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지방선거

 



'''대한민국 지방선거'''
1960년 12월 12일/12월 19일/12월 26일/12월 29일

1991년 3월 26일/6월 20일

1995년 6월 27일
1960년 지방선거
'''1991년 지방선거'''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1991년 지방선거/광역의원 선거 결과'''
'''민주자유당 '''
'''신민주연합당 '''
민주당
민중당
무소속
'''564석'''
'''165석'''
21석
1석
115석
'''65.1%'''
'''19.1%'''
2.4%
0.1%
13.3%
'''1991년 지방선거/기초의원 선거'''
'''4,304석'''[1]
1. 개요
2. 과정
3. 결과
3.1. 군소정당의 의미있는 성과
3.2. 눈에 띄는 후보들 - 최동원과 이선희, 그리고 허경영
3.3. 지역별 광역의원 선거 결과


1. 개요


1991년 3월 26일6월 20일 2번에 걸쳐 치러진 지방선거. 투표율은 각각 55.0%, 58.9%를 기록했다.
국내에서 1960년 이후 31년만에 부활된 지방선거다. 다만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한 날이 달랐고[2] 지방자치단체장도 선출하지 않았다.

2. 과정


일단 지방선거제를 하자는 주장 자체는 이미 1980년대 중반부터 신한민주당이 하고 있었지만[3], 민주화가 이뤄진 이후로도 여당 민주자유당은 예상보다 지지율이 낮다는 점 때문에 선거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러다 1987년 6월 항쟁에 따라 개헌이 될때 지방의회의 설치가 헌법에 규정되면서 지방선거가 부활되었다.


오늘날과 달리 기초의원과 광역의원을 선출하는 날이 달랐고, 지방자치단체장은 선출하지 않았다. 이유는 1992년 6월에 단체장 선거를 치를 예정이었지만, 당시 대통령 노태우가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경제에 미치는 부담을 이유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3년 후로 연기한다고 발표했던 것. 노태우가 공약했던 중간평가 역시 1989년 이미 유야무야 되었다.
사실 민자당은 1990년 3당 합당으로 민정당과 민주당, 공화당의 조직이 합쳐지며 그야말로 거대한 정당 조직력을 갖추기는 했지만, 그 지지층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고 부동산 값과 물가상승 문제에 날치기, 당권투쟁 등까지 겹쳐 1990년 양대 재보궐선거에서 패배할 정도로 민자당의 지지율이 저조했던 탓에[4] 당장 지방선거 치르는 것을 썩 내켜하지 않아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것을 당시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단식투쟁을 하고 합의를 보는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야 지방의회 선거나마 치러질 수 있었던 것.
여하튼 이렇게 선거가 치러지기 직전 민자당은 거듭되는 날치기와 당 내분으로 지지율이 낮았던 상황이었고, 평화민주당을 확대 개편한 신민주연합당의 지지율도 그리 높지는 않던 상황이었지만 민자당과는 대체로 비슷한 수준이었고, 제3당인 꼬마 민주당도 선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덕택에 당초 선거에서는 민주자유당이 부진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었'''다.
한편, 지방의원 선거는 1961년 이후 기존의 시읍면단위[5]에서 시군단위로 행정 사무를 처리하는 제도가 도입되었으므로,[6] 부활되기 전과 달리 기초의원은 시군구단위로, 광역의원은 시도단위로 선출했다.
기초의원선거는 3월 26일, 광역의원은 6월 20일 선출하였다. 참고로 3월 26일에는 선거일을 맞아 학교가 쉰다고 도룡뇽 알을 주우러 간 몇몇의 학생이 실종되는 일명 개구리 소년 사건이 일어나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5월에 일어나면서 선거 분위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7] 신민주연합당의 상징색은 초록색, 꼬마민주당의 상징색은 파란색이었다.
최초로 한자가 기재되지 않은 투표용지가 사용된 선거이다. 14대 대선에서는 투표용지에 한자가 다시금 병용되었지만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부터는 투표용지에 한글과 아라비아 숫자만 기재된다.

