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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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 기록된 이현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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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시절의 이현상
李鉉相
1905년 9월 27일 ~ 1953년 9월 17일
1. 약력
2. 생애
2.1. 일제 강점기
2.2. 광복 후 정국
2.3. 6.25동란중 벌인 빨치산 활동
2.4. 최후
2.4.1. 죽음의 미스테리
2.5. 사후 북한에서
2.6. 이현상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2.7. 유족
3. 극화 속에서
4. 같이보기


1. 약력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 공산주의자. 노동 운동가. 일제 때는 6.10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고 지하 비밀 독립운동 단체 경성 콤그룹을 결성, 조선 공산당 재건 운동을 하였다. 해방 후에는 남조선 로동당의 간부로서 1949년 여순사건을 일으킨 14연대 병사들을 이끌고 지리산 일대를 중심으로 파르티잔 활동(남부군)을 지휘했다.자세한 자료. 수필 남부군#s-2의 저자 이태는 이현상을 가리켜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 ‘외로운 방랑자’, ‘고독한 공화국 영웅’, ‘남한 빨치산의 전설적인 총수’라 칭하고 있다.

2. 생애



2.1. 일제 강점기


1905년 9월 27일, 전라북도 진산군[1] 군북면에서 3백석쯤 하는 부농 이면배의 4남 2녀 중 다섯째(아들로는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 씨가 당시 면장을 지냈는데 면민들이 송덕비를 세워 그 비가 지금도 금산 - 대전 간 도로변에 서 있다. 지금은 모두 고인이 된 맏형과 둘째 형도 면장 일을 보았다.[2]
금산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고창고보에 다니다 중도에 그만두고 서울 중앙고보로 옮겼다. 중앙고보 재학 때인 1925년 박헌영 등과 조선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다. 1926년 6.10 만세 운동 당시에는 학생 신분으로 주동자 역할을 하며 유인물을 배포하다 출판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경성 지방 법원 검사국에서 기소 유예 처분을 받았다.
이듬해인 1927년 보성전문학교(現 고려대학교) 법과에 들어간 뒤, 조선 공산당과 고려 공산 청년회 산하의 학생부 위원회, 조선 학생 과학 연구회, 학생야체이카회, 독서회 등에서 상무 위원ㆍ상무 집행 위원ㆍ책임 비서 등으로 활동했다.
1928년 보성전문학교에서 반일 동맹 휴학을 주도하다 일제의 대대적인 공산당 검거에 걸려 구속됐다. 이것이 세칭 ‘ㄱ당 학생 사건’이었다. 당시의 일본 경찰 신문 조서를 보면 이현상은 1927년 4월 중국 상하이에 건너가 한인 청년회에 입회, ‘사회주의 선전에 전력’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재미있는 것은 '피의자 소행 조서'에서 "일견 온순함을 가장하고 있으나 음험한 자로서 과묵하며 의지가 대단히 강고"하다고 기재돼 있고 '''극력한 사회주의자로서 개전의 가능성은 없음'''이라고도 적혀 있다. 또 신문사 조사에 따르면 이때 그는 서울 익전동에서 아내와 슬하 1남 1녀, 하인 한 사람을 두고 생활하고 있었는데 생활비와 학비는 형이 대주고 있었다고 한다.
1928년 검찰에 의해 다시 한 번 치안 유지법ㆍ보안법ㆍ출판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고, ML당 사건까지 겹쳐 징역 4년을 살게 되었다. 1932년 감옥에서 나온 후로도 사회주의 운동을 멈추지 않아 체포되고 투옥되기를 거듭하였다. 그가 일제하 감옥에서 생활한 기간만 12년여였다.
1933년 김삼룡 이재유와 함께 경성 트로이카 활동을 하는데 경성부지역에서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을 조직하였다. 같이 활동한 여성으로는 이효정, 이경선과 박진홍이 있다.
1939년에는 박헌영, 김삼룡, 이재유, 이관술과 함께 경성 콤그룹을 결성해 조선 공산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는 이 시기에 집에서 돈을 끌어다 공산주의 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러다 2차 대전 말기 일제의 발악이 심해지고 동료 공산주의자들의 투옥ㆍ전향이 속출하자 일제의 수사망을 피해 덕유산으로 도피, 은거하였다. 이 당시의 은거 생활은 이후 이현상의 행적에 크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

