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재보궐선거
1. 개요
대한민국의 공직선거법 규정에 따라 2005년 4월 30일과 10월 26일에 치러진 재보궐선거다.
2. 상반기(2005년 4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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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율: 33.6%)
'''참여정부 레임덕의 도화선''', '''朴風의 시작'''
열린우리당 소속 국회의원들이 연이어 선거법 위반으로 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확보한 152석의 과반은 반년여만에 붕괴되었다. 200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는 열린우리당에게 있어 과반 재확보를 위한 절대적으로 중요한 선거로 최소 3석을 확보하면 과반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후술할 각 지역구의 무리한 공천으로 이어진다. 반면, 한나라당은 어떻게든 이 선거에서 승리하여 열린우리당을 과반의 자리에서 확실하게 끌어내려야 했다.
당시 재보궐이 치뤄지는 국회의원 선거구는 총 6개였다.
- 경기 성남 중원 : 열린우리당 이상락 선거공보물에 학력을 위조하여 당선 무효.(04.12.10) 초졸인데 고졸로 허위기재했다. 본인 왈, 초졸이 너무 부끄러웠다고... 다들 그 말에 납득이야 했지만 명백한 선거법 위반인데 어쩌랴...
- 충남 공주/연기 : 열린우리당 오시덕 사전선거운동으로 당선 무효.(05.01.27)[2]
- 경북 영천 : 한나라당 이덕모 사전선거운동으로 당선 무효.(05.2.18)
- 충남 아산 : 열린우리당 복기왕 사전선거운동으로 당선 무효.(05.03.10)[3]
- 경남 김해 갑 : 열린우리당 김맹곤 사전선거운동으로 당선 무효.(05.03.25)[4]
- 경기 포천/연천 : 열린우리당 이철우 허위사실 공표로 당선 무효.(05.03.25)
2.1. 선거 결과
이중 경기 포천/연천, 경북 영천을 제외한 4개 선거구는 모두 접전이 예상되었다. 사실 포천/연천은 열린우리당 입장에선 탄핵후폭풍 속에서 생각치도 못하게 건져낸 접경선거구라 다시 확보할 가능성이 없었다.
열린우리당이 과반 확보를 위해 필요한 의석은 정확히 3석. 이를 위해 우리당은 필승선거구 3곳으로 경기 성남 중원, 충남 공주/연기, 충남 아산을 지목한다. 성남 중원은 탄핵에 반대해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해당 지역구의 조성준 전 의원[5] , 공주/연기에는 자민련 출신 '''유성'''구청장으로 탄핵 직후 탈당해 무속으로 유성에 출마했다 낙선한 적 있는 이병령을, 아산에는 자민련 출신으로 17대 총선에서 아산에서 복기왕에게 패한 이명수를 각각 공천한다.
그러나 상황이 코미디처럼 흘러갔다. 성남 중원에선 민주노동당이 최초의 수도권 진보정당 의원을 내겠다며 이 지역에서 탄탄한 조직과 지지세를 갖고 있던 정형주 후보를 공천하고 당세를 집중하여 총력전을 펼쳤다. 아산에선 기껏 영입한 이명수 후보가 '''자민련을 탈당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당에 입당''' 즉, '''이중당적자'''임이 선관위에 의해 드러나면서 후보등록을 거절당했다.[6] 이뭐병.(...) 공주/연기에서는 자민련을 탈당한 심대평 충남지사측이 충청신당을 준비하면서 16대 공주/연기 지역구 국회의원인 정진석이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거기다 예상 못한 낭보(?)에 열린우리당 수뇌부가 낚인 것도 있었다. 경북 영천의 열린우리당 정동윤 후보가 선거 초기 여론조사에서 정희수 후보에 여유있는 리드를 가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북 영천에서!!!''' 이는 다른 지역의 열세에 침울하던 당 수뇌부에게 5곳의 패배를 '''TK 지역구 1곳의 승리로 만회할 수 있다'''는 생각을 불어넣었고, 당은 사실상 영천에 총력전을 펼쳤으나, 역시 영천에서의 열세에 뒤집어진 한나라당도 박근혜 대표가 선거전을 진두지휘하는 총력전을 펼쳐 결국 한나라당이 이겼다.(...)[7]
열린우리당은 큰 타격을 입게 되는데 의석수에 변화가 생기면서 1년만에 '''원내 과반수 의석이 붕괴'''되었다. 민주당계 정당의 단독 과반 의석은 9개월로 끝이 났다. 제1야당인 한나라당은 조금씩 의석을 불려가며 정국 주도권을 되찾으려 했다.
2.1.1. 국회의원
2.1.1.1. 경기도
2.1.1.2. 충청남도
2.1.1.3. 경상북도
2.1.1.4. 경상남도
3. 하반기(2005년 10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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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선거 결과
'''한나라당의 싹쓸이'''
노무현 대통령 집권 당시 치러진 선거의 대다수가 이런 결과였다. 그리고 보궐선거가 끝나면 당 의장이 물러나는 것이 일종의 관례가 되고 만다.
