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국회의원 선거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를 KBS가 정리한 영상.
1. 개요
제18대 국회의원 선거는 2008년 4월 9일 수요일에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로 투표율은 46.1%였다.[1] MB정부 출범 약 2달만에 치러진 허니문 선거로, 투표 당일에 전국적으로 비가 와서 투표율이 더 저조해졌다.
2. 배경
국회의원 지역구를 인구가 늘어난 경기도의 경우 49석에서 51석으로 2곳 늘리고(243→245), 비례대표를 2석 줄여(56→54) 의원 정수를 현행대로 299명으로 유지하는 선거구 획정안을 확정했다. 선거에 참여한 정당은 통합민주당, 한나라당,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창조한국당, 진보신당, 친박연대, 평화통일가정당, 한국사회당 등이었다. 대선이 끝나고 4달만에 치러지는 전국단위선거다 보니 시간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모든 당에서 경선을 치르지 않고 공천했다. 덕분에 공천 파동도 상당한 선거였다.
3. 출구조사
총선 출구조사답게(?) 이때도 한나라당 과반만 맞추고 정작 의석은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 이 당시 출구조사는 KBS와 MBC가 공동으로 출구조사를 진행했고 SBS는 단독 예측 조사를 진행했는데 SBS는 50만명을 표본으로 한 전화여론조사를 진행했다.
KBS와 MBC는 20만명을 대상으로 한 예측 조사를 실시했으며 SBS는 한국갤럽,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50만명을 대상으로 전화 예측 조사를 실시했다. YTN은 한국리서치와 손잡고 사전에 판세조사로 경합도를 판정한 뒤 245개 선거구에 대한 1차 조사를 진행하고 경합도가 높은 지역과 판세 변화가 큰 선거구를 대상으로 2차 조사를 진행하여 예측했다.
당시 각 방송사의 예측 결과는 다음과 같다.
보면 16대 총선과 17대 총선에 이어 방송사에 관계없이(...) 실제 결과와 동떨어진 출구조사 결과를 내 놓았다. 그나마 KBS-MBC의 출구조사가 한나라당/친박연대를 제외한 나머지 정당의 의석 범위를 맞췄고, SBS와 YTN의 예측 조사는 그마저도 빗나갔다.[5] 그리고 엇나간 양상이 '''집권여당 의석 과다예측'''이라는 점으로 동일했다. 물론 방송사의 출구조사 방식과 데이터의 일반성에도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겠지만, 유권자 관점에서 보면 여당 지지자들(단, 어느 정도의 지지율을 유지하는 여당일 경우)에 비해 야당 지지자들은 출구 조사에서 정치 성향을 솔직히 밝히기 꺼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다만 18대 총선의 경우 약간 특이한 점이라면, 보수 진영인 한나라당 예측 의석이 일방적으로 제1야당인 통합민주당으로 바뀌지 않고, 오히려 친박연대,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의 비교섭단체들 및 무소속 의석으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출구조사랑 대비할 때, 한나라당은 예측 범위 밖으로 감소하여 턱걸이 과반(153석) 달성, 민주당은 딱 적정 예측 수준(81석) 달성[6] , 자유선진당(18석), 민주노동당(5석), 무소속(25석)은 예측 범위의 최고값 언저리 달성, 그리고 친박연대(14석)는 예측 범위를 뛰어넘는 의석 획득을 했다.
3.1. 출구조사와 결과가 다르게 나온 지역구
18대 총선 당시 KBS-MBC 출구조사와 실제 당선자가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출구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22개 지역.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
4. 결과
- 지역구별 당선 의원 목록은 "제18대 국회의원"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 비례대표 당선 의원 목록은 "제18대 국회의원"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 지역별 상세 개표 결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 통계를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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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권역별 결과
- 수도권
- 충청권
- 호남권
- TK(대경권)
- PK(부울경권)
- 강원도
- 제주도
5. 분석
18대 총선은 MB정부 출범 2달여만에 치러진 허니문 선거로 당시 뉴타운 열풍이 불며 2000년대 후반 리즈 시절을 누린 보수정당의 화룡점정을 찍은 선거였다. 특히 수도권에서 부진하던 보수정당이 약진한 선거이기도 했다.[33] 이 선거로 여당은 지난 총선 패배를 설욕하면서 집권의 동력을 얻게 된다.