2.2. 광복 후 정국


광복후 조선공산당 재건에 힘을 기울이며 남조선로동당으로 개편된 이후 남로당 연락부장 겸 간부부장을 맡았다. 하지만 미군정에 의해 남로당이 불법화되자 박헌영과 함께 월북했다.
외세 소련김일성을 극도로 싫어했으며 공산주의의 정통성은 어디까지나 남조선로동당이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리승엽박헌영이 어느정도는 김일성과 타협점을 찾았던 반면 이현상은 그것을 외압에 인한 굴복으로 간주했다.
그런 배경에서였는지 4.3 사건이 터지고 그로 인해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바로 월남하여 여순사건과 파생 남로당계 반란군들을 수습하여 지하무장세력화한다. 한편 북한의 남로당계 인물들도 이에 호응하기 위해 강동정치학원을 설립하고 남로당계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켜 남파시키는 등 조직적인 남한 내 빨치산의 구축을 담당하나 이현상이 이끄는 병력을 제외하고는 조기에 격파되거나 와해되었다.

2.3. 6.25동란중 벌인 빨치산 활동


한국전쟁 발발 후 북한군이 파죽지세로 남침하자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이현상의 빨치산 병력은 이에 내응하여 하산, 낙동강까지 진격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 낙동강 전투 당시 이현상 휘하의 부대들은 낙동강을 도하하여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 전을 전개했었다. 심지어 북한군 T-34를 잡기 위해 도착한 '''미군 탱크'''를 상대로도 전투를 치르기도 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UN군의 반격이 심해지자 다시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한 가지 구분해야 할 점은 남부군=남한 빨치산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50년 11월 중순 남로당계열의 리승엽이 자파의 세력 강화를 위해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이라는 명칭으로 이현상 아래 6개 도당(충남북, 전남북, 경남북) 유격대 전체를 관할하게 하였으나, 51년 4월자로 노동당 중앙당에서 남부군을 6개 도당과 동격인 지대로 격하했다.(이 지령이 산넘고 물건너 지리산에 도착한건 51년 10월) 그렇지 않아도 남부군의 전력은 각 도당과 비슷한 정도였다. 이때문에 각 지역별 빨치산 세력과 의견을 조율하는 데 상당한 애로사항이 있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한국전쟁 이후 각 지역 빨치산의 사령은 대부분 북로계였으며 남로계인 이현상의 휘하로 들어가는 것을 달가와하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1951년 7월, 고립된 북한군 잔당 및 좌익세력으로 구성된 타 빨치산과 조율하여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 총사령관 자리에 올라 남한 빨치산의 상징격인 인물이 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선인민유격대의 총사령관이란 직함으로 그의 상관이었던 인물은 남로당에서 이현상과 배분이 비슷했던 이승엽이었다. 이현상의 시각으로는 배신한 옛 동료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이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다.(남부군 발췌)
이현상이 민간인을 학살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의 일기에도 군경이 희생됐단 말만 있지 민간인 학살 내용은 없으며 오히려 이현상을 동정하고 있다.[3] 이현상이 학살자라면 과연 이렇게 생각했을지 의문이다. 심지어 차일혁의 관할 구역이였던 전북도당에서는 군경 포로를 전부 사살하는데 남부군에서는 포로를 돌려보냈다고 나왔다. 27명의 포로를 돌려받으면서 '포로를 돌려보낼 정도로 여유가 있는 적은, 진정 무서운 적'이라고 판단한다.
또한 자신은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군경 포로의 배를 갈라 생간을 꺼내 먹는다는 증언을 여러번 들었다고 나온다. 그런데 수색작전중 배가 깨끗한 군경 시체들을 발견하자 기존의 적인 전북도당이 아닌 새로운 부대가 나타났다는 것을 깨달았다.(얼마 후 남부군이라는 것을 안다.)
또한 이현상은 여수 14연대 반란사건은 '''민중봉기가 아니라 (우발적인) 반란'''이며 '''무책임하게 일으켰다'''이라 평가한 사람이었다.[4] 다만 일단 일어난 반란은 정의로우며 지도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2.4. 최후


