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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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상세
3. 학문적 경향


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서양 정치사상을 담당하였으며,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및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2. 상세


1930년 경기도 인천부 출생. 경기중학교를 거쳐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진학하였다. 재학 중에 민병태 교수가 동국대에서 서울대로 적을 옮겼는데, 그의 영향을 받아 대학원에 진학하여 서양 정치사상를 전공하였다. 민병태 교수는 당시 영국미국에서 유행하는 다원주의 국가론을 한국 정치에 적용하고자 하였는데, 석사과정 재학 중인 그 역시 지도교수인 민병태 교수와 같이 정치를 곧 국가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 안에서의 사회작용으로 보는 시각을 갖게 되었다. 또한, 장 자크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을 국역하는 등, 정치철학 고전의 번역에도 힘썼다. 이윽고 1956년에는 "국가이론의 변천과 현대민주주의"를 주제로 석사논문을 출간하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듬해인 1957년 모과의 전임강사로 임용[1]되었으나 시카고대로 유학을 떠났다. 이 시기 시카고대에 재직 중인 레오 스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아 본격적으로 고대 서양 정치사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였고, 1959년 귀국 후 한태연 교수 대신 헌법을 잠시 강의하기도 하였으나, 퇴임 전까지 서양 정치사상이라는 단일 분야에 깊은 관심을 갖고 투신하였다. 1973년에는 레오 스트라우스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모과에서 (구제[2])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는데, 이는 서울대에서 배출한 정치학 박사 1호였다.
1983년에는 한국정치학회 회장을, 1989년에는 서울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정년퇴임을 맞았는데, 정계 등 외도가 잦았던 서울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중 최초로 정년을 맞아 화제가 되었다. 2000년 별세.

3. 학문적 경향


과학적 정치학에 상대적으로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였다. 그가 교수로 임용된 1950년대 후반은 고려대 정치학과의 윤천주를 중심으로 정치학의 과학화와 행태주의에 대한 관심이 한국에서도 고조되고 있는 시기였다. 김영국 교수가 1년 여 간 수학한 시카고대 역시 행태주의 정치학의 대가인 데이비드 이스턴이 재직하고 있는 등, 과학적 정치학이 유행하고 있었으나, 그가 영향을 받은 레오 스트라우스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흐름은 정치에서의 철학의 배제 및 몰가치화로 이어지는 비판의 대상이었다. 한편, 이러한 김영국 교수의 학적 지향은 그후로도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에 지속되어 이홍구, 김홍우 등 정치사상이 활발히 연구되는 학풍을 형성한다.
한편 국제관계학이나 지역연구에 있어서도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하였다. 김학준은 아래와 같이 회고하였다.

김영국 교수는 특히 국제관계론(Intemational Relations) 분야와 지역연구(Area Studi)분야는 학문으로 여기지 않는 듯한 발언을 가끔 했다 필자가 학위를 받고 귀국했던 때 선생님의 첫 말씀은 “자네 혹시 아이 아르(IR, 국제관계학) 같은 거나 에어리어 스터디스 같은 거 공부하고 온 것 아닌가”이었다. 그 말씀의 뜻올 잘 알고 있었기에 필자는 “선생님,정치사상이나 정치철학율 아무나 공부활 수 있나요? 저는 능력이 모자라는 걸 진작 알았기에 처음부터 포기했습니다”라고 솔직히 ‘자수 했다 선생님은 “잘 생각했었군. 그러니 학위가 빨리 끝났지. 아이아르’ 라는 건 『타임』이나 『뉴스위크』만 제대로 읽어도 다 알 수 있는 거지”라고 혹명하시며 홉족해하셨다.


[1] 당시에는 구 일제의 유풍이 아직 우리 학계에도 남아 있어, 박사 학위 없이 임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2] 코스워크 없는 학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