3. 결과


기초의원 선거는 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수서지구 택지 특혜 분양 사건낙동강 페놀 유출사건으로 당시 노태우 정권과 민자당 지지율이 크게 저조했음에도 불구하고, 3당 합당을 통해 탄생한 거대한 지역 조직력과 야권 분열, 투표율 저조에[8] 힘입어 예상 외 보수계의 우세로 나타났다. 시군구의회 260곳 중 190곳에서 보수계가 과반을 차지했고, 기초의원 4,333명 가운데 과반에 조금 못미치는 인원(2142명)이 민자당원이었고, 신민당은 785명에 그쳤다.[9] 다만 신민당이 지원한 무소속 후보까지 합치면 902명 정도가 당선되었으니 아주 대패까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기대했던 서울에서 참패한데다가 전북 일부에서도 민자당에게 의석을 내주는 등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민주당 직접 당선자 33명에 지원 당선자까지 합쳐도 126명의 당선자를 내는데 그치며 역시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을 얻었다.
이후 치러진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강경대 치사 사건 및 잇달은 분신 정국으로 민자당이 수도권 및 주요 대도시 지역에서 열세일 것으로 예측되었으나,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을 비롯한 검찰의 언론플레이와 선거 직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일명 정원식 국무총리 서리 밀가루 투척 사건이 터지면서 강성층에 대한 대중의 반감으로 투표 열기가 가라앉게 되고, 역시 기초의원 선거와 마찬가지로 야권 분열에 투표율도 저조하게 나오며 광역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자유당이 당초 열세 지역으로 예측되었던 수도권에서 의석을 싹쓸이하여 868석 가운데 2/3인 564석을 휩쓸어 당초 목표인 550석을 웃돌았다. 지역적으로도 호남과 제주도를 제외한 11개 지역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단, 득표율은 40.6%에 그쳤다.) 반면 평민당의 후신인 신민주연합당(신민당)은 최소목표인 200석(기본 목표는 220석)에 못 미치는 165석을 얻는 참패를 당했고, 수도권에서 민자당에게 1당을 내준데다가 7개 시도의회에서 1석도 얻지 못하는 치욕을 당하게 되었다, 민주당(별칭 꼬마 민주당) 역시 득표율은 선전했지만 비례대표 의석이 없던 특성 때문에 고작 21명의 당선자만 내는데 그치는 참패를 당했으며 진보 민중정당을 표방한 민중당도 43명의 공천자를 냈지만 강원도 정선에서 당선자 1명을 내는 데 그치고 말았다.
개표 초반에는 군인표가 무소속과 야당에게 쏠리면서 대구 등 기존 여당의 텃밭으로 여겨졌던 지역에서 신민당과 민주당, 민중당, 무소속 후보가 대약진하고 민자당이 참패할 것으로 나왔지만, 투표율이 낮게 나온 탓에(...) 개표가 진행되면서 민자당이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요 지역에서 역전하게 됐고 선거 결과는 민자당의 낙승으로 나타나게 된다.
반면 무소속은 경기, 강원 충남 등 중부권과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115명이 당선되어 돌풍을 일으켰는데, 특히 제주도에서는 민자당을 제쳐 과반수를 차지하기도 하였다. 이들 무소속 인사 중 상당수는 민자당 공천에서 탈락해 반발 출마한 친여 인사들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무소속 후보 중 화제가 된 시민연대회의 측은 서울지역 공천자 15명이 전원 낙선했고 전교조 역시 광주와 제주에서 각각 1명의 당선자밖에 못 냈다. 시도의회의원, 구시군의회의원.
결과적으로 이 지방선거는 신민주연합당에게 꼬마민주당과의 합당 없이는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교훈을 주었다. 결국 1991년 두 당이 통합하여 민주당이 창당되었으며, 다음해 14대 총선의 결과는 민자당의 득표가 비슷한 상황에서 (통합)민주당의 득표는 29.2%로 7%를 더할 수 있게 되었다.[10]

