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
1. 개요
서울대학교의 정치학을 전문으로 하는 학과. 교수진 28명으로 정치학 관련 학과로는 국내 최다이다. 출범 이후 한동안 정치학과와 외교학과, 두 개 학과로 분리되어 운영되었으나(통합 이전까지 정원 각 27명), 2010년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정원 74명).
기존 정치학과에서 다루는 정치학의 제 분야(정치사상, 비교정치, 한국정치, 공공정책 및 행정) 및 외교학과에서 다루는 국제정치학, 지역연구 등을 두루 포괄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치사, 공법 등으로 학과 소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해방 이래, 정치외교학부 학생은 4.19 혁명 선언문의 "적색 전제와 백색 전제에의 항의"라는 문구가 표현하는 것처럼, 반탁 학생운동, 4.19 혁명, 6.3 항쟁 등 민주화 운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학과 졸업생들 역시 관계로 진출하여 한국의 경제성장을 견인하거나 정계와 언론계에서 현대적인 민주정치 확립에 기여하는 등, 현대 한국의 정치사에 있어 작지 않은 족적을 남겼다.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한국에서도 반기문 전 UN 사무총장을 비롯한 외교 및 국제기구에 다수의 졸업생이 진출하여 세계 속에서의 한국 위상 제고에 힘쓰고 있다.
2. 연혁 및 역사
2.1. 창립과 분과
식민지 조선 시기를 포함할 때, 한국 최초의 정치학과는 1926년에 개설된 경성제국대학의 정치학과이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서 정치학이라는 학문이 독립된 영역을 갖고 있다고 보기엔 어렵고, 제국대학 중 법률학과와 정치학과를 구분하는 곳도 도쿄제국대학, 교토제국대학, 두 곳밖에 없었기 때문에 경성제국대학에서 정치학과를 독자적으로 운영할 필요성이 적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듬해 정치학과는 폐과, 재학생은 신설된 법학과에 흡수되어 법학과로 졸업하였다. 다만 경성제국대학의 법학과는 일본 제국대학의 작은 '법학부'와 같은 기능을 했기 때문에, 37년부터 개설된 법과2류가 정치학과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해방 직후 법문학부 법학과가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의 세 학과로 분과됨에 따라 부활하였다. 그러나 국대안에 의해 경성대학이 폐지되고 국립서울대학교에 각 학과가 편입되면서 문리과대학 소속이 된다.
서울대학교 설립 당시, 이와 같이 일본 학제와 달리 정치학과가 문리과대학에 개설된 것은 미국 학제의 문리과대학(College of Arts and Sciences)의 전례를 따른 것이다. College of Arts and Sciences는 보통 문리과대학으로 번역되어 왔으나, 한국과 달리 미국의 문리과대학은 훨씬 넓은 범위의 학과들을 포괄한다. 예컨대 하버드대학의 경우, 경제학과가 동 대학 문리학부 소속이다.
정치외교학부의 또다른 전신인 외교학과는 1955년 개설된 정치학과 내 외교학전공으로 출발, 1959년 독립된 학과인 외교학과로 승격되었다. 대학신문에 따르면, 외교학전공 개설 이전에 법과대학 행정학과에 외교학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는 대학원 과정으로 외교학과 창설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두 학과의 분리 계기는 이승만 정부의 외교관 양성기관 설립 의도, 정치학과 내 교수 간 의견 충돌 등으로 설명되고 있다.
2.2. 가열찬 학생운동
정외학부(당시 정치학과)는 1946년 정식 설립된 직후부터 반탁 학생운동의 중심지로 기능하였다. 이는 해방정국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학과 특성 상 유달리 정치의식이 강한 인재들이 모였다는 점에서 우선적으로 기인한 것이다. 아울러, 국대안 파동을 거치고 재조직된 서울대학교, 그것도 경성대학의 직계 후신이었던 문리과대학을 구성하는 학과 중 정치학과가 가장 규모가 컸다는 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6] 이 당시 사회주의 계열 학생 운동에 맞서 채문식이 경성대학[7]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의 우파 계열 학생 운동을 이끌고 있었으며, 보성전문학교-고려대학교의 이철승, 연희전문학교-연희대학교의 이동원 등과 함께 전국학생총연맹을 조직하여 반탁 운동에 나섰다. 이외에도 엄영달, 박준규(1925) 등이 반탁운동의 기수로 활동하였다.[8]
1940년대의 운동이 일종의 적색 전제에 대한 반발이었다면, 6.25 전쟁 이후 1950년대 폐허 속의 학생 운동은 이승만 정부의 문민독재가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백색 전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전후 정치학과 중심의 문리대 독서회인 신진회와 이를 둘러싼 1957년의 류근일 필화 사건은 뒤이을 4.19의 대표적인 전조라 할 수 있다. 전후라는 시대적 상황에도 불구하고 반권위주의, 사회민주주의적 성향을 띠고 출범한 학회 신진회는 무산대중의 단결, 새로운 국가 건설 등을 학회지 논문에서 과감히 주장한 류근일이 국가보안법 저촉을 이유로 구속되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게 된다.
