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1. 개요
가톨릭 사상 최초 한국인 추기경이자[5] 제11대 한국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무너져가던 대한민국 천주교(가톨릭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 사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 직후, 혼란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였다. 군부독재 시절부터 21세기까지 한국 사회를 향한 목소리와 비판을 아끼지 않았으며 동시에 가장 낮은 곳에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였다.
가톨릭 신자 사이에서는 혜화동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등[6] 한국 가톨릭계의 큰 어른이자 영원한 정신적 지주이다.
2. 생애
2.1. 유년 및 학창시절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7]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8]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가톨릭 신자로 1866년 병인박해 때 관군에게 잡혀 순교한 인물이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9] 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이때 김수환 추기경은 매우 슬퍼했었다.바로 물거품이 되어버린 자신의 미래계획 때문이었다.어머니께서는 두 아들이 모두 사제가 되는것을 희망하셨는데 정작 김수환 추기경 본인은 사제가 되고싶은 마음이 없었다.김수환 추기경은 어머니손에 이끌려 새벽미사에 참석할때도 미사시간내내 꾸벅꾸벅 졸았다.반면 형인 김동한 신부는 바른자세로 미사를 드렸다.이렇듯 김수환 추기경은 정말로 사제가 되고싶은 생각은 하나도 없었다.김수환 추기경은 어느날 어머니와 시장에 갔었는데 시장에서 물건을 판매하는 장사꾼을보며 문득 장사를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었다고한다.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초등학교를 졸업하면 읍내에 있는 상점에 취직해서 장사하는법을 배우고 이후로 자신이 상회 하나를 차려 장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고 돈을 모아서 장가를 간 다음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것이 그의 계획이었다.그러나 김수환 추기경이 5학년이 되었을때 어머니께서는 그를 신학교(5~6학년 과정)에 보내시면서 그의 계획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말았다.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신학교에서 공부에 전혀 흥미를 못느끼고 시험성적도 바닥을 기면서 유급을 당하기도 하였다.이렇듯 김수환 추기경은 어린시절 사제가 되어야한다는 어머니의 소망속에서 방황하는 삶을 살아갔었다.
참고로, 김수환 추기경의 본래 이름은 '김수한'이였는데, 신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관청에서 관련서류를 떼던 중에 이름이 '김수환'으로 올라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고 한다. 출생신고 당시 담당직원의 기재 실수인 듯한데, '김수환'이란 이름도 괜찮다는 어머니의 말씀과 당시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이름이 아닌 세례명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굳이 고치지는 않았다고 한다.
동성상업학교[10] 재학 시절, "천황 폐하의 생신을 맞이하여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윤리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신민이 아님. 그러므로 소감이 없음"'''이라고 썼다. 이에 당시 교장이던 장면은 노발대발하며 따귀를 때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아직 나이도 어린 학생이던 김수환이 일본인들과 일본제국 경찰에게 고문을 받을까봐 한 행동이었다. "교장이 직접 애를 이렇게 훈육했으니 넘어가 달라"는 액션. 즉 장면이 적절하게 쇼맨십을 발휘하여 김수환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11]
이후 장면은 김수환이 일본 조치대학[12] 으로 유학을 갈 때, 추천서를 써주는 등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또한 장면의 셋째 아들 장익은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로 있다가 김수환 주교가 마산교구장에서 서울대교구장으로 이임해왔을 때 교구장 비서로 함께 일했고, 추후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의 한국순교자 시성식을 위한 한국방문 시에 장익 신부가 요한 바오로 2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서 여의도광장에서 한국말 미사를 집전하게 도움을 주었다. 이후 장익은 주교가 되어 춘천교구장을 지냈으며,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1년만인 2020년 8월 선종하였다.(나이도 11년 차이가 난다.) 이처럼 김수환 추기경과 장면의 인연은 장익 주교를 통해 2대에 걸쳐 이어진 셈이었다.
김수환 추기경도 훗날 "장면 선생님이 해주시는 영어 강의 때 미국의 문물에 대한 이야기를 매우 흥미롭게 들었고, 여러 가지로 나를 도와주신 분이라 존경한다"고 언급했다. 비록 이루어지지는 못했지만, 김 추기경은 "장면 총리의 시복시성을 희망한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로 존경심을 표했다.
조치대학 문학부 철학과에서 수학하던 시절,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와중에도 자신을 차별하지 않은 독일인 신부에게 감명받아 사제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13] 당시 김 추기경의 은사였던 독일인 테오도르 게페르트 신부는 해방 후 한국에 건너가 서강대학교의 창립을 주도하여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김 추기경은 2002년 게페르트 신부가 선종했을 때, 직접 장례미사를 주례했다. 게페르트 신부(1904~2002)의 일본 조치대학 시절 제자인 김수환 추기경은 "게페르트 신부님은 사제로서 훌륭했을 뿐 아니라 인간적으로도 자상한 분이었으며,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늘 자애롭게 대해주었다"고 회고했다.
2.2. 학도병 지원과 광복, 사제 수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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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왼쪽에 있는 사람은 훗날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전석재 이냐시오 신부(1988년 선종)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학도병으로 참전하여 생사의 갈림길에 설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해방을 맞이해 무사히 귀국, 사제의 길로 들어섰다.
일본 육군 일등병으로 지치시마에서 복무했으며, 일본군의 대표적 전쟁범죄중 하나인 지치시마 사건에 미군 조종사 살해를 목격한 조선인 징용 노무자들과 함께 전범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51년 사제로 수품된 후, 경상북도 안동시 목성동성당[14] 주임신부를 시작으로 대구대교구 교구장 비서, 김천시 황금동성당 주임신부, 성의중학교, 성의고등학교 교장 등 대구대교구에서 사목했다. 1956년 독일 뮌스터 대학 유학을 거쳐 사제 수품 15년 만인 1966년 주교로 수품되어 그해 신설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에 임명되었다.