한편 이승만은 '''"이현상의 토벌 없이 지리산의 안정 없고 지리산의 안정 없이 대한민국의 안정 없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당시 이현상 한 사람 때문에 대한민국 정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겠다. 오죽하면 이현상이 축지법을 쓴다는 얘기까지 나왔을까. 이에 이현상을 잡으면 1계급 특진 시켜준다는 지시가 내려왔다.
한국전쟁 당시 남한 내 빨치산들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어느곳에서도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전쟁 휴전협상이 종료될 때까지 북한은 빨치산에 대해서 적극적인 구명운동을 벌이지는 않았다.
대신 빨치산들에게 하산해 도시로 들어가 지하활동을 계속하라는 무전 지시를 보내왔다.[5] 그런데 빨치산들은 하나같이 거지꼴이어서 하산이 어려운데다가 경찰이 잔존 대원들의 신상을 파악하고 있어 무사히 산을 벗어난다 해도 갈 곳이 없었다.
그런데 1953년 8월 6일자로 북한에서 남로당 최고 간부 12명을 일제히 숙청하고 그 중 이승엽 등 10명에게 사형판결을 내렸다. 김일성의 정적인 남로당 숙청이 시작된 것이다. 이에 5지구당 위원장으로 남로당 고위간부이자 산하에 남부군, 전북도당, 전남도당, 경남도당을 두고 이끌던 이현상 역시, 1953년 9월 6일자로 김일성 절대지지파인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 등에 의해 모든 직위를 박탈 당하고 평당원으로 강등 되었으며, 무장 해제당하고 반감금되었다. 이후 남부군 사령부 요원들을 찢어져서 각 도당으로 분배되었고, 남부군 직계 부대이자 5지구당 경호부대였던 김지회 부대는 995 부대로 개칭 당하고 전남도당 구례군당 산하 일개 부대로 격하 되었다. 이후 이현상은 경남도당으로 이송되어 가도록 예정 되었다.
1953년 9월 4일. 제5지구당 기요 부과장 겸 박영발 전속 의무관 이형련이 전투경찰 2연대 사찰유격대에게 체포되었다. 연대장인 차일혁 총경이 "이현상은 (소문대로) 월북했는가? 아니면 지리산에 있는가?"하고 물어 봤을 정도로 이현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이형련은 5지구당의 내분에 질려 먼저 원래 소속지인 전남도당으로 이동중이었다. 그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상태였는데 치료를 거부하고 죽으면서 5지구당에 무언가 중대한 변화가 있다는 것과 이현상이 아직 지리산에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1953년 9월 6일에는 이현상의 개인 경호원 7명 중에서 2명인 김은석과 김진영이 체포된다. 그 둘은 5지구당에서 이현상을 숙청한 것에 큰 불만을 갖고 있는 상태라 몽땅 불어 버린다. 즉 제5지구당은 해체되었고 이현상은 개인 경호대 역시 해체된 상태로, 홀로 감금되어 경남도당으로 이송 대기중이라는 초특급 정보였다.
이 둘은 2연대 수색대(사찰유격대)로 편입된다. 수색대는 대장인 김용식 경사 등 31명 중 한 사람을 빼고는 전원이 빨치산 출신이었다. 김용식은 유일한 정식 경찰이었는데, 조선대학 출신으로 덕유산지구 적상산에서 부하 15명을 이끌고 귀순하였다. 이현상의 호위병이 제공한 귀중한 정보를 바탕으로 서전사는 사령관 김종원의 명에 따라 1953년 9월 13일자로 작전명령 9호를 발동한다. 바로 이현상 체포작전이었다.
당시 군경은 더 이상 합동작전을 하지 않고 서경사(군)와 서전사(경찰)로 나뉘어 각자 경쟁을 하면서 작전하였다. 몇 만명을 동원해서 싸워야 할 빨치산 부대도 없는 상황에서 상호간에 경쟁심을 유발하겠다는 것인데, 실전에서는 정보 공유가 전혀 안 되는 단점이 있었다.
이에 경찰은 이현상에 대한 정보를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군부대가 지리산 빗점골에서 철수하는 1953년 9월 17일까지 작전을 연기하였다. 그리고 군부대가 철수하는 17일부터 작전을 시작하였다. 이현상 호위병까지 포함하여 33명이 된 2연대 수색대는 17일 23시부터 매복을 시작했는데, 다음날 18일 11시경 매복조 중 하나가 산에서 내려오는 빨치산 3명을 포착하여 그 중 1명을 사살하였다. 나머지 2명은 도주하였는데, 그 2명 중 1명이 바로 이현상이었다.
공식적인 이현상의 최후는 이렇지만, 후술된 의문사항이 제기되었다.