다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명박 정부가 엄청 만족스러워 할 만한 결과는 아니었다. 범보수로는 202석에 육박하는 대승이었지만[34] , 착각하면 안될 것이 한나라당의 의석은 153석으로 과반을 턱걸이한 정도였다. 그리고 나머지 보수정당들은 한나라당과 MB 정부에 우호적이지만은 않았다.[35] 또 친이 후보들 중에서도 수도권 지역의 정치 신인들은 대부분 당선되었지만, 대통령인 이명박을 대신해서 당을 실질적으로 이끌 친이계의 유력 정치인들 중에서는 친박 공천 학살에 대한 역풍으로 낙선한 사람들도 꽤 있었다. 대표적으로 친이계 좌장인 이재오,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고 알려진 이방호 그 외 정종복, 박형준 등이 있었다.
사족으로 대략적인 구도는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와 많이 흡사했다. 범여권의 승리가 이루어졌지만 비주류 보수 후보들이 대경권과 충청도를 중심으로 승리를 거두면서 130명 정도의 주류계파[36] , 50명 정도의 비주류계파[37] 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야권 역시 개헌저지선에서 조금 모자란 정도로 여러 당으로 나뉘어 있었던 것도 공통점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1996년 당시 50석의 자민련은 임기말의 캐스팅보트로서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와 연정을 이루어 정권교체 이후 아슬아슬한 역과반을 확보한 데 반해 2008년은 비주류 세력이 한나라당 내외의 친박 세력과 자유선진당 등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김종필과 같은 구심점이 없었다.[38]
덕분에 친박계와 선진당은 세종시 수정안 문제를 제외하고는 캐스팅보트 역할을 전혀 하지 못했으며, 개헌선 캐스팅보트였던 선진당 역시 개헌이 불발되면서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실제 친박+자유선진당의 교섭단체화나 연대로 심지어 민주당과 함께 내각제 개헌이나 대통령 탄핵, 그걸 제외한 평범한 전략제휴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가정도 있었으나, 세종시 건을 제외하고는 그런 무리수는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 전반적인 흐름은 친이vs친박의 구도 속에 그나마 이해관계가 맞을 땐 직권상정 일명 날치기 시도를 할 때가 많았다.
5.1. 정당별 분석
한나라당은 총선 전후해 장관 후보자들의 자질 논란이 이어지고[39] 친이계와 친박계와의 갈등이 불거지면서 허니문 선거임에도 지지율이 하락 국면을 보여 우려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선거에서 패배할 정도의 지지율은 아직 나오지 않았고, 선거 공약으로 내건 뉴타운 열풍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일며 짭짤한 재미를 보게 된다.[40] 거기에 전년도 성탄절에 발생한 안양 초등생 유괴 살인 사건으로 인해 불거진 아동안전 관련 이슈를 선점하는데 성공[41] 하여 초등 학부모들로부터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덕분에 친박계 무소속 후보나 친박연대 후보자들이 따로 출마해서 사실상 여당 후보가 둘씩 나온 선거구도 꽤 있었지만 이를 극복하고 과반 확보에 성공한다. 물론 선거 초반 일부 언론에선 최대 200석까지 내다보는 대승을 예상하기도 했지만, 친박 공천 학살의 역풍으로 영남권[42] 과 충청권에서[43] 상대적으로 부진하면서 설레발이 되었다.
결론적으로 한나라당은 다시 과반의석을 차지하였지만, 당초 목표였던 절대과반 168석[44] 에 미달하였고 영남에서의 의석 손실과 이 선거 이후의 수도권 민주당 득표율 재상승을 막지 못한다.[45] 또한 친박계와 친이계의 싸움이 본격적으로 불거지면서 한나라당의 수장이 둘이 된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명박의 국정운영이 그렇게 매끄럽지도 못하게 되었다. 덕분에 19대 총선에서도 계파 갈등으로 인한 내홍이 벌어졌고, 그나마 이땐 MB가 대통령이었기 때문에 친박도 친이계를 완전히 밀어내진 못했지만 중진들은 살려주고 초재선 위주로 공천 학살을 단행했다.
통합민주당은 참패했다. 그야말로 흑역사로 남은 선거. 의외로 선거운동기간 중반에는 견제심리에 힘입어 상당수 지역구에서 한나라당을 따라잡는데 성공, 공천한 197곳 중 선거 막판 여론조사를 보면 종로를 비롯해 수도권 상당수 선거구에서 오차범위 내 접전을 벌였고 여당 후보가 사실상 둘 이상 나온 경우도 적지 않아 예상 외 선전을 거둘 수도 있겠다는 낙관론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선거일에는 비가 와 투표율이 고작 46.8%밖에 안나온데다, 뉴타운 열풍으로 수도권에서 당 중진들이 맥을 못추며 줄줄이 낙선, 말 그대로 떡실신을 당하고 만다. 결국 최다 의석이 걸린 수도권에서 후보자들이 줄줄히 낙선하여 참패하는 바람에 197석 공천 가운데 겨우 81석밖에 못 건지게 된다.
