거의 없이 토축으로 만든 성벽에 앞뒤로 돌을 쌓은 방식으로 축조하였다. 그리고 다지기만 잘 되어 있다면 일정 관리만으로 성벽이 유실되지 않게 할 수 있는으며, 성벽을 오르기에도 토성은 제법 어려운 편이다. 거기다가 이것이 평지가 아닌 구릉지대라면 밑에서 올라가야 하는 적군의 어려움은 증가한다.[18] 1글자는 마모되어 확인 불가.[19] 이전까지의 나제간의 전투는 모두 국경지역에서 몇 개의 성을 빼앗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였는데, 나당연합군은 수나라 이후 고구려 공격에 방책 중 하나였던 수도 직공으로 변경되었다. 이에 변방의 성들이 대항할 수 없는 병력 규모로 구성되어서 전투를 할 엄두가 나지 않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방책은 백제의 중앙조직이 빠르게 붕괴시키는데에는 효과적이였으나, 지방에 세력들이 남아 있음으로 인하여서 후환을 두는 계책이였다.[20] 의자왕은 자신의 서자 40명을 좌평으로 임명하였으므로, 충상은 사기를 높이기 위해 계백과 함께 파견된 왕자였을 가능성도 있다. 근데 김유신 열전에서 의자왕에게 김유신과의 거래에 대해 조언한 적도 있다. 즉 이전부터 대신으로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상영은 달솔이었으나 위 백제군 전략의 2안의 입안자로 황산벌 전투 즈음에서 좌평으로 승진한 것으로 보인다.[21] 조선상고사에서는 의직이 당군을 저지하기 위해 1만명을 이끌고 파견되었다고 실려있으나, 다른 기록에는 전혀 없는 부분이라 윤충의 월주정벌처럼 신빙성이 떨어진다. 백강 전투에서 당군의 상륙 저지가 실패한 뒤, 사비성 인근에서 백제군과 당나라군과의 교전에서 1만이 넘는 백제군이 전사한 기록이 있는 점을 보면, 황산벌에 파견된 백제군 전력을 제외한 중앙군은 당군과 교전했을 가능성이 높다.[22] 세번째 공격 때는 기어이 신라군이 백제군을 완전히 포위하는 데 성공했는데 백제군이 어찌나 처절하게 덤벼들었는지 '''포위망이 뚫렸다(!)''' 쉽게 말해서, 전력적/전술적 이점을 완전히 취하고도 '''결사항전'''이라는 단 하나의 의지에 패배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 포위망 때문인지 네번의 공격 후 백제의 전력이 80%가 박살났다.[23] 흔히 반굴관창의 돌격이 '단기돌격'이라 알려져 있고 여타 대중 매체에서도 그렇게 묘사되는데, 이건 삼국사기가 아니라 삼국사절요와 단재 신채호조선상고사에서 와전된 이야기다. 삼국사기 원문에서 관창이 잡힐 때 분명히 "'''적군은 많고 아군은 적었기 때문에而彼衆我寡''' 적에게 사로잡혀 산 채로 백제 원수 계백의 앞으로 보내졌다"라고 적혀 있어서, 숫자가 적었던 건 맞지만 관창 혼자서 돌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이들의 돌격이 사기 진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군의 기동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주장도 있는데, 반굴과 관창이 자살돌격으로 시선을 끄는 사이 병력의 일부를 나누어 황산벌의 중심을 흐르는 연산천 옆의 구릉을 우회하여 계백의 5천 병력을 포위섬멸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반굴과 관창의 돌격은 단기돌격이 아니라 상당수의 병력을 필요로 하게 된다.[24] 황산벌로부터 부여성까지 거리는 이틀거리였는데 황산벌에 도착한 건 하루 전이었다. 전투 하는데 또 하루를 소모했으니 약속 시간보다 이틀이나 늦어버렸다.[25] 김유신이 직접 도끼를 매고 당나라 진영으로 가서 '''백제를 멸망시키기 전 당군 네놈들부터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이에 잔뜩 쫄아버린 당군 수뇌부는 바로 김문영의 처형을 없던 일로 했다(...). 사실 말 그대로 쫄았다기보다는 고대에는 꽤 리스크가 있는 원양 항해까지 하며 10만명이 넘는 대군을 신라와의 파트너십을 위해 원정 보냈는데, 고작 며칠 늦었다고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당은 한반도 내의 파트너를 잃고 제 1목표인 고구려 원정도 기약할 수 없게 된다는 외교적 배경도 있었을 것이다. 단독으로는 안 된다는 걸 고구려-수 전쟁고구려-당 전쟁으로 뼈저리게 알고 있는 당 수뇌부였을테니...[26] 뒷글자는 마모가 심해 확인이 불가능.[반론] 당나라는 당시 사방으로 팽창하던 국가로 많은 군사들을 천지사방으로 나눴다. 이들에 대한 군량을 모두 자체적으로 조달하였다라는 것은 사실 말도 안되는 것이며, 수도 장안이 있던 관중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체 식량 수급이 불가능한 지역으로 이를 해결하고자 수양제대운하를 건설하였다. 또한 당시 강남지역이 하북의 경제력을 완벽하게 능가하는 수준이라고 보기에는 어렵기에 고민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신라군이 보급부대가 아니라면 소정방이 김유신을 약속시간보다 더 기다릴 필요가 사실 없다. 왜냐하면 소정방은 13만명으로 사비성 앞에 있는데, 단지 연합을 하였다라는 이유로 5만에 불과한 병력을 기다릴 이유가 없다. 오히려 단독작전으로 사비를 점령하고, 신라가 백제 멸망에 한 일이 없음을 들어서 영토를 내주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편이 훨씬 편했다.[27] 어디까지나 굵직한 부분이다. 코미디 부분을 좋게 볼 리는 없지 않은가(...). [28] 백제군과 신라군을 다 합해서 100명 될까 말까 한 정도의 숫자로 어설프게 싸우는 등 굉장히 허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