2.4.1. 죽음의 미스테리


당시 상황에 따르면, 정확히는 18일 경찰 수색대에서 총 맞고 죽은 늙은 공비의 시신을 찾았는데 그가 이현상이었다. 왜 경찰의 전투상보를 의심하냐면 일단 이현상을 사살했다는 대공로를 세운 경찰이 누군지부터 안 밝히고 있다. 교전시간도 3분이라고 되어 있는데, 경험상 매복전은 5초~10초를 넘지 않는다는 점을 들어, 이태는 경찰측 전투 상보를 "신빙성이 희박한 글짓기의 냄새가 짙어진다."라고 하였다.
백선엽의 증언록인 <실록 지리산>에서는 "전투 상보가 흔히 보고용으로 사후에 씌어진다는 점에서 이 기록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렵다. 오히려 당시 서전사 2연대장 차일혁씨가 남긴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남아있는 이현상의 사살 경과가 훨씬 더 생생해 보인다."라고 하였다.
어쨌건 이현상은 1953년 9월 18일 11시 지리산 빗점골에서 총상을 입은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김용식은 일단 시신에서 목을 가져갈 생각으로 목에 총을 8발 쐈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김은석과 김진영을 통해 시신이 이현상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다. 줄이 선 미제 사지 군복바지와 군용 농구화를 착용하고 있었고, 일기, 수첩, 가래(호두와 비슷함. 호두처럼 손아귀 힘을 증진시킬때 사용), 염주가 주머니에서 나왔다.
그날 오후에는 근처를 배회하던 김지회 부대원 5명이 토벌대를 보고는 자살하려는 듯이 덤덤히 다가오다가 몰살되었다. 아마도 참변 소식을 듣고 이현상의 시신을 찾으러 왔다가 절망상태에 빠져 저항할 생각도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같은날 같은 곳에서 다른 경로를 통해 이현상에 대한 정보를 얻고 작전한 5사단 56연대 수색대[6]에서 자신들이 전날인 17일 밤에 이현상을 사살하였다고 주장하며 나섰다. 실은 공비 몇 명과 교전하여 다른 시체들은 가져갔으나, 늙은 공비의 시체는 한 대원이 권총이 탐이 나 권총만 가져가고 시체는 그대로 두고 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증거로 간부들의 상징인 권총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권총이 좀 특징 있는 장식이 붙어 있어, 빨치산 생포자들이 틀림없는 이현상의 권총이라고 확신하였다. 이태도 군 수색대가 갖고 있다는 권총만은 확실히 이현상 것이 맞다고 하였다.
남부지구 경비사령부의 '전투 상보' 가운데 '무용담'편을 보자. 56연대의 수색대원이자 민간인 신분이였던 오동식은, 그 전 계급인 1등 상사에 맞추어 오상사라고 불렸다. 그가 이끄는 매복조가 9월 15일[7] 빗점골에서 이현상과 정면 조우하여 사살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상사가 공비 한 명을 발견하고 "손 들엇!"하고 외치자 그 공비는 "국군이냐, 경찰이냐?"고 물었다. 오상사가 국군이라고 대답하자 "장교를 불러라. 협상할 일이 있다."고 말하며 권총을 빼들고 다가왔다. 결국 그 공비는 권총을 버리라는 말에 불응하여 오상사가 카빈총으로 사살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전과보고를 위해 목을 자르려고 했는데 대검이 없어서 권총만 수습해왔다고 되어 있다.
이는 서전사(경찰)와 남경사(군인)의 공로 다툼에서 급기야 내무부와 국방부의 갈등으로까지 번졌다. 이후 내무부, 국방부 합동 조사단까지 내려와 1953년 12월 1일 남원에서 '군경합동관계당국자회의'까지 열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경찰의 공로로 결론 지었다. 이에 내무부 장관, 김장흥 치안국장, 김종원 사령관이 태극 무공훈장. 김억순 작전과장이 금성충무무공훈장, 차일혁 2연대장은 금성화랑무공훈장, 김용식 2연대 수색대장은 은성화랑 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단일 작전으로 태극무공훈장이 3개나 나온 유일무이한 사건이었으니 얼마나 대한민국 정부가 이현상의 사살을 중요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김용식 경사는 이후 경정까지 진급하였지만 빨치산 출신이라는 것이 걸림돌이 되어 한직에만 머물다가 퇴직하였다.