이로서 지난 총선 과반이었던 제1당 상실은 기본, 목표인 개헌저지선(100석)에도 12년만에 미달하며 지선, 대선에 이은 쐐기를 박는 3연패를 당했다. 그래도 선거 초반 전망되던 50~60석보다는 많이 건져서 그나마 선전했다는 평을 받았고, 이후 MB정권의 실정에 의해 민주당이 야당 버프를 받으면서 재보궐선거에서 족족 이기며 89석까지 확보하면서 사실상의 개헌저지선을 지켜내긴 했다만, 개헌이 일어나지도 않았고 일반 법안들에서는 계속 끌려다녔으니 큰 의미는 없었다.
이 81석은 역대 제1야당의석 가운데 새정치국민회의(79석) 이래로 최저였다. 새정치국민회의 때는 그래도 전면적인 야권 분열 상황이었고 여소야대라 할 말은 있는 반면, 18대는 야권 분열이 미미했음에도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민주당 81석에 호남 무소속 의원 6석(이무영, 유성엽, 강운태, 박지원, 김영록, 이윤석)과 이후 민주당에 복당하게 되는 강원 속초·고성·양양의 송훈석 의원까지 합쳐 88석이었으니, 15대 총선의 무소속 제외 국민회의 + 민주당 = 95석에도 못 미치는 역대 최저 수준이었다. 여기에 중도정당인 창조한국당 3석과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5석을 넣어도 범야권 도합 96석이라 개헌선에 미달했다.
수도권의 경우, 당 대표였던 손학규를 서울 종로구에, 당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을 서울 동작구 을에 배치하고도 떨어지는 등 유력 인사들이 줄줄이 낙선했다. 뒷심이 부족한 민주당 지지율이 선거 막판에 불어닥친 뉴타운 열풍을 맞아 흔들렸고, 이로 인해 경기도에선 한명숙, 서울특별시에선 김근태, 최재천, 임종석, 이인영 등이 낙선했다. 심지어 관악구, 금천구, 구로구, 도봉구 등 서울 서남쪽과 동북쪽의 민주당 아성도 모두 무너졌다. 보통 민주당계가 유리했던[46] 수도권 111석 가운데 고작 26석만을 건지는 대참패를 당한 셈. 그나마 수도권 득표율은 30~40%대로 지난 대선보단 많이 올라왔고 위성도시에서 상당수 의석을 지켜내어[47] 훗날을 도모할 수 있게 된건 자그마한 위안이었다.
다만 권역별 내용으로 보면 여권분열에 힘입어 제주특별자치도와 충청북도, 강원도에서 선전했고, 부산/경남에서도 지난 총선과 비슷한 2석을 확보하면서 호남 정당으로 쪼그라드는 최악의 경우는 피했다. 특히 무주공산이 된 충청북도와 제주특별자치도는 계속 석권하는 등[48] , 체면치레는 했다. 더불어서 강원도에서도 의석을 확보했는데, 정당 득표율과의 차이를 보면 후보 개개인의 개인기에 가까웠다. 더불어 김해를 포함한 낙동강 벨트에서의 궤멸도 막았다.
한편, 박지원, 이인제, 강운태와 같은 구 민주당 출신들은 이른바 "개혁 공천"에 따라 낙천되자 무소속 출마하여 대거 당선되었으며, 이후 선진당으로 간 이인제를 제외하고 대개 복당했다.[49]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탈당한 정동영이 승리 후 이 루트를 밟았다. 신계륜, 김영환도 무소속 출마에도 불구하고 20%대의 건실한 2위 득표로 결국 복당 후 부활했다. 정읍시의 유성엽은 19대 총선까지 무소속으로 압도적 득표로 살아남은 후 복당. 이윤석, 김영록도 같은 케이스. "공천 학살" 소리까진 안 나왔지만 탄핵사태에 대한 책임을 상당히 물었으니 사실상 (합당을 주도한 인력을 제외한) 구민주계에 대한 복수였던 셈이다.
