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헌영

 



<colbgcolor=#292929> '''박헌영
朴憲永 | Pak Hon-y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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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박헌영 (朴憲永)
'''출생'''
1900년 (고종 37) 5월 28일
충청도 예산군 #s-2 신양면 신양리 333번지 빗돌마을
(현 충청남도 예산군)
'''사망'''
1956년 12월 5일? (향년 57세)[1]
평양특별시
'''직업'''
정치가, 사상가, 언론가
'''주요 경력'''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조선청년총동맹 중앙검사위원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 위원
경성콤그룹 지도자
남조선로동당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북한 부수상·외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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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2929><colcolor=#fff> '''본관'''
영해 박씨 (寧海)[9]
'''자'''
덕영 (德永)
'''호'''
이정(而丁)
이춘(而春)
'''종교'''
무종교 (무신론)
'''학력'''
대흥보통학교
경성고등보통학교
국제레닌학교
동방노력자공산대학
'''국적'''
[image] 대한제국
[image] 중화민국 · [image] 소련
[image] 북한

정당 ||<-2><(>
【 역대 소속 정당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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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관계'''
'''부모'''
부 박현주(朴鉉柱)[10]
생모 이학규(李學圭)
적모 탐진최씨(耽津崔氏)
서모
'''배우자'''
윤레나(Лена Юн 본명 : 윤옥)
주세죽(朱世竹)
이순금(李順今)
정순년(鄭順年)
'''자식'''
슬하 3남 2녀
아들 박병삼(朴秉三, 법명: 원경(圓鏡))
딸 박 나타샤
딸 박 비비안나(Вивиана Пак 본명 : 박영)
아들 박 세르게이
'''정치 노선'''
극좌
'''이념'''
마르크스-레닌주의, 무신론, 반기독교주의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기
2.2. 광복 이후
2.3. 월북 이후
3. 가족 관계
4. 외모와 성격
5. 기타
6. 평가
6.1. 미제간첩설
7. 대중매체에서
7.1. 배역 및 캐릭터로서
7.2. 관련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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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박헌영은 남한북한공산주의계열 정치인, 독립운동가, 6.25 전쟁전범자다. 본관은 영해 박씨이며, 호는 이정(而丁). 의미는 "인민의 고무래", 즉 하층 농민계급을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다. 1929년 소련에서 유학생활 중 썼던 호이자 필명이었다.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상징하는 여러모로 복잡한 인물로, 광복 전에는 대표적인 거물 항일 독립운동가, 광복 후를 대표하는 급진적 공산주의자였으나 대한민국에서는 김일성과 마찬가지로 6.25 전쟁의 발발을 주도하고 정부수립 초기의 대한민국을 준 내전상태로 몰아넣은 빨치산을 조직화한 원흉이자 '''전범'''이다. 극단적인 수단으로 무력 통일을 시도하고 이에 따라 수반되는 조국의 폐허화와 인명 피해를 방조했다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북한에서도 6.25 전쟁에서 UN군에게 밀리게 되자 김일성이 그를 처형하면서 '미국과 작당하여 간첩일을 한 매국노'로 패전 책임까지 덮어쓰고 반민족행위자의 표본이 되었다. 그래서 20세기 내내 양쪽 모두에서 언급이 금기되었다.
남한보다는 북한을 따른 사람이었지만 의외로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로서 그것의 이념을 따르려 하고 원래 거기에서 말하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개념에 어긋나는 무소불위의 1인 독재를 막고 싶어했다. 박헌영 역시 레닌주의자였던 만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추구하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스탈린 사후의 소련과 마오쩌둥 사후의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와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서 보듯이 공산당 내에 다양한 파벌이 존재하여 1인 독재가 아닌 상호 견제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이루고 있고, 사회주의 국가 자체를 부정하거나 전복시키려 하지 않는 이상 다양한 의견 개진과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소련식 인민민주주의, 현실사회주의 노선이었지 지금의 북한과 같이 1인, 아니 한 가문이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휘두르며 어떠한 견제 장치도 없고 어떠한 표현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 무소불위의 독재 체제는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당시만 해도 위세가 상당히 컸던 좌익계 독립운동가와 광복 직후 시기 중 거물들 중에서도 가장 교조적이고 교과서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자였다고 할 수 있다. 공산주의라고 봐주기도 힘든 주체사상이라는 재해석으로 김씨 일가의 독재정치의 장을 연 김일성, 정통 볼셰비키와는 한발 비껴나간 마오이즘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 공산당 아래에서 성장한 김무정을 비롯한 연안파, 계급 독재 자체를 부정했고 차라리 동시대 유럽의 사민주의 계열에 더 가까워 개혁주의의 오래된 미래라 불리는 여운형, 시작부터 소련 정권과 척을 졌었던 아나키즘에 입각하여 활동한 김원봉 등등, 동시대의 다른 좌익 지도자들이 어떻게 하나같이 고전적인 소련의 마르크스-레닌주의식 혁명관, 방법론, 사상적 배경과는 차이가 많았던 반면 박헌영은 그 중에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론적 이해도 가장 깊었고, 속된 말로 하자면 우리식 재해석 없이 볼셰비키식 혁명 과정과 원칙을 그대로 따르려고 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레프 트로츠키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직접 창조한 체제에 잡아먹혔으며''' 죽고 나서도 남북한 양쪽에서 배척받는 그의 최후는, 하루가 바쁘게 적과 친구가 뒤바뀌고 테러, 내란, 전쟁으로 점철된, 결코 하나의 이론에 끼워 넣을 수 없을 만큼의 혼돈의 도가니였던 당시의 현실에서 오직 원칙만을 일관되게 고수하다가 초래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상적으로 완전히 일치하는 건 아닐지라도 박헌영은 북한의 트로츠키라 비유되기도 한다. 물론 박헌영이 트로츠키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도 스탈린 시대의 소련 공산당에 큰 영향을 받았다. 트로츠키의 경우 스탈린의 소련을 '퇴보한(degenerated) 노동자 국가'로 규정했으나, 박헌영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그가 김일성에게 숙청당하는 방식은 스탈린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당시 박헌영이 이론가로 이름높았고 박헌영 자신이 스스로에게 원칙론자였는지는 몰라도 같이 일하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아서, 광복 직후에 여운형이 "박헌영에게 강간당했다"고 표현했을 만큼 주도면밀하게 정치조직을 쌈싸먹은 적이 있는 교활한 행적도 역사에 남아 있다. 여운형이 완전히 힘을 잃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 1940년대라면 어땠는지 몰라도 2000년대에 여운형은 박헌영과는 급이 다른 대우를 받고 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몰락 양반가의 서자로 태어났다. 그러나 조선 시대 이후 벼슬을 배출하지 못한 그의 집안은 몰락한 양반으로 전락하고 말았고, 아버지 박현주는 '''신분은 양반이면서도 지주로 농사도 짓고 미곡상인으로 일하는''' 처지였다. 그러나 벼슬길에 오르는 양반이 아니었지 경제적으로 넉넉했다. 생모 역시 주막 및 여관업으로 크게 장사를 하여 돈을 잘버는 편이었다.
아버지 박현주는 두 번 결혼했으나 아들이 없다는 이유로 과부였던 서산의 신평 이씨 이학규를 소실로 들여 아들 박헌영을 보았다. 본부인 탐진 최씨에게서는 이복형 박지영과 이복누나 박신기가, 이름 미상의 다른 부인에게는 어려서 죽은 이복 여동생 박간난이 있었다. 족보에는 첫부인 최씨가 1912년 사망으로 되어 있으나 호적에는 1907년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임경석의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족보 내용을 취해서 최씨가 1912년에 사망한 것으로 봤으나, 족보보다는 공문서인 호적이 더 정확할 수 있다.
한학을 배우면서도 소설을 독파했던 그는 홍길동전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서자로 태어났으나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 대한 기대가 남달랐고, 박헌영 역시도 학업이 우수하여 대흥소학교 졸업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YMCA 활동도 하였다.[2] YMCA에서 영어를 배우면서 미국 유학을 꿈꾸기도 하지만 좌절되었다. 1919년 2월 고보를 졸업하고 3.1운동을 경험하며 화요파에서 활동하다가 상하이에 가게 된다.
졸업반 무렵에 3.1 운동에 선전 역으로 참여한 것 때문에 학교에서 퇴학당할 위기에 처했으나, 어찌어찌해서 겨우 퇴학은 모면하였고 졸업은 하긴 했다. 훗날 박헌영은 '3.1 운동은 현대 세계사의 초기에 일어난, 동방에서 가장 큰 봉기였다.'고 찬양했다. 이어서 '자신이 독립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게 만든 계기가 바로 3.1 운동이었다.'고 회고한다. 여하간 이를 통해 박헌영은 해외 망명을 결심하게 된다.
처음에는 미국 유학을 희망하고 아르바이트와 중노동으로 비용을 마련했으나 턱없이 비싼 배삯이나 비행기료를 지불할 수 없어 그는 미국 유학을 단념하고 만다. 그 이후에는 일본으로 향하는 밀항선에 몸을 실어 일본에서 고학을 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치하 조선에서 일본제국 경찰에 쫒겨 밀항한 처지라 대입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 결국 일본 도쿄로 건너간 지 2달 만인 1920년 11월 중국으로 망명을 갈 것을 결심하고, 중국 상하이로 망명을 하게 된다.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하던 중에 김단야, 임원근을 만나 서로 교우를 쌓아갔다. 1921년에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하여 열성적인 활동을 하였다. 당시 고려공산당은 이동휘상하이파 고려공산당과 여운형의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가 있었는데, 이동휘의 상하이파 고려공산당은 젊은사람들을 가입하는데 조건을 까다롭게 했었다. 반면,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는 그런거없이 다소 개방적인 조건이었기 때문에 박헌영과 김단야 일행들은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파에 가입.
'''1920년 모습.
앞줄 왼쪽에서 3번째 앉아 있는 사람이 박헌영이다.'''