2.3. 대주교와 추기경 서임
마산교구장에 임명된 지 2년 만인 1968년 대주교로 승품되어 서울대교구장이 되었다. 이 일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일이어서 김수환 추기경 본인은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이 나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면 어떡할까'라고 고민하였지만, 착좌식 미사에 원로 신부를 필두로 한 서울대교구 사제단 전원이 아무런 이의없이 순명서약을 하는 것을 보자 그런 우려를 걷어내었다.
이러한 항의가 사치스러운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은 매우 안 좋아서[15] , 교구청으로 고리대금업자들이 나타나 돈을 갚으라고 을러대는 일이 다반사였다.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재임 사이에 잠시 임시관리자로 봉직한 윤공희 빅토리노 주교[16] 가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 서울대교구의 재정형편을 개선시켰고[17]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면서 재정문제가 말끔히 해결될 수 있었다.
마침내 1969년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서임됨으로써 '''한국 최초'''이자 '''당시로서는 전 세계 최연소'''로 추기경[18] 이 되었다(47세). 그리고 경기도 부천시에 위치한 소명여자고등학교의 이사장으로도 활동하였다. 훗날 추기경은 "보잘것 없던 나를 주교에서 대주교로, 다시 추기경으로 임명한 바오로 6세가 선종했을 때 크게 슬퍼했다"고 회고록에서 술회했다. 다만 역대 최연소는 아니다. 중세 때 유력 가문의 자제들은 10대 때(...) 대주교나 추기경이 되는 경우도 잦았다.[19]
2.4.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수환 추기경은 회고록에서 "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정치적 의도나 목적을 갖고 한 일은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 주려고 했을 따름이다."고 회고했다.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는 보수적 성향의 천주교회가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유에 대해 "70년대의 언론탄압, 전태일 군의 분신자살과 유신 선포 긴급조치 발동으로 이어지는 엄청난 인권유린 앞에서 교회도 그냥 방관자로만 있을 수는 없었다"고 밝혔다.
1970년 12월 23일에 김 추기경은 불교의 청담스님[20] 과 개신교의 한경직 목사, 그리고 조덕송 조선일보 논설위원 등과 함께 어수선한 시국을 논의했다.[21]
군사정권 시절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 인천교구장 나길모(미국인) 주교, 안동교구장 두봉(프랑스인) 주교, 전주교구장 김재덕 주교와 함께 사회참여파 주교로 활동하였다.
또한 다른 성직자보다 높은 권위가 있는 추기경으로서 많은 방면의 민주화 운동에 기여하였다. 1971년 밤 KBS로 중계된 예수성탄대축일 자정 미사에서 "만일 현재의 사회 부조리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나라는 독재 아니면 폭력 혁명이라는 양자택일의 기막힌 운명에 직면"할지도 모른다며 박정희 대통령을 강하게 비판하였다.[22]
이후 김 추기경은 박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박정희의 정교분리 주장에 대해 "교회는 단지 개개인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 뿐 아니라 한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파수꾼 역할도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 추기경은 또 종교계가 노동 문제에 개입한다고 박 대통령이 불만을 표시하자 "사용주는 개개 노동자에 비해 원래부터 엄청난 강자인 데다 중앙정보부, 경찰 심지어 노동청까지 기업주 편이고 노동자 편을 드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박 대통령을 설득했다.
70~80년대 수많은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의 중심에는 명동성당이 있었다. 명동성당은 종교시설이라는 특성상 경찰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고, 따라서 이곳은 개신교의 향린교회나 불교의 조계사처럼 강압적인 정권에 맞서는 운동가들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소도와 같은 역할을 하는 피신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항상 명동성당의 중심을 지키고 있었다.
10.26 사건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고 들어선 군부독재와 5공화국 체제에서도 김수환 추기경은 독재를 비판하는 날선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당시 아래 어록에도 나오는 '카인의 대답'이 대표적. 결국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된 6월 항쟁은 전두환 정권이 몰락하는 가장 큰 계기가 된다. 당시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 일갈한 것도 유명한 일화.
이 밖에도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나자 당시 광주대교구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편지와 함께 "긴급구호를 위해 쓰라"며 당시 거액이었던 1000만원 수표를 보내고, 전두환을 직접 찾아가 "그만해 달라"고 부탁하는 등 사태를 막아 보려고 애를 쓰기도 했으나, 전두환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가장 가슴아팠던 일은 광주의 5월"이라 회고했다.
김수환 추기경은 5.18 민주화운동 당시 전두환을 찾아가 병력을 투입해 사태를 악화시키지 말라고 부탁했지만 전두환은 "미안하지만 지금 도저히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국방부에 가 봐야겠습니다"고 말하며 자리를 떴고 김 추기경은 글라이스틴 미국 대사를 만나 유혈 사태를 피해야 한다며 위컴 주한미군사령관에게 병력 투입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글라이스틴 면담 이후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김 추기경을 찾아와 "광주에 병력을 투입한다고 한 것은 경고일 뿐이고 사실은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김 추기경은 "이 장군을 믿겠다"고 말했지만 결국 5월 27일 병력이 광주에 투입되어 유혈 진압이 있었다. 김 추기경은 1995년 서울대 강연에서 "5.18 기간이 가장 괴로웠던 때"라며 "사태를 악화시키지 않으려 나름대로 노력했지만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했다"고 후회했다. 회고록에서는 "나도 사태 전면에 나서고 싶었다. 아니, 광주로 내려가 몸으로라도 계엄군을 막고 싶었다. 혼자서라도 강경한 항의성명을 내려고 쓰고 찢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신문방송에서 보도해 주지 않으면 유인물을 찍어서라도 항의하려고 했다. 그러나 만일 젊은층 요구대로 내가 자극적 표현을 써가면서 신군부를 연일 비판했더라면 유혈사태는 서울까지 번졌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김 추기경은 광주 유혈진압 이후 정부의 사과와 책임자 엄단을 요구하는 담화문을 냈고 5.18 구속자 가족들이 사형 집행을 막기 위해 명동성당을 점거하자 환대하며 추기경 집무실을 내주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한 시 광주 방문을 적극 추진하여 교황이 직접 금남로와 전라남도청 등을 방문하게 된 사실이 밝혀졌다.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때도 당국 관련자들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하는 파렴치'하다고 강하게 비판하는 등, 당시 정부에 대한 공개적인 일갈을 서슴지 않았다.