제19대 대통령 선거 바른정당의 대선후보이자 前 바른미래당 대표를 맡은 유승민은 당시 비례대표 초선이었는데 의원직을 사퇴[8] 하고 지역구(대구 동구 을)[9]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당시 이것 때문에 말이 많았다. 다만, 대구 동 을 선거구는 전국적인 관심사를 가진 선거구였는데 왕수석(문재인 민정수석을 지칭)과 함께 '''왕특보로 불리던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이강철'''이 자리를 내던지고 출마하여 상당한 접전 선거구가 된 것이다.[10][11] 물론 결과론적으로야 패했지만 44.1%의 득표력을 보여주어 한나라당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대구에서 이 득표율을 깬 것은 11년이나 지난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수성 갑 선거구의 김부겸에 의해서였다. 애시당초 비례대표이던 유승민을 전격적으로 차출한 것도 이강철의 기세가 의외로 강했기 때문.[12] 참여정부 지지율이 그렇게 개판만 아니었어도 의외로 가능성이 있었던 선거였다.
울산 북구는 이후 기구한 운명을 맞이하는데, 2005년 조승수 의원의 의원직 상실로 재보궐선거를 치뤄서 이 지역에서 16대 국회의원을 지냈던 윤두환 의원이 당선되었지만, 그 윤두환 의원은 18대 총선에서 당선되어 3선에는 성공했으나,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며, 2009년에 재보궐선거를 치렀다. 19대 때 당선된 박대동 의원은 무난하게 임기를 마쳤지만, 20대 때 당선된 윤종오 민중당 의원이 의원직을 잃으면서 2018년에 다시 재보궐선거를 치렀다. 2004~2018년까지 14년동안 총선을 4번 치뤘지만 '''보궐선거를 무려 세 차례나 했다.''' 서쪽의 순천[13] 이나, 북쪽의 서울양천구도 비슷한 케이스.[14]
한편 경기 광주시는 한나라당의 거물 홍사덕이 공천탈락에 반발하여 무소속으로 나왔으나 정진섭 한나라당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였다. 보수표가 갈라졌음에도 정진섭 후보가 당선되었으며 범보수표가 과반을 넘긴 것은 덤.
3.1.1. 국회의원
[1]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이전까지는 기초자치단체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정당 소속이 없었다.[2] 이후 자유선진당을 거쳐서 새누리당으로 갔으며, 공주시장이 되어 2014년에 부활한다. 그러나 2018년 지선에서 재선에 도전하였으나 더불어민주당 김정섭 후보에 대패해 낙선하고 만다.[3] 이후 열린우리당-민주당에 남아 아산시장으로 부활한다.[4] 계속 열린우리당-민주당에 남아 김해시장이 되어 부활한다. [5] 합류가 늦었던 탓에 열린우리당 공천을 못 받았다.[6] 상황을 살피면 이명수 아산시 자민련 지구당 위원장이 해당행위자로 당 윗선에 찍혔고, 사실상 징계를 받을 것으로 예측되자 탈당선언을 했다. 막상 탈당계가 수리되지 않아 결국 출마하지 못 했고, 자민련은 이 때다 싶어서 자당 후보를 공천했다. 열린우리당에서는 부랴부랴 지역내 인지도가 상당했던 임좌순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을 공천하였으나, 결국 한나라당 이진구 당선.[7] 그리고 이때 영천에서 당선된 정희수는 이후 멀박이 되어 먼 훗날인 2017년, 문재인 캠프에 합류한다.(...)[8] 비슷한 케이스로 2002년 지방선거 때에 손학규 의원이 경기지사 출마를 위해 사직하자 비례대표 의원직을 사퇴하고 광명시 을에 출마한 전재희가 있다. 다만 전재희 의원은 본래 광명시장을 했기에 기반이 광명이었다.[9] 전임자 박창달 의원직 상실[10] 이강철 후보는 기호 1번 열린우리당 소속 후보였는데, 선거 벽보(포스터)는 열린우리당의 상징색인 노란색이 아닌 한나라당 상징색인 파란색으로 꾸몄고, 열린우리당 마크도 우측 하단에 깨알같이 표기했다.# 아무래도 민주당계 정당이 힘 쓰기가 힘든 지역이다 보니 의도적으로 벽보를 저렇게 만들었을 것이다.[11] 후일담으로 선거사무소의 간판에도 열린우리당의 로고가 달려있지 않았는데 정작 후보는 인터뷰 하면서 기자에게 이 사실을 처음 전해듣고 남자답지 못하다며 간판 교체를 지시했다는 일화가 있다.[12] 한나라당에서 여론조사를 돌린 결과 유승민 말고 다른 후보를 공천 하면 이강철이 당선된다고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박근혜 의원이 유승민을 차출한 후 적극적으로 유승민을 지원했다.[13] 2011~2016년까지 5년간 국회의원 선거를 4번이나 치렀다. 서갑원은 뇌물수수로 잘리고, 김선동은 최류탄 던져서 잘리고, 이정현이 2014년 재보궐선거와 20대총선에서 당선되어 지역에서 내리 재선에 성공했다.[14] 2006~2014년까지 8년간 구청장 선거를 6번이나 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