친박연대는 이른바 "공천 학살"에서 탈락한 서청원, 홍사덕 등의 친박 인사들이 한나라당의 결정에 불복하고 탈당하여 17대 대선 당시 정근모 전 장관을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에 입당한 후 당명을 미래한국당을 거쳐 친박연대로 바꾸고 총선에 출마한 당이다. 덕분에 이념이나 정책이 아닌 그저 개인 숭상을 위해 만든 당이라고 극딜을 당하기도 했지만, 비례대표에선 약 13.2%[50] 를 득표하며 자유선진당을 제치고 지지율 3위를 기록해 지역구에서 당선된 6석[51] 을 비롯해 총 14석의 의석을 확보하게 된다. 게다가 이 숫자에 10여명의 한나라당내 친박과, 김무성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친박 무소속 연대'[52] 12명까지 더하면 40여명에 이르는 무시못할 숫자를 가지게 되었다. 이후 여기서 미래연합, 친박연합 같은 짝퉁들까지 쏟아져나오며 18대 국회의 난장판에 기여했지만, 친박이 한나라당의 당권을 장악하고 새누리당으로 이름까지 바꾼 2012년 19대 총선쯤에 들어서면서부턴 싸그리 정리된다.
충청지역정당으로 사실상 자민련의 바톤을 이어받은 자유선진당은 충청권에서만 14명의 의원을 배출하며 나름 선전했지만, 비례대표는 4명만 당선되며 교섭단체를 이루는데는 실패한다.
창조한국당은 비례대표는 3.8%로 2명의 비례대표가 당선되었고, 당 대표인 문국현 후보가 서울 은평구 을에서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를 꺾고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민주당계 진영에 힘을 보태기는 한참 역부족이었다. 참고로 자유선진당과 창조한국당은 2008년 하반기 선진과 창조의 모임이라는 교섭단체를 만들었지만, 이후 문국현의 의원직 상실과 2009년 8월 심대평의 탈당으로 교섭단체가 무산되고 만다.
저번 총선에서 13%의 비례득표를 올리며 화제를 모았던 민주노동당은 이후 분열로 인해 당이 쪼개지면서 권영길의 수성과 강기갑[53] 의 당선, 그리고 비례대표에서 5.7%를 득표하여 총 5명의 의원을 배출하는데 그친다. 그나마 따지고보면 이것도 꽤 선전한 편으로 진보신당은 노회찬, 심상정이 민주당 후보 출마에 따른 진보 표 분산으로 낙선하면서 지역구에서 한 명의 의원도 배출하지 못했고, 비례대표 득표율에서도 봉쇄조항 3%에 2만표(0.1%) 못 미쳐 원내 진입에 실패한다. [54] 이로서 최상의 시나리오에선 최대 11석[55] 까지 확보할 수 있었던 진보정당은 의석이 원래 10석에서 5석으로 반토막나고 그 전략도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이 각각 야권연대와 독자 생존에 치중하는 전략으로 분화하면서 그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만다.
그 외 기독사랑실천당은 정당해산이 되지 않는 2%를 넘는 득표를 했으며[56] , 한나라당과 함께 전 지역구(!)를 공천한 통일교 휘하의 평화통일가정당은 지역구 0석, 비례대표 1%의 안습한 성적으로 해산되었다. 허경영의 경제공화당은 나오지 않았다.[57]
5.2. 친이계의 운명
일단 이 선거의 승리로 친이계는 분명 한나라당에서 그것도 격차가 꽤 많이 나는 주류 계파가 된다. 허나 18대 국회 말기가 되어서는 오히려 여당 내에서의 주도권을 친박에 빼앗기고 마는데, 이는 친이계에 '''마땅한 차기 대권주자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친이계에서도 이를 알았기에 정운찬이나[58] 오세훈, 김태호 등을 대권주자로 만들어 보려고 부단히 노력을 했으나, 친박의 방해로 번번히 실패하고 만다.
사실 해당 선거부터도 친이계를 겨냥한 표심 이반이 간간히 나타나긴 했는데, 박형준(부산광역시 수영구)[59] , 정종복(경주시), 이재오(은평구을), 이방호(사천시)[60] 등의 친이계 핵심들이 친박계와 야권의 공조로 낙선한 것은 당시엔 대단한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다. 화룡점정은 친박에 제대로 찍힌 이방호 의원의 지역구 서부 경남 사천시에서 민주노동당 강기갑 후보가 당선된 것이었다. 서부 경남은 분명 보수정당 텃밭이었으나, 교외 지역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많은 친박세에 야권세까지 붙으며 이변이 일어나고 만다. 이들 낙선자들은 2010년 재보궐로 복귀한 이재오 정도를 제외하곤 이후 내각이나 청와대에 입각하는 정도에 그쳐, 여의도에 포진해 있던 다른 친이계 핵심들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세도를 부리지 못했다.
