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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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노동·민주운동가, 학자 출신 정치인.
제33대 보건복지부 장관과 제31대 경기도지사를 지냈고, 옛 민주당, 바른미래당 대표를 역임하기도 한 거물급 정치인이다. 사실상 대통령, 국무총리 빼고 어지간한 자리는 다 해봤다. YS 키즈의 일원.[1]
'''17대 대선, 18대 대선 모두 민주당계 정당의 유력 후보였으나 두 차례 모두 당내 경선 패배(2위)로 후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19대 대선에서 당적을 변경하여 대선후보 경선에 나갔지만 탈락하면서, 대선 주요 후보로 거론된 11년, 3회의 대선 동안 한 번도 후보조차 되지 못한 정치가가 되었다. 유례 없는 기록이다. 1997년 15대 대선 이래 '''야당 인생만 20년에 또 5년을 추가하게 되었다.'''[2]
2014년 재보궐선거에서 낙선 이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전남 강진군 '''만덕산'''에서 은둔하며 지냈으나, 꾸준히 복귀설이 흘러나왔다.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 '만덕산'이다.
2016년 4월 20대 총선 직전 더불어민주당에서 복귀해달라고 요청했으나, 이를 거부했고 결국 복귀 타이밍을 놓쳤다. 민주당이 총선에서 패배하면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문재인과 안철수가 사퇴할 테니 그 빈 공간을 자신이 채우면 된다는 작전이었던 것 같으나 민주당이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행보가 꼬였다.
갈지자 행보로 비판받기는 해도, 인성이나 능력면에서는 반대편 진영에서도 인정할 정도다. 거꾸로 말하면 큰 인성 결함이나 논란이 될 사건이 없고 정책 수행능력이 좋은데도 어느 순간부터 정치인으로서 매력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그나마의 인망도 바른미래당 말기의 독선적 행보로 결함이 생기게 된다.
2. 일생
3. 손학규계
민주당(2008년) 시절에는 손학규계를 이끄는 당내 대주주 중 한 사람이었다. 만덕산으로 은둔한 이후에도 손학규계는 건재하여, 20대 총선 직후까지만 해도 언론에서는 손학규계를 14명[3] 정도로 꼽았다.
하지만 이후의 엇박자로 손학규를 따라 실제로 탈당한 현역 정치인은 이찬열 의원과 박우섭 인천 남구청장 단 두 명 뿐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당내 결속을 위해 손학규계를 대폭 끌어안았고#,결국 제19대 대통령 선거가 문재인의 승리로 끝나면서 사실상 손학규계는 와해되었다.[4]
4. 손학규 징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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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행보를 보일 때 심사숙고를 하는 편이다. 심사숙고 자체는 문제가 안 되는데, 결정을 내리는 시점을 전후해서, 더 큰 일이 터져서 행보 자체가 묻혀버리는 경우가 많다. '장고 끝에 악수 둔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하도 타이밍이 절묘한 경우가 잦다 보니 '''타이밍의 마술사'''라는 반어적 별명이 붙었고 여러 언론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 ## ### 아예 '손학규가 움직이면 나라에 큰일이 터진다'는 농담까지 나올 정도다.'''타이밍의 마술사, 손학규'''
다음은 손학규 징크스의 구체적 사례들을 나열한 것이다.