필화 사건은 류근일의 무죄 방면으로 종식되었지만, 신진회는 해체되었다. 그러나 신진회는 이수정, 윤식, 이영일, 김정강 등의 활동가를 길러내는 요람이 되었다. 1959년 봄 이수정, 유세희, 이장춘, 서정복, 윤식 등은 '후진국문제연구회'를 결성하여 사실상 신진회를 재건하였다.[9] 1960년의 4.19 혁명에서는 후진국문제연구회 출신 학생이 선언문 작성, 운동 기획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고 만다.한국에 있어서의 무산계급 운동의 세력적 기반과 그 이념적 기초는 서구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 잉여노동가치를 착취당하는 산업 노동자군이 뚜렷이 하나의 대계급으로 확립되어 있지 않으므로 한국 무산운동은 그 계급적 기초를 인텔리겐차들에 의해 지도되는 근로 소시민과 농민과 노동자들의 전체 무산대중 층과 이에 협력, 합세하는 진보적 프롤레타리아 군중의 총화에 구해야 할 것이다.
특권적 관료적 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전체적, 억압적 공산주의를 다 같이 경험한 우리의 인민대중들은 새로운 형의 조국을 얼마나 갈구해 마지않는가. 끝으로 한 가지 제시하는 말이 있으니 그것은 ‘전체 무산대중은 단결하라!’는 외침인 것이다.
1960년 3.15 부정선거 및 3.15 의거 익일인 3월 16일 김성희 교수의 정당론 수업 후 모인 정치학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학생 봉기 논의가 시작되었으며, 곧 문리대 타 학과를 포함한 40여 명 규모로 확대되었다. 이들 40여 명은 3학년생(58학번) 윤식(학생회장), 이수정, 황선필, 박실, 양성철 등 14명, 2학년생(59학번) 김영작 등 5명 등 정치학과 학생들을 비롯해, 중문과, 사학과, 철학과 등 문리대 다수 학과로 구성되었다. 집행부는 타 대학과의 연계를 통해 서울 시내 대학 학생 시위일을 4월 23일로 정하였으나, 일정 공유의 혼선으로 고려대학교에서 먼저 4.18 학생시위가 발생하였다. 이로 인해 사전 예정된 거사일을 앞당겨 4.19일에 문리대를 비롯한 시내 각 대학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4.19 혁명이었다.
4.19 혁명의 성공으로 찾아온 민주주의 정부는 뒤이은 5.16 군사정변으로 전복되고 만다. 박정희 정부는 정치외교학과를 시위꾼 양성소로 인식하고 있었으며[11] , 실제로 1960년대 서울대를 비롯한 각 대학의 정치학과는 권위주의 정권에 대한 가장 주요한 반대세력 중 하나였다. 과거와 달리 1960년대 이후의 정치학과(그리고 외교학과는) 정원 30명이 채 안 되는 소규모 학과가 되었으나, 제3공화국 하에서도 6.3 항쟁을 주도하는 등 반권위주의 투쟁의 중심에 서있었다. 정치학과 중심의 문리대 학회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와 김중태, 김도현, 현승일, 박범진, 이종률, 김경재 등이 이 시기 대표적인 활동가에 해당한다. 1965년 간첩 조작 사건인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이 보여주듯, 권위주의 정권의 눈엣가시였던 것이다.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오늘의 우리는 자신들의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 하여 사악과 잔학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선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제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로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헤슬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의 일천한 대학사가 적색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거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 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중략)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시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하와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구의 양심을 강렬히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의 일익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퇴아래 미칠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 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모든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단기 4293년 4월 19일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학생 일동[10]
1970년대 이후, 학생운동에서의 엘리트주의적 색채가 옅어지면서 특정 학과, 특정 대학 중심의 운동보다는 전방위적인 학생운동으로 경향이 점차 변화하였다. 그럼에도 87년 6월 항쟁에서 재야 운동가로 활동한 이부영, 김정남을 비롯해 제정구, 김부겸 등을 배출하는 등, 학생운동계의 주요한 일익을 담당하였다고 평가된다.
2.3. 테크노크라트의 요람
창립 이후 정외학부가 우리 사회에서 수행한 또다른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공직에 종사할 직업관료의 양성이었다. 전쟁 직후의 폐허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던 당시의 한국에서 사회계열 졸업자를 받아줄 번듯한 직장은 찾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다수의 정치학과, 외교학과 졸업자 다수가 그나마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을 입직 시의 필기고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부부처, 국책은행 등의 문을 두드렸고, 1960년대 이후의 고도성장기에 이들이 경제의 근대화, 사회의 근대화,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위상 제고 등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정치학과의 목적으로서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중략) 둘째, 공직에 취임하기에 필요한 준비이다. 공직이라 함은 일반 국가공무원직만이 아니라 사회단체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결정력을 갖는 정치인이 아니라, 결정된 사항을 충실히, 그리고 능률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유능한 행정가의 양성이다.