1922년에는 여운형과 함께 소련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 피압박민족 대회에 참여하여 공산주의에 대한 신념을 굳혔으며, 국내에 잠입하여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실천하기 위해 국내로 들어왔으나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살이를 한다.
1924년에 옥에서 풀려난 뒤 동아일보 기자를 하던 중 화요파를 중심으로 조선 공산당 결성에 참여하며, 산하조직인 고려공산청년회의 책임비서로 선출되었으며,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기자 생활을 하게 된다. 기자로 재직중 주세죽과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1년 뒤 그의 사회주의 행보를 탐탁치않게 봤던 일제에 의해 기자직에서 해직되었다.
학생 시기 YMCA에 입회하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사상을 완성한 후엔 무신론적이고 反기독교 성향을 갖게 되었다. 1920년대에 조선 내부에서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회주의계와 기독교계 간에 논쟁이 치열했을 때 기독교를 비판하는 논설을 자주 싣고 반기독교 설문조사를 하기도 하였다. 다음은 그런 논설 중에 하나.

종교과학과 생산기술이 낙후한 조건에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기독교는 봉건 사회에서는 제후의 이익을, 자본주의 사회에 와서는 자본가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도구로 기능했다. 야만 미개의 나라에 파견되어 이교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는 선교사는 몸에 촌철의 무기도 갖지 않은 정예병사로서, 제국주의 영토 확장의 첨병 구실을 한다.-《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중

1925년에 제1차 조선공산당검거사건이 터지자, 박헌영이 상하이여운형모스크바에 있던 조봉암에게 보내려던 보고서가 일제에 발각되어 조선공산당 조직이 드러나면서 다른 간부들과 함께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의해 체포되었고 신의주 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와중에 박헌영은 계속 자기 주장을 역설하고, 동료 박순병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들을 살려내라'고 격렬히 항의하여 재판정에 달려들었고, 그 결과 그를 제압하는 총독부 경찰들에게 매우 심하게 폭행당했다.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공판이 있었는데 그는 공판에서 박순병을 데려오라며 자신이 쓴 안경을 집어던지고 소란을 피웠고, 결국 간수들이 그를 끌고 나가 재판이 10분만에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5회 공판에서는 박헌영이 배제되었다. 세간에는 박헌영의 건강에 무슨 심각한 문제가 생긴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신청한 병보석이 기각되자 감방에서 자살소동을 벌여 막으려는 간수들과 몸싸움 끝에 온몸에 멍이 들기도 하고 심지어 자기가 싸놓은 똥을 벽에 바르거나 심지어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인분에 원래 독이 있다 보니 몸이 엄청나게 부었고 입에서 냄새가 심했다고도 한다.
결국 1927년 11월 22일에 정신병으로 병보석을 얻어 석방되었는데, 아내 주세죽을 못 알아 보기도 할 정도였다. 정신과 의사는 회복이 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진단을 내렸다. 이 모습을 본 박헌영의 경성고보 동창인 영화인 겸 소설가 심훈은 박헌영을 박군이라고 지칭하며 "박군의 얼굴"이라는 시를 쓰기도 했다.
이 정신병력이 낭설이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심지어 '박헌영이 광인행세하여 연극했다'는 것도 터무니없는 소리로, '''실제로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정황이 많다.''' 어쨌건, 이 때문에 뒷날 소련으로 탈출에 성공했으니 결과적으로 이득이 되기는 했다. 일설에는 일부러 아버지에게 쌍욕을 하기도 했다고.
훗날 북한 법정에서 '그가 일본제국 경찰에 투항한 후 서로 짜고 미친 행세를 하여 석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오늘날 이를 두고 '박헌영이 일제와 비밀리에 타협했다'라는 낭설로 비난하는 사람도 있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당시 고문으로 건강이 악화된 이들은 많았고 일부는 병보석되었다. 고의로 박헌영을 석방시키려 했다면 굳이 미친 사람 행세를 시킬 필요도 없이, 폐병같은 내과적 질병에 걸렸다고 속이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당시 일본의 고문 방식은 정신이 나가도 이상할 것이 없을 수준으로 잔혹했다.
출감 이후로도 정신병에 시달렸으나 아내 주세죽과 어머니 이학규의 보호 속에 어느정도 회복이 되어가게 된다. 그러던중 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한다고 1927년 겨울의 어느 야밤에 아내 주세죽의 고향인 함경남도 함흥으로 갔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더니, 이듬해인 1928년 아내와 함께 소련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해 버렸다. 당시 주세죽은 만삭의 임산부었으며 이들의 탈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자, 함흥경찰서장 이하 경찰관들은 감시를 게을리했다며 징계를 받았다.
'''1928년 블라디보스토크로 탈출한 주세죽과 박헌영의 모습.'''[3]
그리고 이듬해에는 아내를 데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소련 모스크바로 떠나 버렸다. 그 때 아내가 만삭이었는데, 급하게 도망치다 보니 '''기차에서 딸인 박 비비안나를 낳았다'''. 그들의 극적인 탈출은 세간에 화제가 되었고, 아들 원경스님에 따르면 "눈물젖은 두만강"도 김용환이 이에 영감을 얻어 작곡되었다고 한다.
1928년 박 비비안나를 안고 소련 모스크바에 도착한 뒤 1928년 11월 그 곳에서 유학 중이던 공산주의자 김단야의 추천으로 국제레닌대학을 다녔다.
1929년 2월 소련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9년 초 국제레닌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여기서 박헌영은 '농민들의 뒤를 받쳐주는 역할을 하고싶다.'는 의미로 농촌에서 밭을 메꾸는 고무래를 뜻하는 이정(而丁)이라는 호를 쓰게 된다.
국제레닌대학을 졸업 후 노동과 고학으로 동방근로자대학 2년 과정을 거치며, 1931년 말 졸업하여 자신의 공산주의 이론을 정교하게 심화시켰다. 그리고 코민테른으로부터 조선의 공산당을 지도하라는 지시를 받고 4살이 된 딸 박 비비안나를 모스크바 근처 이바노바시에 있는 당시 소련을 거점으로 활동하던 각국 혁명가들의 자식들을 양육하던 시설인 스타소바 육아원에 맡기고 1932년 1월 아내 주세죽과 함께 상하이로 건너갔다.
이 때문에 부모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던 박 비비안나는 자신이 고아인 줄 알고 자랐다고 한다. 이후 박 비비안나의 수기에 따르면 어머니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반가움은 전혀 느낄 수 없고 거북한 감정만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의 면회에 친구를 데리고 나가거나 될 수 있으면 빨리 자리를 끝내려고 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성장한 후 돌이켜보면 어머니가 그런 모습에 굉장히 가슴아파한 것 같다고 기술하였다.
1931년 상해로 돌아가 "코뮤니티"라는 잡지를 국내로 반입시켰다. 당시 윤봉길 의사가 홍커우 공원에 폭탄을 던진 사건 당시 박헌영은 '민중의 계급적 각성과 연대가 뒷받침하지 않은 극소수에 의한 폭력'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 당시 박헌영이나 조봉암 등 공산주의자들뿐만 아닌 이승만 같은 외교독립론을 주장했던 측들들도 이 의거를 맹렬히 비난했었다. 이승만은 윤봉길 의사 의거에 대해 '이런 짓은 어리석은 짓이며, 일본의 선전기관에만 도움을 줄 뿐이다.'라면서 비난했었다.
1932년 7월에 박헌영은 '상해폭탄 사건은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다루었는데, 그는 여기서 '윤봉길의 의거는 결코 살인이 아니며 일제의 대표들을 죽이고 '병신'을 만들었다는 것은 참으로 통쾌한 기분'이라고 전제하면서도 민중의 각성 없는 일회성 의거의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고 '개인적인 테러와 공산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못 박았다. 즉, 박헌영은 '개인적인 테러는 군중의 조직적이고 대중적인 투쟁에 장해가 되며 그들에게 비조직적이고 개인적인 투쟁의 환상을 심어 결과적으로는 적에게 유리한 무기가 되고 만다.'라고 보았던 것이다.
원래 개인적인 테러리즘을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다. 당장 마르크스 자신부터 일부 무정부주의자들의 테러행위는 자본주의 권력을 무너트리는 데 아무런 공헌도 하지 못한다고 여러 차례 비판했다. 또 공산주의의 실현에 테러리즘이 유익하게 작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 트로츠키의 경우도 각성되고 조직화 된 대중에 의한 테러를 주장한 것이지, 혁명가 개인의 파괴행위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주장하였다. 설령 테러로 일부 지도자를 살해한다 하더라도 체제는 그를 대신할만한 사람을 얼마든지 배출할 수 있으니 무의미하다는 것. 물론, 개인적인 테러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그것이 '강력한 지배구조에 대하여 저항하는 개인의 유일한 실천'이며 '테러행위에는 지배체제에 경종을 울리는 기능과 함께 저항의 실천을 알림으로써 조직화의 동력을 제공하는 기능이 있고', 적발되기 쉽고, 내부적으로 경직화되는 부작용을 피하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여튼,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로 상해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탄압이 높아지자, 박헌영은 한국명 '이두수', 중국명 '왕양목'이라는 가명을 쓰면서 활동하기도 했으나 상해 부두에서 시장에 나갔다가 따라붙은 일본제국 경찰의 미행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됐다.
6년형을 언도받았으나 5년 만인 1939년에 가석방으로 출소, 이관술, 김삼룡 등과 함께 기존에 준비해두었던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을 출범시켰고, '조선공산당 재건'을 목표로 지하 비밀리에 공산주의, 노동운동 활동을 하게 된다. 박헌영은 경성콤그룹 지도자 겸 '코뮤니스트'라는 기관지를 발간하는 선전 업무등 맡아 출판물을 돌리는 등 비밀리에 활동 하였다.
이를 두고 뒷날 북한에서는 '박헌영이 6년만에 석방된 것이야말로 일제에 항복하여 동료들을 팔아넘긴 대가'라고 '일제와 타협한 기회주의자'라고 일방적으로 주장한다. 동료 김형선 등이 10년형을 선고받은 것과 달리 박헌영이 6년형이라는 짧은 형기를 받은 것은 일제 밀정으로 변절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근거없는 낭설일 뿐이다. 박헌영은 웬만해서는 기회주의자 성향의 인물과는 절대 타협하지 않았던 성격이었다.
그러다가 1941년에 경성콤그룹이 발각되어 검거가 일어났는데 박헌영은 간신히 전라남도 광주로 도피했고, 전남지역 공산주의자들과 연락을 하였다. 태평양 전쟁 기간에는 일본제국 경찰의 눈을 피해 별의별 직종을 전전하면서 위장직업으로 지낸다. 이무렵 박헌영은 '김성삼'이라는 가명을 짓고, 변소청소부, 벽돌 인부 공장 노동자등등 일하면서 숨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전남 일원의 경성콤그룹 조직원들과 비밀활동을 계속 했고, 그들을 통해 경성 주재 소련 영사관의 샤브리와도 비밀교신을 주고받으면서 기관지 발행 등의 비밀리에 활동했다.
한편 조선공산당의 지도자들이 5차례에 걸친 검거와 탄압, 고문으로 사망하면서 박헌영은 자연스럽게 조선공산당 재건 준비 조직의 리더로 격상되었다. 이 기간 중 정순년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연락이 두절되면서 그는 이순금과 임시로 동거한다. 정순년은 정태식의 5촌 조카딸로 그의 소개로 박헌영을 만났다. 그러나 정순년의 부모는 딸의 임신사실을 안 뒤 외손자를 내다버리고 딸을 재혼시켰다. 그러나 하필이면 정순년이 재가한 남편 역시 겉보기엔 목수였지만 실은 공산당의 평당원이었다. 남편이 한국전쟁에서 죽자 그는 술집을 운영하다가 우연히 만난 남자에게서 아이를 낳고 살던 중 아들인 승려 원경을 다시 재회하게 된다.
8월 15일 광복 소식을 접하자 보다 나은 생활을 위해 떠난다는 편지를 남기고 서울로 상경한다. 벽돌공장 사장과 인부들은 1970년대 중반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그가 보통의 노동자가 아니며, 특이한 인물인 줄 알면서도 모른체 했다고 회고했다.

