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승엽

 


'''서울시 인민위원회 위원장'''
서울특별시 함락

'''리승엽'''

9.28 서울 수복
李承燁
1906년 2월 8일[1] ~ 1953년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관련 문서


1. 개요


북한정치인이자 언론인. 조선공산당 창설에 관여했으며 조선로동당의 초대 정치 위원이자 박헌영의 최측근이었다. 한국 전쟁이 끝난 후[2] 박헌영 등과 같이 김일성에게 숙청당했다. 이명은 이양경(李良敬).

2. 생애


경기도 남양군 영흥면 외동(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외리)에서 아버지 이기선(李夔善)과 어머니 전씨(田氏)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기선은 뱃사공이었으나 이후 인천으로 이주하여 여관을 경영한다. 2~30년대 일제의 요시찰 인물 감시 카드에 따르면, 부친의 부동산동산이 약 2만 원 상당에 이를 정도로 부유했다고 한다. 이를 볼 때, 어린 시절 크게 부족함 없이 자란 것으로 보인다.[3]
인천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4] 이후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에 입학하지만, 입학한 당해[5] 7월에 퇴학당한다.[6] 이후 보성법률학교에 들어가지만 1923년 2월 중퇴한다. 이 무렵에 그는 사회주의에 심취하였으며, 이후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한다.
중퇴 이후에는 인천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혼도 하여 가정도 꾸렸으며,[7] 동인천역 맞은 편에 있던 인천미곡상조합의 사무장으로 일했다.[8] 1925년 조선일보 인천 지부 기자로 일하였다. 한편 그는 조선노동총동맹에 가입하여 인천 지부의 핵심 인물이 되었으며, 1925년 조선공산당에 창건에 관여한다. 이로 인해서 그런지 그는 1926년 조선일보사에서 권고사직당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다.
2년 가량 감옥 생활 이후 그는 계속해서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 1930년 3.1운동 11주년 기념으로 '전조선 피압박 피착취계급에 격함'이라는 격문을 뿌린 '격문사건' 주도자로 수배당했지만, 그는 도주에 성공하여 검거되지 않았다.[9] 이후 그는 영남 지역에서 노동 생활을 하며 사회주의 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그 가운데 1932년 이른바 '반제격문사건(반제사건)'으로 체포된다. 이는 만주사변과 관련하여 반제국주의 반전 격문을 뿌린 사건으로, 대범하게도 당시 진주부산에 있던 일본군 주둔지에도 이 격문을 뿌렸다고 한다. 이로 인하여 부산 재판소에서 징역 4년을 구형받는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를 따르면, 부인과 어린 자식이 인천에서 부산까지 와서 징역을 선고받는 공판을 참관했다면서, 처자식이 불쌍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다.
석방된 후에도 조선공산당 재건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으로 감옥을 들락날락했다. 그리고 1940년 전향서를 쓰고 출소한다.[10]
이후 그의 평가에 대해서는 엇갈린다. 석방된 이후에 과거 미곡상조합에서 일했던 경력 때문인지 일제의 식량배급조합 이사로 있었고, 친일적인 글도 다수 썼기에 친일반민족행위자로 비판받는다.[11]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위장된 것이며 비밀리에 사회주의 운동[12]을 벌였다고 하기도 한다. 어쨌든 그는 1945년 봄 조선건국동맹 결성에 관여했으며, 해방 이후에는 조선공산당 결성에 가담하여 중앙위원에 오른다. 당시 남로당에서는 박헌영 다음의 사실상 2인자 위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즈음에 월북했으며,[13]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사법상에 임명되는 등 요직에 앉았다. 1949년에는 박헌영과 함께 조선인민유격대(이른바 빨치산)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며, 6.25 전쟁 당시에도 총괄 책임자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1953년 '정권 전복'과 '미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물론 실제로 간첩 행위를 했다기보다는, 사실상 김일성의 정적 제거에 가깝다. 당장 전쟁 당시 북한이 서울을 점령한 이후 서울시 인민위원장(서울특별시장 격)으로 활동했으며,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패잔병을 모아서 유격전과 지연전을 펼치다가 후퇴했다. 인천상륙작전 당시 유일하게 UN군 및 국군과 대치했으며, 김일성과 장교들이 평양을 버리고 도망갈 때도 끝까지 전선을 지켰다고 한다. 고향이 인천이라서 인천 지리에 밝았고 이로 인해 UN군과 국군을 상대로 인천에서 2주일이나 개길 수 있었다. 결국 2주일만에 숫적열세로 털리고 후퇴했으며 리승엽이 후퇴하자 서울은 수복되었다.
전쟁을 일으켰지만 무력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 전역이 폐허가 된 채로 정전협정이 체결됐기 때문에, 김일성 입장에는 이에 대해서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이에 따라서 리승엽을 시작으로 남로당 인사들은 '정권 정복 음모 및 미제 간첩' 혐의로 숙청당했다. 그리고 1955년경 최종적으로 박헌영이 처형되면서 북한에서 남로당계 세력은 사실상 소멸한다.
현재는 남북 모두에게 버림받은 인물이다.[14]

