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만식
'''북녘과 내 고향 동포들이 그자의 통치하에 억압받고 고통받고 있는데 나 혼자 좋게 살라고 남쪽으로 내려갈 수는 없다. 나는 이곳에 남아 동포들과 운명을 같이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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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 시민 사회 단체인, 정치인이다. 아호는 고당(古堂), 본관은 창녕(昌寧).
2. 생애
2.1. 구한말
1882년 12월 24일(양력 1883년 2월 1일) 평안남도 평양부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내동(현 평안남도 대동군 가장리)에서 창녕 조씨 가문의 선비인 조경학(曺景學)과 경주 김씨 가문의 김경건(金敬虔) 사이의 1남 2녀 중 독자로 태어났다. 그에게는 5살 연상의 누이 조보패와 5살 아래의 여동생 조은식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반일리 내동은 창녕 조씨의 집성촌으로 조씨 선비들이 오랫동안 살아왔으나 살림살이는 대체로 빈궁했다. 그러나 부친인 조경학 대의 가세는 '벼 백섬'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비교적 풍족한 살림살이였으므로 그는 어려서부터 교육을 받았다.
1888년 7살 때 평양의 관후리에 살던 한학자 장정봉(張正鳳)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이때 같이 공부했던 학생들 중에 한정교(韓楨敎)가 있었다. 한정교는 조만식이 기독교에 입교하는데 큰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 시기에 조만식은 서양 선교사를 처음 목격했다. 그는 훗날 선교사를 처음 만났을 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는 이 시기 기독교에 별 관심을 가지지 못했고 그저 서양 선교사가 전해준 전도 책자를 통해 막연히 알고만 있었다. 1896년 15살 때 한문 수학을 마친 뒤 1897년 평양 성내 상점에서 일하며 장사를 배웠다. 1902년 전주 이씨 가문의 이의식과 결혼하여 2남 2녀를 낳았다. 그는 처음에는 포물상을 운영하다 후에 지물상으로 업종을 바꾸고 한정교와 동업했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 매일 술로 세월을 보냈다. 놀기 잘하고 활달한 성격을 가진 청년으로 상점가에서 대주가(大酒家)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그렇게 8년간 술과 담배에 찌들었던 삶을 살았고 전 재산을 잃어버렸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상업을 그만두고 3월 13일 가족을 따라 대동강 중류 배기섬으로 피난했다.서양인을 처음 보던 감상은, 아이 때의 일이 되며 잘 생각되지 아니하니 기억에 남아있는 몇 가지만 말씀하면 이러합니다. 내가 서양인을 처음으로 보기는 한 열 한두 살 되었을 때, 즉 임진년인가 계사년인가 생각되며, 보았던 곳은 대동문 한 술막골 한석진 목사 댁이었던 것 같습니다. 한 목사의 맏 자제 고 민제. 아명 갑손이라는 나의 글동무였습니다.
이 집에 서양인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늘 놀 겸 구경 겸 자주 가서 서양인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서양인이 아니고 '양귀자(洋鬼子)'였지요. 이 양귀자는 마포삼엽 목사였는지, 혹 다른 목사였는지 그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시커먼 옷, 커다란 키, 노란 눈, 높은 코, 참말로 모든 것이 무섭기보다 놀랍고 이상스러운 눈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다가 그때 일반 사람들은 말하기를 이 양귀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약을 먹여서 미치게 하는데, 약 먹이는 방법은 몰래 얼른 입에다 슬쩍 스치기만 하면 곧 미쳐서 양귀자가 하라는 대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때마다 양귀자 냄새나는 책자를 늘 줍디다. 지금 생각하니 이 책자는 한문으로 번역하면 인쇄한 쪽복음, 즉 마태복음 누가복음 기타 부속서류인 인가귀도 임혜입문 등과 같은 조그만한 전도서류였습니다.
양지 냄새와 인쇄 묵 냄새들이 그렇게 변하여 양귀자 냄새로 되었던 것인데, 그 냄새가 역시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인가 하여 좀 맡아보고는 내어버리던 것이 어제와 같은데, 별써 40여 년전 호랑이 담배 먹던 옛날 묵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서양인 처음 보던 인상", <신동아>, 1934년 6월.
이후 한정교의 전도를 받아들여 기독교에 입교한 그는 금주와 금연을 실천했고 1905년 23세의 나이로 평양의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고당기념사업회에 따르면 숭실학교 설립자이자 선교사 베어드는 그의 외양이 주정뱅이 같아 보여서 "공부는 무엇하려고 하겠냐"며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밝혔지만 조만식이 "공부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겠소."라고 하자 감격하며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학업에 재미를 느껴 방학 때도 놀지 않고 처진 학업을 보충하는 등 열성적으로 공부했다. 그 결과 본래 5년 동안 다녀야 할 학교를 3년만에 졸업했다. 이때 그는 서양의 학문을 익히면서 개화 사상에 눈을 떴고 민족 의식도 숙지했다. 숭실학교 졸업 후 1908년 일본 도쿄로 유학가서 세이소쿠 영어 학교에 입학해 약 3년간 영어를 공부했다. 이때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의 자서전을 읽고 그가 내세우는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매료되었다.