2.2. 광복 이후


'''1946년 모습'''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자, 8월 19일 김삼룡, 이주하 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전남지부의 목탄트럭을 타고 경성으로 올라가서 과거 경성콤그룹에서 활동했던 핵심인물들인 김삼룡이나 이주하, 이관술 등을 만나 경성콤그룹 출신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 때 와해되었던 조선공산당 재건에 착수했다. 박헌영은 바로 당 중앙을 조직하는 대신 조선공산당 재건위원회를 결성했다. 전국의 좌파 세력을 결집하여 견고한 당 조직을 구축하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박헌영은 경성 콤그룹 뿐 아니라 1930년대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코민테른 동양비서부 조선위원회의 지시로 조직한 공산주의 그룹까지 포섭했다.
경성 콤그룹 중심의 재건파보다 먼저 8월 16일 서울파인 이영, 정백과 화요파인 조동호, 리승엽 및 ML파인 이정윤, 최익한과 이현상 등은 서울 장안빌딩에서 또 다른 조선공산당, 즉 장안파 공산당을 조직했다. 그러나 장안파 구성원의 대부분은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활동을 포기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정통성 면에서 우세한 재건위가 출범하자 장안파는 와해되기 시작했다. 9월 8일 좌익의 각 계파가 모인 열성자대회에서 참석자들은 박헌영 지지와 조산공산당 재건 위임을 천명했다. 이영, 정백, 최익한 등은 박헌영에 반대하며 한동안 재건파를 유지했다. 이에 힘입어 박헌영은 9월 11일 재건위를 해소하고 정식으로 조선공산당을 재건했다. 박헌영은 총비서로 선출됐다.
한편 박헌영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는데, 이 때부터 여운형과 점차 갈등하게 되었다. 여운형건준에서 공산당원들의 참여를 받아들인 건 일단 공산당원들이 항일운동에 공헌하기도 하였고, 자신이 상하이에서 접했던 중국공산당과 임시정부의 고려공산당처럼 조선공산당이 민족해방의 수단으로서, 반제국주의와 민족주의적 태도를 견지할 것이고 따라서 광복 시기에서 민족해방을 위해 정치적으로 협력해줄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헌영은 근본적인 공산당 이론에 의한 폭력 투쟁노선을 견지했다. 게다가 당시 국제공산당은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아닌, 스탈린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세계공산화를 위해서 어떻게 나아갈 지에 대한 논의에서 사실상 소련을 건국한 트로츠키는 '''전 세계에서의 공산혁명을 연속적으로 일으키자'''라고 하였으나, 그러나 스탈린은 이제 막 건국된 소비에트연방을 발전시켜서 세계공산주의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우리 모두가 아는대로 스탈린이 레닌 생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공산당 서기장(당시에는 각 행정업무를 담당하던 위원회들의 업무를 조정하는 일명 별볼일 없는 심판자와 비슷)이라는 직위를 이용하여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후 2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중국의 마오쩌둥이나 유고의 티토 같은 예외적인 몇몇 경우를 제외하는 소련 공산당/코민테른의 지령을 받는 각 국의 공산당들로 편성되었다. 사실 프랑스 같은 경우에는 2차세계대전 직전까지 코민테른의 지령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마오쩌뚱 역시 스탈린 생전에는 직접적으로 대항하지는 못 하였다.
우선 박헌영은 조직력을 발휘해 공산주의자 동지들을 건준에 침투시켜 주도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고, 여운형파의 주요 인물들을 자기진영으로 포섭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또한 박헌영은 여운형에게 건준의 간부들 속에 민족주의자가 너무 많기 때문에 우경화할 위험이 있으니 개조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여운형은 이 문제는 혼자 결심할 일이 못되니 토론해야 한다고 대응했다. 박헌영의 이런 행동을 보다못한 안재홍과 같은 민족주의 세력은 건준을 탈퇴하였다.
'''몽양 여운형과 박헌영'''
9월 6일 여운형과 박헌영은 전국인민대표자대회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우익이 보이콧한 허울이었다. 이 과정에서 박헌영은 인공의 권력기구인 중앙인민위원회와 각 지방의 인민위원회를 장악하고 독단적으로 인공의 각료 명단을 발표한다. 여운형도 몰랐던 일이었다. 각료 명단 발표 당시 여운형은 요양 차 서울을 떠나 있었다. 심지어 여운형은 인공의 탄생에 대해 '''자궁 외 임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반발했으며, 인공 내각 명단에 자신이 부주석으로 오른 것에 대해 기뻐하기보다 박헌영과 허헌의 경거망동을 한탄했다고 한다. 애초에 건준과 인공이 서울지역 우익이 참여하지 않았다는 한계를 내포하고 있긴 했다.
건준이 인공으로 개편되며 좌경화는 더욱 심해졌다. 박헌영은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던 이승만을 주석으로 추대하여 명분상으로 좌우 균형을 맞추려는 수를 쓰지만 이승만은 '''자기 뜻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좌익세력에 휘둘리는 정권의 대통령이 되기 싫다'''며 거절했다. 다른 우익인사들도 인공이 정부를 참칭했다며 비판했다. 주석으로 이승만을 지목한 것은 훗날 북한에서 그를 '미제의 간첩'으로 모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헌영이 조선인민공화국 내각 명단 기초할때 우익세력들도 넣은 이유는 1945년 8월 20일, 조선공산당 재건과 함께 발표한 '8월 테제'를 실행에 옮겼던 것 뿐이다. 8월 테제는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기 위해 우선 자본주의를 수용, 유산계급과의 통일전선을 통해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민주주의를 훈련함으로써 장차 사회주의혁명 내지 인민민주주의혁명을 준비한다는 마르크스의 정통이론에 따른다.'는 내용으로, "부르주아"와 손을 잡는 전형적인 혁명이론이었다.
반면 좌익 중에도 이승만, 김구, 김성수 등이 포함된 인공 구성안을 보고 우편향 정부라며 비판하는 사람이 있었다.
여담으로 그가 지령을 작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당원의 손을 빌린 것이라는 북한쪽의 비난이 있다. 그에 의하면 박헌영은 공산주의 이론 조차도 몰랐다는 말이다. 그러나 전직 남로당원의 증언에 의하면 8월테제 등을 비롯한 각종 문건은 박헌영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다.
며칠 뒤 들어온 미군정이 조선인의 자치활동을 불허하며 인공의 해체 혹은 정당화를 요구했다. 박헌영은 대안으로 인공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좌우 합작을 모색하나 임정의 미온적 태도로 무산됐다. 임정은 임정의 법통과 기존 조직, 직책을 유지하는 대신 2~3개의 신설 부서를 좌익이 맡을 것을 제안했다.
결국 박헌영은 허울뿐인 인공을 사실상 포기하고 좌파 정당과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전국농민조합총연맹 등 좌익 성향 대중단체를 규합, 미군정에 맞서는 길을 선택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이 귀국하자 그는 이승만에게 조선공산당의 영수직을 맡아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그 후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독립촉성중앙회에 가담했다. 귀국 초창기에 이승만은 라디오 방송 연설하면서 “나는 공산당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 주의에 대하여도 찬성하므로 우리나라의 경제대책을 세울 때 공산주의를 채용할 점이 많이 있다…”라고 하여 공산주의를 포용하겠다고 대중연설한 적이 있었다. 이때만 해도 조선공산당 재건파 세력은 이승만에 대해 호의적으로 접근했었고, 실제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국민회에 가입했을 정도.
그러나 친일파 처리 문제를 놓고 이견을 보이다가 조선공산당을 이끌고 독촉을 탈퇴했다. 45년 10월 29일 박헌영은 이승만을 만났다. 이승만은 석상에서 친일파 즉각 숙청에 반대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주석직을 거부했는데, 애초에 이승만과 상의도 없이 선포한 자리였다. 이승만의 입장에서는 이름만 있고 실권은 없는 직위를 굳이 수락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친일파 숙청은 미룰 수 없는 문제라고 반박하고 인민공화국 해산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광복 이후 처음에 박헌영은 임시정부에 우호적인 입장이었고, 앞서 보듯이 조선인민공화국의 내각 명단 작성에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를 넣기도 했었다. 그러나 임시정부 요인들은 인공 내각 참여를 거부했고, 1945년 11월 23일에 임시정부 주요 요인들이 귀국했을때 김구는 박헌영과 합작을 추진하려 했으나 박헌영이 12월 12일자로 발표된 '망명정부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글에서 임시정부를 '망국정부'라 지칭하고 임시정부요인들을 '망국인사'라 칭하며 사실상 상해임시정부를 부정하는 성명을 발표하여 김구의 합작시도는 실패하게 되었다.
'''1946년 2월'''
그해 12월 말, 신탁통치 오보사건이 발생하여 좌우 모두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조선공산당은 공식적인 의견 표명을 보류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좌파세력들이 우파세력들보다 훨씬 더 강경하게 신탁통치 반대성명등 규탄시위, 집회를 했었다. 박헌영 역시 비슷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서울 소련영사관 부영사 샤브신은 박헌영에게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라"는 지시를 전달한다. 샤브신의 부인 샤브시나의 회고에 따르면 "박헌영은 못마땅한 눈치였다"고 한다. 박헌영은 소련의 정확한 의중을 알기 위해 몰래 38선을 넘어 평양에 가서 소련의 지령을 받아온 뒤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한다"는 성명을 발표한다. 이 때부터 대부분의 좌익세력들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지지하며 신탁통치를 찬성하게 된다.