어쨌든 친박계 공천학살+친박연대의 약진으로 인하여 친이와 친박 간 갈등은 더 커져서 이쯤 되면 같은 당이라고 하기도 힘든 수준까지 갔고, 국회선진화법도 없는 압도적 과반의석에도 불구하고 18대 국회가 미디어법과 한미 FTA 정도를 빼면 역사에 대단한 족적(?)을 남기지 못한 것도 이 계파 갈등 때문이었다. 여기에 자유선진당까지 끼면서 형성된 복잡한 범보수 내 역학관계가 지리멸렬하던 범진보 야권에 숨통을 틔워주게 되고, 이후 5회 지선의 패배에 이은 친박계 주도의 세종시 수정안 부결로 친이계는 당내 주도권을 거의 상실하고 친박에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그나마 2011년까진 친이계와 가까웠던 홍준표 대표 체제가 출범하며 어찌저찌 명맥은 유지했으나, 이후 오세훈 시장의 런(...)과 재보선 패배, 선관위 디도스 사태로 인한 선거부정 논란 등으로 홍준표 대표 체제가 얼마 못가 붕괴하면서 친박계가 다시 당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박근혜가 비대위원장을 맡게 된 2012년 19대 총선에서 영남권 친이계 의원들은 숙청당하고 수도권 친이계들은 귀환한 탄돌이들에게 밀려 전부 낙선하면서 당의 주도권은 친박에게로 완전히 넘어가고 만다.
6. 여담
선거 관련 기록으로는 30세에 최연소 비례대표 1번으로 당선되었다가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비례대표의 나쁜 예로 지목된 친박연대 양정례 의원, 경기도에서 벌어진 고작 수백표차의 당선/낙선 사례가 있다.#
2008년 시점에서 4년 뒤인 2012년 대선과 총선이 모두 치러지면서, 대통령 임기를 조금만 줄이면 개헌이 가능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보수정당들이 개헌선을 넘지 못하면서 결국 개헌은 이뤄지지 않았다.[61] 사실 넘었어도 딱히 보수진영 내에서조차 확립된 개헌안 자체가 없었던 상황이라 흐지부지됐을 확률이 높긴 하다만. 오히려 개헌찬반론자들은 좌우 가리지 않고 뒤죽박죽 섞여있어 진보진영과 연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해도 국민투표가 남아있어서 말처럼 쉽진 않았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당시 MBC의 일부 여론조사 결과 한나라당이 20대에서 53.1%의 지지를 받았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다는 점이다.# 물론 여론조사란게 으레 그렇듯 신뢰도에 의문점은 있지만[62] , 여튼 이 조사결과에서는 20대가 30대는 물론 40대보다도 높고 50대와 거의 비슷한 지지율을 보였던 셈. 보통 저연령층에서는 진보정당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높고 보수정당의 지지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걸 고려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결과였다. 이는 뉴타운 열풍 등 정권 초기 MB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어느정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63] 또 투표율이 낮은 편이었다는 것을 볼때 보수지지층이 늘어났다기보단 진보지지층이 잠시 이탈한 점이 크다고 보는 것이 맞을지도 모른다.
사실 실제 투표도 아니고 일개 여론조사를 이렇게 언급하는 이유는 이런 여론조사 결과들이 2010년대 들어 본격화된 20대 개새끼론(...)의 시초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19대 총선까지 담론이 이어지면서 "30대 개객끼론", "비수도권 20대 개객끼론"으로 바뀌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엔 결과에 껴맞추기식으로 청소년기에 IMF와 뒤이은 양극화를 맞은 이 세대(80년대 초반생)가 유독 보수성이 높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 20대였던 80년대생들은 되려 가장 '''진보적인 성향의 세대'''가 되었다.# 실제 8년 후 20대 총선에서 이 당시 20대였던 30대의 경우, 새누리당 득표율은 14.9%에 불과했던 반면 야권 득표율은 무려 79.5%에 달했다.#
결과적으로 이후의 관점으로 보았을 때, 20대가 보수화했다는 당시의 논변은 선거 결과의 충격에서 나온 일회성 분석이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진짜 문제는 낮은 투표율. 20대 총선의 20대 투표율은 52.7%[64][65] 인데, 18대 총선의 20대 투표율은 고작 28.1%(...)[66] 였다. 20대에서 보수정당 득표율 수치의 뻥튀기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상황. 고로 당시 정치구도에 실망한 진보 성향 20대 다수가 투표를 포기했다는 분석이 더 타당하다. 8년 사이 20대 투표율이 2배 상승했는데, 그 표의 대다수는 진보 진영에 간 것으로 보인다.[67] 이는 21대 총선에서도 나타나 보수정당은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사실 MB정권이나 한나라당 입장에선 운이 좋았던 선거기도 했는데, 당장 해당 선거 직후부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논란이 커지면서 총선 당시 50%대를 기록했던 MB정권 국정 수행 지지도는 1달 후인 5월 초 20%대, 심지어 6월 초엔 10%대까지 떨어지게 된다.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1~2달 사이에 오간 셈.