서울대학교 학생안내(1963)[12]
1950년대의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는 전술한 바와 같이, 문리대 내 타 과에 비해 기형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학과였으나, 80여 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수용할 민간의 기업은 역시 앞서 말한 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 당시의 한국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정부관료의 등용문이었던 고등고시 행정과가 주된 선택지로 각광 받았고 실제로 정치학과 출신 합격자가 적지 않았다. 첫 합격자가 나온 고시 행정과 2회에서는 38명 중 확인 가능한 4명이 정치학과 출신이었다.[13] 고시 4회에서는 24명 중 4명[14] , 고시 5회에서는 9명 중 3명[15] 등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들 초기 고시 기수 합격자는 1960년 4.19 혁명 전후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적지 않은 수가 자의반 타의반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이나 실업가로의 변신을 꾀하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공직에서 활약하게 된 건 50년대 중반에 고시에 합격한 이들이었다. 정치학과 출신은 고시 7회(1955년) 합격자 41명 중 9명[16] , 고시 8회(1956년) 합격자 11명 중 1명[17] , 고시 10회(1958년) 합격자 27명 중 3명[18] , 고시 11회(1959년) 합격자 36명 중 5명[19] , 고시 13회(1961년) 합격자 72명 중 8명[20] , 고시 14회(1962년) 합격자 38명 중 2명[21] 등이다.[22] 또한, 김재익, 김건[23] 등 한국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들도 있다. 이렇게 공직에 입직한 이들은, 경제관료로서, 또는 내무관료나 외무관료로서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키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 받도록 헌신하게 된다.
우선, 경제관료로는 제5공화국 시기 한국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한 김재익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은행 입행 및 유학 생활을 거쳐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도 보기 드문 스탠퍼드 대학 한국인 경제학 박사로서 귀국하게 된다. 국가 주도 발전의 경제 컨트롤타워였던 경제기획원에 스카웃, 커리어를 밟아가며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경제수석에 발탁, 물가안정화와 정보화, 금융시장의 체질 개선 등 80년대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한다. 김재익의 입학 동기였던 서석준 역시 대표적인 경제관료이다. 고시로 입직한 그는 마찬가지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무를 초기부터 제4공화국 말기까지 참여하고, 제5공화국 출범 후에는 45세의 최연소 경제부총리에 발탁된다. 우정이 돈독했던 김재익과 서석준은 한편으로 전자가 보다 과감한 미국식 시장화를, 후자가 중화학공업화를 비롯한 70년대의 국가주도 경제성장의 가속화를 각각 원하는 상이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김동휘 동력자원부 장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등도 동시기에 활약한 유사한 연배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동시기 내무관료로는 행정의 달인이라 불린 고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고시로 입직한 고건은 내무부와 지방을 오가며, 농촌의 근대화 사업인 새마을 운동의 기획과 추진에 앞장선다. 이 시기의 내무관료에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폭증하는 도시 인구 유입 등의 미증유의 상황에서 어떻게 지방, 특히 농촌을 이 근대화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기술적 능력이 요구되었다. 최연소 전남지사, 서울시장, 내무부 장관 등 중앙과 지방, 농촌과 도시의 요직을 오가며 고건은 공직 커리어 대부분을 이 사업에 매진한 셈이다. 노건일, 전석홍, 강운태 등의 내무관료 역시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마지막으로 외무관료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부터 외교관 선발을 목적으로 설치된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25] 와 정치학과의 유일한 국제정치 전임이자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인 이용희 교수의 존재로 많은 학생들이 외교관의 길에 뛰어 들었다. 외교로 인해 분단되고, 절대 빈곤에 머물러 국제사회에서 온전한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외교와 외교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게 비쳤을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고등고시 행정과 시절부터 이상옥, 유종하 등 정치학과 출신 외교관이 배출되었으며, 1955년 외교학전공 신설 및 1959년 외교학과 독립 이후 외교학과는 외교관의 산실로서 기능하게 된다. 고등고시 폐지 및 외무고시 부활 간 짧은 공백기를 제외하면, 외무관료 배출 역할은 여전히 왕성하게 기능 중이다. 한국인 최초의 UN 사무총장인 반기문은 그러한 전통이 축적된 산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특기할 만한 점은, 전술한 학생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과 테크노크라트가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령, 외무관료로서 왕성한 커리어를 거둔 엄영달은 반탁운동가였고, 내무관료로서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까지 들은 고건은 50년대 진보성향의 대표적인 독서회였던 신진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은 1960년 당시 정치학과(및 외교학과) 3, 4학년이 주도하였는데, 위에서 인용한 4.19 혁명 선언문 작성자 이수정은 청와대 정무1비서관,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노태우 정부 시절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역시 운동에 주역으로 참여한 노건일, 박운서, 이장춘 등도 관계 각 분야에서 주요 직위를 역임하였다. 요컨대 초, 중기의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는 전방위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 근대화를 이끈 인력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2.4. 통합 학부 출범
2010년에 정치학과와 외교학과가 "정치외교학부"로 다시금 통합되었다. 50여 년만의 통합, 60여 년만의 학부 승격이었다.
