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삼룡

 

金三龍
1908년 ~ 1950년
1. 개요
2. 생애


1. 개요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고 경성콤그룹을 조직한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 남조선로동당 서울지도부 책임자 등을 역임한 한국의 공산주의자이다.

2. 생애


1908년 충청북도 충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하고 시골의 학당에서 한문만 배웠다. 22세가 되던 1934년 조선공산당의 일본총국 간부였던 이재유를 중심으로 이관술과 그의 동생인 이순금, 이현상 등과 함께 경성트로이카에 참여하였다. 그 후 공산당 재건운동을 추진하다가 1937년 이재유가 체포되자 고향인 충주로 피신하였다. 1939년 이관술·이순금 남매가 조직책임자로 그를 임명하자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콤그룹을 조직하고 조직부와 노동부의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 1939년 출옥한 박헌영의 지도로 경성전기, 대창직물, 경성방직, 용산철도공작소, 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조합 조직을 확장하는 활동을 이어나갔으나, 1940년 12월 조직선이 드러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1]
1945년 8월 15일 광복 후 전주형무소에서 출소한 그는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재건파에서 김형선과 함께 조직책임을 맡아, 먼저 출범한 장안파 공산당을 약화시켰다. 같은 해 9월 11일 재건 조선공산당의 조직국책을 맡았으며, 1946년 2월 15일 좌익단체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지내는 등 주로 당 조직에 몰두하였다. 1946년 9월 박헌영·리강국 등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지자 피신하였다.[2]
1946년 11월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의 3당이 합당하여 창당된 남조선로동당의 중앙위원회 정치위원 후보로 선임되었고 조직부장을 맡게 되었다 리승엽 등과 함께 남로당 지하운동을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49년에는 불법화된 남조선로동당의 서울지도부의 책임자로 활약하였다. 이후 이주하와 함께 지하조직을 결성하는 등 활동을 이어나가다가 1950년 3월 27일에 경찰에 체포되어 5월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3]
그 뒤 남침을 준비하면서 평화공세를 벌이던 북한에서 제의한 조만식과의 교환협상이 오가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