- 2006년 민심대장정 → 북한 1차 핵실험
- 2007년 광개토전략 → 고건 불출마 선언
- 2007년 한나라당 탈당 → 한미 FTA 타결
- 2010년 민간인 사찰 농성 → 연평도 포격 사태
- 2011년 국회 쇄신안 → 31개 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 2016년 복귀 및 개헌 제안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 박근혜 대통령 탄핵 정국
- 2017년 국민의당 입당 → 이재용 구속 수감
- 2017 대선 공약 발표 → 사드 배치, 김종인 민주당 탈당
- 2017년 북한 핵보유국 인정 발언 → 이명박 정부 정치계 블랙리스트, 화이트리스트 공개
- 2017년 미국서 귀국 →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사고
- 2018년 정초 산행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우연히 조우 → 북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발표
- 국민의당 - 바른정당 통합 찬성 의견 발표 → 이명박 정부 당시 김태영 국방부 장관의 UAE 파병 비밀협약 인정
-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바른미래당 선거대책위원장직 수락 →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논란, 박진영의 개신교계 사이비종교 구원파(권신찬-유병언계) 전도 논란
- 송파을 보궐 선거 출마 선언 → 2018 북미정상회담 취소
- 송파을 보궐 선거 출마 번복 →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2018년 북미정상회담 재개 가능성 타진, 다음 날 2018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 바른미래당 당대표 출마 선언 → 태풍 솔릭,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폼페이오 장관 방북 취소 명령
- 바른미래당 당대표 당선 → 청와대 대북 특별사절단 발표, 손흥민 군면제,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폐회식
- 국회 로비 단식농성 → 강릉선 KTX 열차 탈선 사고[5]
- 이학재 의원, 류성걸 전 의원 탈당 → 강릉 펜션 일산화탄소 누출 사고
- 2019년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당내에서 제기되는 대표 퇴진론을 일축', 퇴전거부하며 "계파주의 굴목 안해" → 이재명 직권남용 및 선거법위반 1심 무죄, KIA 타이거즈 김기태 감독 자진사퇴
- 2019년 자칭 '손학규 선언' →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딸 조민에 대한 의혹이 논란이 됨.
- 바른미래당 대표 취임 1주년 →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의 무제한 기자간담회
- 유승민 발언 비판 기자회견 및 여야 영수회담 제안 → 봉준호 감독 오스카 각본상 감독상 작품상 국제영화상 수상
- 바른미래당 대표직 사퇴 및 합당 수용 →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환자 100명 돌파
- 민생당 상임선대위원장직 사퇴 →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온라인 개학 및 등교 개학 무기한 연기
- 2020년 12월 31일 이명박, 박근혜 사면 주장 → 2021년 1월 1일 이낙연의 "이명박, 박근혜 사면 건의할 것" 발언
북한 1차 핵실험이나 2016년까지의 사례는 그럴 듯하나, 이후의 사례는 타이밍이 문제가 아니라 손학규 본인이 그냥 쩌리 정치인으로 전락했기에 아무런 관심을 못 받는 것이다.
4.1.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직전 정계 복귀
제20대 총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면서 정계 복귀 타이밍은 제대로 꼬여버렸고, 결국 2016년 10월 20일에 만덕산이 내려가라고 한다며 개헌론을 꺼내들고 정계 복귀를 선언하였다.
그런데 그 직후인 10월 24일에 '''최순실 태블릿 보도가 터지면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때부터 손학규의 별명은 만덕산이 되었으며, '만덕산'이라는 명사는 '무슨 결정을 하면 바로 큰일이 터져 아웃 오브 안중이 되어버리는 상황'을 말하는 정치적 용어가 되었다.
4.2. 국민의당 입당
탄핵 정국에서 국민의당의 호남계 의원들은 안철수에 대항할 만한 당내 대선 주자로, 안철수계 의원들은 경선 흥행을 위한 카드로서 손학규를 1순위 영입 대상으로 두고 있었다. 손학규는 2017년 2월 17일 국민의당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바로 그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특검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다. 게다가 며칠 전부터 북한에서 미사일을 날려보내고 김정남이 죽어버리는 등 북한발 뉴스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여론은 손학규에게까지 관심을 줄 여유가 없었다.
4.3. 바른미래당 대표 출마 선언
2018년 8월 8일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바른미래당 당대표에 출마를 선언했다. 치욕과 수모를 감내하고서라도 당을 위해 헌신하며 양 극단의 정치를 끝내겠다는 요지의 연설을 남겼다. 하지만 세간의 관심은 이번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에 쏠려있는 듯. 실제로 JTBC는 아예 대놓고 손학규 징크스를 운운하며 이번엔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4.4. 민생당 출범
바른미래당, 민주평화당, 대안신당 세 정당의 통합정당인 민생당이 2020년 2월 17일 출범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합의 막판(창당 예정일)에 손학규 측[6] 의 단순 호남 3당 합당은 의미가 없다며 중도의 빅텐트 통합을 하자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합의가 결렬되거나, 바른미래당 일부 통합 찬성파가 탈당하여 민생당에 합류할 것으로 보인다.