군부대에서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오 상사는 1953년 12월 25일 을지무공훈장, 1954년 2월 27일에는 을지은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남경사 유격대 해체와 함께 귀향하였다.
사건 당사자인 차일혁 총경은 국군의 주장대로 권총을 소지했다는 것은 거물급이라는 뜻인데, 거물의 시체를 나두고 왔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면서 다음과 같이 자서전에 써놓았다. "나는 우리 수색대가 이현상을 죽이지 않았다면, 누가 그를 죽였을까 하는 의문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현상의 사살에 대해 여러가지로 추측하던 나는 빨치산 내부에서 이현상을 죽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8]
이태가 마을 사람에게 들은 목격담에 의하면 56연대 수색대가 17일 넓적자리에 총을 맞아 옷을 빨고 있던 내의바람 혹은 팬티만 입고 있는 늙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우리 얘기 좀 하자. 우선 목이 마르니 물을 좀 주고 짧은 총 찬 사람을 불러와라"라고 했으나 귀찮아서 그냥 사살(...) 해버렸다고 한다. 목을 베어 올려고 했는데 잘 안 되어서 그냥 옆에 있던 시신의 목을 베어 내려왔다. 그런데 마침 17일이 군과 경찰의 임무교대일이라 2연대 618부대[9]가 올라오는 중이었다. 그 때 경찰들이 군수색대원에게 술을 퍼먹여 매수한 후(...) 베어온 목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김은석과 김진영에 의해) 목의 주인이 이현상의 보좌관인 것을 알게 된 경찰은 즉시 산으로 올라가 다음날 18일 이현상의 시체를 찾아 자신들이 사살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일단 양쪽의 상황을 짜맞춰보면 하나의 이야기는 완성된다. 목격담이 서로 다르고, 날짜나 부대가 경찰의 전투상보와도 약간씩 어긋나는 점 때문에 이태는 "많은 모순점이 발견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옷을 벗고 있다는 점은 자살의 가능성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예측한다.
그런데 북한의 혁명열사능의 이현상비에는 사망날짜가 9월 17일로 되어 있다. 남한의 신문에는 9월 18일로 발표되었는데 도무지 17일이라고 할 이유가 없다. 군의 17일 사살설은 내부적인 주장일 뿐으로 공표된 것이 아니라 북한이 알 방법이 없다.
그러나 결정적인 증언은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에 나와 있다. 당시 작전 지휘관인 차일혁 총경은 군부대가 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 수색대장 김용식의 설명도 의심하고 있었다. 이에 모든 상황이 종료된 후 김용식 수색대장에게 이제 다 끝났으니 사실대로 말하라고 한다. 그러자 김용식은 18일 새벽 매복중 공비 3명과 교전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도주하였고 날이 밝으면서 늙은 공비의 시신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정확히 등뒤에서 가슴을 관통한 총상 한발만 있었을 뿐이었고, 확인 사격을 몇발 가했다. 그때가 11시경이였다. 이후 김은석 등이 이현상의 시체임을 확인하고 '선생님'하고 흐느끼며 거수경례를 했다는 것이다.
정확히 누가 사살한지 모른다는 것과, 어떻게 이현상의 권총이 군 토벌대 측에 들어갔는지를 설명 못할 뿐이지 당시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증언이었다. 앞서 경찰의 전투상보와 군토벌대측 주장과 달리 논리적으로 전혀 모순이 없다.
이에 이태는 그의 후속작인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아마도 북의 은밀한 지령을 받았을 X가 이현상에게 호송원 2명을 붙여준 것 같다. 호송원 1은 이동 중 이현상을 등 뒤에서 저격하여 죽이고 증거로 권총을 챙겼다. 그런데 이동 중 호송원1은 권총을 챙긴 채로 군 수색대에게 걸려 사살되었고 호송원 2는 그대로 도망갔다는 것이다. 이에 군 수색대는 호송원1의 시신을 이현상으로 알고 그의 목과 권총을 챙겨 환성을 지르며 내려갔다.(마을 주민들이 목격한 장면) 그리고 군경이 상호 작전지역 교대를 하여 올라온 경찰의 수색대가 18일 이현상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도주한 호송원2는 사살경위를 X에게 보고하고, X는 이를 다시 (아마도 일본을 경유하여) 북한에게 보고하여, 북한의 혁명열사능에는 이를 바탕으로 9월 17일이라고 기재하게 되었다." 