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1963)
[각주]
1. 정계 입문 이전
1.1. 출생과 어린 시절
1963년 10월 3일 전라남도 담양군 수북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한학자 출신으로 몰락한 양반 가문의 마지막 세대다. 1969년 삼산초등학교 입학했다. 집에서 어깨너머로 배웠던 한자와 글공부에 익숙했던 터라 처음부터 공부를 잘 했다고 한다. 4학년 때는 광주에 있는 계림초등학교로 유학(전학)을 갔다. 전학간 뒤로 도시 아이들한테 무시당하지 않으려고 열심히 공부해서 전교 1등을 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 인간의 존재와 삶에 대한 고민을 시작, 급기야 고2때 머리를 깎고 ‘출가’ 하겠다며 돌연 전남 순천의 송광사로 들어갔다. 송광사 스님은 처음에 가출이 분명해 보이는 고삘이를 받아주지 않으려 했다. “출가하려면 반드시 부모님의 허락이 필요하다”는 스님의 말에 “부처님 가르침 어디에 출가하려면 부모 허락을 받아야한다는 말씀이 있는지요? 근거를 대보시지요 스님?”라 받아쳤다고 한다. 그렇게 송광사에서 설거지와 법당 청소 등을 하며 한 달을 보냈지만 전라도의 절이란 절은 샅샅이 뒤진 어머니의 끈질긴 탐문수사에 걸리는 바람에 다시 집으로 귀가하였다.
1.2. 학생운동
1.2.1. 광주항쟁
고3 때 였던 1980년 5월, 광주의 참혹한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1]
공포도 있었지만, 치솟는 분노도 참을 수 없었다. 전두환의 만행을 알려야겠다고 생각해 자기학교뿐만 아니라 전주고등학교까지 가서 또래들에게 광주의 실상을 알렸다. 이때 ‘녹두장군 전봉준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를 위해 싸우자’는 말도 했다. 나라가 이렇게 된 판에 대학은 가야 하는지를 고민했지만 흥사단 형들이 “전두환이랑 싸우려면 대학교에 가야 한다”고 충고하는 바람에 방황을 끝내고 입시공부를 시작했다.
1.2.2. 소년범
대학시절은 거의 운동권 생활이었다. 학교 수업은 빠지는 날이 더 많았고 탈춤 동아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83년 5월 24일.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는데 이 때 형사들이 “너 전과 7범이야!” 라고 말했다. 이미 사진 채증 등으로 7번 이상 경찰 정보망에 올라갔다는 얘기였다. 당시 만 20세가 채 안 되어 소년범으로 분류, 죄수 번호 376번을 달았다.
0.7평의 독방에서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처음엔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으나, 좀 지나니 약간 적응이 되었다고 한다. 1984년 학원자율화 조치로 출소한다.
1.2.3. 비주사 NL 수장
당시 서울대 운동권에는 여러 정파가 온갖 논쟁을 거듭하고 있었는데. 주사파의 시조로 유명한 김영환이 구학련을 만들어 NL그룹의 천하통일을 추진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김윤은 구학련 그룹과는 별개의 노선을 추진했는데 이를 자주파 NL이라 불렀다.
NL은 NL인데 주체 사상은 거부하는 NL이었던 것이다. 자주파 NL그룹은 주사파 NL인 구학련과 대립하고 동시에 PD 계열과도 대립했다. 나중에 이 그룹은 ‘비주사 NL’이라는 말로 더 알려진다. 이 조직은 나중에 서울대 학생운동 족보에서 ‘21세기 연합’의 뿌리가 되었는데, 진보적 사회진출을 주장하며 공장이 아니라 일반 시민단체나 사무직노조로 나가는 시발점이 되기도 했다.
자주파NL은 자신들의 사상과 노선을 정리한 기관지로 <현대와 혁신>을 발간하기도 했다. 비주사 NL의 주요 인물로는 김윤 외에 원희룡(제주지사)을 꼽는다. 김윤의 1년 후배였던 진중권은 학번 상 후배인데 (김윤이 초등학교를 일찍 들어가는 바람에) 나이는 김윤보다 많았고, 원희룡 역시 1년 후배이지만, 나이로 따지면 두 달 차이밖에 안 났다고.