손학규의 퇴진요구 수용으로 통합은 이루어 질 것으로 보이나, 손학규가 통합 거부 선언을 한 다음날, '''신천지 대구교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을 시작으로 대경권을 중심으로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확산되었다.'''
4.5. 또 다른 징크스
민주계 정당으로 옮긴 후 대선 후보 경선에 3회 참여했는데, 자신은 경선에서 탈락하고 경선에서 손학규를 이긴 후보는 본선에서 낙선하는 징크스가 있다.
-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 대통합민주신당 후보 정동영이 2위
-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민주통합당 후보 문재인이 2위
-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국민의당 후보 안철수가 3위
5. 평가
시류에 어둡고 정치적 감각이 떨어진다. 총리나 장관 같은 임명직 관료에 맞는 사람이 선출직을 노리다 보니 생기는 비극(?)의 주인공.[7] 정치적 감각 문제로 지속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반복했으며, 결국 그게 누적되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즉, 일부 사람들에게 인식되었던 못 뽑혀서 그렇지 능력과 인성은 괜찮은 이미지마저 점차 사라져 가 재기하기 어려워졌다.'''"자신만의 브랜드를 보여주기에 부족했다”'''
2007년 1월 10일 경향신문 "손학규 인터뷰 평가"#
사실 민주자유당에서 정치를 시작한 만큼 보수층으로의 확장성도 있고, 한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경기도의 도지사를 역임했다는 점에서 수도권에서의 득표력도 기대해볼 만하며, 도지사 및 장관 재직 경험을 통해 행정 능력까지 입증했다는 점에서 '저평가 우량주'로 평가받았'''었'''다. 그러나 2007년에는 한나라당에서 이명박과 박근혜 양강에 밀리고, 진영을 옮겨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유력 주자로 부상했으나 조직표를 끌어모은 정동영에게 밀려버렸다. 2012년의 경우는 더욱 허망한데, 2010년~2011년 민주당 대표를 지내면서 2011년 4월 재보궐 선거에서 '험지' 분당을 당선에도 성공했으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재부상한 친노계에게 장외 주도권을 내준 결과,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참신한 슬로건을 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문재인에게 큰 차이로 패하고 만다. 마지막 시도에서는 2016년 국민의당 창당 과정 및 20대 총선에서 애매한 태도로 일관한 결과, 대권주자로서의 존재감이 실종되기에 이르렀다.
썰전에서 이철희 소장이 말하기로는, 손학규는 대통령감이지만 정치에 무른 편이라고 한다. 이유는 너무 신사라서 즉 정치 투쟁에 밀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판에 20년 있었던 사람에게 신사라서 투쟁에 밀린다는 말은 결국 칭찬이 아니다.[8] 제대로 말하면 당내의 여론을 주도하는 코어 지지층에 인기가 부족한 스타일이다. 이제 70을 훌쩍 넘은 고령이라는 점도 걸림돌로 작용한다. 보수층과 수도권에서 먹히는 강점이 있다는 말이 무색하게 2014년 7.30 재보궐 선거 때 새누리당의 신인 김용남 후보에게 깨졌다는 점[9] 에서 실제 확장성에 의문이 있기는 하다.