이는 이태가 경찰과 군의 주장에 김용식의 결정적 증언을 모두 짬뽕하여 만든 하나의 시나리오인데 논리적으로 너무 완벽하여 도무지 헛점이 없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시나리오일 뿐으로, 정설은 경찰이 9월 18일에 사살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1990년대 말 SBS토요미스테리 극장의 한 에피소드는 이현상이 북한의 공작원에 의해 사살되었다는 내용을 방영하였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할머니가 북한에서 이현상을 죽이라는 지시를 받고 내려온 공작원을 목격했다고 제보한 것이다. 영상링크
아직까지도 그가 살아서 북으로 건너갔다는 말이 있다. 어떤 곳에서는 죽은 줄 알았던 이현상이 초췌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물을 얻어 마시고 다시 종적을 감췄다는 소문도 나돌 정도.
시신은 방부처리 후 서울로 이송되어 "공비 두목의 죽음"으로 창경원에서 20일간 전시되기도 했다. 당시 좌익계열 인사 가족들은 엄청난 불이익 정도가 아니라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시신을 인수하려고 하지 않았다.한민족의 비극 - 남부군 이현상, 토벌대장 차일혁
이후 이현상을 쫓던 경찰측 토벌대장 차일혁 총경이 화장 후 그의 화이바에 백골을 빻아서 강물에 뿌려주고 하늘에 권총으로 예포 3발을 쏘며 정중히 장례를 치뤄주었다. 이때문에 군토벌대 측에서는 차일혁 총경이 증거를 인멸하려 한다고 비난하였고, 경찰 측에서는 어떻게 빨치산의 장례식을 치뤄줄수 있냐며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손가락질 하였다.
97년에 출판된 최화수의 <지리산 반세기>에서는 이현상을 사살했다고 알려진... 또는 그렇게 주장하는 오동식 상사를 40년만에 극적으로 만나 인터뷰 하였다. 당시 그는 사단법인 '대한무공수훈자회 부산시 남구지회 고문'으로 있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오 상사는 1953년 9월 15일 작전 당시 6명으로 구성된 '벼락대' 대장으로 있었다. 15일 매복중 15명의 국군 복장을 한 빨치산이 나타났다. 이들은 오 상사 일행과 3미터 지점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서로를 알아채고 총격전을 벌였다. 15분 쯤 뒤에 총성이 멎었고 빨치산은 한 명만 쓰러져 있었다. 이때 최점만 대원이 도망가는 빨치산 한 명을 목격하였다. 오상사가 쫒아가서 바위 뒷편에 웅크린 그에게 "손 들엇!"하고 외쳤다. 이에 팔자수염의 빨치산은 의외로 늠름한 태도로 천천히 고개를 들어 "국군이냐, 경찰이냐?"하고 물었다. "국군이다."라는 대답을 듣자 "좋다. 그럼 이야기를 좀 하자."라고 말하면서 권총을 들고 다가섰다. 계속 버리라는 말에 듣지 않자 빵~
두 명의 빨치산을 사살하기는 했지만, 도망간 나머지 빨치산들이 돌아올까봐 급하게 돌아가기로 했다. 장비지급이 신통찮아 대검이 없어 최점만 대원이 총으로 쏴서 목을 자르기로 했다. 그러나 "총알을 디립다 갈기다 보니 턱에도 맞고, 수염에도 맞아 뒤집혀지는 게 하도 끔찍하여 수염 달린 놈의 목은 그만 포기해 버렸습니다."라며 빨치산 목 1개만 들고 나타났다. 이에 오 상사는 초조한 마음에 그냥 빨치산 목 1개에 권총을 노획하고 후퇴한다.
돌아오는 길에 너무 기뻐 콧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추다가 신흥부락 쪽에서 경찰 대원들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해준다.(이에 경찰 2연대는 "역시 그랬었구나"라고 하며 빨치산 귀순병을 대동하고 즉시 현장으로 출동한다.) 구례군에 설치된 본부로 돌아오자 안진기 수색대장은 "이놈이 임존환이다. 빨치산 잔당 중에서 주요 간부 놈이다."라고 크게 기뻐하였다. 그런데 이 전과보고를 하던 통신병이 경찰의 무전을 감청(...)하다가 이상 한 것을 듣는다. "오 상사님, 서전사 2연대가 빗점골에서 이현상을 잡았다고 야단들인데요?", "...?"
그러자 남경사의 장교들이 유격대 본부로 달려와 오 상사에게 왜 전공을 빼았겼냐고 구둣발길 세례를 퍼부었다. 뒤늦게 조사차 안진기 수색대장과 오 상사가 경찰병원으로 가서 막는 것을 억지로 밀고 나가 시신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분명히 오 상사가 사살한 팔자수염의 공비였다.[10]