2.2. 일제강점기
1910년 메이지대학 법학부에 입학한 뒤 백남훈, 김정식과 함께 장로교, 감리교 연합회 조선인 교회를 설립했다. 도쿄 YMCA 회관에서 예배를 드렸으며 참석인원은 약 40명 정도였다. 교회의 조직은 평양 출신의 장로교 목사 한석진이 담임 목사를 맡았고 영수(領袖)에 조만식, 김정식, 오순형 등이 있었으며 집사에는 백남훈 등으로 구성되었다. 신도들 중 감리교인 홍모[4] 를 빼고는 모두가 장로교인이었다. 처음에는 연합 교회 운영은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감리교인이 증가하면서 연합 교회는 분열의 조짐이 일었다. 이에 조만식은 분열을 막기 위해 백남훈에게 건의했다.
백남훈은 이에 동의했고 두 사람은 분열을 수습하기 위해 노력한 끝에 장감연합교회를 조직했다. 이 교회의 목사는 1년씩 교대로 장로교와 감리교 본부에서 파견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장로교 측에서 박종순 목사가 맡았고 다음 해부터 감리교와 장로교가 교대로 목사를 파견했다. 조만식은 유학생 친목회를 이끌던 김성수, 송진우, 현상윤 등과 함께 항일 동지 규합에 힘썼다. 그런데 송진우가 호남 유학생만의 다화회를 조직하자 유학생 친목회는 분열의 조짐이 일었다. 이에 조만식은 송진우와 김성수에게 "고향을 묻지 말고 국권 회복을 위해 인화 단결하자"라고 하여 지방색을 배제하고자 했다. 그는 이후에도 민족 운동에 있어 지방색을 초월한 민족적 단결을 중요시했다."감리교인과 장로교인이 한 건물 안에서 따로 예배를 보게 된 판이니 문제가 심상치 않구려. 이는 교파 문제라기보다도 일본인이나 다른 외국인에게 체면이 안 서는 일이라고 보오. 가뜩이나 우리 한민족이 국난을 당하고 있는 이때 그것도 본바닥 일본에서 이러한 일로 민족 분열의 인상을 주게 되니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우리가 긴급 대책을 세워 통합해보도록 합시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조만식은 이승훈이 세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로 부임했으며 1915년 5월 오산학교 교장이 되었다. 그는 봉급도 받지 않고 무료로 봉사했으며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기거하며 모범을 보였기에 학생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조만식은 강직하면서도 제자와 동지들에게 지극히 관대하고 온유했으며 신행일치(信行一致)를 언제나 따랐다. 제자들의 감정과 심리를 꿰뚫어보고 적절한 위로와 고무를 통해 각자의 개성에 맞게 키웠다. 이러한 그의 문하에서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등 여러 인재들이 배출되었다.
3.1 운동이 발발하기 직전인 1919년 2월 27일 조만식은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고 이승훈의 권유를 받아들여 도인권(都寅權)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하려 했다. 그가 어떠한 이유에서 상하이로 가려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하이에서 애국지사들과 만나서 장차 있을 독립 만세 시위 이후 새 정부를 수립하는데 함께 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강동에서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2년간 수감되었다. 출옥 후 일제 헌병대에 의해 불태워진 오산학교를 다시 지었으나 일제의 간섭을 견디지 못하고 사임했다. 1921년 3월 21일 평양의 YMCA 총무로 취임했으며 그는 먼저 상담을 통해 민중을 돕는 일을 했다. 그를 찾아오는 이들은 다양했는데 억울한 일을 호소하러 온 이, 입학 시험에 낙제한 학생의 부형, 낙제한 학생을 염려하는 학생의 부형, 지방에서 처음으로 평양에 오는 사람, 수년 전에 이혼한 아내 때문에 찾아온 노동자도 있었다. 그는 이들과 반드시 악수하고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총무직이 갖는 다양한 활동 영역을 활용하여 민족운동에 헌신할 수 있는 중요한 발판으로 삼았다. 조만식의 대표적인 민족 운동은 물산장려운동이었다. 그는 1920년 50여 명의 기독교인을 모아 '조선물산장려회'를 조직했고 1920년 7월 30일 오후 9시 야소교서원 상층에서 발기 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에서 임시회장으로 그가 선임되었고 회칙기초위원으로 정세붕, 김동원, 김정숙 세 사람을 선출했다. 창립총회는 8월 23일 오후 8시에 개최하기로 하고 11시에 폐회했다. 그러나 창립총회는 예정대로 개최되지 못했고 취지서 및 발기인 명단만이 발표되었다. 이는 일제가 집회를 개최하는 걸 불허했기 때문이다. 이후 1922년 평양의 자본가들이 장대현교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를 다시 발족하여 토산품 장려 운동을 전개했다. 이 운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25개의 지회와 3,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는 전국적인 물산장려운동으로 발전했다. 1922년 12월 31일 장대현교회에서 장로가 된 조만식은 여기에 적극 참여했다. 1923년 YMCA를 중심으로 장감연합저축조합을 조직하여 3,000여 명의 조합원을 모집했으며 3년간 15,000원의 자금을 모아서 양말 공장을 설립하는 등 조선의 상품을 장려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3년 서울 YMCA에서 이상재, 송진우, 김성수 등과 함께 '민립대학기성회'를 결성한 그는 100여 개소의 지방부를 조직하고 1천만원의 대학 기금을 목표로 전국적인 순회 강연회를 개최하여 모금 운동을 전개했으며 민립대학기성회 중앙위원으로서 관서 지방 일대를 책임졌다. 그러나 모금 운동은 거듭된 홍수와 흉작 등 자연재해로 인해 실적이 부진했다. 특히 경성제국대학 이외 어떠한 대학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조선총독부의 기본 방침 때문에 민립대학설립운동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YMCA 총무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민립대학설립운동을 이어갔다.