갓 식민지에서 벗어난 상황에서 신탁통치에 찬성하는 것은 또다른 외세에 의한 지배로 받아들여졌고 대중의 지지도 좌익을 떠나갔다. 신탁통치 사건 이전만해도 우익세력이 지지가 그렇게 압도적이지는 않았는데, 모스크바 3상회의때 신탁통치 사건으로 정국은 한순간에 우경화된다. 게다가 박헌영이 3상회의 지지 결정에 대해 설명하는 자리에서 미군정과 밀월관계에 있던 뉴욕타임즈 기자 존스턴이 "박헌영이 '조선이 소련연방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는 오보를 내보냈고, 동아일보가 이를 다시 인용하며 박헌영은 치명상을 입는다. 박헌영은 존스턴에게는 사과를, 미군정에는 존스턴 추방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박헌영은 정국을 전환하기 위해 좌익 정당과 대중 단체를 결속해,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한다. 조선공산당과 전평, 전농뿐 아니라 여운형의 조선인민당, 백남운의 조선신민당,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김원봉김성숙의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이 민전에 참여했다. 민전은 조선의 과도정부, 임시의회를 자처하며 이승만, 김구 세력이 중심이 된 남조선대한국민대표민주의원과 대립했다. 민전 결성을 통해 박헌영은 좌익을 결집하는 데 성공한다.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우익에서는 그가 반탁에서 찬탁으로 입장을 뒤집으며 좌우 대립을 촉발시켰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박헌영이 지지한 것은 신탁통치가 아니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언급한 '조선의 민주적 독립정부 건립’이었다고 주장한다. 실상 3상 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강하게 추진했던 것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보였다고 해도 3상 회의의 결과를 신탁통치로 알고 있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을 박헌영 본인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에 대한 반대집회를 준비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에 대한 오해를 제대로 풀기 전에 갑작스레 이에 대한 지지를 선언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할 수는 없다. 결국 이는 본인의 자충수였을 뿐 아니라 극렬한 좌우대립으로 이어진 것이 사실이다.
신탁통치 찬성을 무작정 비판할 수도 없다. 실제로 박헌영이 이끄는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한국민주당, 조선인민당, 한국국민당 등과 "4당 코뮈니케"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성수 등 한민당 보수파의 반발로 4당 코뮈니케는 하루만에 무너졌다.
'''1946년 10월'''
1946년 3월 20일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된다. 국제노선을 통한 건국을 지향했던 박헌영은 미소공위 개최를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박헌영과 소련군정은 아래로는 대중을 포섭하고 위로는 우익-반탁 세력을 배제하여 조선공산당 중심의 임시정부를 수립하려 했다. 그러나 미국이 반탁 단체 배제를 반대하며 1차 미소공위는 결렬된다.
미소공위 결렬 이후 한반도의 위기감이 고조되자 조선인민당 당수이자 중도좌파의 대표 격이었던 여운형과 김규식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다. 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박헌영 역시 좌우합작 논의에 참여한다. 박헌영은 좌우합작운동을 미소공위 재개를 촉구하는 도구로 사용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1주기 추모식 때 참여하기도 했었고, 여운형 환갑잔치에 참여해서 '''조선민족해방운동의 과정에서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라고 극찬까지 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좌우합작의 원칙으로 3상회의 원칙 지지, 친일파-파쇼 배제, 테러 중단 등을 제안한다. 그러나 7월 22일 평양 방문 이후 박헌영은 민전 의장단을 소집해 좌우합작운동에서 철수할 것을 주장한다. 여운형, 김원봉 등이 반대하자 박헌영은 토지 몰수, 군정 종식 등 5원칙을 좌우합작의 조건으로 내건다. 조선공산당 세력은 우익이 받아들이기 힘든 이들 조건을 민전의 공식 입장으로 발표한다. 이 훼방으로 좌우합작은 어려움에 몰린다. 이 과정에서 조봉암은 박헌영의 노선을 비판하는 서한을 보낸 뒤에 공산당과 결별을 선언하였고 좌우합작운동에 참여했다.
1946년 여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 일어나자 공산당을 허용하던 미군정의 탄압이 본격화되었다. 이렇게 공산당이 궁지에 몰리자 박헌영은 '신전술'이라는 강경한 정책을 통한 대중적인 투쟁을 주장하며 극단적인 노선을 고수하였다.
동시에 박헌영은 7월 22일 우익세력에 맞서 힘을 결집하기 위해 조선공산당, 남조선신민당, 조선인민당 3당 합당을 제안한다. 인공 선포 때와 마찬가지로, 인기 많은 여운형을 내세워 당의 대중적 지지도를 확보하고 자신이 당내 주도권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스탈린 역시 공산당의 대중적 기반 확대를 위해 7월 초 박헌영의 모스크바 방문 당시 좌익 정당 통합 지지를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건준 때부터 박헌영에게 감정이 상해버린 여운형은 그에게 맞서기 위해 인민당 당수를 사임하고 종적을 감추었다. 그렇게 친했던 사이였는데 이때는 그야말로 서로 고성 높이며 싸웠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여운형이 박헌영에게 '''"닥쳐"'''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고... 여운형은 8월 3일에야 통합을 수용하여 합당 제안문을 발표한다.
그러나 문제는 내부에 있었다. 강진 등 조선공산당 간부 일부가 신전술 도입과 3당 합당 등 박헌영과 옛 경성 콤그룹 세력의 독단적인 당 운영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박헌영파는 이들을 제명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지만 성명서를 계기로 결집한 반(反)박헌영파는 당 대회를 소집해 합당 문제를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인민당과 신민당에서도 순차적 합당에 반대하는 세력이 등장했다.
이에 대해 박헌영은 인민당 내 프락치에게 3당 합당의 지령을 내렸고, 프락치는 8월 3일 인민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격론 끝에 여운형과 상의 없이 여운형 명의의 합당 제의 서한을 공산당과 신민당에 발송해버렸다. 김오성이 이를 주도했다. 이렇게 탄생한 남조선로동당 지도부는 대부분 공산당 출신으로 충원됐다.
이에 대해 여운형은 '''박헌영에게 정치적 강간을 당했다'''고 주장하였고 1946년 8월 미군정에게 '박헌영이 인민당에 프락치를 심어 자신의 세력들을 빼내오는 등 정치적 강간을 벌이고 있다. 박헌영을 제거해달라.'고 했으나 미군정은 들어주지 않았다. 실제로 박헌영이 인민당에 프락치를 심어 여운형 세력들을 빼내오는 정치공작을 벌였다. 김형선과 김오성 두 인물을 통해서... 이 과정에서 여운형의 최측근이고 김원봉, 김약수와 친분이 있는 언론인 출신인 이여성이 공산당으로 넘어갔다.
이렇게 여운형은 수세에 몰리자 타개책의 일환으로 이북으로 건너가 김일성을 만나 회담하였는데 회담하던 중에 박헌영의 행동이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임을 확인하고 분을 삭이며 합당을 완수하기로 한다. 이는 박헌영이 공산당 도그마에 빠져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가 항일운동을 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조선 공산당'''의 지도자인 이상 코민테른의 지령에 따라야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박헌영이 아닌 '''김일성'''의 공산당을 택했다. 사실 스탈린에 의해 공산당 내부에 치킨게임이 일어난 건 조선 뿐만이 아니었다. 공산당 항목 참고.
그리하여 3당이 합당되어 남로당 창당준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여운형은 초대 위원장, 박헌영은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로도 여운형과 박헌영은 좌우합당문제와 당 주도권 문제를 가지고 열나게 싸웠고, 결국 여운형은 얼마 못가 초대 위원장을 사퇴하게 된다.
그러나 박헌영 역시 미군정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다. 1946년 9월 7일 미군정은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게 체포령을 내리고 '조선인민보' 등 좌익 신문을 폐간한다. 위기에 몰린 박헌영은 총파업을 통해 미군정에 타격을 주려 했다. 9월 23일 부산 철도노조에서 시작된 '9월 총파업'은 한국사 최대 파업으로 번졌다. 총파업은 경찰과 우익단체의 대대적인 진압으로 1주일 만에 소강 사태에 들어갔다. 이 와중에 박헌영은 비밀리에 영구차를 타고 본격적으로 월북, 이북지역의 황해도에서 주로 생활을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0월 1일 대구에서 경찰의 발포로 노동자 한 명이 숨지면서 대구 10.1 사건이 발생한다. 대구에서 시작된 유혈 충돌은 순식간에 남한 전역으로 확대됐다. 조선공산당이 통제하지 못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막대한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발생했고 그 원흉으로 지목받은 조선공산당과 좌익은 조직과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한편 여운형은 46년 12월 정계은퇴 선언과 남로당 탈퇴, 미군정의 과도입법의원 불참 등을 하지만, 1947년 5월에 미소공위가 다시 재개될 조짐이 보이면서 좌우합작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5월에 근로인민당을 창당하여 박헌영과 결별하고 남로당을 비판했다. 보수주의적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 및 한국 사회주의운동사를 연구하는 펜실베니아 대학교 출신 역사학자 이정식 교수에 따르면, 여운형은 '남로당은 미군정과 투쟁하는 정당이라면, 우리 근로인민당은 미군정과 협력하는 정당입니다'라고 연설했다고 한다. 이후 여운형은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끝까지 좌우합작운동을 고수했다. 여운형은 좌우합작으로 통해 미소공위가 합의되면 통일임시정부가 수립될거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이 부분은 암살당하는 순간까지 끝까지 고수했다.
당연히 박헌영은 김일성 등 북한측 주요인사들에게 여운형 욕을 바가지로 하며 여운형에 대한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게 "김일성 동지는 여운형을 잘 모른다. 여운형은 대중선동을 좋아하는 야심가이고 철저한 친미주의자며 부르주아 민주주의자다. 여운형이 좌우합작운동을 끄집어내면서 3대 원칙을 제시했는데, 첫 번째로 부르주아 민주주의 공화국을 세운다고 하지 않았느냐. 또 그는 출신 자체가 양반지주 출신이다."라는 식의 서신을 보냈다. 사실 박헌영 시각에서 봤을 때, 여운형은 이미 '사회주의' 노선 자체를 포기한 사민주의자로 인식하고 있었고, 여운형에 대해서는 정치적으로 결코 믿을 수 없는 존재였다. 여운형뿐만이 아닌 조봉암, 백남운도 역시 '개량주의 사회주의' 노선으로 흘러갔다고 인식.
그렇게 하여 여운형은 우익쪽 뿐만 아니라 '''남로당 측으로부터도 테러협박에 시달렸는데''' 실제로 죽였는지의 여부를 떠나, 일단 박헌영 측이 여운형을 '''죽일 마음까지''' 먹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여운형을 추종하는 이들은 박헌영을 당연히 적대적으로 깐다. 여기에는 여운형의 일가가 북한에서 제법 대접을 받고 있다는 정치적 이유도 포함된다.
여운형은 1947년 7월에 결국 암살당했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는 미군정에 의한 암살로 보고있으면서도 박헌영 소행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데, 이는 여운형의 딸 여연구가 '종파분자에 의해 암살당했다.'고 증언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파분자는 박헌영 계열을 지칭한다. 여운형 항목을 참고해보면 알겠지만 김구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사실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엄정한 역사적 논의보다는 남북한을 막론하고 그때그때의 정치적 편리에 의해 각색되는 경향이 강한 주제라...