2.5. 사후 북한에서


북한에서 '빨치산'이라 함은 대부분 김일성의 빨치산 활동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해방과 한국전쟁 휴전 사이의 남부 빨치산 활동을 완전 부정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전쟁 당시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은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 빨치산 가운데 유일하게 이현상은 북한의 평양근교 혁명열사릉에 가묘가 만들어져있다. 애국열사릉에도 제주도 인민유격대 출신 김달삼 등 월북자들의 묘가 있기 때문에 북한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숙청당하지 않은 그의 가묘가 북한의 국립묘지에 있는 것은 이상하다고는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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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현상동지

남조선혁명가

1905년 9월 27일생

1953년 9월 17일 전사

라고 묘비에는 씌어 있다.
또한 평양 조국해방승리기념탑 비문 중 '적후 인민유격대원들의 투쟁'편에서 이현상과 빨치산들의 조각 군상이 있으며 평양 조선혁명박물관에 이현상의 사진까지 전시되어 있다.
남로당 계열 주요 간부들은 박헌영부터 리승엽과 임화까지 대부분 숙청되었는데 이현상의 경우에는 남로당 계열 주요 간부임에도 불구하고 숙청되지 않았다. 아마도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하다가 전사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남로당 계열 출신 주요 간부기 때문에 북한에 있었다면 숙청의 화마를 피하기 힘들었겠지만 이현상은 북한으로 피신하지 못하고 죽었다. 어쨌든 북한 정부는 다른 남로당 계열 주요 간부와 달리 그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혁명열사릉에 그의 가묘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는 그의 유족들을 우대했다.
남로당 계열이라고 하더라도 말단 간부나 평당원까지 철두철미하게 숙청한 것은 아니다. 심지어 숙청됐다고 하더라도 다 사형당하거나 수용소, 교화소에 수감되는 것이 아니라 공직을 박탈당하거나 한직으로 좌천되는 등 상대적으로 가벼운 탄압을 받은 사람도 많다. 남로당 계열 출신 월북 당원이 만 명 단위일 정도로 많기 때문에 당적 박탈에 그치거나 한직으로 밀려났지만 당적을 유지한 남로당 계열 출신도 적지 않다고 한다.

2.6. 이현상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


학살 항목에 이걸 근거로 한 내용이 일시적으로 작성된 적이 있다. 그러나 이현상은 14연대 반란 당시 그 장소에 없었다. 만약 이현상이 한 것이면 지령에 의한 것일 것.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니다.
백선엽은

여순반란사건은 결코 남로당 중앙의 지령에 의한 것이 아니다. 4.3과 마찬가지로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이었다."[11]

당 말단에서 빚어진 자의적인 행동 이라고 증언하고 있다.

2.7. 유족


어머니 원주 김씨는 “우리 현상이 죽지 않았다.”며 아들을 기다리다 지난 1975년 90살을 일기로 생을 마쳤고, 일부 조카들만이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살고 있다.
부인 경주 최씨와의 사이에 1남 3녀가 있는데 625 전후로 모두 월북했다. 외아들 이극은 모스크바 유학을 다녀온 후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를 지냈고 정년퇴직후에 인민대학습당의 국제도서교환처장으로 일했다. 맏딸 무영은 중앙당학교를 졸업하고 조선인민군 정치부와 노동당에서 일했다. 둘째 딸 문영은 만경대 혁명학원을 졸업하고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에서 일했다. 막내딸 이상진은 북한에서 여성 최초로 일등서기관이 되었다.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 방문 당시 평양의 만수대의사당 부총장으로서 안내를 맡기도 하였다. 이상진(1941년생)씨는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의 동급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이현상 부대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지리산에서 내려와 낙동강 전선으로 이동했는데, 이때 하수복이라는 간호사가 합류 했었다. 그녀는 3년간 남부군 사령부 의무요원으로 있었다. 대략 53년초 남부군이 수십명 밖에 안남고 지리멸멸한 단계때 둘은 본격적으로 가까워 졌고 육체 관계까지 맺었다. 그녀는 당시 이현상의 딸뻘 나이인 23세였다. 하수복은 1953년 여름께 산에서 내려와 수용소에 갇혔다가 얼마 안 있어 풀려났다. 이어 바로 아들을 낳았다고 하는데 이 아들이 이현상의 자식이며 현재 부산지역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수복과 아들은 자신들과 이현상과의 관계를 극구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그녀는 1989년초 그동안 청주보안감호소에 줄곧 수감돼 있다가 76세의 나이로 병사한 경남도당 부위원장 김삼홍의 장례식에 조문하러 찾아온 적이 있다.

