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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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7월 1일 - 2010년 9월 30일
국산 사운드카드의 아버지이자, 前 옥소리, 훈테크, 훈넷, 포털아트 대표. 국내 1세대 벤처기업인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출신#으로 거창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에 1년과정의 기술연수를 거쳐 금성사에 입사했다. 당시 금성사 고졸 기술연수생 모집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는데, 그 17명 중에서 유일하게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잔심부름 같은 일을 했지만, 다른 사람의 당직까지 떠맡아가면서 모두 퇴근한 연구소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금성사 연구팀의 어엿한 인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금성사에 있는 동안 100여건 이상의 발명품을 특허출원하고, 1982년부터 연속 3년간 사내 발명왕이 되기도 했으며, 1985년에는 상공부 발명공로 표창도 수상. 1985년 금성사를 퇴사하고 1987년 옥소리의 전신인 삼호전자에 입사했다가 1989년 회사가 쓰러지자 자신이 삼호전자를 인수해 옥소리 사운드카드의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1992년 6월에 옥소리 최초 제품을 발매하였고[1] , 이내 옥소리는 국내 사운드카드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히트상품이 되었다. 삼호전자는 아예 회사명을 옥소리로 개명했고, 김범훈 사장도 주목을 받았다. 최고 전성기때는 벤처기업인의 신화이자, 고졸 기업인의 신화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히트상품인 옥소리 카드는 옥소리 노래방이라는 FM음원의 노래방 번들 프로그램을 제공했는데, 이 옥소리 노래방은 당시 노래방 열풍을 타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2] 덕분에 당시에 수많은 유사 노래방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고, 이런 노래방 프로그램들은 1990년대 후반 까지도 많이 나왔다. 그 외에도 옥소리에 CD-ROM을 번들한 멀티미디어킷을 발매하고, CD-ROM 멀티미디어 컨텐츠나, 각종 멀티미디어 하드웨어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중반 국내 멀티미디어 PC 시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운드블라스터와 경쟁을 벌이던 옥소리는 다양한 시리즈를 거듭하여 1995년에 옥소리 WS32 MEF-II 까지 등장하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김범훈 사장은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옥소리를 한솔전자에 매각했다. [3] 하지만 한솔전자의 적대적 인수로 옥소리 사업을 축소하면서, 그에 반감을 느낀 김범훈 사장은 기존의 옥소리 개발진을 데리고 나와 회사를 새로 설립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훈테크.
김범훈 사장과 기존의 개발진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훈테크는 사운드트랙 시리즈라는 옥소리의 직계 후속작을 만들게 되는데, 세계최초 4채널 사운드카드와 세계최초 PCI 사운드카드도 여기서 등장했다. 사운드트랙 시리즈는 하드웨어 미디 성능에서는 사운드 블라스터 AWE32, AWE64를 능가하는 성능을 보였으나[4] , 드라이버 문제로 고전하게 되었고[5] , 내장사운드 시대의 도래로 사운드카드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멀티미디어 하드웨어에서 손을 떼고 훈넷을 만들어 소프트웨어 개발[6] 및 '''대북사업'''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 이전에 훈넷은 당시 벤쳐 IT투자 붐을 타고 주식시장을 뒤흔들던 인터넷전화회사인 새롬기술과 같은 인터넷전화 회사를 만들겠다고 개인투자자의 자금을 끌어모았던 회사다. 하지만 정작 훈테크의 기술을 믿고 새롬기술과 같은 회사의 초기주주가 된다는 생각으로 돈을 싸들고 갔던 개미투자자들은 허름한 사무실 앞에서 길거리까지 줄을 늘어서서 접수하면서 상당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식을 받은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된 사업내용이 인터넷전화에서 전혀 엉뚱한 대북관련 도박사이트 운영 등으로 뒤바뀌어버렸다. IMF사태 직후라 어렵게 모은 재산이나 남은 돈을 가지고 오직 김범훈이란 유명인만을 믿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다.
2000년대 초중반 대북사업으로 온라인 복권, 카지노 같은것을 추진했으나, 통일부와 법무부의 의견차로 훈넷의 대북사업은 붕 뜨게 되어버렸고#, 결국 북한과의 마찰로 김범훈 사장을 포함한 훈넷의 임직원들이 북한에 억류되고 말았다. 다행히 억류 인원들은 풀려나고, 대북사업은 2004년 까지 유지되는듯 했으나, 이내 얼마가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06년 11월에는 그의 일생 마지막 사업인 포털아트라는 미술품 경매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럭저럭 순조롭게 되어가는듯 했으나, 창업 3년만인 2009년 11월에 건강상 문제로 포털아트 대표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2010년 9월 30일 백혈병으로 사망.
과거의 신화적 행보와 대조되게 그의 부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왕년의 옥소리나 사운드트랙 사운드카드 시리즈 팬들 대부분은 이 슬픈 소식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씁쓸한 현실...
1959년 7월 1일 - 2010년 9월 30일
국산 사운드카드의 아버지이자, 前 옥소리, 훈테크, 훈넷, 포털아트 대표. 국내 1세대 벤처기업인이다.
경상남도 거창군 가조면 출신#으로 거창 대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9년에 1년과정의 기술연수를 거쳐 금성사에 입사했다. 당시 금성사 고졸 기술연수생 모집에서 2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는데, 그 17명 중에서 유일하게 인문계 고등학교 출신이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잔심부름 같은 일을 했지만, 다른 사람의 당직까지 떠맡아가면서 모두 퇴근한 연구소에서 독학하고 노력하여 금성사 연구팀의 어엿한 인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금성사에 있는 동안 100여건 이상의 발명품을 특허출원하고, 1982년부터 연속 3년간 사내 발명왕이 되기도 했으며, 1985년에는 상공부 발명공로 표창도 수상. 1985년 금성사를 퇴사하고 1987년 옥소리의 전신인 삼호전자에 입사했다가 1989년 회사가 쓰러지자 자신이 삼호전자를 인수해 옥소리 사운드카드의 개발을 추진하게 되었다.