한편 여러 민주화 사건에 많은 신경을 쓰고 서울대교구를 총괄하는 업무가 너무 중하다 보니[23] 이 즈음엔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젊은 후배 사제에게 교구장을 넘기는 게 교구 발전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도 있던 터라 한국식 나이로 71세가 된 1992년 초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게 서울대교구장 사직서를 제출했는데,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보낸 답장이 더 걸작이었다. 답장 내용인즉슨... "나는 김 추기경보다 2살이나 많은데 지금도 교황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후에도 계속 서울대교구장직을 역임하다가 1998년에야 사임했다.결국 임기를 끝까지 채우고 교구장에서 물러난셈.후임 교구장으로 당시 청주교구장이었던 정진석 주교가 임명되었다.
2.5. 민주화 이후
2.5.1. 문민정부
우여곡절을 거쳐 문민정부가 탄생하고 인권과 민주화에 관한 김수환의 역할은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1995년 한국통신 파업 사태에서 김수환은 다시 인권의 현장에 선다. 그는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일갈하였다. 한편 95년 12월 관훈토론에서는 국민들을 향해 '우리 모두의 추악한 얼굴'을 지적하며 엄하게 꾸짖는다. 요지는 한국인의 가치관 부재와 망국병이 부정부패로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한다는 것이다.
천주교 신자인 이회창 당시 총리와는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1995년 11월 이 총리의 회갑연에서 참석해 이회창 전 총리를 '청렴과 결백으로 모든 이의 사표가 되는 사람이며, 우리 민족 모두에게 보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한 바 있으며 그 당시 이미 전 총리였다. 93년 12월~94년 4월 총리 재임. 96년 1월에는 총리 사임 후 변호사 활동을 하고 있던 중 김영삼 대통령의 권유를 받고 정치계 입문을 고민하던 이 전 총리에게 "나라가 어렵고 역사 바로세우기가 중요한 만큼 힘을 합치는 것이 좋겠다"며 "하나의 밀알이 되는 심정으로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말로 이회창의 정치입문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1997년 1월에는 노동법, 안기부법 통과로 노동계 총파업이 일어나자 김영삼 대통령을 단독으로 만나 정부의 반성을 촉구하기도 한다. 그는 이후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많이 했다.
2.5.2. 국민의 정부
김대중 대통령 취임 후 김 추기경의 활동이 그나마 가장 평화로운 시기였다. 97년 12월에는 서울 성북구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사를 하기도 하였으며, 98년에는 '경제난국 극복을 위한 특별강연회'를 열면서 법정스님을 명동성당에 초청하는 등 종교 간 화해의 움직임을 보인다.
한편으로는 대북화해 움직임에 발맞춰 남북화해를 위한 한반도 평화라는 주제로 많은 강연을 하였다.
2.5.3. 참여정부
참여정부는 불안하고 과도하게 좌경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김수환 추기경은 보수 야권 진영으로 돌아서서 정부를 적극 비판했다. 선명한 반공보수 성향을 보이며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비판하지 않았던 햇볕정책도 강력히 비판했고, 참여정부에서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 수도 이전, 사학법 개정 등에 반대를 하며 당시 여당 지지자들에게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노기남 등 천주교계 친일을 옹호하면서 "나도 창씨개명하고 신사참배했다"고 말해 일부 여당 지지자들에게 친일경력이 있니 없니 하는 비난과 구설에 오르기도 하였으며, 이래저래 참여정부와는 좋지 않은 관계가 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된 어록 참조.
2004년 프란츠 쾨니히 추기경의 선종에 따라 가톨릭 전체 추기경 중 최선임자[24] 가 되었고, 2005년 치러진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즉위미사를 최선임 추기경으로서 공동집전'''하고 전체 사제를 대표하여 신임 교황[25] 에게 순명서약을 바치는 막중한 역할을 맡았다.
2005년 터진 황우석 논문 조작 사건 당시엔 사태를 언급하며 가슴 아파하다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번 사태를 황 교수 논문에 국한시켜 생각하지 말자. 우리 모두의 문제다. 우직하고 정직하게 살자. 그것이 바로 치유책이고 수습책."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외엔 일반적인 사목활동을 했다.
2.6. 선종과 그 이후
2009년 2월 16일 오후 6시 12분 경, 가톨릭대학교 서울성모병원에서 노환으로 선종했다. 사인은 폐렴에 의한 호흡부전. 선종 당시 최장기간 재임 추기경이었다. 향년 88세. "그동안 많이 사랑 받아서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임종은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과 서울대교구 소속 사제들과 수녀들이 지켰으며 이후 김수환 추기경의 안구적출이 진행되었다.후술하겠지만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사후 각막을 기증하겠다고 서약을 했었다.'''"서로 사랑하십시오, 용서하십시오." '''
장례는 당초 서울대교구장으로 치를 예정이었다. 그러나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비록 자신이 참석하지는 않았지만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하여 '''교황장[26] 으로 격상'''해서 치렀다. 장례는 5일장으로 치뤄졌으며, 선종 당일과 장례 미사 당일을 제외한 3일의 조문 기간 동안 '''약 40만 명'''의 시민들이 명동성당에 줄서서 조문하였다. 당시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명동성당까지 줄지어 선 조문객 행렬의 총 길이는 300m였다고 한다.[27] 이때 '''단 한 번도'''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다.'''