본래 정치학과는 국대안 과정에서의 전과 희망생 수용을 이유로 문리대 내에서 그 정원이 문학부의 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기형적인 형태였기 때문에 학과가 개설된 지 얼마 안 된 1952년에 이미 정치학부로의 승격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1959년 정치학과, 외교학과의 분과로 그 필요성이 소멸하게 되었다. 분과 후 50여 년 동안 두 학과는 각각 정치학과는 사상, 외교학과는 한국적 국제정치이론 등의 전문 분야를 특화시켜 왔으나, 한편으로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담당 분야 중복 등의 비효율도 불가피하게 따라왔다.
통합 논의의 첫 시작은 동창회였다. 1990년 12월 정치학과 동창회와 외교학과 동창회가 분과 후 최초로 합동이사회를 개최하였다. 이윽고 1996년에는 두 동창회가 정치외교학과 동창회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통합 동창회의 건의로 1997년부터 학사 운영 과정에서 양 전공 개설과목의 상호 전공 학점 인정 및 전공필수 과목 교차 지정[26] 등의 보완조치가 행해지는 등 일부 개선이 있었다. 그렇지만 근본적으로 소규모의 교수진과 학생, 양 과 간 중첩되는 연구분야의 존재를 해소하기 위한 통합의 필요성은 늘 잠재된 상태였다.
학부 통합이 이루어진 것은 이로부터 약 15년 남짓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2008년 1월 동창회 신년 하례식에서 정치학과와 외교학과의 통합 및 정치외교학부 확대 방안이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 도입으로 발생이 예정된 구 법과대학의 정원을 활용하여 학과 증원을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이전의 추상적인 논의와 달리, 가시적인 유인의 존재로 인해 통합 논의가 빠르게 진척되었다. 그해 8월에는 동문 출신인 김형오 국회의장과 이장무 서울대학교 총장 간 면담이 있었으며, 동 시기 졸업 동문 124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통합 여부를 묻는 설문조사 결과에서도 925명 찬성(74.3%), 105명 반대(8%)와 같이 압도적 찬성으로 나타났다. 그해 12월 학과 통합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고, 이듬해인 2009년 5월 추진위-서울대 본부 간 협의에서는 통합에 대한 긍정적인 본부 측의 반응이 도출되었다.[27] 8월에는 논의가 한 걸음 더 나아가 치의학전문대학원 체제 전환에 따른 반납된 구 치과대학 학부 정원 45명 중 20명을 학부 통합 인센티브로 신설 정외학부에 배정할 것을 본부로부터 확약 받았으며, 11월 25일 통합안이 최종 승인되었다.[28]
2010년 6월 3일 정치외교학부가 새롭게 출범하였다. 그러나 일단 이렇게 통합은 되었으나, 일각에서 '결혼사기단'으로 표현하듯,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양 과의 통합은 명목상의 결합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존재하였다.
통합 10년이 훌쩍 지난 현 시점에서 회고해 볼 때, 단일 자치회(학생회)인 정치외교학부 자치회가 운영되고 있으며, 과 행정실 역시 통합되는 등, 당초의 우려는 기우였던 듯하다.[29] 늘어난 규모와 중복 해소로 이전에 미처 포괄하지 못했던 공공정책, 법철학, 국제정치경제, 정치현상에 대한 데이터과학 적용 등 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행해질 수 있었다. 또한, 학부생 차원에서도 규모의 증대로 과거 분리 이전처럼 각기 다른 형태이지만 공동체와 국가라는 공적인 영역에 뛰어들 의지를 가진 인력 간의 소통과 교류의 산실이 마련되고 있다는 평가도 가능할 것이다.
3. 교육
당초 학과가 분리되어 있던 시절에는 정치학과에서도 국제정치를, 외교학과에서도 정치학 기초 및 정치사상을 교육, 연구하는 담당 교수를 두는 등의 경향이 있었다. 가령, 90년대 말까지 정치학과는 정치학원론을 1부와 2부로 나누어 2부를 국제관계학 개론에 상당한 내용으로 과목을 편성하였고[30] , 외교학과는 각종 국제정치사상 교과목의 내용 상당부분을 고대 및 중세 정치철학 관련 내용으로 편성한 사례가 존재한다.[31] 학과 통합 이후에는 이러한 교수진 및 교육과정상의 중복이 완전하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해소된 측면이 있다.