1992년 6월에 옥소리 최초 제품을 발매하였고[1] , 이내 옥소리는 국내 사운드카드 시장의 80%를 차지하는 히트상품이 되었다. 삼호전자는 아예 회사명을 옥소리로 개명했고, 김범훈 사장도 주목을 받았다. 최고 전성기때는 벤처기업인의 신화이자, 고졸 기업인의 신화적인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히트상품인 옥소리 카드는 옥소리 노래방이라는 FM음원의 노래방 번들 프로그램을 제공했는데, 이 옥소리 노래방은 당시 노래방 열풍을 타고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2] 덕분에 당시에 수많은 유사 노래방 프로그램들이 등장하고, 이런 노래방 프로그램들은 1990년대 후반 까지도 많이 나왔다. 그 외에도 옥소리에 CD-ROM을 번들한 멀티미디어킷을 발매하고, CD-ROM 멀티미디어 컨텐츠나, 각종 멀티미디어 하드웨어 등 다양한 멀티미디어 분야에서 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1990년대 초중반 국내 멀티미디어 PC 시장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사운드블라스터와 경쟁을 벌이던 옥소리는 다양한 시리즈를 거듭하여 1995년에 옥소리 WS32 MEF-II 까지 등장하는 전성기를 구가했으나, 김범훈 사장은 무슨일인지는 몰라도 옥소리를 한솔전자에 매각했다. [3] 하지만 한솔전자의 적대적 인수로 옥소리 사업을 축소하면서, 그에 반감을 느낀 김범훈 사장은 기존의 옥소리 개발진을 데리고 나와 회사를 새로 설립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훈테크.
김범훈 사장과 기존의 개발진들에 의해 다시 세워진 훈테크는 사운드트랙 시리즈라는 옥소리의 직계 후속작을 만들게 되는데, 세계최초 4채널 사운드카드와 세계최초 PCI 사운드카드도 여기서 등장했다. 사운드트랙 시리즈는 하드웨어 미디 성능에서는 사운드 블라스터 AWE32, AWE64를 능가하는 성능을 보였으나[4] , 드라이버 문제로 고전하게 되었고[5] , 내장사운드 시대의 도래로 사운드카드 자체가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멀티미디어 하드웨어에서 손을 떼고 훈넷을 만들어 소프트웨어 개발[6] 및 '''대북사업'''에 손을 대게 되었다.
그 이전에 훈넷은 당시 벤쳐 IT투자 붐을 타고 주식시장을 뒤흔들던 인터넷전화회사인 새롬기술과 같은 인터넷전화 회사를 만들겠다고 개인투자자의 자금을 끌어모았던 회사다. 하지만 정작 훈테크의 기술을 믿고 새롬기술과 같은 회사의 초기주주가 된다는 생각으로 돈을 싸들고 갔던 개미투자자들은 허름한 사무실 앞에서 길거리까지 줄을 늘어서서 접수하면서 상당한 의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식을 받은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된 사업내용이 인터넷전화에서 전혀 엉뚱한 대북관련 도박사이트 운영 등으로 뒤바뀌어버렸다. IMF사태 직후라 어렵게 모은 재산이나 남은 돈을 가지고 오직 김범훈이란 유명인만을 믿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은 큰 충격과 고통을 받았다.
2000년대 초중반 대북사업으로 온라인 복권, 카지노 같은것을 추진했으나, 통일부와 법무부의 의견차로 훈넷의 대북사업은 붕 뜨게 되어버렸고#, 결국 북한과의 마찰로 김범훈 사장을 포함한 훈넷의 임직원들이 북한에 억류되고 말았다. 다행히 억류 인원들은 풀려나고, 대북사업은 2004년 까지 유지되는듯 했으나, 이내 얼마가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2006년 11월에는 그의 일생 마지막 사업인 포털아트라는 미술품 경매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그럭저럭 순조롭게 되어가는듯 했으나, 창업 3년만인 2009년 11월에 건강상 문제로 포털아트 대표에서 사임했다. 그리고 2010년 9월 30일 백혈병으로 사망.
과거의 신화적 행보와 대조되게 그의 부고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왕년의 옥소리나 사운드트랙 사운드카드 시리즈 팬들 대부분은 이 슬픈 소식을 뒤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여러모로 씁쓸한 현실...
[1] 그 이전에도 국산 사운드카드가 존재했으나 애드립이나 사운드블라스터 호환 복제품이 대부분이었다.[2] 옥소리 노래방의 인기로 사운드블라스터 시리즈를 수입하던 제이씨현도 스타탄생이라는 사운드 블라스터 시리즈 번들 노래방 프로그램을 만들었다.[3] 한솔전자가 옥소리를 산 이유가 PCS 시장 진입을 위해 IT업적 실적을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보는것이 중론이다. 그리고 결국 옥소리는 한솔전자에서 희생되고 말았다...[4] 지금도 사운드트랙 97이나 128 시리즈가 최고의 사운드카드라고 생각하는 애호가들도 제법 있다.[5] 당시 우스갯소리로 드라이버 설치할때는 개고생이지만, 드라이버를 다 잡고 사운드트랙 카드의 환상적인 미디 음원을 들으면 고생끝에 크게 감동한다는 말도 있었다.[6] 훈넷이 만든 인터넷 실시간 스트리밍 동영상 녹화 프로그램인 하이넷 레코더는 꽤나 인기를 끌었다. 고스톱과 포커같은 웹보드게임을 운영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