2.3. 월북 이후


'''1948년,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김일성과 박헌영.'''[4]
박헌영은 미군정으로부터 수배를 받자 이 실린 영구차를 타고 월북한 후, 수시로 남북을 비밀리에 오가다가 1948년 4월의 남북협상에 참여한 이후 내려오지 않고 북한에 머물렀다. 1차 남북협상 이후 48년 여름 남한에서 가까운 해주에서 머무르며 해주의 인민대표자 회의를 주관하고 남로당을 지휘했으며 2차 남북협상에 참여한다.
9월 북한 정권 고위직에 임명되었고, 남북노동당의 합당으로 조선로동당이 형성되자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만 해도 박헌영의 영향력은 아직 죽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가 월북했을 당시에는 그를 따라 월북하거나 전쟁 발발 후 월북한 남로당계 인물들이 수천에서 만까지 이르게 있었다. 우리가 아는 카프계 작가들도 거의 다 이쪽에 속해있다.
이들에게는 박헌영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월북 남로당계는 박헌영을 그야말로 우상숭배하듯 받드는 인물들이 많았으며 특히 젊은 청년들에게는 박헌영 헌시나 박헌영 선집이 자발적으로 발간되는 등 인기가 극에 달했다고 한다. 박헌영은 최초엔 남조선로동당 당수로, 합당 후에는 조선로동당의 부위원장으로 이들을 정치기반으로 삼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으며 남로당원들 또한 박헌영 없이는 말 그대로 살 수 없었다.
그러나 박헌영의 기반은 어디까지나 38도선 이남이었고 머릿수가 아무리 많다한들 북한에서 세력을 떨칠 수 있는 기반은 전무했다. 게다가 박헌영이 북조선에서 '부수상' 겸 '외무상' 자리에 있는 것도 '이름뿐인' 권력이었다. 게다가 주요 공산주의 정파인 남로당계, 연안파, 소련파, 만주빨치산계들간의 연합정권으로 내각 수상에 올랐던 김일성에게는 남로당계의 거두 박헌영이 상당한 위협이 되었다. 박헌영과 김일성은 사사건건 의견이 충돌했고 오월동주의 신세나 다름없었다. 결국 남로당계는 점점 주도권을 잃어갔으며, 박헌영 본인도 실질적으로는 김일성의 눈밖에 나지 않도록 행동했을 정도였다.
한국전쟁 당시의 대북삐라로 월북 정치인들을 저격했다. 지금은 요직을 누리고 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탈린의 손에 숙청당할 거라는 뜻. 그리고 이것은 8월 종파사건으로 현실이 되었다. 허성택 숙청도 예언한 삐라(?). 실제로 허성택은 1958년 남로당 숙청 때 같이 숙청된다. 단, 홍명희는 숙청되지 않고 천수를 누리다 죽었다. 그리고 뒤쪽에서 스탈린에게 귀속말하는 아첨꾼처럼 묘사된 인물은 당시 북한 상황을 볼 때 숙청의 실무책임자였던 내무상 방학세로 보인다. '박'학세는 '방'학세의 오타인듯.
1950년, 박헌영은 일생일대의 패착이자 악수를 두고야 만다. 한국전쟁 직전 김일성에게 '''"조선인민군을 남한으로 내려보내면 남한의 남로당원 20만 명이 이에 호응할 것"'''이라는 엄청난 주장을 한 것이다. 다만, 이 부분은 박헌영의 입장에서는 피해갈 수 있는 다른 수가 없었던 것에 가깝다. 북한 내에서 박헌영의 기반이 워낙 미약했기에, 가만히 있었다면 김일성에 의한 숙청을 피할 수 없겠지만, 일단 남침에 성공한다면 그것을 기반으로 김일성에 대항할 만한 세력기반을 구축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즉, 박헌영 개인의 입장만을 따진다면 남침 주도는 도박이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으면 숙청을 피할 수 없으므로 국면 전환을 노릴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수세에 몰린 상황에서 뭔가 큰 거 한 방이 필요했기에 딴에는 승부수를 띄운 것이었다.
실제로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1917년 러시아 대혁명의 성공이후 블라디미르 레닌이 '세계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외치자, 제국주의에 시달리고 있던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전역에서 일대 사회주의 붐이 일어났고, 당대의 지식인들은 대다수가 사회주의에 경도되었다. 더구나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까지 마르크스의 예측대로 역사가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면서 전세계적으로 '깨어있는 지식인이면 당연히 좌익이지'란 분위기가 팽배했다. 광복 직후 한반도에서도 최대의 단일 정치세력은 당연 조선공산당이었다. 정예당원 10만, 방계조직 100만을 외치던 조선공산당인지라... 박헌영은, 비록 조직이 파괴되어 모두 흩어진 채 평범하게 살고 있지만 인민군이 진군하면 기존 좌익계 지식인과 노동자, 농민들이 열렬히 봉기할 거라고 실제로 굳게 믿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광복 직후 이후 박헌영이 이끄는 조직은 규모만으로도 손꼽힐 만해서 주목을 끌었지만, 그들이 주도하고 연루된 굵직굵직한 사건들 때문에 남한 당국에 완전히 찍힌 지 오래였다. 그렇지 않아도 탄압이 과해서 죄 없는 양민들까지 학살되는 판에 조금이라도 빨간 물(?)이 든 조직은 궤멸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이 주장은 후에 '''박헌영이 북한과 남한 양쪽에서 철저히 까이고 매장당하는 계기를 마련한 원인이 되었다.''' 이 때문에 박헌영은 한국전쟁 책임공방에 대해서 김일성과 더불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즉 그가 자랑하던 남로당원 조직의 실체는 허상이었다.
(북한 입장의) 혁명과 해방에 가장 도움이 될 군 조직의 경우만 들어도, 남한에서는 이미 여순사건 이후로 남한 군 내부의 남로당원들이 숙군 작업에 의해 뿌리뽑힌 상황이어서 호응할 군대가 없었다. 결국 "남조선에 쳐들어가기만 해도 우리 남로당원의 호응에 남조선은 3일만에 무너질 것"이라는 박헌영의 주장 때문에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은 3일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진격을 멈추고 그걸 기다리는 데에 써 버렸고, UN군과 국군에게 대응할 기회를 주어버렸다.
다만 인민군이 서울에서 3일간 지체한 이 사건은 국군 6사단이 분투한 춘천-홍천 전투의 영향으로 동부전선의 진격이 늦어졌기 때문이란 설도 팽배하다. 또다른 주장으론 군수품 보급이 늦어졌다는 설도 있다. 혹은 국군이 너무 맥없이 무너지고 수도 서울을 쉽게 함락시키자, 김일성이 오히려 당황해서 일단 세웠다는 설도 있다. 여하튼 이 부분은 한국전쟁 최대의 미스테리이다. 물론 3일 후에도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낙동강까지 남한을 밀어붙였지만, 그 3일도 없었다면 남한은 더 어려웠을지 모른다.

어느 나라에서든 인민은 그들의 주권과 독립을 위해서 유혈전쟁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우리는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떠한 희생도 주저해서는 안 되고 지금부터라도 장기전을 계획하지 않으면 안 된다.

