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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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4월 11일, 경성 반제동맹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을 당시 촬영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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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觀述
1900년 4월 26일[1] ~ 1950년 7월 3일
1. 개요
2. 생애
3. 가족


1. 개요


일제강점기 당시 경성반제동맹 사건, 조선공산당재건운동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이다. 본관은 학성(鶴城)[2], 이명(異名)은 이수해(李樹海), 김종석(金鍾石), 김대성(金大成) 등이 있다. 해방 이후 조선공산당남조선로동당의 간부이자 박헌영의 최측근이었다.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체포되어 대전형무소에 복역하였고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과정에서 총살되었다.

2. 생애


1902년 경상남도 울산군 범서면(현 울산광역시 울주군 범서읍) 입암리[3]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5년 3월 경성의 중동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1929년 3월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 지리역사과를 졸업하였다. 고등사범학교에서 재학 중이던 시절 법제경제연구회에서 활동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해 공부하였고 이때부터 공산주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다.[4]
귀국 후 1929년 4월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게 되었고, 1931년 학생자치 및 교내 경찰출입 반대 등을 내세운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지도했다. 1932년 10월 재학생과 졸업생으로 구성된 독서회를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며 11월에는 ‘반제동맹 경성지방결성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1933년 1월 ‘경성반제동맹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1934년 3월 15일 병보석으로 가출옥하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무렵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박선숙과 결혼했다.[5]
가출옥 상태였던 1934년 9월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을 지도하던 이재유와 함께 공산주의 운동을 이어나가며 12월에는 ‘조선공산당 경성재건그룹’을 결성하였고 학생운동부문을 담당하게 되었다. 1935년 1월부터 일제의 대재대적인 검거가 시작되자, 2월 이재유와 함께 수해이재민 형제로 위장하여 경기도 양주에 있는 비밀근거지에서 은신하였다.[6]
1936년 5월 김희성 등의 다른 콤그룹들과의 통일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했고, 10월 이재유 등과 함게 경성트로이카와 경성재건그룹의 통일체인 ‘조선공산당재건 경성준비그룹’을 결성하였고 출판부 책임자로서 기관지인 『적기』를 발간하였다. 그해 12월 이재유가 체포되자, 상인으로 위장하여 피신해 다녔다. 1937년 7월부터 수감생활을 끝낸 동지들과 함께 조선공산당 재건을 추진했으나 일본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무산되었다. 이후 대전과 대구 등에서 신분을 위장하고 다니며 공산주의 활동을 이어나가이 위해 노력했다.[7]
1939년 1월경 경성으로 올라와 여동생인 이순금과 동료인 김삼룡 등과 함께 공산주의 활동을 재개하여 4월경 ‘경성콤그룹’을 결성하고 지도부를 맡게 되었다. 「노동자 리플렛」, 「메이데이 투쟁방침서」 등을 제작하고 배포했으며, 9월부터 기관지 『코뮤니스트』를 월간으로 발간하고 책임자를 맡게 되었다.[8]
1940년 2월 인천에 비밀근거지를 마련하고 출옥한 박헌영을 피신시켰다. 그해 8월 함북노동조합조직준비위원회 지도자 장순명 등과 함북노조준비위원회를 청진좌익노조조직준비위원회로 개편하고, 기관지인 코뮤니스트의 출판과 편집 책임자가 되었다. 1941년 1월 다시 한 번 체포된 그는 1943년경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지하활동을 계속하다가 해방을 맞았다.[9]
1945년 해방 이후 박헌영을 중심으로 재건된 조선공산당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총무부장 겸 재정부장으로 활동했다. 그해 9월 6일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 설립된 조선인민공화국 중앙인민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되었고, 9월 14일 조선인민공화국 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46년 2월 좌익들의 통일조직인 민주주의민족전선의 결성에 참여하고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해 7월 6일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으로 인해 미군정 경찰에 체포되었고, 11월 28일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수감 중이던 1948년 8월 해주에서 열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에서 제1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이던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에서 총살되고 말았다.[10]

3. 가족


이복여동생 이순금이 있으며 일제시대 함께 사회주의 독립운동에서 활동한다. 이순금은 해방이후 월북하였다
2번 결혼하여 자녀들을 두었으나 일찍 죽었고 이경환 여사가 국가에 소송을 제기하여 최종 승소하였다.
대법원이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던 이관술의 유족에게 국가배상하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훈은 받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