오산학교 교장에 다시 취임하고 숭인상업학교 이사장을 겸임해 한인 학생 교육에 힘썼으며 숭인중학교 교장을 맡았다가 1926년 일제의 강압으로 사임했다. 이후 전국 YMCA 제1회 하령회(1927)부터 제3회(1929)에 이르기까지 강사로 참여했다. 하령회에서 강연한 내용은 YMCA 연합회 기관지인 <청년(靑年)>지에 게재되었다. 1927년 9월 청년지에서 그는 '기독교와 실생활'이라는 주제로 글을 실었다. 이 글은 1927년 8월 24일 열린 남녀학생연합 하령회에서 연설한 글을 옮긴 것이었다. 조만식은 10여 년 전에 수입된 기독교의 역할을 말하며 기독교가 역사의 중심에 있는데 조선 사회에서는 잠자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잠자고 있는 기독교를 우리의 실생활에 접목시켜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주인으로 우뚝서기를 바랬다. 특히 양복을 입는 허례허식을 책망하고 검역 실행을 강조했으며 고등 교육을 강조했다.
조만식은 대중적인 집회 장소를 설립하는 데에도 앞장섰다. 그가 평양에서 활동할 당시 평양에는 대중적인 집회 장소가 없었다. 그러던 중 평양의 갑부 중 1명인 백선행(白善行)이라는 여인이 환갑의 나이에 그를 찾아와 사회에 뜻있는 일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조만식은 평양의 유지들과 상의하여 공회당 설립 계획을 세우고 백선행이 기부한 거금 20만원으로 1926년 평양 시내 중심지에 500여 평의 토지를 구입하여 백선행 기념관이라는 이름의 공회당을 건립했다. 백선행 기념관은 현대식 건물로서 평양의 명물이 되었고 한인의 크고 작은 옥내 집회가 개최되면서 평양에 거주하는 이들의 문화센터가 되었다. 1931년 조만식은 독지가 김인정이 기부한 거금 10만원으로 3층 벽돌 건물인 인정도서관을 건립했다. 인정도서관은 열람실, 사물실, 집회용 소강당을 갖췄고 백선행 기념관과 쌍벽을 이루는 문화센터였다.
조만식은 농촌진흥운동도 추진했다. 그는 농촌 진흥을 위한 구체적인 운동으로서 덴마크의 '국민고등학원'과 같은 농촌 지도자 양성 기관을 설립하고 모범 농촌을 건설해야 한다고 봤다. 모범 농촌의 주요 사업 과제로서 소비조합, 저축조합 등 조합을 만들고 농사를 개량하며 목축, 원예, 수공업 등 농촌 부업을 장려하고 문자 보급을 위한 야학, 강습소 등의 설치를 제시했다. 1933년 신설된 장로회총회 농촌부 상설 기관에 참여하여 장로회 후기 농촌 운동을 주도했다.
1927년 신간회에 참여하여 활동했으며 1930년 관서체육회 회장을 맡아서 1935년 6월 조선총독부가 축구통제령을 실시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동아일보에 이를 반대하는 성명서를 게재하고 학무국에 반대 각서를 제출했다.[5] 1932년 조선일보사 사장으로 추대되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보도를 중점으로 뒀으며 1936년 을지문덕장군수보회를 설립했다.
1935년 12월 18일 부인 이의식과 사별한 뒤 1937년 봄 개성 호수돈여자고등학교 기숙사 사감을 지내고 있던 전선애와 결혼했다. 1936년 산정현교회의 목사가 공석이 되자 자신이 대신 목사 일을 맡다가 제자 주기철에게 부탁하여 산정현교회의 목사로 부임하게 했다. 이 무렵 안창호가 체포되어 국내로 송환되자 여운형과 함께 그를 찾아가 면담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뒤 경성으로 이송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20여 일만에 증거 불충분으로 방면되었다. 이후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고 야인으로 살던 그는 1943년 지원병 제도 실시 후 협조를 청하러 온 조선군 사령관 아타카기와의 면담을 거절했다가 구금되어 며칠간 고초를 겪었다.