생전에 악연이 있었던 전두환도 조문을 위하여 명동성당을 방문하였으나 뒷짐 조문으로 욕을 먹기도 했다. 그 외 "다른 전직 대통령은 전부 직접 조문하러 왔는데 노무현 대통령만 직접 조문하지 않고 조전을 보냈다"며 일부 언론에서 비판하기도 했으나, 조문은 강제사항도 아니고, 측근에 따르면 노 전 대통령은 당시 문제가 되었던 박연차 게이트 의혹이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가급적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직접 오지 않은 거라고 한다.
시신은 경기도 용인시의 사제 묘역에 안치되었다. 위치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의 옆. 묘비에는 김 추기경의 사목표어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와 시편 23편 1절 「야훼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노라」가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이는 김수환 추기경이 생전에 직접 묘비명으로 부탁한 구절이다.
선종할 때 각막을 기증해서 2명의 환자에게 각막을 이식했고, 그 영향으로 각막과 장기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하는 사람들이 폭증했었다. 특히 선종 이후 1주일 간은 각막 기증자가 너무 많아 장기기증운동본부의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서점가에는 김 추기경과 관련한 서적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김 추기경의 자서전을 포함해 이미 절판된 책들도 수많은 사람들의 요청에 의해 재판되었다. 이러한 열기는 선종 1주기가 지나도록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한 출판업자가 무단으로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이름을 빌려 김 추기경 관련 서적을 출판하였다가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김 추기경이 안장된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간다고 한다.현재 용인 천주교 성직자 묘역에는 김수환 추기경을 포함하여 전 서울대교구장이었던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와 김수환 추기경을 오랜시간 보좌하였던 서울대교구 보좌주교이자 총대리주교였던 김옥균 바오로 주교가 안장되어있다.
3. 어록
제4공화국~제5공화국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인사와 시민들을 보호하며 남긴 명언들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있다. 가톨릭 내에서도 상당히 정의 의식이 강하고 이를 실천하는데 두려움이 없는 인물이어서, 당시 민주주의 세력이 독재정권에 대항하면서 민주화를 이룩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는 민주주의가 쟁취된 이후에도 지속되어 다양한 사회 비판적 목소리를 내었다.
3.1. 박정희 정부
'''박정희 당신은 압니까? 정의와 사랑이 없는 곳에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평화가 없는 곳에 사회 안정과 질서는 없습니다. 비상 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 유익한 일입니까?'''
- 1971년의 예수성탄대축일 메시지.[28]
'''그의 죽음은 별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더 새로운 빛이 되어 앞길을 밝혀주기 위해 잠시 숨은 것뿐입니다.'''
- 장준하의 영결 미사.
'''이제 대통령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주님 앞에 선 박정희를 불쌍히 여기소서.'''
- 박정희의 장례 미사.
'''아버지 이 죄 많은 박정희를 용서해주십시오.'''
- 박정희의 장례 미사.
다만 김수환 추기경과 박정희의 사이가 험악할 정도로 나쁘진 않았다고 한다.[29] 훗날 김수환이 회고록에서 "종이에 4대강을 그려가면서 몇 십 년은 족히 걸릴 법한 개발 계획을 설명해주는 박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 나라가 1인 장기 독재 체제로 갈 것임을 예상했다. 다음날 혼자 서울로 올라오는 동안 무척 우울했다. (중략) 박 대통령을 생각하면 아쉬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장기 집권의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진정한 애국자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또한 박정희가 죽은 뒤 명동성당에서 고 박정희 추도 미사를 봉헌했다.[30] 육영수 여사에 대해서도 "국모다운 면이 많은 훌륭한 영부인이었으며, 그녀가 살아있었다면 박정희의 통치가 한결 누그러졌을 것"이라고 평했다.[31]'''고인께서 군인과 대통령으로서 보여주신 애국심은 열정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인은 국토 구석구석, 국민 생활 속속들이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삼천리 방방곡곡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마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고인은 산업화와 경제 발전에 실로 빛나는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충격적 사건에서 뼈아픈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아집과 탐욕, 증오와 폭력을 우리 가슴 속에서 씻어 내고 용서와 화해, 사랑을 채워 넣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나라는 국민이 역사의 주인공이 되는 나라, 억압과 폭력의 공포가 없는 나라입니다. 이제 중요한 문제는 국상을 끝낸 후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역사적 운명은 크게 발전할 수도, 침체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이 곧 갈림길이며 위기의 고비입니다.'''
- 박정희의 추모 미사.
어쨌든 김 추기경은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이 장기집권으로 이어지면서 국가와 국민은 물론 박정희 개인에게도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다"며, 그의 독선적이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비판했다.
3.2. 전두환 정부
'''마치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
- 쿠데타 직후인 1980년 초에 인사차 찾아온 전두환에게 한 말.
'''광주사태에 대해서는 군에 의한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 진압이 도에 넘침으로써 군경을 포함하여 학생과 시민 등 많은 희생자를 내게 한 데 대해 정부는 깊이 사과하고 그 같은 엄청난 유혈 사태를 일으킨 책임자를 정부는 엄단해야 합니다.'''
1980년 봄 시국에 관한 담화문.