3.1. 군소정당의 의미있는 성과


사실 꼬마민주당은 참패를 거둔 것만은 아니었다.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바로 앞 선거인 13대 총선와 비교하면 득표율에서는 민자당이 결코 이득을 본 선거가 아니었던 것. 앞선 13대 총선에서 4당의 득표는 노태우의 민정당 34%, YS의 민주당 24%, DJ의 평민당 19%, JP의 공화당 16%였다. 그리고 이 상황을 그대로 대입한다면 3당합당으로 창당한 민자당은 34 + 24 + 16 = 74%의 어마어마한 득표율을 올려야했다. 그러나 실상은 지방선거의 특성상 무소속에 22.4%가 쏠리면서 민자당의 득표는 고작 40%에 그쳤다. 그리고 신민당은 21.9%로 고작 3%를 더 득표하며 부진했던 반면, 꼬마 민주당은 전국적으로 14.3%라는 혁혁한 득표를 올렸다. 옛 통민당 지지자의 과반 이상을 흡수한 것이다.
또한 꼬마 민주당은 양당의 쏠림 현상이 심각한 호남, 대구직할시, 제주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모두 의석을 확보했다. 특히 인천, 충남에서는 각각 무려 3석, 4석을 확보해 민자당에 비해서는 매우 부족하지만 2당이 되었다. 다만 서울의 1석은 아쉬운 결과였다. 신민당은 서울에서도 고작 132석 중 21석을 확보하는데 그쳤으며, 수도권과 호남, 대전(2석), 경남(1석)을 제외한 전국에서 전멸했다.
한편, 진보정당인 민중당은 42명이 출마하여 상당히 높은 득표율을 확보했지만(선거구당 13.3%) 전국적으로 출마한 것이 아닌데다가 당시 광역의원 비례대표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강원도 정선군 제2선거구에 출마했던 성희직 1명의 당선으로 만족해야 했다.[11] 전체 득표로는 0.8%에 그쳤다. 민중당은 14대 총선과 대선에서 백기완(무소속 출마)을 내세웠는데, 거의 비슷한 1%대를 득표하며 "재야" 세력의 한계를 드러냈으며, 이후 제15대 대통령 선거까지 5년간 재야, 노동세력의 존재감은 거의 사라졌다.

3.2. 눈에 띄는 후보들 - 최동원과 이선희, 그리고 허경영


[image]
부산직할시(현 부산광역시) 시의원 선거에서 당시 갓 은퇴한 야구선수 최동원[12]이 "건강한 사회를 향한 새정치의 강속구"라는 슬로건과 함께 꼬마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기도 했다. 지역구는 서구. 하지만 큰 표차로 낙선했다. 최동원이 상도동계와 안면이 있었고 이전에 김영삼이 직접 최동원을 섭외하려고 시도까지 한 것을 생각하면 대단한 소신 출마였던 셈. 게다가 당시 서구는 김영삼 본인의 지역구였다. 때문에 최동원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민주당계의 차기 부산 시장감으로 거론되었을지 모른다는 떡밥이 간간히 흘러나오고는 했었다.#
[image]
가수 이선희는 전성기 시절에 민주자유당의 서울시의원(마포구)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구호는 "실천하는 마포의 딸". 하지만 야당세가 강한 전통 야당 텃밭 마포구에 일종의 인기성 저격 공천을 한 것이라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애초 민자당이 이선희의 성향과도 맞지 않아 결국 민주당으로 옮기고 임기가 끝나자마자 바로 정치계를 은퇴했다. 여담으로 그 와중에도 가수 활동은 했다. 자세한 건 항목 참조.
'''허경영'''도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이력을 거쳐 무소속으로 서울 은평구(갈현동) 기초의원(구의원) 선거에 출마한 전력이 있다.(...) 결과는 다행히 21.1%를 득표하고 3위로 낙선.# 하지만 3개월 뒤 민중당으로 또 출마하는 끈기를 보여준다.
김을동도 꼬마민주당 후보로 동대문구에 출마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이후로는 보수정당쪽 정치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아버지가 말년에 신민당 소속 정치인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 어쨌든 김을동 자체는 이전부터 네임밸류가 있던데다가 비슷한 시기에 장군의 아들이 히트를 치다보니 후광효과가 기대되었는데 결국 투표율 저조와 야권단일화 실패로 낙선했다.