- 6.25 전쟁 중 한 연설의 내용 가운데

한국전쟁 개전 초기 2~4만 정도로 추정되는 남한의 빨치산(파르티잔) 병력이 호응하여 지리산내장산 등에서 활동, 박헌영의 기반이 되어주었다. 빨치산의 대표격인 인물이 박헌영계의 최측근 이현상이었고, 또 남한 빨치산이 훗날 조선인민군의 패잔병을 흡수하기도 했다. 하지만 알다시피 한국전쟁은 북한의 패전으로 귀결되었고, 빨치산은 그 2년 사이에 급격히 쇠락했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리승엽은 계속 빨치산 보충 부대를 조직하여 다수 남파하나 대부분 합류하기 전에 전멸하거나 국군의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재월북하여 수포로 돌아갔으므로, 결국 빨치산은 이후 군경의 토벌로 몰락하였고 박헌영은 정치기반을 완전히 잃게 된다.
이제 박헌영에게 남은 건 예정된 숙청뿐이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노동자 파업 하나 일어나지 않았다'면서 박헌영을 비난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다못해 부산 항만 노동자들이 파업해서 물자수송만 며칠 지연시켰더라도 남한을 손에 넣었을 텐데 그런 내부 교란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실제 박헌영이 장담한 대로 10만 봉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좌익계 노조의 파업 및 태업만 몇 건 일어났으면 혹시라도 역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전쟁 중 박헌영은 1950년 10월부터 문화훈련국을 개편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의 초대 총정치국장을 맡으며 미군의 공격으로 와해된 조선인민군 내부의 당조직을 개편하고 조선인민군을 당의 통제 하에 놓는 작업을 수행하는 등 김일성과의 마지막 밀월관계를 갖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이 되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졌고 결국 박헌영은 한국전쟁 책임론에 휩싸여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53년 3월에 체포당한다. 당시 체포당한 이유는 '리승엽이 미군과 비밀리에 내통한 간첩의혹'에 연루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제 리승엽은 6.25 전쟁 때 인민군 서울점령 치하 때 대한민국 국군유엔군을 상대로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인민군 간부들은 줄행랑만 쳤고... 그리고 휴전 직후 미국 스파이, 반당 종파 분자 등의 죄목을 뒤집어쓰면서 당에서 제명당하고 직위에서 해임당했다.
현재 북한은 6.25 전쟁의 책임을 일방적으로 박헌영에게 몰고 있다. 박헌영도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에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한국 전쟁의 원인을 김일성도 아니고 마오쩌둥이오시프 스탈린도 아닌, 공산당을 배신한 박헌영의 사주 때문에 발생한 전쟁이며, 미국과 이승만의 보도연맹 집단 살해 공작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한국전쟁 책임자로 제 1순위는 두말할 것도 없이 실권자 김일성이며, 북한은 한국전쟁의 책임은 박헌영에게 넘기면서도 "조국통일전쟁"이라는 영광은 김일성에게 바치고 있다. 물론 실질적인 재가는 스탈린의 것이었으며, 김일성을 부추긴 박헌영의 죄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핵심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평안북도 대유동의 지하갱도로 달아났던 김일성은 1950년 11월 7일 만포진의 소련대사관에서 술에 취한 나머지 박헌영에게 "당신이 말한 빨치산들은 다 어디에 갔는가? 백성들이 다 일어난다고 그랬는데 어디로 갔나?"라고 마구 호통을 쳤는데 박헌영은 "아니 김일성 동지. 어찌해서 낙동강으로 군대를 다 보냈는가? 서울이나 후방에 병력을 왜 하나도 안 두었는가? 그러니 후퇴할 때 다 독안에 든 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다 내 책임은 아니다."라고 반박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그야말로 빡돌아서''' "야, 이 자식아! 전쟁이 잘못되면 나뿐 아니라 너도 책임이 있어!" '''라고 외치면서 대리석으로 만든 잉크병까지 집어던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6.25 전쟁 시기 북한의 전략은 일단 서울을 점령하고, 한강에서 국군 주력병력을 박살내면, 남한 내에서 빨치산들의 봉기로 경부선을 따라서 부산까지 곧장 진격한다는 것으로 분석된다. 그런데 실제로는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였지만, 한강에서 국군을 괴멸시키는데 실패하였고, 충청도에 진입하기도 전에 미 육군의 선발대가 파병되어서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빨치산들의 봉기가 대규모까지 아니더라도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이 전혀 없었기에 중공에서 전투를 해온 정예병력(국공내전이 끝나고, 중국 공산당 군대 내에 있었던 조선인들이 대규모로 북한으로 유입)을 중심으로 부산까지 나아가고자 하였다. 초반의 기세를 바탕으로 낙동강을 건너고자 하였으나, 이제는 강을 경계로 위치를 잡은 유엔군과 한국군의 방어를 뚫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고 2~3일 후에 미국은 해군과 공군으로 북한지역에 포격과 폭격을 퍼부었으며, 전선이 뒤로 밀리면서부터는 강을 경계로 폭격을 시행하였다. 이러한 포격과 폭격으로 평양에서조차 지하로 대피할 지경이었기에 전선에는 물자지원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으로서는 승리하지 못한 책임을 박헌영에게 지워야 했고, 일면에서는 이러한 주장이 타당한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박헌영만 믿고 있던 남아있는 남로당계 인사들은 빗자루로 쓸리듯 쓸려 버렸다. 1953년 7월 27일 휴전된 후 북한에서 8월 한 달 동안 검거된 남로당원이 무려 2,000명에 달한다. 그 중에는 시인 임화도 있었는데, 임화는 휴전 협정이 있고 나서 몇 주 후에 처형당했다.
1955년 12월 15일, 박헌영은 북한 최고재판소에서 재판을 받았다. 재판명은 '피소자 박헌영의 북한정권 전복음모,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북한 최고 재판소에서는 박헌영을 일방적으로 '미제의 간첩'이라고 몰아붙힌다. 사실 북한측에서 주장하는 '박헌영의 미제 스파이'의 근거들은 하나같이 말도안되는 억지스러운 것들 주장들이다. 박헌영이 접촉한 미국측 인물로 등장하는 이들은 존 하지 중장, 미국대사관 일등 서기관 노블, 선교사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육군대령 로빈슨과 항공 정보관 니콜스 대령, 헌병 대위 존슨, 버치 중위 등 '''너무 잘 알려진 최고위급 인사 혹은 정보업무와 관련 없는 하급장교들뿐이었다.''' 참고로, 위와 같이 박헌영과 만났던 미국인들은 박헌영뿐만이 아닌 조선의 여러 정치인들과 접촉하여 만나느라 바빴다. 그런데, 이걸 근거로 삼아 북한측은 '박헌영은 미제의 고위 인사들을 수차례 만나 접선했다. 따라서 미제의 간첩.'이라 주장하고 있다.
재판중에 박헌영은 안경을 벗어 시멘트 바닥으로 내집어던지면서 '그래, 네 말대로 스파이였으니 멋대로 해라!'라며 강하게 반발했는데 이때 안경알이 박살났다. 이 재판에서 박헌영은 사형 및 전재산 몰수형을 선고받았다. 형문 과정에서 그는 '그렇다'라고 대답하지 않고 '그렇겠지'라고 대답했다 한다. 재판장에서 박헌영은 공식적으로 다음과 같이 마지막 발언을 하였다고 한다.

너희들의 주장대로 나는 미제의 간첩이었다. 그러나 너희들이 주장하는 미제 간첩과 내가 주장하는 미제 간첩은 엄격히 다르다.(중략) 나는 조국의 해방과 독립 통일을 위해 미국인과 만난것이지 결코 너희들이 말하는 간첩행위가 아니다.(중략) 그대들 말대로 내가 미국의 스파이였다고 하자. 모든 것은 내가 주도했을 뿐 남로당 간부들은 전혀 책임이 없다. 그들은 모두 조국의 해방과 통일, 사회주의 혁명과업을 위해 밤낮으로 일해온 정직한 애국자들이다. 나에게 떨어진 죄의 대가가 어떤 것이든 간에 달게 받겠으니 죄 없는 남로당 간부들을 용서해달라. 거듭 부탁한다.

- 소련파 출신 망명가가 회고한 박헌영 재판기

이 마지막 공식적 발언은 박헌영이 결코 타협적이 아니라 비타협적 성격으로 철저한 공산주의자였음을 짐작케 할 수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북한에 호의적인 증언자들은 이 발언을 '박헌영이 비굴하게 살려달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 말한다. 특히 북한에서 이 발언을 "박헌영은 미제의 간첩임을 시인했다. 끝으로 제가 과거에 감행하여 온 추악한 반국가적, 반당적, 반인민적, 매국역적 죄악이 오늘 공판에서 낱낱이 폭로된 바이지만 여기 오신 방청인들뿐만 아니라 더 널리 인민들 속에 알리여 매국 역적의 말로를 경고하여 주십시오."라고 왜곡했다. 이는 재판문서나 로동신문 등에 기록되어 있다.
결국 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았다. 1955년 박헌영 사형 판결문, 판결 직후 김일성계를 비롯한 일부 갑산파 간부들만 판결에 만족했지 나머지 간부들은 무거운 표정을 짓고 침묵으로 일관한 채 퇴장했다고 한다.
재판 직후 증인으로 나와있던 리강국 등 주요 남로당계 간부들은 즉결 처형당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김일성의 다른 정적들을 때려잡기 위한 증언을 뽑아내기 위해 잠시 더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남로당 숙청 직후, 김일성과 회담하던 마오쩌둥은 박헌영이 미제 간첩이라는 주장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지적하면서 박헌영은 일개 문인이니 가급적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어떠한 경우에서도 죽여선 안된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소련대사 이바노프도 박헌영의 사형을 집행하지 말라는 소련 당국의 뜻을 전달했지만 김일성은 박헌영이 모든 것을 자백했으므로 절대 살려둘 수 없다고 거절했다.
1956년 2월, 니키타 흐루쇼프소련 공산당 20차 당대회에서 이오시프 스탈린에 대한 비판보고인 <개인숭배와 그 결과물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박헌영은 엉뚱하게도 정치적 피해자가 된다. 흐루쇼프는 20차 당대회에 참석한 북한 대표단 최용건에게 스탈린 비판 문건을 전달했고 1956년 3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긴급소집, 조선로동당도 개인숭배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결의했다. 이어 4월에 열린 조선로동당 3차 당대회는 박헌영과 그 일당이 조선로동당 내부에서 개인숭배 행각을 저질렀다고 비판하면서 김일성을 집단지도의 지도자로 대비키심으로 이미 숙청된 박헌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성을 추켜올렸다.
이어 1956년 내각부수상 최창익, 상업상 윤공흠을 비롯한 연안파가 실각한 소련파 등을 규합하여 대대적인 反 김일성 동맹을 결성한 후 김일성 축출을 기도하기에 이른다. 동유럽과 소련을 방문 중이던 김일성은 내각 수상 대리 최용건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경악하여 1956년 7월 19일 귀국, 연안파와 소련파가 박헌영을 이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박헌영에 대한 사형집행을 결정한다. 소련 정보 기관 출신의 충성분자이며 재판 당시에도 배심원으로 참여하였으며, 재판장의 말을 가로채면서까지 박헌영을 간첩으로 몰아붙인 당시 사회안전상 방학세에게 처형을 지시한다. 방학세는 이 공로로 1957년 9월 내무상에 임명되었다. 연안파와 소련파도 8월 종파사건에서 패배하면서 몰락한다.
하지만 처형 날짜가 확실히 밝혀지지 않았다. 외무성 부상, 동독 대사 등을 지내다가 김일성으로부터 신변위협을 느껴 소련으로 망명한 고려인 박길룡의 말에 따르면, 7월 19일에 처형당했다고 한다.
내무성 지하감옥에 수감되어 있던 박헌영은 밤중에 야산으로 끌려나왔다. 죽기 전에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라는 말을 남겼고, 이후 권총 두 방을 후두부에 맞고 생을 마감한다. 시신은 그 자리에 묻혔다.

오늘 죽을 것을 아니까 여러 가지 절차를 밟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해주시오. 그런데, 수상(김일성)께서 내 처와 두 아이를 외국으로 보내겠다고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소. 꼭 약속을 지켜달라고 수상께 전해주시오.

- 처형 직전 김일성에게 남긴 말.

