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서울대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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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명동주교좌대성당(좌측)과 서울대교구청(우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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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와 황해도[2] 를 관할하는 가톨릭 교구. 박해기 조선대목구의 직계 교구다. 2004년까지는 의정부를 비롯한 경기 북부 일대까지, 1962년까지는 경기도 일대까지도 서울대교구 관할이었다. 황해도의 경우 지구에 대응되는 감목대리구가 설정되어 있지만, 2014년 현재는 감목대리구장이 공석인 것으로 보인다. 한편 평양교구 소속 성직자를 서울대교구장이 선발하여 양성하고 있다.[3] 주보성인은 성모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주교좌성당은 명동성당이며, 교구청은 명동성당 뒷편에 있는 옛 계성초등학교 건물을 개조한 별관과 명동성당 옆 주교관에 있는 본청이 있다. 그 이전에는 명동성당 앞에 있는 가톨릭회관[4] 이 교구청이었다. 명동성당 앞의 개발이 2014년 여름에 끝나면서 그곳으로 교구청이 옮겨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때문에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 주교관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현직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은 당연히 명동성당 주교관을 이용한다. 은퇴한 주교들은 대부분 혜화동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의 주교관으로 옮겨간다.[5]
2017년 8월 말 기준으로 신자 수는 1,534,899명이고, 이는 서울 시민의 15.1%, 한국 전체 신자 수의 26.6%를 차지한다. 관할에 황해도가 있지만 황해도의 사목을 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신자는 전부 서울시민이다. 본당 수는 231개이며, 크게 3개의 지역으로 나누어 교구장 대리주교가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추기경 2명(정진석 니콜라오 前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안드레아 現 서울대교구장)[6] , 주교 4명[7] (보좌주교 유경촌 티모테오 주교, 정순택 베드로 주교, 구요비 욥 주교, 교구 총대리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몬시뇰 8명, 신부 846명이 소속된 한국에서 가장 큰 교구이자 중심교구이다.
2. 역대 교구장
3. 관할 지역
2012년 말부터 적용된 서울대교구 산하 지역은 다음과 같다.
3.1. 중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구요비 욥 주교
- 볼드체는 지구 중심 본당이며, 볼드 + 밑줄은 주교좌 본당이다.
3.2. 동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유경촌 디모테오 주교
- 볼드체는 지구 중심 본당이다.
3.3. 서서울지역
교구장 대리: 정순택 베드로 주교
- 볼드체는 지구 중심 본당이다.
3.4. 교구 내 성지
4. 역사
한국 가톨릭의 모든 교구들은 사실 서울대교구에서 분리된 것이다. 1831년 9월 9일에 교황 그레고리오 16세가 조선과 간도를 관할하는 조선대목구(이후 조선교구)를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1911년에 조선대목구에서 충청도 이남 지방을 관할하는 대구대목구가 분리되면서 이름이 경성대목구(서울대목구)로 바뀌었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원산대목구, 평양지목구, 황해감목대리구가 차례로 분리되었다. 처음 대목구가 설정될 때 조선대목구의 선교를 파리 외방전교회가 책임졌기 때문에, 1942년까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가 교구장을 역임했다.[25]
서울대교구가 된 것은 1962년으로, 이 때 서울관구 하에 서울대교구와 함께 대전교구, 인천교구, 춘천교구, 평양교구, 함흥교구가 설정되었다. 1963년에는 한강 이남의 경기도를 관할하는 수원교구가 분리되었다.[26][27]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대확장 직후에 수원교구 분리가 이루어졌기에 이후 2004년까지는 서울대교구 관할구역은 큰 폭의 조정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1998년 수원교구 산하 광북성당이 설치되면서 광명시 철산1동과 광명1동은 서울대교구의 관할에서 벗어나 수원교구에 편입되었다.[28][29]
2004년까지는 서울과 한강 이북의 경기도 중 일부(나머지 일부는 춘천교구 관할), 그리고 황해도를 관할하였으나 한강 이북의 경기도 지역을 의정부교구로 분리 설정하였다. 때문에 의정부교구 분리와 동시에 월경지가 되었다.