3. 여담


  • 야구선수 이승엽과 한자가 동일하다. [15]
  • 燁이라는 한자가 일본에서 자주 쓰이지 않아 어려워서 그런지 일본어 위키백과에서는 '엽' 부분만 가타카나로 표기한 '李承ヨプ'란 표기가 표제어로 되어있다.
[1] 1905년이라고 하는 자료도 있으며, 192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1928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6년 2월 8일생으로 기재되어있다. 허나, 1936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왜정시대인물사료에는 1908년 2월 9일생으로 되어 있어 무엇이 맞는지는 알 수 없다.[2] 애매한 게, 리승엽과 박헌영 모두 전쟁이 한창이었던 53년 3월에 체포되었다. 종전까지 4달이 남은 상태였기에 전쟁 중 총살당한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다.[3] 이와 관련해서 북한에서는 소부르주아 가정에서 태어났다고 언급하면서 '출신부터 반혁명적인 인물'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역사 속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인사들 중 부르주아 출신들이 꽤 된다. 당장 러시아 혁명을 일으켰던 블라디미르 레닌이 아버지가 교육장학사 출신이였고, 동료이자 라이벌 이현상도 아버지가 부농에 면장까지 지낸 지역 유지였다.[4] 한국민족대백과사전 등에는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퇴학 당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일제강점기 그와 관련된 기록에서는 그가 '졸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5] 기록마다 연도가 다르다. 1921년 혹은 1922년에 입학했다고 한다.[6] 퇴학 사유는 알 수 없다.[7] 부인의 이름은 '신간난'이라고 한다.[8] 리승엽이 인천미곡상조합에서 일할 때 2~3분 거리에 조봉암이 운영하던 비강조합이 있었고, 인천사회주의 운동 핵심에 있었던 박남칠이 그 옆에서 쌀 가게를 하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리강국서울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자주 오가기도 했다. 훗날 이러한 인연이 시작이 되어 광복절 이후 인천의 미곡상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인천 지부의 핵심 인원이 된다.[9] 당시 격문사건 재판부에서는 격문사건으로 체포된 6명에 대해서만 형을 집행하였고, 리승엽을 포함하여 체포되지 않은 인물에 대해서는 기소중지 처분을 내렸다.[10] 당시 일제는 무조건 사회주의자들에게 전향서를 강요했고, 수감 중이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자들이 전향서를 썼다. 그 가운데에는 제법 늦은 축에 속하는 편이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정말로 사회주의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전향한 사람도 있었고, 겉으로는 전향한 척하면서 다시 사회주의 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경우도 있었다.[11] 이로 인하여 친일인명사전에도 등재되어 있다.[12] 함경도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 지하 조직에 관여했다고 한다.[13] 박헌영의 지시였다고 한다.[14] 박헌영은 그나마 민주화 이후 거물 독립운동가로서 어느 정도 인정받는 시각이 있다. 하지만 리승엽은 독립운동가로서 그렇게 큰 실적도 없고 전쟁에 참여해 빨치산 활동까지 했으므로 지금까지도 꾸준하게 비판을 듣고 있다.[15] 야구선수 이승엽광주 이씨이다.


4.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