3.3. 지역별 광역의원 선거 결과


'''서울특별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132석)'''
민주자유당
신민주연합당
민주당
'''110석'''
21석
1석
'''인천직할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27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신민주연합당
무소속
'''20석'''
3석
1석
3석
'''경기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117석)'''
민주자유당
신민주연합당
민주당
무소속
'''94석'''
3석
2석
18석
'''강원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54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민중당
무소속
'''34석'''
1석
1석
18석
'''대전직할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23석)'''
민주자유당
신민주연합당
민주당
무소속
'''14석'''
2석
1석
6석
'''충청남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55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무소속
'''37석'''
4석
14석
'''충청북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38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무소속
'''31석'''
2석
5석
'''광주직할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23석)'''
신민주연합당
무소속
'''19석'''
4석
'''전라남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73석)'''
신민주연합당
민주자유당
무소속
'''67석'''
1석
5석
'''전라북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52석)'''
신민주연합당
무소속
'''51석'''
1석
'''부산직할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51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50석'''
1석
'''경상남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89석)'''
민주자유당
신민주연합당
민주당
무소속
'''73석'''
1석
1석
14석
'''대구직할시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28석)'''
민주자유당
무소속
'''26석'''
2석
'''경상북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87석)'''
민주자유당
민주당
무소속
'''66석'''
5석
16석
'''제주도의회 선거 결과
(총 재적 17석)'''
무소속
민주자유당
'''9석'''
8석

[1] 기초의원직에 정당공천제가 실시되지 않아 후보자들 및 당선자들의 소속 정당을 알 수 없다.[2] 이건 이전 지방선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선거 단위를 전국에서 동시에 치룬 선거는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가 최초다.[3] 과거 지방선거는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실질적인 지방자치제를 통일 이후로 유예하는 내용의 제3공화국 헌법이 도입되고, 제5공화국에서는 지방의회재정자립도에 따라 설치하도록 했지만 결국 설치되지 못한 상태였다.[4] 당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꼬마민주당과 민자당, 평민당의 지지율이 서로 엇비슷하게 나올 지경이었다.[5] 일본시정촌제를 본따서 군은 단체격이 없었다.[6] 개정법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그 직전에도 정부에서 군 자치제를 도입하려고 했었다.[7] 유서대필 사건은 사건 발생 23년 만에 강기훈 씨가 최종 무죄판결을 받으며 공안조작 사건으로 마무리 되었다.[8] 특히 20대 층에서 투표율이 37%로 비교적 저조하게 나온 원인도 있다. [9]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까지는 시군구의회선거에서 정당에서 따로 공천을 하지 않았으나 '''각 정당에 소속된 당원들은 출마가 가능했다'''.[10] 나머지 7%는 박찬종의 신정치개혁당(2%)이나 정주영통일국민당(17.4%) 등으로 흩어졌다. 14대 대선의 결과도 거의 같았는데, 결과적으로 김영삼-김대중의 득표차가 8.2%였던 상황에서 박찬종이 6.4%나 되는 득표를 올린 것을 감안하면 단일화 실패의 탓을 무시할 수 없다.[11] 이는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 때에도 이어저 65명이 출마해 선거구별 득표율 6.5%를 획득했지만 당시엔 1인 2표제가 아니었고, 전체 득표로는 1.5%였으므로 정당 자체가 해산되었다.[12] 선수협 파동이 계기가 되어 최동원은 1988 시즌이 끝나고 삼성 라이온즈로 트레이드 되었으나, 1990 시즌이 끝나고 은퇴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바로 지방선거에 나오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