5. 운영 재단
- 천주교 서울대교구 유지재단 :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재산 관리 기구. 서울대교구의 모든 부동산(토지, 건물 등)[30] 은 법률적으로는 이곳 소유로 되어 있다. 법률상 천주교 서울대교구가 재산을 소유하려면 재단법인을 설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른 교구들 역시 자기네 교구의 재산을 이런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3대 가톨릭 계열 출판사 중 하나(나머지 둘은 생활성서와 바오로딸)인 가톨릭출판사도 이 재단 소유다.
- 가톨릭학원 : 교육기관과 가톨릭대학교 산하 부속병원과 기관을 관할하는 재단이다.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성의교정, 성심교정과 동성중학교ㆍ동성고등학교(혜화동), 계성고등학교(길음동)[31] , 계성초등학교(반포2동)[32] 을 운영하고 있으며 가톨릭대학교 산하 부속병원인 서울성모병원, 여의도성모병원, 성바오로병원(청량리), 인천성모병원, 부천성모병원, 의정부성모병원, 수원성빈센트병원, 대전성모병원 등 8군데의 병원을 운영하며 현재 은평구에 제9성모병원을 짓고 있다. 참고로 모든 병원이 서울대교구 산하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인천성모병원의 경우 인천교구 소유지만, 인천교구에 의대가 없어 서울대교구에 위탁운영을 맡긴 것이다. 그래서 인천교구에서 관동대학교를 인수하여 의대가 생긴 후, 새 병원인 국제성모병원(인천 서구 소재)은 인천교구가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성당에 있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은 학교법인 소속이 아니라 유지재단 소속이다. 또한 여러가지 수익사업들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모병원 내 장례식장과 음식업체인 미셸푸드, 상조 업체인 평화상조와 서초평화빌딩 등이 있다.
-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 교구의 모든 사회복지를 관할하는 재단이다. 원래는 까리따스라고 불리는 세계 가톨릭 복지기구의 서울지사라고 보면 맞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영문 명칭은 'Caritas Seoul'. 서울에 있는 모든 가톨릭계 사회복지시설들이 이곳 소속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당의 바깥에 있는 어린이집들은 사회복지회 소속이다.
- 서울가톨릭청소년회 :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에서 운영하는 재단법인이다. 이곳에서 청소년 및 청년에 관련된 모든 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 서울시립보라매청소년수련관, 서울시립성동청소년수련관, 서초구립유스센터를 위탁운영하고 있고, 용문산과 경기도 용인시에 청소년 수련장을 운영하고 있다. 또한 동교동 가톨릭청년회관, 혜화동 가톨릭청소년회관 등이 청소년회 소유이며 花요일아침예술학교라는 예술대안고등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 가톨릭출판사 : 서울대교구의 호칭이 '조선교구'이던 시절부터 소유하여 운영한 회사. 1888년에 설립되어 현재 창립 136주년을 맞이한 출판사다. 과거에는 전국에 사용되는 성경, 기도서, 성가책을 직접 발행하였는데 이 부분은 CBCK 주교회의가 가져갔고, 지금은 성경 일부 판본의 위탁 인쇄, 서울대교구 주보 인쇄와 유통만 담당한다(주보 본면은 교구청에서 직접 기획/디자인 한다). 출판사이기에 당연히 자체 도서나 정기간행물을 기획·유통하여 판매 중.
- 재단법인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 서울대교구에서 운영중인 가톨릭 종합 매스컴이다. 한국 천주교에는 영향력 있는 2가지 관영(교구에서 운영하는) 신문이 있는데, 하나는 대구대교구에서 발행하는 가톨릭신문이며 나머지 하나가 가톨릭평화신문이다.[33] 1988년 5월 15일 평화신문을 창간했고, 평화방송은 1990년 4월 15일 라디오, 1995년 3월 1일 TV방송을 시작했다. 2016년 11월 23일자로 "가톨릭평화방송·평화신문"으로 사명을 변경했다.