1943년 11월 16일 매일신보에 조만식의 명의로 '학생들에게 일본의 전쟁에 지원할 것'을 공식적으로 독려하는 학병 권유문이 게재되었다. 하지만 친일 연구가이며 독립기념관장을 역임한 김삼웅 씨는 2002년 3월 1일자 <국민일보> 기사를 통해 조만식의 ‘학병 권유 논설’이 위서임을 밝혔다. 근거로는 그 무렵 매일신보 평양특파원으로 근무한 김진섭 씨가 <대한언론인 회보> 2000년 9일 1일자 ‘그때 그시절 – 녹취 한국언론사’에 밝힌 내용. 매일신보 고영한 지사장이 쓴 날조 기사임을 근거로 삼았다. 친일 연구가이며 <대한매일> 간부와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지낸 정운현 씨도 <대한매일> 2001년 10월 6일자 반론성 기사를 통해 매일신보의 조만식 선생 ‘학병 권유 논설’이 일제 매일신보 간부가 날조하였음이 당시 관계자들의 증언과 주장이라는 점에서 신뢰할만 하다고 논평했다.
이렇듯 일제강점기 말기에 조선인의 참전을 독려할 것을 강요받자 조만식은 압박을 피하기 위해 1945년 4월 평양을 떠나 고향인 강서군 반석면 안골로 들어갔다. 이후 평안남도지사 서고천(西古天)이 조만식 등 3~4명을 관사로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앞으로 시국이 달라질 테니 민중의 폭동 같은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협조해달라고 요청했다.
2.3. 해방 후
<조선 종전의 기록>에 따르면 평안남도 도청은 8월 12일 밤 종전 소식을 듣고 대책을 논의한 뒤 13일 아침에 조만식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비상 사태의 도정에 적극 협력을 요청했다. 이후 8월 15일 평양에서 아들 조연명으로부터 일본 천황이 항복 성명을 발표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는 방송의 내용을 몇 가지 묻고서 여느 때처럼 뒷산으로 산책을 나가 저녁 때까지 내려오지 않았다. 아내 전선애의 회고 <그 어른, 조선생님을 기다린 50년>에 따르면 그는 저녁에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후 김항복이 찾아와 "아무래도 이북에서는 고당께서 주인이니 업무를 인수해달라"는 도지사의 말을 전달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일본 지사가 타던 차를 내가 탈 수 있겠는가? 조만식이를 그렇게 밖에 보지 않았느냐"고 나무라며 "나는 인수받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뒤 김항복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결국 김항복은 민족주의자 오윤선을 설득해 평양으로 모셨고 오윤선은 '평안남도 치안유지위원회'를 결성했다. 하지만 오윤선은 자신이 단독으로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겼고 8월 16일 오전 라디오를 통해 안재홍이 건국 담화를 발표하면서 조급감에 빠졌다. 이에 그는 김항복과 김동원에게 자신의 친서를 가지고 조만식을 다시 찾아가라고 했다. 오윤서의 친서 내용은 "이 기회에 선생의 지도를 바라는 민중의 기대가 간절하니 이 여망을 버리지 마시오."라는 것이었다."일본은 결국 끝이 났는데, 잘만 하면 우리 민족에게도 앞으로 꽃이 만발할 장면이 다가오긴 할 거야."
8월 17일 새벽 2시 오윤선의 집에 도착한 조만식은 그날 오전부터 상황 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먼저 조선총독부 평남도청에서 나온 고위 관료 농상부장과 산업과장을 만나 일본인과 마찰을 피할 것, 물자와 서류를 잘 보관할 것, 일상 업무를 지속할 것을 지시했다. 이후 오전 11시에 자신의 동료들과 모여서 건국 방안에 대해 상의했다. 이때 모인 이는 조만식, 오윤선, 김병연, 한근조, 석창윤, 노진설, 장이욱, 이윤영, 지창규, 이주연 등이었다. 그들은 논의 끝에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를 결성하되 중앙 정권이 확립되고 중앙 정부가 수립되는대로 모든 권리와 사무를 무조건으로 이양하기로 결의했다.
조만식의 측근이었던 한근조에 따르면 당시 건국준비위원회를 이끌고 있던 여운형이 조만식에게 장거리 전화를 통해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조만식은 "충칭에 우리 정부가 있는데 새삼스럽게 건국준비위원회를 쓰는건 그리 좋은 것이 못되나, 명칭이야 어쨌든지 그것을 가지고 다툴게 무엇이겠나"라며 그의 뜻대로 '건국준비위원회'라는 명칭을 쓰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송진우의 측근 인사였던 김준연에 따르면 조만식은 8월 17일 오전 송진우에게 전화를 걸어 "지금 조만식, 오윤선, 김동원 세 사람이 모여서 전화를 한다. 그런데 평남지사로부터 시국 담당의 교섭이 있으니 어찌하면 좋은가?"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송진우는 "민중 대회를 열고 민중으로부터 권한을 받아야 하며 치안 유지 정도로 하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당시 조만식과 함께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한 이들은 정부를 실제로 조직하기 위한 모임이 아니라 치안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1945년 8월 18일 평양매일신문에 기재된 호외에서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성명을 발표했다.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는 백선행 기념관을 사무실로 삼고 조선총독부와 협의해 자신들의 임무를 치안에 국한시키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패전한 일본인에 대해서 관용을 베풀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건국준비위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서 간단하게 설명한다.(중략) 소련과 미-영군이 상륙하는 동시에 해외정부가 들어오게 되는 바, 이때에 치안유지는 주목적 사명으로 하려는 것으로, 건국준비위원회라니까 무슨 조각이나 하고 방금 정부가 되는 것 같이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을지 모르나 결코 그런 것이 아니고, 주로 치안유지를 목표로 하는 기관일 것이다.