1.3. 노동운동과 도올 김용옥
19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은 노동운동을 하기 위해 현장에 뛰어드는 경우가 많았다. 김윤도 구로공단을 거쳐 부천과 인천에서 노동운동을 했다. 렌즈공장, 인쇄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고, 인천노동교육연구소에서 상담, 교육, 조직 활동을 했다. 하지만 노동운동을 하며 조금씩 회의가 들었다. 1992년 사회주의권이 무너지자 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상실한 운동권 집단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고, 혼란속에서 공부를 다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김윤은 1994년 무렵, 도올 김용옥의 <도올서원>에 찾아가 제1기 제자가 되었다.
1.4. 김우중과의 만남
1992년 결혼한 뒤, 김윤은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대학원을 다니며 번역 일을 해서 아이들의 분유값을 벌었다. 하지만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고 나니 생계가 어려웠다. 그때 마침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이 ‘세계경영’을 내걸고 인재들을 찾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서울대 운동권 출신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련 해체 이후 방황하고 있던 운동권 출신들 100여명이 대거 대우로 몰렸다. 김윤은 1995년 10월 힐튼호텔 지하 중식당에서 김우중과의 짧은 만남을 나눈 뒤로 운동권 전사에서 세계경영의 첨병으로 변신했다. 김윤은 이 순간을 나중에 “낡은 학생운동의 틀에 갇혀 있었더라면 만날 수 없었던 세계를 만났다”고 회고했다. 대우입사 당시 대우가 좋았다. 김우중 회장은 운동권 경력도 ‘경력’으로 인정, 신입사원이 아니라 고참 대리로 입사하도록 배려했다. 김윤은 대우의 ‘세계경영’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다. 인사와 조직의 전면적인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김윤은 대우자동차 부문 김태구 회장 앞에서 자신의 전략과 대안을 브리핑했다. 새벽 6시 단독면담 자리였다. 이 단발 브리핑으로 대우자동차 세계경영기획단장이 되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자 대우는 직격탄을 맞고 쓰러졌다. 김윤은 우크라이나 합작법인 Autozaz-Daewoo의 경영관리를 맡고 있었지만, 결국 기회의 땅 우크라이나를 뒤로 하고 눈물의 귀국길에 오른다.
2. 정치인으로써의 행보
2.1. 전진코리아
2007년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넘어 새로운 길을 추구한다’는 명분으로 <전진코리아>를 창립해 ‘정치혁명을 위한 제3당 창당’에 도전한다. 출범 당시 언론은 전진코리아를 ‘중도개혁신당 창당을 추진하는 386세대 전문가 중심모임’으로 소개했다. 전진코리아는 ‘제3정치세력’을 예고하는 최초의 움직임이었지만, 유력인사들 중에는 유일하게 손학규 경기도지사만 참여했다. 특히 학생운동 시절부터 오래된 후배였던 원희룡의 참여가 불발로 끝나자, 전진코리아는 1년여 만에 실패한다.
2.2. 대통합민주신당 입당
전진코리아의 유일한 거물, 손학규가 2007년 대선을 앞두고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자 김윤도 같이 입당한다. 하지만, 당시 당내경선에서 손학규는 정동영에게 패한다. 뒤이은 본선에서 정동영은 이명박에게 500만표가 이상 큰 차이로 대패했고, 대통합민주신당은 손학규로 간판을 바꾸고 2008년 총선을 치른다. 이때 김윤도 출마를 결심한다.
2.3.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초구 을 출마
스스로 험지출마를 자청해 서초을 지역에 출마한다. 서초구는 강남3구에 속한 곳이라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할 경우 패배는 예견된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 상대는 고승덕 후보였다. 대개 낙선하면 해당지역을 떠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김윤은 낙선 후에도 거의 4년 동안 서초을 지역위원장을 맡았다. 지역위원장은 자금과 시간을 소모해야 하는 자리라 출혈이 컸다.
2.4. 민주당 탈당
2012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친노세력이 민주당 외부에 혁신과 통합이라는 단체를 결성하고 민주당과 당대당 통합을 요구했다. 김윤은 이들과의 통합에 반대한다. 386세대의 뿌리 깊은 패권주의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손학규 대표는 물러나고, 한명숙 체제가 들어서자 4년간 피와 땀을 쏟아 부은 민주당 서초을 지역위원장 자리를 내려놓고 “친노세력과 낡은 386세대 정치인들이 중심이 된 민주당은 민주화 운동의 경험과 나만 옳다는 교만으로 똘똘 뭉쳐 시대에 역행하는 패권세력으로 전락하고 있다.”며 탈당.