잦은 수준은 아니지만 근본적으로 두 차례 양대 정당을 떠나고 나서 국민들이 지지할만한 신뢰를 얻지 못한 것도 문제였다. 노무현 대통령을 "경제를 포기한 대통령"(일명 경포대 발언)으로 비판하고는 정작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하면서 민주당 최대지분의 친노계를 자극했다는 것이다.[10] 어쩔 수 없이 건너온 철새정치인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이명박 정권 교체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가 점점 오르고, 사망 이후로는 거의 절정으로 오르면서 "노 전 대통령께 결례를 범했다"고 사과를 했지만, 근 8년 간의 꾸준한 행보에도 국민의당으로 이적할 때까지 친노계의 불신은 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이명박도 권좌에서 내려온 뒤에, "그 사람도 참.. 한나라당에 남았으면 대권후보까지 되었을 건데.. 괜히 옮겨가지고.."라는 말까지 했다.[11] 다만 한나라당에서 나올 당시의 손학규는 이명박의 친이계와 박근혜로 대표되는 친박계 양쪽 모두에게 적대당하며 '''한나라당 내에서 정치적으로 끝장난 상태였다.''' 일례로 이명박은 손학규의 탈당에 대해 "당에 남더라도 시베리아가 기다리고 있을 것"라고 냉소했을 정도.# 그러므로 훗날 이명박이 한 말은 진심으로 안타까워서라기보단 "그러길래 나한테 숙이면 편했을텐데..." 정도의 조롱으로도 볼 수 있다.[12]
추후에는 결국 아래의 논란거리로 인해 구 국민의당 출신이었던 안철수계까지 포함해 바른미래당을 이탈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최측근이었던 이찬열마저 손학규에게 등을 돌리고 결별하고 말았다.[13] 최측근이었던 이찬열마저 손학규를 등지게 된 것은 손학규에게는 엄청난 타격이며, 대중들이 손학규를 이제는 은퇴해야할 정치인 중 하나로 보고 있고, 다른 의원 보좌진들에게 손규라는 멸칭[14] 으로 불리는 등 비아냥의 대상이 되어비린 이상, 호남계열 정당과 합당해서 정치생명 자체는 좀 더 유지하더라도 예전의 위상을 되찾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민생당이 합당 이후 총선에서 민생당은 씨도 싹도 없이 단 한 석도 못 건진 채 아예 전멸했다.[15]
6. 논란
7. 선거 이력
8. 소속 정당
9.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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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학규와 찍새 딱새들: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끝나고 퇴임하면서 출간한 책.
- 대한민국 손학규를 발견하다: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발간한 책이다.
- 저녁이 있는 삶 - 손학규의 민생경제론 :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할 때 내놓은 책이다.[26]
10. 여담
- 흔치 않게 이인제처럼 육군 현역병 출신으로 병장 만기 제대를 하였다. 무려 35개월 동안 복무하였으며 본인도 전역 당시에도 예비군복을 입고 오전 근무한 후에 집에 갔다고 하면서 나름대로 군 복무를 열심히 한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 정계의 잠룡 혹은 거물이라고 불리는 인물답게 고정적인 지지층이 있으며 지지자들의 손학규를 향한 마음은 일편단심이다. 매 경선에서 고배를 마셔도 '우리의 가슴 속 영원한 대통령은 손학규 의원님'이라며 위로와 응원을 할 정도.