3. 극화 속에서


1987년부터 나름 극화된 캐릭터인데 의외로 많은 배우들이 맡았다.
1. 이순재(KBS 대하드라마 지리산) : 원작의 초월 캐릭터이다. 원작은 이념에 맹종하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안습 캐릭터인데. 여기서는 말 그대로 카리스마 있는 역사의 한 인물, 이순재 초기 필모에 반공영화가 많은데도 이런 공산주의자 연기도 꽤 잘한다.
2. 김병기(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 : 과거 지금 평양에선에서 김정일 역을 맛깔나게 소화한 김병기씨가 맡았다. 해방전에 지리산에 은거해서 대광당 투쟁을 하는 캐릭터, 어른의 사정으로 드라마가 조기 종영하는 바람에 사라졌다.(...)
3. 신구(악극 눈물의 여왕) : 주요 조역이지만 거의 독립군 레빌
4. (영화 "남부군") : 빨치산들이 집단 목욕하는 장면에서 손만 나와서 흔들어준다... 이때 손 연기는 감독인 정지영이 직접 했다고 한다.
5. 야인시대 : 김두삼. 2기 초반에 유진산에게 돈을 빌려 동지들에게 활동자금으로 주는 장면으로 등장한다. 거의 엑스트라급이다. 김두삼씨는 1인2역을 하여, 나중에는 임화수를 심문하는 형사[12]로 전직(전향?)했다.

4. 같이보기


[1]충청남도 금산군. 그 당시에는 전라북도 소속으로, 금산군이 충남으로 편입된 건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실향민 출신이자 군사쿠데타 세력이였던 길재호의 입김으로 인해 이현상이 죽고나서 10년이 지난 1963년의 일이다.[2] 셋째 형은 6.25 뒤 행방불명되었다.[3] 차길진, 차일혁의 수기 (빨치산 토벌대장), 후아이엠, 2011, 3장 부분에 수록된 차일혁 총경의 수기 참고[4] 안재성, 이현상 평전, 실천문학사, 2007, 제 2부 반란의 밤 이후 부분 참고[5] 남부군을 쓴 이태는, 북측의 지령은 대부분 공작원이 도보로 가져왔다고 한다.[6] 수색대장인 안진구 소좌를 포함 전원 귀순 공비로 구성된 군인판 사찰유격대.[7] 오상사의 증언으로는 경찰 2연대가 이미 사살돼 있던 시체를 수색하는데 날짜를 소요했고, 자신들의 전공으로 조작하는 과정에서 18일로 조정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7일 군경간에 작전지역 교대이기 때문에 17일 이후에 사살해야 경찰 공로로 인정 받을 수 있었다.[8] 차일혁의 책에는 노획한 이현상의 진짜 권총은 차일혁이 따로 챙겨 놓았다고 나와 있지만, 아무런 증거 없이 너무 작위적이라 집필자인 아들이 추가로 가필해놓은 것이 아닌가 싶다. 이 부분은 이후 나온 각종 책에서 언급조차 안 하고 있다.[9] 2연대의 수색대와는 다른 또다른 사찰유격대[10] 이상과 같은 인터뷰를 책에 기재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최화수는 북한의 혁명열사능에 사망일이 9월 17일로 기재된 것, 이태가 <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이현상>에 쓴 것과,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의 내용 등을 종합해 볼 때 북한 밀사의 지령을 받은 호송원이 이현상을 죽였을 가능성에 좀 더 비중을 두었다. 정확한 것은 미스테리라는 말과 함께.[11]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157쪽[12] 김희갑 폭행사건 관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