또한 조선인 동포끼리 서로 가해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생각하면 과거 원통한 일도 많았지만, 지금은 과거의 구구한 일을 추궁할 때가 아니라 큰 일을 할 때이다. 만일 우리가 일본인에게 복수를 하면 일본에 가있는 7백만 동포를 어떻게 되겠는가? 아울러서 우리가 자기 땅에 있는 다른 동포를 해한다면 만주에 가 있는 2~3백만 우리 동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따라서 생명만이 아니고 신궁불각, 사원건물, 은행, 회사 및 점포, 선박, 교량 등 일반 시설에 관해서도 절대로 소각, 파괴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이는 일제강점기 친일 인사들에 대한 보복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뜻이 담긴 것이었다. 평양 주민들은 이러한 그의 뜻을 잘 따랐다. 8월 15일 저녁 일본 신사에서 불이 난 것을 제외하면 소련군이 진주할 때까지 평양에서 별다른 충돌이 벌어지지 않았고 일본인에 대한 폭행 시비, 물건 약탈 같은 일도 없었다. 일부 좌익 인사들은 친일파 청산을 내세우며 일본인의 재산을 약탈하고 친일파에게 처벌을 가할 것을 요구했지만 조만식은 끝까지 거부했다.가령 관공직 기타직에 있을 때, 단체적, 또는 개인적으로 쌓인 원한을 위 유사지시에 보복하겠다는 심리가 생기기 쉬우나, 전 동포가 힘을 합하여 손을 맞잡고 큰 일을 달성해야 하는 이 때에 동포가 서로 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되겠다. 자유와 광명이 스스로 우리에게 오는 때 무슨 까닭으로 그런 소소한 일에 매어 큰일을 잊어서 좋으랴.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좌익으로 치우치자 평양 건국준비위원회 내부에서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일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되기도 전인 8월 26일 오후 소련 극동군 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평양에 진주했다. 조만식은 사람들과 함께 평양역으로 가서 '해방군'으로서 환영했다. 소련군이 평양에 도착하면서 평양에는 대소란이 일어났는데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흡사 거지와 비슷한 행색이었고 여인들에 대한 겁탈과 시계를 비롯한 각종 약탈이 시작되었다. 조만식은 이러한 상황을 지켜보고 이때부터 소련에 대한 반감을 품었다.
치스차코프는 평양에 도착한 직후 철도호텔에서 조만식과 건국준비위원회 인사들, 평안남도 공산당 지부 인사들을 호텔로 초대했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소련군은 해방군인가? 아니면 점령군인가?"라고 물으면서 소련군의 행패를 항의했다. 치스차코프는 "나는 전투밖에 모르는 순수한 군인이니 정치 문제는 평양에 올 전문가 레베데프 장군에게 물어보라"며 29일 정식 회담을 하자고 밝혔다. 8월 29일 철도호텔에서 레베테프 장군, 치스차코프 장군, 로마넹코 장군, 건준 측 위원과 공산당원이 자리를 잡았다. 치스차코프는 건준 측을 향해 "이제부터는 도의 모든 행정에 있어서 공산당의 지도를 받으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이에 대해 건준 측은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응답하며 즉석에서 전원이 사의를 표명했다. 이에 치스차코프는 자신의 발언이 오해를 만들었다고 밝히면서 "공산당과 협력하라"고 내용을 수정했다. 레베테프는 조만식에게 치스차코프 대장이 정치를 잘 몰라서 시원한 대답을 하지 못한 것을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요청했다. 조만식은 그런 그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레베테프가 대답했다."소련군대가 온 목적이 무엇인가?"
이에 조만식이 말했다."소련군대는 조선 해방을 위해서 왔다. 영토 확장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 조선인민이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기를 바랄 뿐이다."
소련 측에서는 '인민위원회'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권했지만 건준 측에서는 '정치위원회'를 주장했다. 인민위원회는 공산당에서 사용하는 정치 조직 명칭으로 소련군이 동아시아에서 공산화를 이끌 때 인민위원회라는 기관을 사용했다. 따라서 인민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할 것을 권한 것은 공산 정권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였고 건준 측은 이를 잘 알고 반대했다. 하지만 소련군이 진주한 상황에서 계속 반대할 수는 없었기에 절충안으로 '인민정치위원회'를 사용하기로 했다. 이를 본따서 평안북도와 황해도는 인민정치위원회라는 명칭을 사용했으나 나중에는 모두 인민위원회로 통일되었다."기본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적이어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하며,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민족의 한을 자주 독립국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위해 종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존되어야 한다."[6]
소련군은 건준 측에게 공산당과 건준을 1:1의 구도로 해서 인민정치위원회를 조직할 것을 요청했다. 로마넹코 소장은 "지금은 소자산 계급성 민주주의 혁명 단계이니 좌우익 할 것 없이 모두 힘을 합하여 민주주의 완전 독립 국가를 건설하도록 해야 한다. 지금의 평안남도 건준은 우익 인사들로만 조직되었으므로 이를 해체하고 공산당과 같은 비중으로 자치 기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건준과 공산당은 각각 명단을 제출했고 위원장에는 조만식, 부위원장에는 공산당원 현준혁과 건준 인사 오윤선이 선임되었고 위원은 양측이 16명으로 균형을 이루었다.[7] 겉으로는 동등하게 대우하는 듯했지만 실제로 경찰 치안 관계의 요직을 차지한 이들은 모두 공산주의 계열이었고 건준 인사들은 명예직에 가까운 직위를 받는 것에 그쳤다.