과거 군부독재 시절 북한의 비인도적,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해 셰퍼드가 있는 우리에 박헌영을 던져 넣어 처참하게 찢겨 사망했다는 설이 유포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소련파인 강상호의 증언에 따르면 그가 간첩증거를 고문과정에서 밝히지 않아 셰퍼드 두마리를 그가 취조받던 오두막에 풀어놓았다는 이야기가 와전된 것으로, 사실 가능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 소문을 들은 소련 대사관이 강상호에게 사실 여부를 물어보기도 했다고.
그보다 김일성은 박헌영의 마지막 유언을 지키지 않았고, 그의 처 윤레나와 두 아이는 모두 지금까지 생사불명이다.

3. 가족 관계


그가 상해 부두에서 붙잡혀 취조를 받던 중, 그의 처 주세죽은 남편이 죽은 줄 알고 남편 친구였던 김단야와 재혼하였다. 그 때 김단야 역시 아내 고명자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단야가 '''박헌영이 살아남았다는 걸 알면서도 그 사실을 주세죽에게 숨겼다'''는 설도 있다. 그 뒤 1929년 경 주세죽과 김단야가 눈이 맞았고 이를 안 박헌영이 주세죽과 결별하였다는 소문이 나돌았으며, 박헌영이 살아있음을 확인한 국외 공산주의 운동가들은 주세죽과 김단야를 비난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박헌영은 신경쓸거 없고 그냥 묻어두라고 함구했다.
이하 아내들과 자식들.
박헌영의 가족관계에 대한 내용은 이철의 저작 '경성을 뒤흔든 11가지 연애사건' 제 10화에 자세히 나와있으니 참고바람.
딸 : 박 비비안나(본명, 박영, 1928년 ~ 2013년 11월 7일), 소련에서 무용가이자 대학교수로 재직
[5]
  • 이순금(1912~ ?) 항일운동과 공산주의운동을 함께한 동지이자 1940년 전후 사실혼관계인지 아지트키퍼인지 불분명함. 이관술의 동생. 박헌영과 비슷한 시기 월북
  • 정순년(鄭順年, 1920년 ~ 2004년 12월)
1940년 전후 남한에서 지낼 때 만난 여성로 정태식이 아지트키퍼로 조카인 정순년을 소개시켜준 것임. 슬하에 아들 1명이 있다.
원경(본명, 박병삼, 1941년 ~ ), 남한에서 승려로 출가. 현재 평택 만기사 주지 승려로 지내고 있다. 동시에 역사문제연구소 학회단체 주요간부로 활동. 조계종 원로의원. 이정 박헌영 평전 총 9권(2004)을 발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며 단순히 아버지 찬양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가치있는 자료를 모음.
  • 윤레나(본명, 윤옥)(생사불명)
딸 : 박 나타샤(朴 Наташа, 생사불명)
아들 : 박 세르게이(朴 Серге́й, 생사불명)
[6]
그의 비서 윤레나(본명 윤옥)와 딸 박나타샤. 박헌영은 1949년 8월에 윤레나와 재혼했다.

4. 외모와 성격


키가 161cm로 당시는 평균키였고, 성격이 냉철한데다 완강하고 고집이 강했으며, 평소에 좀처럼 활짝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린이와의 약속을 지킬 정도로 철두철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에 있어서 철저히 자기 사람으로 생각되는 사람들만 썼다는 주장이 있지만 되려 전직 남로당원들의 증언에 의하면 여운형 계열에서 리강국, 허헌을 빼오고 장안파에서 리승엽을 빼오는 등 실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다 써서라도 자기 편으로 들였다. 특히 여운형과의 악연은 유명한데, 박헌영은 아예 측근인 김형선을 주축으로 공산주의 이론가 김오성 등을 여운형의 근로인민당에 프락치로 심어두어서 여운형 측근들을 자기네편으로 빼오는 등 공작활동을 했다.

5. 기타


요리하는 걸 좋아했었고 솜씨도 뛰어났다고 알려져 있으며 미식가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이학규가 주막 일꾼이었으니 영향을 받은 것 같다. 또 미국 유학을 꿈꾸고 영어 공부를 하였으나 학비를 마련할 수가 없어서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영어는 매우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중학교 적부터 영어 공부에 열중했다고 한다. 일본어는 매우 싫어했다고.
그 역시 조선 시대 말기에 태어난 사람인지라 한문을 잘 구사했다. 레닌 대학 입학 원서에 의하면 한국어, 영어, 일본어, 중국어 등 4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었으며 초급 수준의 러시아어도 구사할 수 있었다. 레베데프 비망록에 의하면, 니콜라이 알세예비치 박의 아내인 허정숙과의 동거로 말썽이 일어나서 소련으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당시 박헌영의 가족은 소련에 있었다.
일제 말 국내 독립운동 세력은 거의 다 일제에 잡혀 들어갔다. 여운형조차 감옥에 갇혀 오랜 협박 끝에 가족이 대신 전향서를 쓰는 것을 묵인해주고 나온 일이 있었는데, 박헌영은 상당히 신출귀몰하여 40년대 일제에게 광복까지 잡히지 않았다. 그런 엄혹한 시기에 그의 독립운동 이력은 광복 이후 큰 장점이 되었다.
또한 개신교가 제국주의의 이론적 기반이자 침략의 첨병이라 하며 실로 대차게 깠다. 온건 사회주의자였던 여운형도 개신교인이었던 것과 비교된다.

6. 평가


북한에서의 평가는 여전히 박하다. 전쟁 중 전공을 세운 이현상 등 빨치산은 사후 한참 후에 공로가 인정되어 '공화국 영웅' 칭호 등을 받으며 재평가되는 반면, 박헌영은 김일성이 뒤집어 씌운 미국의 스파이, 반당종파분자라는 죄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으며 당연히 평가는 최악이다.# 심지어 위에서 보듯 그의 병보석 등을 이유로 박헌영을 '미제 간첩'뿐만 아닌 '일제 간첩'으로 '3중 첩자'로 몰아세웠다. 그러나 북한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갖다맞추기식으로 터무니없는 주장들이다.
남한에서는 6.25 전쟁직전 월북해 김일성과 힘을 합쳐 남한의 적화통일을 시도한 "골수 빨갱이"로 인식되어 왔으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가 점차 축적되면서 오늘날 독립운동 이력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참여정부 시기, '조선공산당 역시 독립운동에 기여한 단체'라는 인식 하에 부인 주세죽과 동료 김단야가 건국훈장을 추서받으면서, 광복 전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에 헌신한 박헌영에 대해서도 건국훈장 추서가 논의된 적이 있었다. 결국은 '자발적인 월북자 정치인, 전쟁의 배후 중 한 사람, 북한에서 고위직을 지낸 경력'이라는 이유로 서훈은 무산되었다.
일반적으로 외골수적 성격에, 언변에 능하지 못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룬다. '''전반적으로 시야가 좁고 편협하며 유연성과 포용력이 약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조선공산당 활동 시절부터 '박헌영계열파 vs 반박헌영계열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 싸움과 분열이 상상이상으로 심했다. 즉, 이론가라면 모를까 인간, 그리고 대중적인 정치가로서는 미흡하다는 것. 이는 그가 광복 후 과격파의 지지를 받았던 것도 영향이 크며, 비참한 말로도 영향이 있다.
다만 박헌영은 광복 초기 이승만의 독립촉성회에 참여하고 임시정부의 투쟁을 인정하는 등 타협의 여지는 보였다. 다만 이것은 그가 여운형의 발밑을 아주 잘 판 예를 생각하면 그 행동이 이승만과 타협하려 했던 것인 지는 불확실하다. 박헌영 자신은 미국, 유럽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도리어 이런게 나중에 '미제간첩'의 근거가 된다.
하지만 박노자는 박헌영이 스탈린주의적 도그마에 빠져 있긴 해도 근본적으로 온화한 성격에 열성적 노동계급 혁명가였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이는 현실과 타협해 오염되기보다는 우직하게 오리지널을 고수한 면이 있던 "리론가"로서의 박헌영에게 점수를 주었다 볼 수도 있다. 광복 시기의 좌파 주요 인물 중에서 박헌영에게서 마르크스의 제자에 가까운 면을 발견했을 것이다. 박노자가 이런 캐릭터를 좋아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교수 최규진은 그가 빼어난 이론가이며 이론이 굳센 사람이라고 평가하였기도 하다. 애초에 인간성이라는 것은 자기편인가, 적인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는 부분이라서 크게 의미가 있는 부분은 아니다. 반체제적 운동을 하는 사람 치고 외골수라는 비난을 안 받는 사람은 없기도 하고.
교수 박명림[7]의 경우에는 박헌영의 입지가 모자라 고비에 몰려 전쟁을 일으킨게 결코 아니며, 오히려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장이었던 김일성 하에 부위원장아자 내각 부수상 박헌영으로 군림하며 김일성과 철저하게 손잡고 짝짜꿍하며 일으킨 것이 한국전쟁이라고 주장한다. 박헌영 뿐만이 아니라 후에 숙청되는 리승엽을 비롯한 굵직한 인물들이 정치위원회의 다수를 차지한 것은 덤. 정치위원회 자체가 38선 이남에 있던 김삼룡, 리승엽, 허헌, 허가이, 박일우 등 김일성의 측근이라고는 김책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로동계급의 수령이라 불릴 정도의 박헌영이었기에 월북 이후에는 김일성이 그에게 어느 정도 양보를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럼에도 둘의 의견이 맞아 떨어졌기에 남침을 개시했다는 것이다. 어떤 분석이 맞든 어쨌든 남침을 주장하고 주도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함이 없게 된다.

6.1. 미제간첩설


“박헌영은 1925년 조선공산당과 공산청년동맹의 일부 조직이 파괴되었을 때 이 전조직에 관해 일본 관헌에 고발하고 이 공로로 일찍 석방될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확고한 정치적 신념과 혁명적 양심을 상실했고 1939년 10월 CIC(CIA 전신)로부터 미국을 위해 복무하라는 권유를 받고 승낙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박헌영은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하고 자기 세력을 확대하다 미군이 평양 방면으로 진공해오면 무장부대들을 평양 주변에 결집시켜 동원할 계획을 갖고 준비하다 내란 모의가 발각됐다. ‘박헌영이 정말 간첩이었느냐’라는 질문에 나는 자신있게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다시 한 번 부탁하고 싶은 것은 그 질문보다 ‘박헌영이 왜 간첩이 되었는가’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진지함과 관심을 모아달라는 것이다. 혁명운동은 지식과 재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과 의리로 하는 것이다. 박헌영은 높은 지식과 재능을 갖춘 사람이었지만 혁명적 신념과 의리가 없었다.”