2.5. 청년당 창당
386세대 중심으로 변모한 민주당 탈당 이후, 평화재단에서 주최하는 청년리더십아카데미 강사로 나가 청년들과 새정치 구상을 얘기하며 ‘청년당’ 창당을 제안한다. 결국 한국 정당사상 최초로 청년당이 탄생했다. 2012년 총선에 청년당 이름으로 지역구 3명, 비례 4명이 출마했지만 당선자를 내지는 못했다.
2.6. 법륜과 첫 인연
김윤과 안철수의 인연은 법륜스님에서 비롯되었다. 20대 시절에 이미 법륜스님을 잘 알고 있던 김윤에게 어느 날 법륜스님이 ‘안철수가 누구냐?’ 고 물었다. 젊은 청년들을 상대로 여론조사를 돌려보니 안철수에 대한 기대감이 컸다. “아무래도 안철수가 태풍의 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며 시작한 것이 청춘 콘서트다. 이후 법륜스님이 좌장 역할을 하며 김종인 윤여진 최상룡 등의 인사들을 만났고 이 모임이 최초의 안철수 팀이 된다.
2.7. 진심캠프 합류
2012년 9월 안철수가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진심캠프’를 꾸리자 미래기획위원으로 합류했다. 하지만 안철수는 야권단일화 프레임 속에서 대선승리의 꿈을 접고 새정치추진위원회 를 결성해서 신당창당을 추진하지만, 여의치 않자 2014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당과 합당을 선택. 안철수는 김윤에게 <지방자치단체장 자격심사위원>을 맡겼지만, 내부 공천과정에 실망한 그는 지방선거에서 패배한 새정치민주연합을 다시 탈당한다.
2.8. 박근혜 탄핵과정에서의 역할
2017년 가을 박근혜 탄핵 국면 당시 김윤은 국민의당 전략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탄핵 초기 국면 당시에는 탄핵론이 명확하지 않았다. 탄핵을 걸 것인가? 말 것인가? 가두로 나갈 거냐 말 거냐?를 두고 논쟁이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는 문재인 민주당 대표도 신중론을 펴고 있을 국면이었다. 이때 당시 국회의원, 고위당직자 전체회의를 통해 김윤은 전략위원장으로서 대통령 탄핵을 공식결의하자고 제안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짐으로써 국민의당이 선두에서 탄핵국면을 치고 나가게 된다.
3. 기타 활동
2013년 가회동 골목에 북촌학당(北村學堂) 이라 쓰인 현판을 걸고 학장이 되었다. 나이 오십에 잠시 스스로를 돌아보며 공부에만 전념하고 싶었다는 것이 설립의 심정이었다. 북촌학당은 상당히 잘 되었다. 처음에는 당시(唐詩)를 소리 내어 읽는 모임으로 시작해서 다른 공부 모임들이 계속 만들어졌다. 『중용』, 『주역』, 『도덕경』, 『금강경』 등과 같은 경서(經書) 공부 모임, 『플루타르크 영웅전』 등 역사 공부 모임 및 사상체질과 명리학 공부 모임 등이 만들어졌고 행사도 많이 열렸다. 학당이 비좁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 날이 늘어갔다.
3.1. 방송 출연
2020년 8월부터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고정 출연했다. 민주당 지지층이 주로 듣는 방송에 나가 정부비판에 열을 올린 나머지, 매 방송 때마다 700여개의 댓글 중에 600여 개가 김윤에 대한 악플일 정도로 욕을 많이 먹었다.
나중에는 강성범의 에서도 다루어졌다.
3.2. 저서 : 당시사계64수 (唐詩四季64首)
북촌학당에서 공부하며 함께 읽었던 당시(唐詩)를 묶어 책을 냈다. 청나라의 강희제가 편찬한 『전당시』 중에 계절별로 빼어난 64수를 골라 오늘의 감각에 맞게 번역·해설하여 한 권으로 펴냈다.
[1] “두려웠다. 총소리가 주는 공포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총소리가 들릴 때마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섰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