많은 수의 교수진 및 폭 넓은 학습 선택지에 힘입어 교육 면에서나 연구 면에서나 정치학의 다양한 영역을 포괄할 수 있다는 점이 서울대 정외학부의 특징이다. 영역이 넓다보니 인접 학과들도 많은데, 이들과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갈등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를 들어, 행정학 교과목은 정치외교학부에서 개설하지만 실제 수업은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에 위탁하고 있다. 5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 행정학이라는 학문이 유입됨에 따라 정치학과에서도 일부 행정학 수업을 개설하기 시작하였으며, 75년 서울대에서 행정학과가 폐지된 이후에는 정치학과(현 정외학부)는 전공과목으로 행정학서론, 인사행정, 재무행정, 행정조직론 4개 과목을 개설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현재 정외학부는 학사편입 시 타 대학 행정학과 출신 지원자의 경우 행정학과를 유사전공으로 보아 지원을 허가하지 않는다. 다만, 1975년 이후 45년 간 개설과목에 변동이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학부 차원에서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투자하지는 않는 듯하다.
법학 교과목 역시 정치외교학부에서 개설하지만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위탁하고 있다. 지리학과, 불어불문학과, 독어독문학과, 서어서문학과, 서양사학과, 철학과, 종교학과가 참여하는 유럽지역학 연계전공을 주관하고 있기도 하다. 이외에도 지역 연구에서는 아시아언어문명학부와 영역이 겹치고, 국제정치에서는 국제대학원과 영역이 겹친다. 2020년 현재의 교과과정 및 교육, 연구상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3.1. 교과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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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외교학부 내에 정치학전공과 외교학전공이 설치되어 있으며, 학부 본전공생은 세부 전공을 사전에 택하지 않은 상태로 입학한다. 3학년에 올라가면서 두 세부 전공 중 하나의 전공을 택하여 졸업하게 된다.[32] 두 세부전공의 주된 차이는 졸업요건이다. 정치외교학부의 교과과정은 미분류(전공필수, 답사) 과목을 제외하면, 공통 가군(사상, 역사), 공통 나군(각국 정치 및 지역연구), 전공별 다군(전공 심화) 세 개 군으로 분류된다. 정치학전공은 전공필수 3과목 및 가군, 나군, 다군(정치학전공 심화) 각 2개 교과목만 이수하면 되는 반면, 외교학전공은 전공필수 3과목은 물론, 가군, 나군, 다군(외교학전공 심화) 각 3개 교과목을 이수해야 졸업이 가능하다.
3.1.1. 기초(전공필수)
전공필수 교과목은 정치학원론, 국제정치학개론 및 학사논문 연습, 단 세 과목으로 적은 편. 앞의 두 과목은 1학년 이수가 원칙이나 막상 졸업이 머지않은 고학번이 되어 재수강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졸업 전에는 세부 전공별로 연습 과목을 수강하여 학사논문을 준비해야 한다.[33]
3.1.2. 정치사상
현재 6명의 사상 분야 전임교수가 재직 중이다.(고대 1, 현대 2, 법철학 1, 동양 2) 전임 교수가 없는 근대정치사상 등에 대해서는 특강 또는 강사 섭외 등을 통해 종종 보충하는 편.
초창기 정치학과의 학풍을 주도한 민병태 교수 및 그 직계인 김영국 교수(고대정치사상) 등의 영향으로 서울대 정치학과는 전통적으로 정치사상 분야가 강세를 보였다. 특히 고대나 (초기) 근대 정치사상에 강점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정치사상 외 타 분야 및 정치사상 내에서도 보다 다양한 분야로 다각화하는 추세다. 대표적으로 인권과 (현대) 민주주의론 등 현대정치이론이 강화되었으며, 지성사와의 접목도 활발해지고 있다. 유명한 칼럼니스트인 김영민#s-12 교수가 동양정치사상 분야를 담당하고 있다.
3.1.3. 비교정치 및 한국정치[34]
정치 하면 쉬이 연상되는 정치제도와 정치과정을 다루는 분야다. 정당, 의회, 선거, 시민사회, 거버넌스, 정치체제 (민주주의론, 권위주의론 등), 정치경제 등 국내 정치외교학과에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분야를 포괄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주로 행정학과에서 교육, 연구하는 행정학, 그리고 헌법과 헌정사에 대해서도 교육하고 있다.[35] 최근 10년간 가장 큰 변화는 본래 법대 소속이던 헌법과 헌정사를 교육하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정치학연구방법론, 계량정치, 게임이론 등은 방법론 분야로 따로 분류해야 할 것이나, 편의상 여기에 포함하였다. 이 중 계량정치, 게임이론은 2010년대에 신설된 과목으로, 양적 연구 방법론이 강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3.1.4. 국제관계 및 지역연구[36]
오랫동안 외교학과가 독립된 학과로 존재해온 만큼 국제관계 기본 이론뿐 아니라, 국제정치경제(IPE) 및 지역연구에 있어서도 다양한 교육과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교과 특성 상 한국어 교과서 외에도 영어로 된 논문과 단행본을 수강 중 숙독할 것을 요구받는 경우가 많다.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 이용희 교수를 비롯해 노재봉 교수, 외교사 및 국제법 연구를 전공으로 하는 김용구 교수, 개화기 연구와 이념의 전파 연구 등에 집중한 하영선 교수 등으로 이어지는 학술적 전통이 탄탄히 유지되어 왔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이 전통에서 강조된 것은 주체적 국제관계이론 및 국제관계사였다고 할 수 있다.