- 재단법인 바보의 나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유지에 따라 만들어진 재단이다. 자발적인 참여로 나눔을 통해 세상에게 베풀자는 것이 모토로, 사회복지모금단체에 가깝다.
- 한마음한몸운동본부: 서울가톨릭사회복지회와 다른 NGO 전문 사회복지단체이다. 현재 52개국에 해외 봉사자를 파견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장기와 조혈모세포 기증운동으로 유명하다.
6. 교적관리
한국 가톨릭의 대표 교구인 만큼 여러가지 것을 제일 먼저 시도해 보는 곳으로 유명하다. 양업시스템이 그러한데, 이는 천주교 신자의 호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교적관리시스템이다. 예전에는 종이교적이어서 관리하는 것이 매우 힘들었지만, 서울대교구에서 만든 양업시스템이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하지만 현재 서울대교구 양업시스템은 가동이 중단되었으며, 한국천주교주교회의에서 작정하고 만든 통합양업시스템이 전국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우리은행이 주 거래 은행이나, 이는 서울대교구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천주교주교회의와 우리은행이 협정을 맺은 것으로 서울대교구에서 먼저 주 거래 은행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7. 여담
- 재정적으로 한국 천주교 내에서 가장 돈이 많은 교구이다. 그러나 재정적 투명화를 위해 2006년부터 1년 단위로 재무제표를 작성해서 언론에 배포하고 있다. 사실, 종교단체가 재무제표를 공개할 의무는 없다.
- 수원교구, 대전교구, 인천교구, 원주교구, 춘천교구, 의정부교구, 평양교구, 함흥교구와 함께 서울관구를 이루지만 서울대교구장이 관구장으로서의 직할권은 없다. 이는 광주관구의 광주대교구와 대구관구의 대구대교구도 마찬가지.
- 보좌신부의 보직 주기는 보통 2년이다.
- 인사적체가 심해서 사제서품 받은 지 최소 10년은 지나야 주임신부가 될 수 있다. 반면에 아랫동네 수원교구의 경우는 수품 3~6년 만에 주임신부로 보직된다. 수원교구가 관할하는 경기도 남부는 인구 증가추세로 본당들이 신설되고 있어서 본당 주임신부 보직 역시 증가하고 있는 반면에, 서울대교구가 관할하는 서울특별시는 인구와 신규택지조성이 정체(소폭 감소)되고 있으면서 신임 사제는 전국에서 가장 많이 배출되고 있다보니 인사적체가 그만큼 심해질 수밖에 없다.
- 2019년 방화3동성당 주임신부의 교사회 회칙 독단 변경과 폭언 사태로 인해 대다수의 초등부, 중고등부 주일하교 교사들이 탈퇴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한동안 공석이 난 주일학교 교사를 새로 모으기 위해 방화3동성당 주보에 주일학교 교사를 모집하는 공고가 있었다. 성인부에서도 유사한 일이 발생하여 일부 방화3동 신자들이 주변 (공항동성당 등) 성당으로 가서 미사를 참석하고 있었으나, 방화3동성당에서 압력을 가해 미사 도중 "방화3동 신자는 여기서 미사를 참석하지 말라." 라는 말을 해 논란이 되었다.
8. 논란
8.1. 일제강점기 친일 논란
일제강점기에 서울교구(경성교구)를 필두로 한 한국 천주교회는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순응적이었고, 종교 기반의 유지와 선교권의 보장을 위해 친일 행각도 서슴지 않았다. 무단통치기의 8대 교구장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 주교는 신민회의 독립운동가들을 밀고하여 105인 사건의 원흉이 되었다.[34] 서울교구는 민족말살통치기에 들어서 더욱 노골적인 친일 행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는데 호교적 차원의 허용이란 명분 하에 신자들에게 신사참배를 권고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주교좌 명동성당에서 ‘(황국)국위선양 평화미사’를 거행하고 황군위문금을 모금하는 등 전시총동원에 협력하였다. 서울교구는 1938년 중일전쟁 1주년을 맞아 일제가 조직한 관변 전쟁협력단체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이하 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했으며 이어 1939년 5월 종교단체로는 가장 처음으로 총동원조선연맹 산하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조직하였고 1940년 11월엔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35] 을 조직하는 등 일제에 대한 자발적 충성을 보였다. 이 연맹은 매월 첫째 주를 애국주일로 정해 '무운장구기원미사제'를 지냈으며[36] 매월 1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에 참배했다.