조만식은 소련군의 주선으로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만식은 김일성의 기독교적 가풍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8]
여러 정황을 토대로 추측해보면 그는 당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그러했듯 친미반공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이를테면 10월 5일 미군정청은 각계의 명망있는 조선인 지도자 11명을 군정장관의 고문관(9명이 한국민주당 출신, 1명은 여운형, 1명은 조만식이었다.)으로 임명하였고 북쪽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조만식이 포함되었지만 그는 자리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남쪽의 민족주의자들과도 서신 등을 통해 연락을 취하였고 미군정과도 비밀리에 교류를 가졌다. 반대로 그는 북한에 주둔한 외세인 소련군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소련군을 ‘해방군’으로 보는 일부의 시각과 달리 그는 내면적으로 ‘점령군’이라는 입장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이러한 행동과 태도는 소련군 당국의 비위를 거스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9]
1945년 11월 3일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창당했다. 발기인은 105명이었고 중앙상무집행위원은 33인이었다. 이후 조선민주당은 결성 3개월만에 북한 각 도에 50만 회원을 확보하였고 각 도, 시, 군에 조직을 확고히 했다. 각 지역의 조선민주당 결성에는 교회가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조선민주당의 도, 시, 군 책임자에도 목사와 장로가 많이 선임되었다. 조선민주당은 유산 계층의 이익까지 옹호하는 독자적인 강령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내용은 38선 이남의 한국민주당과 비교해도 더 보수적이었다. 다만 이때까지 조만식은 좌익과의 전면적인 대립은 피했으며 김일성에게 조선민주당 입당을 권하기도 했다.[10] 대신 최용건이 김일성을 대신해 조선민주당에 입당해 좌익과의 가교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조선민주당에 침투하기 위해 김일성이 보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최용건은 부당수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창당 후 몇 개월 간은 별개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양자의 입장 차이는 벌어지고 있었다. 자산 계층의 이해 관계를 일정 부분 대변했던 그가 공산당이 주장하는 개혁 방식에 우호적일 리가 없었으며 이미 소련군 당국이 그의 고집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특히 그가 소련군 진주 직후부터 일부 소련군 병사들의 범죄 행위에 대해 지속적으로 항의한 것은 소련군 당국을 자극하고도 남았는데 당시 소련군은 주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등 북한 주민들의 공분을 사고 있었다.
이에 대해 현준혁은 특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직 토지개혁을 실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일제 식민지 시대의 악랄한 유산인 소작제를 개선하기 위해 공산주의자들이 제기한 소작료 3:7제 운동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는데 지주에게 가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1945년 10월 소련 군정은 새로운 중앙 권력 기관으로 '북조선임시민간자치위원회'를 설치하고 조만식을 위원장으로 내세우려 했다. 조만식은 북한만의 행정 기관 설치가 통일에 방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정청의 제안을 거절했으며 소련군의 행정 재편안은 백지화되었다. 소련군은 행정 기관 설치로 일제하의 만주국과 같은 괴뢰 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고 있었으며 조만식은 소련군의 행위에 제동을 걸었다. 1945년 11월 중순에는 신의주 반공학생사건 처리를 놓고 심한 항의를 하는 통에 이반 치스차코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소련군의 강경 진압에 대한 소련군 당국의 사과는 없었다.
1945년 11월 그는 김구, 이승만 등 38선 이남의 지도자들과 정부 수립을 협의하기 위해 서울을 방문하려 하였으나 소련 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먼저 북쪽에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나중에 중앙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상반된 견해를 보였다. 철저한 민족주의자로서 통일을 지향했던 조만식과 소련군의 지원이라는 유리한 환경 속에서 북한 지역에 사회주의적 개혁을 실시해 공산당 및 자신의 기반을 확보하고자 했던 김일성의 노선이 갈등을 보인 것이었다. 김일성은 이 때까지만 해도 겉으로는 조만식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모셨다. 노선과 정책을 두고 발생한 조선민주당과 조선노동당 간의 갈등과 공산당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점증하는 반감은 조만식을 따르던 한근조 등 평안남도 인민정치위원회의 일부 간부들이 월남하는 결과를 빚어냈다. 이전부터 그의 추종자들은 남한의 민족주의 세력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고 조선민주당 지도부는 보이지 않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추종하였다. 조만식 역시 공공연하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고 남한 민족주의 진영과 연락을 주고 받는 일이 잦았다.