국제정치이론과 외교정책론은 이전과 같이 계속 교수되고 있으며, 사실 이들은 학부 수준에서는 일부 변주가 가능할 뿐 이미 커리큘럼이 어느정도 자리잡혀있는 전통적인 분야들이다. 국제관계사 분야에서는 전통이 유지되는 가운데, 지성사와 전쟁사 등이 강조되고 있다. '한국적' 외교사의 확립과 역사의 현대적 적용이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했던 이전에 비하면 보다 현대 역사학의 경향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37] 국제안보는 여러 과목에서 다뤄지지만 국제안보 분야에 확실히 속한다고 할 수 있는 강의는 10년전과 마찬가지로 안보론뿐이다. 국제법 분야는 2000년대 들어 교육이 잠시 맥이 끊기고 법대와 국제대학원에서만 교수된 적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위탁 개설의 형태로 국제법 교육이 재개되었다.
서울대 정치외교학부의 특징 중 하나는 비교정치학이나 각국의 외교정책론과는 다른 관점에서 국가/지역을 접근하는 지역연구(area studies)가 학부 수준에서 제공된다는 것이다. 지역연구 분야에서는 기존에 다루던 중국, 일본, 러시아, 서유럽에 이어 중동/북아프리카와 동남아 지역을 2010년대에 추가하였다. 다만, 이성형 교수의 요절으로 더 이상 라틴아메리카 지역이 다뤄지지 않고 있으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중앙아시아, 동유럽 지역 역시 거의 다뤄지지 않고 있는 상태이다. 이들 지역은 세계지역연구개론 과목에서 맛보기로 다루어지고 있으며, 더 관심이 있는 학생들은 인문대 관련학과나 연계전공을 선택하곤 한다.
마지막으로, 10년 전과 비교해 가장 큰 변화를 보인 것은 국제정치경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일단 과목 수가 크게 늘어나, 국제개발, 금융, 무역/투자 등의 주제까지 포괄하게 되었다. 또한, 박종희 교수의 부임으로 양적 방법론 (특히 베이지안 방법론)을 보다 잘 가르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학과 내 국제정치경제 분야의 성장에 영향을 주었다.
3.1.5. 답사 및 특강
2015년부터 동문회의 기금 출연에 힘입어 답사-특강 연계과정인 글로벌 리더스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2학년에 개설되는 세계정치의 현장(정치전공 개설), 국제정치의 길잡이(외교전공 개설) 교과목에서는 아시아, 유럽 등 각 대륙에 소재한 국가를 답사한다. 3학년 교과목인 글로벌 리더십 연습은 교수-학생 밀착형 학부 세미나로 10명 내외 소규모로 운영되며 교수와 학생이 특정 주제에 대해 특강 및 학기말 논문 작성에 이르는 과정으로 구성된다.[38]
정치학특강(정치전공 개설), 국제정치의 주요쟁점(외교전공 개설)은 기존의 각 전공 개설 교과목에서 포괄하지 못하는 주제를 다루는 수업이다. 선거사, 정치심리학, 북핵문제, 국제규범 등 다양한 주제로 개설된다.
3.2. 교수진
3.2.1. 현직 교수
2020년 현재 28명으로 국내 최다 전임 교수진을 보유하고 있다. 전임 교수가 없는 공법, 행정학 등의 분야에 대해서는 전문대학원 위탁 개설의 형태로 교육하고 있다.
3.2.2. 전직 교수
성명 우측 상단의 명예는 명예교수임을 의미. 공직 임명 등으로 인해 초기에는 정년을 대학에서 맞이한 교수가 많지 않았다. 정치학과의 경우, 1995년 김영국 교수가 최초로 정년을 맞아 퇴임하기 전까지 단 한 명도 재직 중에 65세 정년을 맞이한 교수가 없었다.
4. 자치활동
4.1. 정치외교학부 자치회
2010년 정치외교학부 통합 이전까지는 정치학과와 외교학과 각각 자치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정치학과의 경우, 2007년 설립된 정치학과 자치회 및 정치학과 중심의 학내 활동인 모의국회 등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운영되었고, 외교학과는 공식 자치회는 없었지만 정치학과와 마찬가지로 학내 활동인 모의유엔 등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운영되었다. 정치외교학부가 출범하면서, 그간 학과별로 분리 운영된 학생 자치활동에 있어서도 협조의 필요성이 한층 높아졌다. 이에 따라, 2012년 외교학전공에서도 자치회가 출범하였으며, 정치학전공 및 외교학전공 양 전공 임원 간의 대표자회의 등을 통해 전공진입생 환영회, MT, 정치외교페스티벌[47] 등의 공통 프로그램이 원활히 운영될 수 있었다.