7. 국회의원 목록
제18대 국회의원 목록 항목 참조.
8. 관련문서
[1] 이는 2002년 6월 13일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의 기록 48.9%를 깨버린 국내 전국단위 선거 '''사상 최저 투표율'''이다.[2] 진보신당 0~2석.[3] 진보신당 0~5석.[4] 진보신당 1~3석.[5] 일례로 서울 은평구 을에서는 KBS-MBC가 문국현 우세, SBS가 이재오 경합우세, YTN이 이재오 우세를 예측했다. 결과는 문국현의 낙승.[6] KBS-MBC와 YTN의 경우 민주당 예측 범위의 '''중간값'''이 80석이다. 실제 81석과 불과 1석 차이. 민주당의 경우 수도권에선 출구조사 예측보다 부진했지만 강원/충청권에서 예측보다 선전한 결과가 나와 서로 상쇄되었다.[7] 최종 개표 결과 129표차로 18대 총선 최소 표차로 당선.[8] 20대 총선에서는 둘다 당선되어 국회에 나란히 입성하게 되었다.[9] 여담으로 심장수는 8년 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새누리당 공천을 받고 출구조사에서도 근소하게 앞섰지만, 이때도 더불어민주당 조응천 후보가 출구조사를 뒤집고 당선되었다. 개표 진행동안 계속 리드를 유지해 와서 미리 당선증 받으러 선관위 가고 있었지만(...) 사전투표함에서 밀려 낙선했다.[10] 출구조사에서 3위로 예측되었다.[11] 경북 경주시의 지역구 색이 잘못 표시되었다. 친박연대 소속 후보가 당선되었으므로 분홍색으로 표시되었어야 했다.[12] 전남 무안-신안은 무소속 후보 당선 지역이다. 이 기사가 쓰일 당시 승부가 미정이었는지 '접전'이라고 표시되어 있다.[13] 서울 40, 경기 32, 인천 9[14] 경기 1[15] 서울 7, 경기 17, 인천 2[16] 서울 1[17] 경기 1(친박 무소속 연대), 인천 1(친박 무소속 연대)[A] A B C D E F G 비례대표 총 득표율의 합이 100%가 안 되는 이유는 진보신당을 제외한 원외정당 득표율과 무효표를 생략했기 때문이다.(진보신당은 2.9%의 의미있는 득표율을 얻었으므로 집계했다.)[B] A B C D E F G '''지역구''' 합계 의석수 / '''비례대표''' 총 득표율[18] 충북 1[19] 대전 5, 충남 8, 충북 1[20] 대전 1, 충남 1, 충북 6[21] 충남 1(이인제)[22] 광주 7, 전북 9, 전남 9[23] 광주 1, 전북 2, 전남 3 (모두 통합민주당 계열 무소속)[24] 대구 8, 경북 9[25] 대구 3, 경북 1[26] 대구 1 (친박 무소속 연대), 경북 5 (친박 무소속 연대 4, 한나라당 계열 무소속 1)[27] 부산 11, 울산 5, 경남 13[28] 부산 1[29] 부산 1, 경남 1[30] 경남 2[31] 부산 5 (친박 무소속 연대 4, 한나라당 계열 무소속 1), 울산 1 (한나라당 계열 무소속), 경남 1 (친박 무소속 연대)[32] 기타 무소속 2석 (최욱철, 송훈석), 한나라당 계열 무소속 1석[33] 실제 2000~2020년 총선에서 보수정당이 수도권에서 이긴 유일한 선거다. 참고로 이때 수도권에서 당선된 인사들은 주로 친이계였다. 친박계를 공천 학살했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말. 반대로 친박계를 학살했기에 수도권에서 선전했다고 볼 수도 있다.[34] 범 한나라당(한나라당(153석)+친박연대(14석)+친박 무소속 연대(12석)+기타 한나라당계 무소속(4석))은 최대 183석. 그 외 자유선진당 18석, 무소속 1석(이인제). 다만 특히 충청권 의원들의 경우 지역주의로 뭉친게 커서 민주당계 성향 의원들도 있긴 했다. 재보궐을 거치고 자유선진당과 최종 합당이 마무리된 2012년 시점의 새누리당(한나라당) 의석은 176석.[35] 당장 자유선진당만 하더라도 세종시 문제를 놓고 정권과 갈등을 빚으며 이후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등 오히려 민주당계와 연대할 정도였고, 친박연대뿐만 아니라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공천학살을 당했다고는 하나 친이계에 대립하는 당내 친박 인사들이 적지만 일부 살아있었다. 당장 박근혜만 해도 한국미래연합의 쓰린 기억 때문인지 탈당하지 않고 한나라당에 남아있었다.[36] 15대는 민주계(YS), 18대는 친이계. 