- 이명박 전 대통령 및 이재오 전 특임장관과는 6.3 항쟁때부터 알고 있어 친분이 있는 사이이다. 오히려 세 사람이 한솥밥을 먹던 신한국당-한나라당 시절에는 이 세 사람 모두 상호간에 허물이 없는 매우 친한 사이었다. 이재오는 이명박을 도우면서 친이계의 좌장이 되었고, 손학규는 민주당계 정당의 당적으로 이동하면서 예전보다 사이가 멀어졌지만 이명박과 이재오도 손학규에 대해서는 최근까지도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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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21일 바른미래당이 6.13 지방선거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회 발대식 및 전국 공천자 대회'를 열었는데, 바른미래당 중앙선대위원장을 맡은 손학규가 이날 문재인 정부의 경제 정책을 호되게 비판하는 일장 연설을 했는데, 바른미래당이 아닌 바른민주당으로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때까지야 그냥 말실수를 했으려니 했다. 그런데 2019년 4월 9일에는 바른정당 계열의 당 최고위원들이 손학규 당 대표에게 4.3 재보선 패배 책임을 물어 사퇴를 종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단호히 거부하면서 바른미래당에 대한 애정을 역설하는 와중, 당명을 바른미래당이 아닌 더불어민주당이라고 말하는 실수를 또다시 저질렀다. 유튜브 영상. 1분 26초부터 흥분해서 한 실수라지만 일각에서는 '손 대표가 사실은 민주당으로 돌아가길 갈망하고 있는 게 아니냐'하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강적들 256회에 진보 패널로 출연해서 자유한국당은 사실상 죽은 정당이며 다음 총선 에서 자신들의 중도 정당이 원내 제2당이자 새로운 거대양당 체제를 이룰것이고 지금의 우파 정당은 소멸될것이라고 독설을 날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21대 총선 에서 자유한국당은 미래통합당으로 보수통합을 이룬 후에 비록 패배했지만 의석수 100석 이상[27][28] 을 지켜내며 보수의 명맥을 유지하며 영남권의 패권을 다시금 가져오는 것은 물론이고 거대 양당 체제 유지에 성공한데 비해 한국당이 죽은 정당이라고 독설을 날렸던 본인은 당대표로써 바른미래당을 파탄내고 국민의당에서 갈라져나온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다시 합쳐서 민생당으로 어찌어찌 재탄생시켰지만 총선에서는 의석수 0석이라는 처참한 성적으로 원내에서 축출되면서 정작 본인의 정당이 죽은 정당이 되고 말았다.
11. 둘러보기
[1] 이명박, 이재오 등의 인물들도 이에 포함된다. 노무현, 손학규, 이명박, 이재오, 이회창은 김영삼이 발탁하긴 했으나, 이들은 김영삼 직계보다 외부 영입인재로 분류되기에 상도동계가 아닌 YS 키즈로 분류한다. 김무성 외에는 강삼재, 김덕룡 등이 대표적인 상도동계 인사이다.[2] 한나라당 시절 당의 총재던 이회창이 1997년과 2002년 각각 김대중, 노무현에게 패배하여 당이 여당에서 제1야당으로 밀려났었고, 대통합민주신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입당하지 않아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 아니었다.[3] 해당 링크는 일요시사 기사지만 그외 언론 기사들에서도 손학규계의 숫자는 엇비슷했다.[4] 이후 이찬열 의원은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했고 박우섭 전 구청장은 더불어민주당에 복당하여, 계파는 고사하고 단기필마로 혼자 남은 신세가 되었다.[5] 다만 이건 더불어민주당에게 선거구제 개편을 약속 받으면서 소기의 성과를 얻었다. 자유한국당이 여전히 반대하지만.[6] 바른미래당 전부가 아니다.[7] 사실 총리같은 상급 임명직은 결국 임명시킬 사람의 눈에 들어야 하는 고로 정치적 감각이 필요하긴 하다. 손학규가 그 정도의 감각을 지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8] 비슷한 시기 민주당 대표를 지냈던 정세균 전 국회의장의 사례도 참고할 만 하다. 정세균 역시 누구에게나 알려진 정계의 신사로서 여야 어느 쪽에서건 적을 만들지 않기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국회의원 최대 영예인 국회의장 직을 마치고도 관례인 정계은퇴에 나서지 않고 계속 정치활동을 시도하고 있다. 