'''광주사태에 책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 민중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하기 바란다. 이 길만이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리라 생각한다. 정부측이 지금이라도 사죄하는 마음으로 민주화를 향한 모든 조치를 다한다면 현재의 정치적 불안이 현저히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1987년 5월 18일 광주사태7주기 추모미사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제 1 독서에서는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희 아들, 너희 제자,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탕'하고 책상을 치자 '억'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좀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까짓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을 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니오?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32]
- 고문 끝에 숨진 박종철의 추모 미사. 실제 육성.
'''경찰들이 성당에 들어온다면 제일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다음 농성 중인 신부님들을 보게 될 것이고, 그 뒤에는 수녀님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은 수녀님들 뒤에 있습니다. 그들을 체포하려면 나와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을 짓밟고 가십시오.'''
- 6월 민주 항쟁 당시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던 학생들을 체포하기 위해 경찰들을 성당에 투입하겠다고 협박하던 정부 관계자에게 한 말.[33]
'''두 분이 모두 양식있는 정치인들인 만큼 반드시 단일화를 이루어 낼 것으로 확신한다.'''
1987년 대선 당시.
3.3. 노태우 정부
김 추기경은 민주선거로 당선된 노태우에 대해서는 완전히 적대하기보다는 설득하려 했다. 당선자 시절 찾아온 노태우에게 양심수 석방, 사면과 5.18 해결을 위한 광주 방문을 요청하기도 했다.'''이제 광주 문제는 여야가 모두 힘을 합쳐 잘못된 것의 진실을 밝히고 그때의 책임자들은 떳떳이 책임을 져야지요. 그들이 국민의 심판, 법의 심판을 받는 것이 바로 그 자신의 인간적 구원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나라의 구원에도 기여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정부와 여당의 근본적 자세입니다. 5공 청산에 대한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그분(노태우) 역시 군인으로 살아오면서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틀이 있어서 그 틀을 쉽게 벗어나기는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희망을 갖는 것은 그가 아직 이야기를 듣는 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1988년 12월 동아일보 송년 인터뷰.
3.4. 김영삼 정부
'''김영삼 대통령이 당선 직후 찾아오셨을 때 나는 축하인사를 하면서 "그러나 나는 다른 후보를 찍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김대중씨를 찍었는데,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지금 이 시점에서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지역감정 문제가 크게 완화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1993년 한국일보 인터뷰
'''민주주의를 위해 싸웠던 많은 사람의 시련과 희생을 바탕으로 탄생한 현 정부가 그 모태라고 할 도덕적 힘을 물리적 힘으로 유린하고 대화보다 힘의 논리를 선택한 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 1995년 한국통신노조 파업사건 당시 [34]
'''모든 국민에게 이 나라에도 정의와 법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야 한다. 이번 사건이 어떻게 해결되느냐에 이 나라의 미래가 달려 있다.'''
1995년 전두환 노태우 정권 수사 당시
3.5. 김대중 정부
'''김 대통령께서 그동안 수고도 많이 했고 성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비판도 많아 괴로운 시간도 있었으리라 봅니다. 아무쪼록 마지막 한해는 사심을 버리고 오로지 나라와 국민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꼭 유종의 미를 거두셔서 임기 후에는 5년 동안의 잘못된 것도 덮어둘 만큼 훌륭한 대통령이었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어쨌거나 김 대통령이 이제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초연하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2002년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김대중 정부를 평가하며.
'''우리 같은 세대들은 노무현 후보에 대해 불안감을 갖고 있어요.'''
2002년 대선에 출마한 노무현 후보를 비판하며.
3.6. 노무현 정부
'''선장인 대통령께서 이를 잘 헤쳐 나가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하는 것 같이 느껴집니다. 대통령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신뢰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통령 취임 후 여러 가지 문제가 많았으나 100일 정도 지나면 나아지리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언제쯤 좀 나아질지 의문입니다.(...) 노 대통령은 말 바꾸기를 잘 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기분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국민 모두에게 자신의 말을 믿을 수 있게 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특별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문을 제대로 읽으라는 것입니다. 싫어하는 신문도 읽어야 합니다.'''
2003년 6월 동아일보 인터뷰.
'''햇볕정책으로 남북한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졌는지 여부를 우리 모두 이 시점에서 심각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자세와 체제에 아무런 변화가 없고, 오히려 북한은 이를 계기로 민족공조를 앞세우며, 남한에 친북, 반북의 분열, 즉 '남남'분열을 유발시키고 있는 것은 분명히 지적되어야 할 문제점입니다.(...) 세계화는 우리 시대의 불가항력적 물결입니다. 우리는 이를 거스를 수 없습니다. 이를 거스른다는 것은 다시금 우리 자신이 나라를 조선조 말에 쇄국주의에 빠뜨렸던 어리석음을 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쇄국적 의미의 민족주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북핵문제를 두고 이른바 민족공조를 지나치게 앞세우는 데도 이런 위험이 있습니다.(...) 특히 소수라고 믿으나 배타적 민족주의에서인지, 일부 젊은이들이 극단적으로 반미, 친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저의 마음을 아주 어둡게 만듭니다. 특히 몇 일전 한총련 일부 학생들이 미군 사격훈련장 기습 진입한 것은 크게 잘못한 일입니다. 정부도 이들에게 유화책으로 일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분명한 선을 그을 때라고 생각합니다.'''
2003년 8월 인터뷰.
'''나는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 솔직히 우리나라가 어디로 갈 건지 걱정된다.(...) 요즘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관권 선거를 하고 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설령 열린우리당이 표를 많이 얻지 못하더라도 공명 선거를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이유를 붙여 행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는 의심을 받는다면 (선거 후에도) 갈등이 계속 남을 것이다.(...) 요즘 미국을 주적(主敵)으로 생각하는 젊은이가 늘고 있다. 나라의 전체적 흐름이 반미 친북 쪽으로 가는 것은 대단히 걱정스럽다. 군 장성에게서 사병들 가운데도 반미 친북 성향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런 계층이 현 정부를 적극 지지하고는 있지만 나라를 이렇게만 끌어가면 미래가 어떻게 되겠느냐. 화해.협력에는 동의하지만 (북한이) 국민을 굶겨죽이는데도 저들에게 끌려다니기만 해서는 안 된다.'''