참고로 15대 국회 시절 종로구 국회의원이었던 이명박은 민주계로 분류되었고, 이후 그의 측근이 된 이재오, 정의화 등과 상도동→친박→범친이가 된 김무성도 민주계로 분류되어, 민주계의 후신이 친이계라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상득, 박희태, 김형오 등 민정당 출신의 친이계 정치인들 또한 김영삼 집권 당시에서는 '신민주계'라는 이름으로 김영삼의 적극적인 지지 세력이었다.[37] 15대는 자민련, 18대는 친박 + 자유선진당.[38]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박근혜와 이회창이라는 구심점이 있긴 했는데, 둘이 사이가 안 좋았다.[39]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한나라당이 야당 시절에 장관 후보자들을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워 낙마시킨 업보가 컸다. 참여정부 시절 장관 후보자들을 한나라당이 위장전입 한두건으로 극딜하면서 낙마 혹은 직전까지 정국을 조성했는데, 한나라당 집권기가 되자 위장전입이 기본 사항이 되면서(...) 역풍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40] 특히 반보수 성향이 원래 강한 (강남 3구 제외한) 서울과 경기 남부 지역에 뉴타운 열풍이 분 것은 한나라당 입장에선 엄청난 호재가 되었다. 일부 호사가들은 이때 당선된 의원들을 보고 타운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41] 안양 사건의 피해 어린이들의 시신이 발견된 지 며칠 후에 일산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성범죄 전과자에게 납치당할 뻔한 사건이 발생하자 이명박 대통령이 일산경찰서를 직접 방문하여 관계자들을 강하게 문책했다.[42] 대경권은 친박연대, 부울경은 부산의 거물급 정치인 김무성이 이끌던 친박 무소속연대에게 일정부분 잠식당했다.[43] 여긴 친이, 친박 갈등보단 충청지역정당 자유선진당의 영향이 컸다.[44] 모든 상임위원회에서 과반을 차지할 수 있는 의석이다. 참고로 이땐 국회선진화법이 가결되기 전이었다.[45] 당장 이 선거를 끝으로 재보궐선거에서 연이어 패배하더니 2년 후 지방선거에선 쐐기를 박게 된다.[46] 2000~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진 유일한 총선이다.[47] 남양주시 2석을 모두 수성했다.[48] 충북은 거의 전석을 차지했다. 유일하게 패배한 곳이 남부의 자유선진당 소속 이용희 의원 정도인데 여긴 지역 기반이 하도 강해서 대책이 없었다. 이용희 의원은 동교동계 출신으로 5선 의원에 76세의 나이에 당선된 최고령 의원. 군수, 지역 도의원, 군의원 등도 사실상 자기가 고르고, 세습까지도 성공했다. 덕분에 충북 보은군, 영동군, 옥천군 별명이 '이용희 나라'(...)인 적도 있었다. 17대 대선에서 정동영을 지원했지만 공심위가 매몰차게 버리자 자유선진당으로 들어가 당선되었고 이후 다시 탈당하여 복당하면서 차남 이재한을 민주당에 입당시켰다.[49] 이인제는 충청남도 논산시/계룡시/금산군에서 한나라, 민주, 친박, 자유선진당의 네 후보와 모두 싸우며 27.7%이란 역대 총선 최저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 이전 최저 기록은 역시 충청권인 대전광역시 유성구 이상민의 32.1%) 반면 광주광역시 동구의 박주선 의원은 구 민주당 출신으로 옥중 출마에서도 늘 생환한 실력답게 88.74%의 경이로운 득표율을 올렸다.[50] 지난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득표한 비율과 거의 일치한다. 다만 18대는 투표율 자체가 많이 낮은 선거였다보니 총 득표수 자체는 민노당이 많이 앞섰다.[51] 대구3석, 경북1석, 부산1석, 경기1석. 사실상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보수텃밭이라는 점에서 친이vs친박 진검승부가 벌어진 셈인데, 영남 지역구 경쟁에선 한나라당이 대거 석권하며 사실상 패한 셈. 다만 이방호, 정종복 같은 친이계 핵심인사들을 떨궜다는 작은 소득은 있었다.[52] 2008년의 김무성은 서청원 다음가는 친박 핵심에다, 상도동계 출신으로(서청원과 함께 상도동계에서 친박으로 간 드문 케이스) 부울경에서도 정치적 위상이 꽤 높았다. 