점점 고조되던 갈등은 신탁통치 문제를 두고 폭발했다. 1946년 1월 2일 조만식을 제외한 북한의 주요 정치 세력은 모스크바 3상회의 지지를 선언한다. 소련 군정과 김일성은 조만식을 설득하기 위해 애썼지만 조만식은 남한의 반탁 운동에 동참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11] 이후 좌익은 일제히 조만식을 반민주주의자, 반소-반공분자, 친일파[12] 로 매도했다.
게다가 공산주의 체제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자본가 및 기독교 세력이 남한으로 월남하면서 조만식의 지지 기반은 크게 위축되었다. 이를 불안하게 여긴 당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인 여운형은 손치웅을 파견하여 조만식에게 남으로 내려올 것을 권유했고 김구도 수차례 권유했으며 비서였던 백선엽 전 대장이 월남을 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만식은 이를 거절하고 북에 남는데 자신을 소위 민족의 지도자로 여겨서 민족을 버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듯하다. 결국 조만식은 소련의 지원을 받은 김일성의 압력에 의해 1946년 1월 평양의 고려 호텔에 연금되었다. 그가 그렇게 지인 및 제자들의 월남 권유와 김일성, 북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월남(越南)을 거부한 이유는 바로 그의 고향인 평안도 향민들과 북녘의 동포들에 대한 걱정과 애정 때문이다. 이 말이 사실상 그의 유언이 되었다.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당 치하에서 우리 북녘 동포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할 때 내가 남(南)으로 가게 된다면 북녘의 동포들은 김일성과 소련의 공산치하에서 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나는 1천만 북녘 동포와 함께하기 위해 북에 그대로 남을 것이오."
북한 정권이 수립될 당시에도 북한의 조선노동당 일파는 그를 지도자 중 1명으로 추대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노선에는 찬성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기에 실패한다. 조선민주당은 1970년대 말까지 지역 조직이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공포 정치로 인해 별 활동이 없었고 이미 최용건이 당수로 취임하면서 본래의 색깔을 잃었다. 이마저도 1981년 조선사회민주당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면서 완벽한 위성 정당이 되어 버린다.[13]
1950년 5월 16일 북한 당국이 조만식을 남쪽에서 활동 중 체포되었던 김삼룡, 이주하와 교환할 것을 제의하기도 하였으나[14] 국내에 남아 끝까지 일제에 굴하지 않고 지조를 지켜온 몇 안 되는 우파 민족주의자인데다 대중들이 선호한다는 사실을 껄그럽게 여긴 이승만이 '조만식을 38선 이남까지 데리고 내려오라'는 조건을 붙여 사실상 교환을 거부했다.
1946년 1월 북한 정권에 자택 연금되었다. 감금 4개월 후인 5월 3일 아내인 전선애 여사와 자녀들[15] 에게 월남을 권유하며 떠나기 직전 자신의 머리카락과 손톱을 남겨주었다고 한다. 국립서울현충원에 있는 그의 묘역은 바로 머리카락과 손톱을 안장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북한 당국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북한에서는 유엔군과 국군에게 넘겨지지 않도록 끌고가던 중 미군의 폭격으로 인해 사망했다고 주장하며 그의 시신이 어디있는지 모른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죽음에도 여러가지 의견이 많다. 평양이 빼앗길 위기에 처하자 살해당했다는 주장이 있고 훗날 모든 정치활동이 배제된 채 시골로 추방당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택 연금이 오래된 탓에 고령의 조만식이 허약해졌고 계속되는 한국전쟁 중의 폭격에 적절한 대피를 하지 못하여 사망했다'[16] 라는 설도 있으나 북한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이야기가 남한에서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자세한 사실 관계 파악에 어려움이 있지만 결과적으로 북한의 불법 감금이 조만식 선생의 사망에 이르게 된 큰 요인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항간에는 NKVD가 친일파라는 모함을 믿고 굴라그에 끌고 가 죽였다는 얘기도 있다. 조만식 선생의 1948년 이후 행적이 불분명한 것을 볼 때 소련으로 북송된 것도 일리가 있는 얘기다. 당시 선생은 고령이어서 시베리아의 혹독한 추위와 간수로 있는 소련 군인들의 학대를 못 견뎠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1991년 7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조만식 선생의 최후가 밝혀졌다고 주장했다. 기사는 전 북한 내무상 강상호와 외무상 부상 박길용 등(이들 모두 북한에서 숙청되어 소련으로 망명)의 증언에 기초한다. 그들 증언은 공통적으로 1950년 10월 평양이 국군에 의해 탈환되기 전에 평양형무소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자세한 증언으로 박길용은 1950년 10월 18일 밤 허가이의 지시로 총살했다고 한다. 