정작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침략에 저항한것은 해외에서 선교 목적으로 온 신부들이였다. 아일랜드에 본부를 둔 성골롬반외방선교회의 신부들은 목포와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했는데,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일제의 눈엣가시로 찍혀서 연금당하고 원산의 베네딕토 수도회도 마찬가지로 탄압받았다. 이런 흑역사에 대해서는 한국 가톨릭 내부에서는 반성보다는 침묵으로 일관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8.2. 성범죄 신부 인사 조치 논란
교구 내 성폭력 전과가 있는 신부들을 별다른 징계 없이 사목 일선에 배치해 버젓이 활동하게 한 정황이 KBS 뉴스에서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KBS 뉴스는 버스에서 여성 신자를 강제 추행하다 벌금형에 처한 신부 와 서울의 어느 청소년 수련관에서 성희롱을 저지른 신부에 대한 사례를 들어 서울대교구의 제식구 감싸기식 인사조치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였는데, 가해 당사자에 대해 아무런 징계 없이 자리만 이동시켜 미사 집전과 고해성사를 수행하게 하거나 직함만 교체한 채 같은 업무를 계속 보게 하는 등의 방식으로 쉬쉬하고 넘어간 정황이 취재 결과 드러났다.
서울대교구는 성추문 신부에 대한 공정한 징계 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지만, 지금까지의 성범죄 건수와 관련 징계 내역에 대해선 공개하기를 거절했다.'''"임지만 이동한 것이 징계라고 한다면, 사실 그런 것들을 고발하고 피해사실을 알리는 사람들이 2차 상처인 거 같아요. 상처받는 거를 실제로 보기도 했고."''' - 천주교 신자의 인터뷰 중
[1] 총대리주교 겸직[2] 남북한 분단 당시의 행정구역에 의한다.[3] 단, 서울대교구의 사제교육기관인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에 여유 공간이 없기 때문에, 이들 사제의 교육은 인천가톨릭대학교에서 담당하고 있다.[4] 본래 이 건물은 명동성모병원이었으나, 1986년 병원이 여의도로 옮겨지고(現 여의도성모병원) 난 후부터 오늘날의 가톨릭회관으로 바뀌었다.[5] 과거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대교구장 은퇴이후 선종때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였으며 현재는 2012년에 서울대교구장에서 은퇴한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이 이곳에서 생활하고있다.[6]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비롯한 추기경 세 분이 모두 서울대교구장 역임[7] 총대리주교였던 조규만 바실리오 주교가 2016년 3월 31일 3대 원주교구장에 임명됨으로써 주교 1명이 줄었다가 2017년 6월 28일 구요비 욥 신부가 보좌주교로 임명됨으로써 다시 4명이 되었다.[8]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만주의 한 교우촌에서 병으로 선종.[9] 한국 땅에 입국한 최초의 서양인 주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새남터에서 모방 신부, 샤스탕 신부와 함께 순교. 1984년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됨.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10] 1845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안내로 조선에 입국. 1853년 과로와 병으로 선종. 경기도 안성시 미리내 성지에 묻혔다.[11] 1866년 병인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12] 1866년 병인박해 때 충청남도 보령시 갈매못에서 순교. 한국 103위 순교성인 중 하나.[13] 1861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겨우 조선을 탈출하여 중국으로 감. 1869년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주교가 되었다. 1877년 다시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였으나 체포되었고, 프랑스로 귀국하여 1884년에 선종.