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경(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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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대한민국 도시빈민 인권운동의 대모이다.
그녀의 가족은 해주에서 살다가 한국전쟁 이후 인천 동구 화수동에 정착한 실향민 가정이다. 16세부터 천주교를 믿었으며 20세에 성당에서 협동조합 교육을 접했다.
1967년부터 사직터널 주변 개미마을에서 천주교 포교와 교리교육을 하며 지내다가 연세대학교 도시빈민연구소가 생긴 직후 연구소 소속으로 활동가 훈련[1] 을 받는 한편 창신동에서 본격적인 도시빈민운동을 펼치게 된다.
창신동 재개발구역에 거주하는 여성들과 함께 재개발에 맞서서[2] 서울시청으로 하여금 결국 서민아파트를 건설하도록 하였으며 청계천 뚝방에서는 부당한 육성회비 납부거부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1972년 신림동 달동네로 이사한 후에는 난곡희망의료협동조합 설립과 신용협동조합 설립운동, 청소년 공부방과 주민교육운동 등을 추진하였는데 달동네에서 펼쳐지는 대부분의 운동 모델을 김혜경이 제공하였다.
1987년 이후에는 국가보안법철폐운동과 지역의료보험도입, 의료보험 통합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1991년 지방선거가 실시되자 주민들의 요청에 따라 관악구의원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이후 3선 의원이 되기까지 무소속 구의원으로 활동하였다. 진보정당이 창당되기 전에는 당적을 가지지 않겠다고 다짐했기 때문인데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자 민주노동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6월 민주노동당 대표로 당선되었다. 기사
2005년 10월 31일 민주노동당 지도부 전원과 함께 총사퇴했다. 사유는 2005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기 위해. 기사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후보로 출마하기 위해 민주노동당 당내 경선에 참여했으나 김종철 후보에게 패배하여 출마하지 못했다. 기사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에 참여했다. 진보신당 창당발기인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
이후 진보신당 고문을 맡았다.
2011년 9월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가 진보대통합을 명분으로 탈당하자 비상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기사 진보신당 해산 이후에는 노동당 고문으로 있다.
2018년 12월, 이덕우 전 당대회 의장과 함께 '노동•정치•사람' 공동대표로 추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