상술한 과도기를 거치며 양 전공 간의 거리가 상당 부분 좁혀졌으며, 서울대학교의 학부제 폐지로 절대다수의 신입생이 1학년부터 개별 학과/부에 배정된 상태로 입학함에 따라 세부 전공별 별개의 자치회를 운영할 필요성도 점차 감소하였다. 이에 2017년에는 단일 정치외교학부 자치회가 발족하였으며, 현재 정치외교학부의 각종 자치활동은 단일 자치회 및 정치외교 양 과/반(일치단결, 나침)[48] 을 중심으로 행해지고 있다.
4.2. 모의국회
정치학전공 중심의 자치활동이다.[49] 정식 명칭은 관악민국 모의국회. 연극 형태로 당대 정치현상을 풍자, 비평하는 행사로, 2학년이 대본, 세미나 등의 준비를 담당하고 1학년이 배우로 출연한다.
당초 1975년 서울대학교 캠퍼스 종합화 이전까지 모의국회는 법과대학의 단과대학 축제인 낙산제의 부대 행사로 운영되고 있었다.[50] 그러나 이후 법대 축제인 낙산제가 형해화되고 모의국회 전통 역시 단절된다.
반면, 위와는 별개로 제5공화국 출범 직후인 1981년부터 동숭동 시절의 초대 모의국회 계승을 제창하며 정치학과에서 당대 정국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롭게 모의국회 행사를 개최하였으며, 이후 연례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87년 민주화 이전까지 당대 군부 정권에 대한 항의 내지 비판운동의 성격을 띠었다면, 민주화 이후에는 그 해 쟁점이 된 정치 현안을 주제로 다루고 있다.
4.3. 모의유엔
외교학전공 중심의 자치활동. 역시 준비요원인 2학년과 팀원인 1학년 모두 세부 전공을 정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외교학전공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모의국회가 주로 국내 정치 쟁점을 소재로 삼는다면, 모의유엔은 국제 이슈를 주로 다루는 비평극이라 할 수 있다. 역시 2학년이 극의 준비를, 1학년이 배우를 담당한다.
수십여 년 간 열린 연례행사인만큼, 모의국회와 모의유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세간의 인식도 존재한다. 모의국회는 아무리 진지하게 만들어도 예능 같고, 모의유엔은 재밌게 만들어도 다큐가 된다는 평가가 일례.[52]
4.4. AFPLA
Asian Future Political Leaders' Association(아시아미래정치지도자포럼)
AFPLA 도쿄대학 지부 홈페이지
서울대 정치외교학부를 비롯해, 베이징대학 정부관리학원, 푸단대학 국제관계학원, 도쿄대학 법학부 제3류(정치코스), 타이완대학 정치학계 등 5개교 정치학 관련 전공 학부생이 모이는 포럼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2008년 정치학과 시절 처음으로 기획되어 서울대, 베이징대 2개교 합동 행사로 운영되었고, 이듬해 푸단대, 도쿄대로 확대 운영되었다. 2014s년부터는 타이완대학도 참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각 대학이 1년마다 돌아가며 의장을 맡아 동아시아 관련 정치, 외교, 역사 등 다양한 국제이슈에 대해 약 4박 5일 간 토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정치외교학부 통합 이후에는 정치학전공을 중심으로 운영하되 외교학전공 학생도 지원이 가능하다.
4.5. 국제교류세미나
국제교류세미나 소개 홈페이지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 및 히토쓰바시대학 법학부 학부생 간 매년 국제정치 현안에 대해 토읠르 나누는 포럼이다. 1997년 외교학과와 히토쓰바시대 법학부 간 연례세미나로 출범하여, 2002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다. 매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세미나가 진행되며, 영어 발제 및 프레젠테이션으로 구성된다.
5. 진로
입학 시 또는 전공 진입 시부터 공적 부문(Public Sector) 진출을 목표로 갖고 있는 학생이 많고, 졸업생의 진로 역시 해당 분야에 다소 치우친 감이 있다.[54] 졸업생이 택하는 주요 진로로는 관계, 법조계, 언론계 등이 있으며, 이외에도 학계 및 각종 공사, 국책은행 등 공공기관 취직, 국제기구 활동 등 공공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 아울러, 민간 기업 등 전공과 직접 관련이 있지 않은 진로라도 해외 관련 업무에 종사하는 등, 학부 전공을 살리는 졸업생이 많은 편이다.
5.1. 관계
학과 창설 이래, 공직 진출은 학부 과정에서 배운 지식을 직접적으로 입직 과정에서 활용할 수 있고 이후에도 간접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적으로 선호되는 진로였다. 특히, 외교학과가 한동안 독립된 학과로 존재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외교관을 다수 배출하였으며, 이외에도 내무, 재무 등 다양한 분야에서 고등고시, 특별채용 등의 형태로 공직에 입직한 졸업생이 많다.