2004년 1월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의 예방을 받고.
'''남북간 교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체제가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우리 사회에 퍼진 친북반미 풍조는 우리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북한 주체사상을 확대 전파하는 등 국가안보를 대단히 위험한 지경으로 몰아가고 있다.(...) 평화와 민주주의의 신장을 위해서라도 당분간 보안법 폐지를 서두르지 말 것을 간절히 호소한다. 보안법은 장기적으로 없어질 수밖에 없겠지만 아직은 필요하다.'''
2004년 9월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며.
'''우리 정부가 북한 인권 문제에 너무나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이는 북한에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겠지만 현재 북한은 체제가 더 경화되고 신경질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따라서 요구할 것은 더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2004년 9월 참여정부의 대북정책을 비판하며.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하나? 현재 정말로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 살고 있는지, 간판만 대한민국이고 지배하는 사람들은 영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렵다.'''
2005년 노무현과 참여정부의 대북유화정책과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를 비판하며[35]
'''수많은 사람이 굶주리고 죽음을 당하는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입을 다물고 있던 정권 담당자들이 강 교수의 인권만 앞장서 보호하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지극히 혼란스럽다. 대한민국을 위기에서 건진 사람을 원수로 보고 현행법에 저촉되는 말을 한 사람을 검찰이 다스리려 해도 대통령과 법무장관이 나서 검찰을 견제하고 그 사람을 보호하는 까닭을 납득하기 어렵다.'''
2005년 강정구 교수 불구속을 비판하며
'''개정 사학법이 단순히 사학비리를 없애는 데 있다기보다, 숨은 뜻이 있는 것 같다.'''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며
'''국민들이 믿을 곳은 한나라당밖에 없다는 생각을 갖게 잘 해 달라.(...) (한나라당에) 대통령 후보 여러 명 있으니 걱정된다. 누가 되느냐가 아니라 정권교체가 중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006년 한나라당 강재섭 대표와 만나
이후에도 "소수의 비리를 다수의 문제로 비화시켜선 안된다", "현장의 혼란을 초래할 것이다" 같은 사학법 개정에 강력 반발하는 발언을 여러 번 하였다. 참고로 참여정부 당시 사학법 개정은 소위 4대 개혁 입법[36] 중에서도 가장 조직적인 반대를 받았던 사안이었다. 국가보안법이나 과거사법의 경우 정치계 중심의 반대였고, 언론법의 경우 몇몇 거대 보수언론의 반대가 주를 이뤘지만, 사학법 개정은 이권이 걸린 문제라 전국의 거의 모든 사립학교재단에서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난 젊은이들의 인터넷 문화를 잘 모른다. 은퇴하고 한동안 ‘혜화동 할아버지’란 이름으로 메일을 조금 이용해봤지만 그마저도 의사가 손목 관절염에 좋지 않다면서 금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편리한 도구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댓글이나 패러디 동영상으로 특정인의 인격을 모독하고, 그것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사건을 접할 때마다 안타깝다. 인터넷의 익명성에 기대어 한 인간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는 진지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다. '정보의 바다' 인터넷에 온갖 욕설이 난무하고 음란물이 떠다니는데도 우리나라가 IT 강국이라고 자랑하는 게 마냥 옳은 일인지 모르겠다. '인터넷 윤리' 또는 '정보 윤리' 없는 IT 강국은 허상이다. 사이버 공간에서도 예의와 윤리는 지켜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무질서의 바다' '범죄의 바다'가 될 수밖에 없다. 가정과 학교에서 청소년들에게 디지털 시대의 윤리를 가르쳐야 한다.'''
2007년 인터뷰.
사실 당시 가톨릭뿐 아니라, 당시 사립학교법에 관해서는 종법사가 직접 밀어준 원불교[37] 정도를 제외하면 대다수 종교의 주류 교단들이[38] 거세게 반대했었다. 이에 대해서 반대 측은 "전교조 등 좌파 세력들이 사학을 점거하는 것을 막아야 하기에 반대한다"는 주장도 있었고, 찬성 측은 "이권 때문에 반대하면서 허울 좋은 명분을 찾는 사학 단체 관련자들은 위선자"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4. 여담
- 테니스와 축구를 좋아해 80대가 되어서도 윔블던 테니스 대회를 밤을 새워 보고 축구 한일전도 빠짐없이 봤다고 한다.
- 군종 신부에서 재입대 제도를 시행하게 된 이유도 김수환 추기경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1984년까지 군종 신부로 입대할 수 있는 사관후보생 제도가 있었지만, 폐지되었다. 이는 "대한민국의 남자라면 누구나 해야 하는 병역의 의무에서, 신학생들이 사관후보생과 같은 특별한 제도로 입대할 수 있는 특혜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이야기를 했었기 때문이다.[39] 평생 순명과 희생의 길을 걷기로 한 신부에게 군종사관 대체복무는 사치라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각에 따라 원칙적으로는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지금까지 금지되고 있다. 그래서, 천주교 군종교구의 군종 신부들은 반드시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신부들만 재입대로 지원할 수 있다. 대부분 육군 징집병으로 병역의 의무를 이행하지만 육군 모집병, 해군/해병대/공군 병으로 복무하는 것까지는 막지 않는다 (현역병으로 복무하기만 하면 된다). 단 신체적 사유로 군 면제를 받은 신학생들은 해당 기간 동안 봉사활동으로 대신하게 된다.
