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1872)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1906년 신민회에 가입해 양기탁, 이동녕, 전덕기 등 동지들과 함께 구국운동을 전개하다 각 지방 의병운동의 연락 책임을 맡았다.
1909년에는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이시영·이석영·이회영·이상룡·주진수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촌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1910년 4월에 삼원보에 민간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훈련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민회에서 준비하기로 한 학교운영자금 75만 원이 도착하지 않고 또한 대흉작이 들어 이곳의 동지들이 봉천·노령 등지로 떠날 때에도 윤기섭과 함께 남아 온갖 고생을 견뎌가며 학교를 계속 유지케하였다.
그러나 1911년 국내에 입국했다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무죄방면된 후에는 배재학당 및 오산학교의 체육을 맡아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다 1914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윤기섭, 이천민(李天民) 등과 함께 신흥학교의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보병중위 지청천, 기병중위 김경천,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위 신팔균, 운남강무당 기병과 출신 이범석 등과 협력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12월 일제의 간도 참변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대한독립군단 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2월에는 대한통군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2년 6월에는 서로군정서의용군 총지휘관으로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조직하고 통일의 절대 필요성을 주장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동년 8월에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함에 그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부감 김혁(金赫) 등과 함께 통의부군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 2월 12일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통의부 대표로 김이제(金利濟)와 함께 참석하여 여러 대표들과 같이 민족의 주권확립,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길림에서 통의부·길림민회(吉林民會) 등을 토대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재무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포사회의 치안확보 및 독립군의 국내 진격을 추진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1932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반만군(抗日反滿軍)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이때 김창환은 부사령으로서 총사령 지청천을 보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만주가 일본군의 장악하에 들어가자 여러 동지들과 남징으로 망명하였다. 1935년 여름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 등이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김규식·양기탁·지청천·신익희 등과 협력하여 주요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2월에는 현익철·양기탁·이복원(李復源) 등과 합의하여 전당비상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적색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켜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이라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7년 2월 12일 난징에서 과로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창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김창환은 1872년 4월 9일 경기도 광주군에서 김계현(金啓鉉)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렸을 때 한문을 수학했고 1899년경 대한제국 육군에 입대해 부위(副尉)를 역임했다. 1905년 1909년에는 신민회의 만주 이주계획에 따라 이시영·이석영·이회영·이상룡·주진수 등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요녕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촌에 도착하여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전념하였다. 1910년 4월에 삼원보에 민간자치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였고 그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치하여 국내에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훈련하였다. 그 과정에서 신민회에서 준비하기로 한 학교운영자금 75만 원이 도착하지 않고 또한 대흉작이 들어 이곳의 동지들이 봉천·노령 등지로 떠날 때에도 윤기섭과 함께 남아 온갖 고생을 견뎌가며 학교를 계속 유지케하였다.
그러나 1911년 국내에 입국했다가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참혹한 고문을 당하였으며, 무죄방면된 후에는 배재학당 및 오산학교의 체육을 맡아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시켰다. 그러다 1914년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이시영, 윤기섭, 이천민(李天民) 등과 함께 신흥학교의 교관으로서 학생들에게 군사훈련을 실시했으며, 일본군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 보병중위 지청천, 기병중위 김경천, 대한제국 육군 보병 부위 신팔균, 운남강무당 기병과 출신 이범석 등과 협력하여 독립군 양성에 주력했다.
1920년 12월 일제의 간도 참변을 피해 북만주 밀산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대한독립군단 대대장에 임명되었으며, 1922년 2월에는 대한통군부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22년 6월에는 서로군정서의용군 총지휘관으로서 남만통일회(南滿統一會)를 조직하고 통일의 절대 필요성을 주장한 결의안을 발표하였다. 이에 동년 8월에 남만주의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이 모여 통의부(統義府)를 조직함에 그 사령장(司令長)에 임명되어 군사부장 양규열(梁圭烈), 부감 김혁(金赫) 등과 함께 통의부군을 지휘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1923년 2월 12일에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 통의부 대표로 김이제(金利濟)와 함께 참석하여 여러 대표들과 같이 민족의 주권확립, 독립운동 노선의 통일 등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뚜렷한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만주로 돌아왔다. 1925년 길림에서 통의부·길림민회(吉林民會) 등을 토대로 정의부(正義府)가 조직되었을 때에는 재무위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동포사회의 치안확보 및 독립군의 국내 진격을 추진하였다.
1931년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하자, 1932년 한국독립군은 중국의 항일반만군(抗日反滿軍)과 연합하여 일본군에 맞섰다. 이때 김창환은 부사령으로서 총사령 지청천을 보필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만주가 일본군의 장악하에 들어가자 여러 동지들과 남징으로 망명하였다. 1935년 여름에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의열단·미주대한인독립단(美洲大韓人獨立團) 등이 통합하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이 조직되자, 김규식·양기탁·지청천·신익희 등과 협력하여 주요간부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2월에는 현익철·양기탁·이복원(李復源) 등과 합의하여 전당비상 대표회의를 개최하고 적색분자를 숙청하는 운동을 일으켜 한국민족혁명당(韓國民族革命黨)이라 개칭하고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그러나 1937년 2월 12일 난징에서 과로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창환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