전 북한 고위 간부로 망명한 인사(익명 처리)의 증언에 의하면 1950년 9월에서 10월 초순 사이 방학세가 결정하고 허가이가 형식적으로 재가하여 조만식 등 민족주의자 및 반공주의자 500여 명을 총살할 것을 결정했고 사후에 김일성에게 보고한 것으로 안다고 한다.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 등의 지시로 조만식 선생의 눈을 파 버리고 대동강 강변에 방치하여 죽게 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하지만 평양이 떨어지는 긴박한 순간에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조만식 선생이 그런 상태로 살아서 국군 등에게 발견되어 구조된다면 김일성에게 좋을리 만무하다. 이런 소문이 돌던 1980~1990년대 초까지 대한민국은 반공 분위기에 편승한 카더라 수준의 소문이 마구 양산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북한 사람들은 머리에 뿔난줄 아는 국민학생들이 있었으며 공공연하게 주간지에서 가쉽성으로 북한 지도부의 비도덕적 행위들을 과장하거나 지어내기도 했다. 다만 나중에 과장의 많은 부분이 사실로 들어나기도 했지만 말이다.(대표적으로 기쁨조)
3. 평가
안타깝게도 사후 남한과 북한 양쪽 모두에서 왜곡당한 인물 가운데 1명이다. 북한에서는 그를 친일파로 몰아 죽였으며, 남한에서는 보수 세력이 그를 '반공주의'의 상징으로 삼아서 찬양하고 있는 실정이다.[17] 사실 신탁 통치 반대보다는 북한의 회유와 협박을 거부하다 죽어간 점 때문에 반공 우익 민족주의자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물론 조만식의 정치사상이나 노선은 당시 남한 내 주류 강경보수 세력(이승만 일파)이 주장하는 바와는 차이가 있다.[18]
오히려 그는 김규식이나 송진우, 안재홍처럼 '중도 우파' 성향에 더 가깝다. 실제로 그는 마르크스주의 유물론과 무신론에 대해서는 반대했지만, 사회주의적 정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대표적인 예로 신간회 활동 당시 그가 사회주의자와 어느 정도 연계를 맺기도 했고, 남한에선 여운형, 홍명희와 친분이 있었다. 이는 그가 중산 계급의 입장만을 대변하려 한 기존의 보수 우파와 달리, 일찍부터 도시 서민과 소농민의 입장을 폭넓게 대변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 노선은 북한 공산당의 급진적 노선을 거부하고 회유에도 거부한, 우익 민족주의자로 적어도 현준혁 같은 토착 공산주의자하고도 같이 협력할 수 있을 만한 역량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 1981년작 MBC 드라마 <제1공화국>에선 배우 박종관이 연기했다.
- 1985년작 KBS1 국군의 날 특집드라마 <전웅실록: 오성장군 김홍일>에선 배우 신구가 연기했다.
- 1991년작 KBS 대하드라마 <여명의 그날>에선 배우 박웅이 연기했다. 같은 해 MBC <여명의 눈동자>에서도 등장했으나 배우의 신원은 불명이다.
5. 기타
조선의 간디란 별명이 있었으며, 한 일화에서는 일제의 패망 직전 "내가 죽거든 비석에 눈을 그려달라. 죽어서라도 일본이 망하고 독립을 되찾는 것을 보고야 말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나마 생전에 광복을 보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승전국의 점령, 분단을 겪고, 끝내 비극적인 최후를 맞고 만다.
여담으로 그의 아들이 중학교 졸업했을때 늘 신고 싶어하던 구두를 모처럼 한 켤레 사 가지고 집에 왔는데 그는 아들에게 그 구두를 갖고 오라 하더니 가위로 싹둑 싹둑 잘라 버리고 아들에게 “공부하기 위해서라면 아까울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 신분에 맞지않는 사치는 결코 용서 할 수가 없다.”라고 꾸짖었다고 한다.
숭실대학교에 위치한 '조만식 기념관'은 학교 동문인 조만식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건물로서, 인문대학 및 사회과학대학의 강의 및 연구동으로 쓰이고 있다.
시인 백석이 해방정국 당시 조만식의 비서였다. 특히 백석이 오산학교재학 시절 조만식은 스승이자 교장이었다. 또한 조만식 선생이 백석의 집에서 하숙도 했다. 백석 시인 어머니는 요리 솜씨가 매우 정갈하였는데 조만식 선생이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그래서 정주에 오면 언제나 백석 시인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한다. 이런 인연과 함께 백석의 유창한 러시아어(영어, 독일어, 일본어도 매우 능통) 실력도 한 몫하여 비서가 되었다.
만화가 조경규가 이 분의 손자이고, 조세호는 먼 친척이다. 시인 김소월이 오산학교에서 조만식을 만나면서 사상적 스승으로 대했다고 하며, 그를 소재로 이니셜을 본뜬 "JMS" 라는 시를 썼다.
동향 사람이기도 한 백선엽 장군이 전후 만주군을 떠나 귀국하여 평양에서 조만식의 비서[19] 로 일했다. 1945년 12월에 월남하기 전에 백선엽은 조만식에게 같이 내려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조만식은 이를 거부했고, 5년 뒤인 1950년 10월 19일(전 날인 18일에 총살), 6.25 전쟁 때 1사단을 이끌고 평양시에 입성한 백선엽은 자신의 옛 상관을 다시 찾았지만, 조만식은 이미 행방이 묘연해진(살해당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태였다.
국제태권도연맹의 고당 틀이 이 분을 뜻하는 틀이다.
서울어린이대공원과 파주시의 오두산통일전망대에 조만식 선생의 동상이 있다. 서울에 있는 동상은 1976년, 파주에 있는 동상은 1992년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