NL 현대사 p.21~22 내용을 발췌

위에 있는 글은 1985년 국내 운동권에 주체사상을 전파한 인물이자, 강철서신의 저자인 김영환이 썼던 “우리는 간첩 박헌영으로부터 무엇을 배울 것인가”의 내용이다. 이들의 당시 주장에 따르면, 1925년 박헌영이 조선공산당을 창당해서 활동했던 시기부터, 한국전쟁 시기 까지 미제 간첩으로서 활동했다고 한다. '''....라고 하며''' 현재 북한은 박헌영을 미제 간첩으로 간주하고 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박헌영 미제 스파이설은 김일성의 정적 숙청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하기 위해 끼워맞추기식으로 만들어낸 사실 왜곡이다.'''
1925년 그가 조선공산당에서 활동했을 당시, 박헌영이 사회주의 계열 조직에 관해 일본 관헌에 고발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다. 1939년 10월 CIA로 부터 미국을 위해 복무하라는 권유를 받고 승낙했다는 얘기 또한 증거가 없으며, 1951년 박헌영이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했다는 얘기 또한 사실이 아니다. 1925년 일제 경찰에게 체포된 박헌영은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똥까지 먹어가며 버티다 1928년 병보석으로 풀려났었고, 1939년 박헌영은 대전 형무소에서 출옥 한 뒤 1941년 경성콤그룹을 만들었으며, 중일전쟁과 태평양 전쟁을 계기로 일제의 탄압의 심해지자, 벽돌공장에서 숨어지내야 했다.
북한이나 NL계열이 주장하는 1951년 무장폭동 지휘부를 결성하여 내란을 준비했다는 주장 또한 사실이 아니다. 당시 박헌영은 1951년 2월 10일 외무상 명의로 유엔총회 의장과 안보리 의장에게 서한을 보내 '''이승만 정권과 미군의 야만적인 전쟁범죄가 진행되고 있음을 규탄했고''', 1952년에는 '''미군의 세균무기 사용을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기 까지 했다.'''
북한이 제시한 자료중엔 "1941년 광주의 벽돌공으로 숨기전 미제간첩질을 하다 자기 혼자 살기위해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은 뒤 도망쳤다."는 허무맹랑한 자료도 있다. 이 또한 사실 관계가 맞지 않는 어거지 주장이다. 1941년은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국하고 전쟁을 사작하게 되는 시기인데다가 박헌영이 미제간첩이기 때문에 적국 일제에게 동료들을 팔아먹는다는 설정자체가 오류고 일제에게 팔아먹었는데 보호받기는 커녕 일제를 피해 광주의 벽돌공으로 위장하여 도망쳤다는 얘기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북한이 주장하는 미제간첩론이 사실이라 하자면, 도데체 박헌영은 어떻게 해서 1929년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에서 유학하고 1948년 북한의 부수상 자리에 오르고 북한에서 숙청되고 난뒤 왜 남한에서는 미제를 위해 간첩질을 한 박헌영이 어떻게 칭찬받지 않고 빨갱이라 욕을 먹는 것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 하다. 그리고 북한의 미제간첩론이 맞다면 광복 후, 박헌영의 지휘아래 미군정과 이승만에 맞서 대립하던 세력인 조선공산당은 미국에 충성하는 집단이 되는데, 그 미국에 충성하는 집단이 미국과 이승만에 맞서 노동자 파업을 지휘하고, 여순사건과 제주4.3사건을 주도한다는 것 자체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처럼 박헌영 미제간첩설은 박헌영에 대해 조금만 공부해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후 한소수교, 한중수교로 공산권쪽 공식기록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게 되고, 특히 지금도 러시아와 중국에 남아있는 당시 관련 인물들의 인터뷰와 회고록들이 속속 공개되면서 이제는 골수 NL들 조차도 박헌영이 미제스파이라는 주장은 안 한다.

7. 대중매체에서



7.1. 배역 및 캐릭터로서


대부분 매체에서는 겉과 속이 다른 사람, 인간 쓰레기로 묘사된다. 하지만 386 운동권에서 즐겨 읽던 창작물에서는 마치 -"저항군의 멘토"같은 입지를 주어 긍정적으로 묘사하기도 한다.
  • 1985년작 KBS 대하드라마 <새벽>에선 배우 임혁이 연기했는데, 1987년 6.25 특집드라마 <환멸을 찾아서>[8]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90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김인태가 연기했다.
  • 1994년 2월 13일자 KBS1 <다큐멘터리극장>에선 배우 최용욱이 연기했다.
  • 2006년작 KBS 대하드라마 서울 1945에선 배우 김효원이 맡았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이끄는 당에 속한 문동기를 생각보다 아낀다. 정판사 사건의 장본인으로 나오고, 김일성과 더불어 6.25전쟁을 일으킨 인물로 등장하는데, 49화에선 문동기에게 "전쟁 말고는 남조선을 해방할 방도가 없소!"라고 한다. 드라마가 끝날 때 쯤에는 문동기를 숙청하려는 김일성에게 "자칫하면 내분이 생길 수 있다."며 문동기 숙청을 막으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의 권력이 너무나도 강했는지, 이를 막지 못한다. 문동기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보는 장면이 나름 의미심장하다. 일각에서는 드라마 서울 1945가 북한을 이롭게 그리는 좌파 드라마라고 근거없는 비판을 하지만, 북한에서 미제간첩으로 규정짓는 이정 박헌영을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미군정과 친일파에 맞서는 인물로 묘사했다. 즉 북조선 입장에서 보면 미제 간첩을 그렇게 그린 셈이 된다.
  • 1988~1990년까지 방영된 KBS2 유머 1번지 코너 <영구야 영구야>에서도 등장했다. 영구가 광복 직후에 김두한과 같이 행동했는데, 쌍라이트를 데리고 남로당을 습격하는 장면이 나왔다. 여기서 박헌영은 이봉원이 맡았다.
  • 조정래 작가의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박헌영이 김일성을 살려주려고 일부러 누명 쓰기를 자청했다고 나온다.
  • 권운상 작가가 비전향장기수를 다룬 소설 <녹슬은 해방구>에서는 단역이지만 지리산 빨치산과 연락하는 북한 이론가로 등장한다.
  • 황석영의 소설 <철도원 삼대>에 등장한다.

7.2. 관련 서적


  • 박헌영 (박갑동 지음) - 1982년에 전직 남로당원 출신이라고 밝히고 있는 박갑동이 일본에서 쓴 책으로 1983년에 한국어판이 나왔으나 당시 시대적 상황이 상황인지라 전량 압수되어 절판되었다. 그러나 84년, 85년판도 은연중에 출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국립중앙도서관 원문검색등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이 책은 중앙일보에서 연재한 글을 바탕으로 엮어 1980년대에 나온 책으로 남한에서 박헌영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에 대한 정보를 전해주는 거의 유일한 책으로 평가받았었다. 이 글에 담긴 박헌영에 관한 정보라든가 광복 직후의 시기 관련한 정보가 반드시 정확한 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에서 부정확한 정보, 측면들이 많아 한계가 있었다. 이는 기존 반공을 표방하던 군사정권의 언론매체등을 통해 발표된 점과 저자의 회상과 기억에 의존하여 쓰여진 측면이 많기 때문이다.
  • 박헌영 노선 비판 (김남식,심지연 저) - 1986년에 간행된 연구서적으로 '조선공산당과 박헌영의 지극히 비판적인' 연구성과로 지목된다. 이 책에 따르면, 일제시대와 광복 직후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박헌영이 관여한곳은 파벌주의로 오염되어 변질되었으며, 나아가 민중 혁명 에네르기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어 남한 사회주의 운동 실패를 초래시켰다고 지적하고 있다.
  •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 박헌영의 일대기를 연보,문헌자료등 쭉 엮어 정리한 내용이다. 참고로 이책에 박헌영의 아들이자 승려인 원경(박병삼)도 참여하였다.

  • 박헌영 평전 (안재성 지음) - 박헌영의 생애에 대해 재평가와 재해석을 다룬 책이다. 치밀한 사료 조사를 통해 추적하였으며 제3자의 시각에서 객관성을 가진 부분이다. 저자 안재성씨는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제간첩이라는 터무니 없는 주장을 객관적인 사실관계를 토대로 하여 조목조목 반박한다. 다만, 박헌영의 비판받을 부분을 쉴드쳐주고 있다는점에서 극우계열의 비판이 있다.
  • 소설 남로당 (이병주 지음) - 관부연락선지리산사이의 시대를 다루고 있다. 엄밀히 말해서는 소설이기보다는 실록, 위에 나온 박갑동을 포함한 전직 빨치산 들의 증언을 입수, 증언들을 토대로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참고로 박갑동이 이병주의 고교 선배다. 결론은 박헌영이 간첩이라면 수십년간 속고 살아온 김일성은 더 바보라는 논리.
  • 이정 박헌영 전집(역사비평사) - 박헌영이 일생동안 발표한 논문, 연설문, 관련기사및 회고담을 모았다. 전9권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차 사료로서는 추천. 1993년부터 장장 10년간 작업 끝에 2004년에 출판되었다. 심지어 이 작업동안 역사비평사 경영진이 한 차례 교체되었다.
  • 박헌영 트라우마 (손석춘 지음/철수와 영희 출판) - 박헌영의 아들인 원경스님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원경스님의 인생 스토리와 원경스님이 본 박헌영의 모습을 알 수 있다.

[1] 사망일이 확실히 밝혀지지 않음.[2] 이때 YMCA에 참여하여 영어도 배우고 선교사 언더우드 등과 교류한 것을 근거로 훗날에 북조선에서 그를 '미국의 간첩'이라고 재판정 문서에 적었고, 언더우드를 만난 것을 핑계로 그가 미국 간첩이라 주장하지만 이에 대한 증거는 없다.[3] 출처 #[4] 옆에는 잘렸으나 원래는 허헌이 박헌영의 옆에 서 있었다.[5] 출처 #[6] 출처 #[7] 김두봉, 최용건, 홍명희 등이 남침에 찬성하지 않았다고 주장했고 남침유도설을 학계에서 추방시켰다. 한국 6.25 전쟁사의 권위자 중 한 명이다.[8] 김원일 작가가 1982년 <문학사상>에 발표한 동명의 소설이 원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