- 다른 종교인도 천주교 신자와 동등하게 존중해주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감명 깊게 읽고 "이 책이 아무리 무소유를 말해도, 이 책만큼은 소유하고 싶다."라는 말을 하였다. 2000년 성균관에서 수여하는 심산상을 수상했다. 심산상은 20세기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이며 성균관대학교의 창립자인 심산 김창숙을 기념하는 상. 관례에 따라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 자리에서 주저없이 절을 하고 음복을 하기도 했다. 추기경은 "이분은 우리 민족의 스승이라면 스승 되시는 분이에요. 이분이 지금 살아서 나온다면 절을 안 하겠어요?"라고 말했다. 2000.05.24. MBC 기사. 천주교가 조선 시절의 혹독한 박해[40] 를 받아 성균관으로 대표되는 유교와는 역사상으로 악연이고 천주교가 피해자임을 고려할 때, 당시 그의 김창숙 묘소 참배는 일종의 종교 간 화해로 해석되기도 했다.[41]
- 딱히 권위 의식도 없었다고 한다. 한 예로 모 대학교 동아리에서 운동회를 하려고 강당을 빌릴 필요가 생겼는데, 때문에 동아리 내의 가톨릭에 대해 무지한 한 학생이 성당에 강당이 있다는 말을 듣고, 성당에 가서 무작정 추기경실로 들어가서 강당을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자 김수환 추기경은 당당한 게 좋다며 즉각 승낙했고, 후에 그 학생은 추기경이 얼마나 높은 직책인지 깨닫고 놀랐다고 한다. 이외에 성매매 업소 여인들을 돕고자 만들어진 시설에 찾아가 그녀들을 위로하고 같이 막걸리도 마시고 윷놀이도 하며 많은 도움을 준 사실도 있다.[42]
- 1996년 월드 투어를 위해 한국에 온 마이클 잭슨과 짧은 만남을 가지기도 했다. 내한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잭슨에게 한/영으로 된 성경책을 선물했고 잭슨은 이를 자신의 전용 박물관에 전시했다고 알려져 있다. 김수환 추기경은 후에 "맑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사람"이라며 마이클 잭슨에 대해 말했다고 한다.
- 어떤 여대생이 한국의 유명인사에 관련된 인터뷰 과제의 상대로 김 추기경을 만나뵙기 위해 찾아갔다가 한 사제에 의해 문전박대당하자 화가 나서 한소리 해 주었는데, 당황한 그 사제는 김 추기경한테 돌아와서 얘기했다가 되려 혼만 나 버렸고, 김 추기경이 직접 그 여학생을 만나서 아까의 무례에 대해 사과한 다음 인터뷰 요청을 수락해주었다고 한다. 후에 그 여학생의 과제는 높은 점수를 받았으며, '문전박대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의견을 피력하는 여학생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 박정희 정권 시절 반정부적인 성향을 보이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불만을 품은 친정부 성향의 가톨릭 신자 몇 사람이, 바티칸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어떤 사람을 만나, "김 추기경을 서울대교구장 자리에서 내쫓게 도와달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사람은 바티칸의 관리에게 김수환 추기경에 관해 안 좋은 얘기를 하였지만, 바티칸의 관리는 오히려 당시 한국 주재 교황 대사였던 도세나 대주교를 통해서 김 추기경을 음해하려는 움직임이 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한다.[43]
- 종교적 측면뿐 아니라 학문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한 인재였다. 독일어, 라틴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하고 영어, 일본어 역시 수준급이라고 하며 신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과 성취도 상당한 수준.[44] 애시당초 최연소 추기경 서임 기록을 세울 정도로 출중한 사람이었다. 특히 당시에는 유색인 출신 사제에 대한 은근한 차별이 꽤나 있었던 시대임을 김안하면 정말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 독일 유학 시절엔 공부하랴 강의 듣느랴 논문 쓰랴 바쁜 와중에도 독일로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들의 어려움에 대해 알게 되면서[45] 그들을 위해 어런저런 어려운 일들을 같이 처리해 주었는데, 한국에 돌아갈 때가 되자 광부와 간호사들이 슬퍼하면서도 그를 잘 전송해 주었다고 한다.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 추기경은 사회 바깥의 어려운 이웃의 존재를 결코 잊지 않는다고 한다.
- 한국 103위 순교성인의 시성과 관련해 김수환 추기경의 역할이 상당히 컸다는 게 관계자들의 평가이다. 다른 사람들은 한참을 기다려야 만날 수 있는 시성성 고위 관료와 교황청 관계자들이 김수환 추기경이 로마에 왔다는 소식에[46] '멀리서 오셨으니 김 추기경께서 편한 시간에 저희가 일정을 맞춰드려야 한다'며 편의를 제공했고 김수환 추기경은 요한 바오로 2세를 알현해 한국 천주교가 원하는 바를 교황에게 직접 말하기도 했다.
- 2004년에는 사제급 추기경 수석이 되었다. 이 때문에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 미사 때는 물론이거니와 요제프 라칭어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된 후, 교황의 좌우에 배석하는 2명씩의 추기경 중 한 사람으로서 즉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베네딕토 16세 즉위미사 영상. 2:24:10부터 김 추기경이 나온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김 추기경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원로 성직자 가운데 한 명으로, 즉위미사가 거행된 2005년 기준 사제급 추기경들 가운데서 서임 날짜가 가장 빨랐다. 바오로 6세는 재위 기간 중 6차례에 걸쳐 추기경을 서임했는데, 그 중 2번째였던 1967년 카롤 보이티와가 서임되었고 3번째였던 1969년 김수환이 서임되었으며 4번째인 1973년 알비노 루치아니가, 마지막이자 6번째인 1977년 요제프 라칭어가 서임되었다.