2000년대 초반에는 행정고시, 외무고시를 통해 학번 당 14 ~ 21명 가량 공직에 진출하였으며[55] , 2010년대에 접어 들어서도 매 학번 11 ~ 19명 가량의 졸업생[56] 이 입직하는 등, 큰 편차 없이 꾸준히 선호 받는 진로이다.
5.2. 법조계
근래에 와 졸업생 중 가장 많은 수가 법조계를 진로로 택하고 있다. 과거에는 정치학의 본산인 미국과 달리 독립된 법학부의 존재, 통제된 진입장벽 및 극심한 정치변동 등의 요소로 인해 법조계에 진출한 졸업생이 소수에 불과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 민주화가 이행되는 등 국내 정치가 안정을 되찾고 사법시험 선발 인원 역시 1,000명을 향해 증가하면서 법조계 진출이 늘어나기 시작하였고[57] , 2009년 법학전문대학원 제도 도입 및 법과대학 폐지로 이러한 흐름이 가속화되었다.
1990년대 및 2000년대 초반 학번의 경우, 사법시험 및 법학전문대학원 제도를 통해 15명 내외의 변호사가 배출되었으며,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정착된 2010년 전후의 입학생의 경우, 2~30명 가량의 졸업생이 법조계를 진로로 택하고 있다. 2020년 서울대 로스쿨 합격자 중 정치외교 전공자가 22명으로 발표되었는데[58] , 이중 서울대 학부 출신이 약 20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59]
5.3. 언론계
언론계 역시 정외학부의 전통적인 주요 진로 중 하나이다. 특히, 공론장이 극히 억압된 권위주의 체제 하에서는 언론 활동이 곧 부조리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공간 그 자체였기 때문에 60~80년대 학번의 경우, 15% 내외의 졸업생이 신문사 등 언론계에 종사하였다. 민주화 이후 사회가 다원화되면서 이전에 비해 다소 부침은 있으나, 여전히 사회 및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적 기능을 수행하고, 학부 과정에서 익힌 정치학, 국제정치학 지식을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진로이므로 언론계 진출은 타 학과에 비해 많은 편이다.
2000년대 초반 학번의 경우, 학번 당 6~7명의 졸업생이 신문 및 방송사에서 기자, PD로 활동하고 있으며, 2010년 전후의 학번 역시 4 ~ 9명이 언론계를 진로로 택하는 등, 큰 부침없이 주요 진로로 각광 받고 있다.
5.4. 학계
정치학 및 국제정치학을 대학원 과정에서도 계속 공부하여 학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졸업생도 꾸준히 존재한다. 모과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밟거나, 유학, 모과 박사과정 등을 통해 정치학자가 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며, 행정대학원에서 행정학, 정책학 석사 과정을 밟는 졸업생도 종종 배출된다.
5.5. 기타
타 학과와 마찬가지로 민간 대기업, 공공기관에서 활동하고 있는 졸업생도 적지 않다. 이밖에도 학부 생활 중 익힌 지식이나 경험 등을 통해 투자은행, 다국적 기업, 국제기구 등에 진출하거나, 재직 중인 기업에서 대외 관련 업무에 종사하게 되는 사례도 있다. 민주화 및 지방자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아직 수가 많지는 않지만 대한민국 국회, 지방의회 등에서 정당인으로 활동하는 졸업생도 돋보인다.
6. 출신 인물
진로에서 유추할 수 있듯, 전통적으로 정계, 관계, 언론계에 진출한 동문이 다수 존재.
6.1. 정/관계
6.1.1. 국무총리
6.1.2. 국회의원
제2대 국회부터 동문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 건국 이후 제12대 국회까지 국내 대학 학과 중 누적 최다 배출 학과였으며, 제13대 국회 이후로는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이어 의원 배출 누적 2위이다.
채문식(제11대 국회), 박준규(1925)(제13대 국회, 제14대 국회), 김형오(제18대 국회) 등 3인은 국회의장을 역임한 바 있다.
6.1.3. 장관
장관급 정무직 등은 제외
6.1.4. 차관
6.1.5. 지방자치단체 관련 인물
6.1.6. 기타 공직자 및 정당인
6.2. 언론계
6.3. 기타
- 강지원 - 변호사
- 구평회 - 기업인
- 권영주 - 번역가
- 김영국 - 정치학자
- 김운태 - 정치학자
- 김용구 - 정치학자
- 남궁곤 - 정치학자
- 노동일 - 정치학자, 전 경북대학교 총장
- 류준세 - 학원인
- 박봉식 - 정치학자, 전 서울대학교 총장
- 배명훈 - 소설가
- 서정민 - 학원인
- 오연천 - 전 서울대학교 총장
- 위종욱 - 학원인[68]
- 유영익 -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 이재호 - 학생운동가
- 이종 - 이우의 차남
- 이종은 - 미국변호사
- 이희준 - 고고학자
- 전용성 - 변호사, 의사
- 최정운 - 정치학자
- 하영선 - 정치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