물론 이는 정세균의 지역기반이 호남이며, 정당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신사'형 정치인은 결국 대통령감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9] 물론 상술한 대로 수원 병 선거구는 남평우 - 남경필 부자의 근거지였던 곳이라 어느 야당의 인물이 출마했어도 이기기 힘든 지역이었다. 게다가 뜬끔없는 전략공천도 겹치고. 그러나 새누리당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다른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더불어민주당 김영진 후보가 당선되며 마침내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입성하게 됐다.[10] 노무현 대통령 본인도 회고에서 "한나라당에서 나를 가리켜 경포대라고 했다. 나도 예전에 사실을 잘못 알고 비판한 경우가 더러 있었다. 하지만 고의로 사실을 왜곡해서 남을 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말을 한 분이 당을 옮겨 이쪽으로 건너왔다. 할 말이 없었다"라고 대놓고 비판을 가했으며, 2007년 대선 당시에 대통합민주신당 경선에 나선 유시민은 손학규를 '''"보따리 장수"'''라고 비판했다.[11] 실제로 이명박은 박근혜에게는 탄핵 소추 가결 직후, '본인이 뭐라고 하든 전 국민들이 다 알고 있으니 순리대로 따르면 된다'고 비아냥대며 박근혜를 비난한 바 있지만, 손학규에 대해서는 개인적인 친분을 드러내면서 상당한 아쉬움을 표현했다.[12] 물론 손학규가 탈당하면서 이렇다할 비박 주자가 사라진 이명박으로서는 박근혜에서 정권을 넘겨주는 것이 아쉬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렇게 되었다고 정말 손학규가 대권 후보가 될 수 있었느냐는 다른 문제. 만약 손학규가 한나라당에 남아었다면, 2007년 대선 경선에서 4위로 사실상 꼴찌를 했던 홍준표의 현실이 손학규의 미래에 가까웠을 것이다. 이명박은 대통령이 당선된 직후에도 차기 대선 주자로 이재오와 정운찬 같은 본인과 성향이 잘 맞으면서 친밀한 최측근을 지지했던 만큼, 손학규가 홍준표처럼 친이계와 같은 배를 탔다고 해도, 손학규가 이명박 정부 말기 인기도가 떨어진 친이계와 강력한 콘크리트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는 친박계 사이에서 투쟁하면서 본인의 확고한 지지층을 만들어 차기 대선주자로서 입지를 강력하게 확보하지 못했다면, 한나라당의 차기 대권주자가 되기는커녕 계파도 만들지 못하고 당시 당 대표 체제가 무너지며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면서 차기 대권 주자의 꿈을 접었던 홍준표와 비슷한 처지가 되었을 확률이 높다. 나중에 홍준표가 대선에 나가고 다시 당권을 잡긴 했지만 그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친박 계파가 아예 개발살나고 보수 진영 자체가 궤멸 위기에 놓인 시점에서 빈집털이를 한 거나 다름없는 일이니...[13] 언론사 쪽과 손학규와의 통화에 의하면, 이찬열이 자유한국당 측으로부터 영입 제의를 받고 나서 탈당했다고 한다.[14] 손학규에게 모두가 ''''학'을 떼며 떠나갔다'''고 해서 학을 제외한 손규(...)[15] 앞서 상술했듯 손학규의 바른미래당 대표 시절 독단적인 당 운영이 당내 여러 인재풀의 이탈을 불러오면서 결국 민생당의 총선 전멸에 한 몫 톡톡히 했다.[16] 전임자 윤항렬 의원 작고[17] 1998.4.6 사퇴 (경기지사 선거 출마)[18] 2002.5 사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19] 전임자 임태희 청와대 대통령실장 임명으로 사퇴[20] 전임자 남경필 의원이 경기도지사 선거 출마로 사퇴. 이후 정계 은퇴 선언[21] 민주당(2007년)에 신설 합당[22] 시민통합당과 신설 합당[23] 새정치민주연합에 흡수 합당[24] 바른정당과 신설 합당[25] 민주평화당, 대안신당과 신설 합당[26] 이 "저녁이 있는 삶"은 워라밸로 이어지는 등 상당히 성공적인 구호였으나 역시 후보 본인의 이미지 상승에는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27] 선거 직후 기준 비례위성정당 미래한국당 포함 103석. 현재는 미래한국당을 흡수하여 단독 103석이다.[28] 2년 전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비하면 이 결과는 양호한 편이다. 이전 지방선거를 총선으로 환산 시 더불어민주당은 가뿐히 230석을 넘기며, 미래통합당의 개헌선은 무너지는 결과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