또한 김무성은 서청원, 최경환, 유승민 등 다른 친박 핵심들과 다르게 독자 생존이 가능했기 때문에 스스로 부울경 지역 친박 정치인들을 모아 무소속 연대를 만들고, 이들 중 상당수가 당선되어 한나라당으로 무사히 복당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친박 무소속 연대를 친무의 기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바로 다음 선거 때도 김무성을 중심으로 자유선진당 출신 충청권 의원들과 수도권이나 부울경 지역의 공천에서 탈락한 친이계 의원들이 모여 비박 범우파 신당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가 있었으나, 그 때는 워낙 판세가 새누리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던 때라 보수 분열 대신 힘을 모아주는 결정을 할 수 밖에 없었다.[53] 당시 지역구는 친이계의 거물이었던 이방호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공천학살을 당한 친박의 앙심이 이방호를 떨어뜨리려는 수단으로 강기갑을 팍팍 밀어주는 촌극 끝에 신승하였다.[54] 그런데 차기 총선에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다만 이 무렵에는 노회찬, 심상정 등이 통합진보당으로 빠졌고, 결국 득표율 2%에 못미쳐 해산되었다.[55] 기존 민노당 5석 + 진보신당 3% 비례 2석 + 노회찬, 심상정 + 조승수, 김선동. 이 숫자는 다음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이 얻은 13석과 큰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실질적으론 더 많은 것이다. (참여계, 시민사회계 숫자를 제하면 10~11석으로 동일.)[56] 이는 17대보다 1% 오른 것.[57] 사실 이 무렵 허경영은 선거법 위반과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되었고 추후 복귀한다.[58] 서울대 총장 출신으로 이명박 정부 총리를 지내며 친이계가 차기 대권주자로 가장 공을 들인 인물이기도 했다. 허나 원래 민주당계 성향으로 알려졌던 인물인지라 당시 야권 지지층에선 배신자 소리를 듣기도 했다. [59] 이후 이명박 정부에서 청와대 정무수석을 지낸다.[60]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한나라당의 사무총장으로 친박계 공천 학살을 주도했다는 평을 받았다.[61] 2011년 초에 개헌 논의가 이루어지기도 했으나 당시 유력대선주자였던 박근혜와 친박연대, 제1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반대로 무산되었다.[62] 당장 기사에 나오는 여론조사 기관부터가 공신력이 떨어지는 비교적 무명 회사고, 같은 시기 조사했다는 한겨레 조사만 봐도 20대의 한나라당 지지가 42.4%로 확 떨어진다. 게다가 이 당시 각종 선거 결과를 보면 원래 여론조사에서 진보 지지층이 보수보다 한 5~15% 정도 낮게 나온다는 점도 감안해야한다.[63] 사실 박근혜 정부 전후한 2010년대 모든 선거에서 20~40대 지지율은 꾸준히 민주당쪽이 높았다는걸 감안하면, 그래도 이념상 보수정당내 민주계 등 개혁보수 세력이 지지하던 MB정부에 대한 상대적 젊은층 호감도가 투영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64] 20대 초반: 55.3%, 20대 후반: 49.8% / 전체투표율: 58.0%[65] 20대 초반 투표율이 후반보다 높은 이유는 군인표가 포함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느 선거에서나 동일.[66] 20대 초반: 32.9%, 20대 후반: 24.2%(...) / 전체투표율: 46.1%[67] 20대 총선의 비례대표 출구조사 결과, 20대에서 새누리당 득표율은 16%에 불과했고 野3당(더민주+국민의당+정의당)은 76%가 나왔다. 그리고 위의 본문에도 언급되었듯 30대(8년전 20대였던 세대)에선 오히려 현재 20대보다 새누리 지지율이 더 낮게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