- 즉위미사를 집전해 준 교황 베네딕토 16세와는 인연이 있다. 독일 유학 시절 김 추기경의 지도교수 신부가 갑자기 주교로 임명되어 그 대체자로 김 추기경을 지도한 것. 신학적 주제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있어 사이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김종인은 회고록 ‘영원한 권력은 없다’에서 지도교수가 교체되면 논문을 처음부터 다시 작성해야하는 독일의 정책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이 학위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 위의 정치인 김종인과는 직접적인 인연은 없으나, 김종인이 그가 두고 간 자전거를 물려받아 탔다고 한다. 사람이 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굉장히 낡은 자전거였지만, 수리해가며 졸업 때까지 탔다고. 역시 같은 회고록에서 나온 이야기. 온화한 품성으로 교민들과 독일인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줗았다는 이야기는 덤.
- 2016년 발매된 공식전기에 따르면 2차대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 여성의 청혼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이성으로부터의 고백이라서 큰 충격을 받았는데, 선배 신부에게 고백 및 조언을 받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참고로 그녀는 김 추기경에게 거절받은 후 군에 들어갔다고.
- 상당히 흡연을 즐겨하는 골초였다. 1983년 12월 6일 방송된 '11시에 만납시다' 프로그램에서 음주는 잘 못하지만 담배를 상당히 좋아한다고 언급한 적이 있다.
- 김수환 추기경이 지은 <우산>이란 시가 있다.
- 박노해 시인이 지은 '거룩한 바보'라는 추모시가 있다.
4.1. 친일파 논란(?)과 실상
김수환 추기경에게 친일몰이를 하는 사람도 가끔 있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때 학도 특별지원병 제도로 '''강제적으로''' 징집된 학병 경력이 있다는 것을 트집잡은 것이다. 그런데 사실 학병으로 강제징집 되었던건 맞지만, 최종 계급이 일병이었으니 간부후보생에 지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육군의 경우 학병 출신들에게 6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과 대부실습[48] 뒤 구대장 면담을 거쳐 간부후보생에 지원하기로 되어 있는데, 중간과정에 탈락해도 하사관에 임관된다. 그러니까 일병이라는 이야기는 애초에 지원조차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조선인 학병의 60%가 엘리트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 간부후보생을 지원한것과는 대조되는 사례이다.
사실 예전에 자서전에도 기술했던 사항이 21세기에 다시 불거진 것인데, 그 당시 친일인명사전을 제작 중이던 민족문제연구소는 그가 애초에 '''수록 대상자에 미달되었음'''에도 이례적으로 해명 자료를 내면서 '''"김수환 추기경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니다"'''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애초에 김수환 추기경은 강제징집이었던만큼 자발적 친일반민족행위자들과는 근본적인 원인부터 다르긴 했다. 비록 학병으로 강제징집되기는 했지만 훈련과정에 들어있던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 낙오하는 형식으로 장교로 임관을 하지도 못했으며,[49] 실제 일본 육군의 경우, 예체능계와 미션스쿨계열 학병들을 초급장교 자원으로 비선호하여 간부후보생에서 탈락시켜 하사관으로 임관시킨 사례가 많다. 어느 초급장교가 바라본 일본 제국의 육군에서는 필자와 동기지만 음대출신이라 간부후보생과정에서 탈락하여 전혀 군조라는 계급[50] 과 어울리지 않는 동기생이 나온다. 그리고 종교적 이유로 전투병과의 간부후보생이 되지 않기 위해 의무병으로 지원하여 병으로 복무하던 선배 이야기도 나온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은 적극적인 친일행동을 하거나 일제로부터 무슨 직위 같은 것을 받은 것도 아니다. 결국 그도 여느 강제징집된 조선인 청년들처럼 원하지도 않았는데 살벌한 전쟁터로 내몰려 언제 개죽음을 당할지 알 수 없는 불운한 경험을 한 것이다.# 단순히 불운한 경험에 치부될 정도가 아니라 다치바나 요시오라는 식인귀 일당이 있던 치지시마란 섬에서 일본군 잔악한 전쟁범죄를 목격한 끔찍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4.2. 정치적 참여에 대한 여러 평가
70년대~80년대까지 민주주의와 인권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었던 김수환 추기경은 1987년 서울의 봄 이후, 대통령 직선제를 거쳐 김영삼 문민정부까지 출범하자 민주주의 체제가 어느 정도 정착된 것으로 판단한 듯 하다. 김수환 추기경은 문민정부 이후 참여정부 출범 전까지 정치중립을 지켰다. 한국 천주교의 최고 지도자이자, 국가적 어른으로서 정치 중립 입장은 말년의 참여정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유지되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너무 좌경화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보수 진영으로 돌아서 참여정부를 적극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친일몰이는 사실 문민정부 이후 진보에 힘을 실어주지 않은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진보진영의 참여요구와 얽혀있다고도 할 수 있다.
김수환 추기경의 정치적 입장은 참여정부 시절 진보 진영과 천주교 일부에서 극렬하게 비난받았다. 특히, 정의구현사제단은 김수환 추기경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참여를 독촉했다.
- 함세웅 스테파노 신부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시위 자제를 이야기한 김수환 추기경에 대해 "그 분은 시대착오적"이라고 공개 비판했다(2006). 당시 김수환 추기경은 그 사안에 대해 냉정히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51]
- 심지어, 김수환 추기경 선종에도 진보신당 등에서는 "친일 논란", "수구 몰이"가 이어지며 "애도가 아니라 비판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높아졌다. 이에 진중권 교수는 SNS에 "김수환 추기경처럼 살지도 못하는 이들이 배은망덕하다"고 일침[52] 했다.
이 때문에 김수환 추기경에게 진보-보수의 잣대로 매사에 선택과 발언을 강요한 것은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