[14] 프랑스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를 조선에 초청(한국 가톨릭 최초의 수도회). 명동성당을 건립하던 중 1890년에 선종. [15] 퇴임 후 은퇴하였다가, 1958년에 대전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16] 최초의 한국인 주교. [17] 1963년 수원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1967년부터 1년간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았고, 1973년 광주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18] 19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 1968년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 1969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한국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 [19] 1970년 주교 수품 (주교 수품 시점 기준으로 한국 천주교 최연소 한국인 주교 기록이다. 만 39세. 이 기록은 1972년 37세의 나이로 주교가 된 이문희 바오로 주교에 의해 갱신된다.다만 1970년 최연소 교구장 주교 기록은 그대로 유지된다. 한국인과 외국인을 통틀어 한국 천주교 최연소 주교 기록은 초대 인천교구장인 윌리엄 존 맥나흐톤 굴리엘모 주교(미국인 선교사)가 가지고 있다. 만 35세.), 청주교구 교구장으로 임명. 1998년 서울대교구장 착좌, 2006년 2월에는 한국 천주교 2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20] 오랜시간 서울대교구 총대리주교를 역임해왔으며 정진석 추기경이 은퇴한 2012년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2014년 2월, 한국 천주교 3번째 추기경으로 서임되었다.[21] 서울 한강 이남 지역 최초의 본당. 과거 명칭은 '영등포성당'이었다. 영등포권 성당의 상당수는 이 성당에서 분리되었다.[22] 주임(보좌)신부 또는 전담신부가 상주하고 있는 성지(성당)이다.[23] 관악지구 삼성산성당이 인근에 있다. 주임신부가 전담신부를 겸임해서 맡는다.[24] 서울에 있으나 천주교 군종교구 관할인 국군중앙성당이다.[25] 물론 이후에도 수많은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사제들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안동교구 초대 교구장을 역임한 프랑스인 두봉 주교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26] 서울시 영역 중 한강 이남 지역이 수원교구 관할구역으로 넘어갈 뻔하기도 했다.[27] 실제로 영국 가톨릭의 경우, 웨스트민스터 대교구(성공회 런던 교구, 세인트알반스 교구와 겹침)는 템즈강 이북의 런던과 그 북부 교외지역을 관할하지만, 켄트 주를 관할하는 서더크 대교구(성공회 서더크 교구, 로체스터 교구, 캔터베리 대교구와 겹침)는 템즈강 이남의 런던까지 관할한다.[28] 당시 개봉동 본당 소속 광명시 철산1동, 광명1동 거주자들은 신설된 광북성당으로 강제 편입. 사실 교구관할구역의 사소한 변동이든 아니든 분당이 이루어지면 일부 신자들은 신설 본당으로 강제 편입되긴 한다.[29] 다만 당시까지는 철산1동, 광명1동은 서울대교구 개봉동성당과 수원교구 철산성당 관할에 동시에 속했을 가능성도 있다.[30] 대표적으로, 일반 상가에 세 든 극히 일부 임시 본당을 제외한 본당 부지 및 건물.[31] 본래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여고였지만, 2016년 3월 1일부터 길음동으로 이전하였고 남녀공학으로 바뀌었다. 개교 당시에는 계성여자중학교도 함께 있었으나, 계성여중은 1980년대에 폐교되었다.[32] 원래 명동성당 바로 뒤에 있었는데 2006년에 이전했다. 기존 학교 건물은 교구청 별관으로 사용 중이다.[33] 표면적으로 특정 교구나 성직자와 관련이 없이 평신도가 운영하는 가톨릭 계열 언론매체로는 가톨릭뉴스 지금여기가 있다. 실제로는 정의구현사제단이 운영한다고 오해들을 많이 하나, 평신도 중심의 신학연구소인 우리신학연구소와 많은 접점이 있다.[34] 그 보상적 대가로 주교좌 명동성당의 부지를 확장했다.[35] 창설 당시 53개의 본당과 6만 6천여 명의 신자로 구성되어 있었다.[36]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 가고 있었을지가 의문이다. ....대동아 건설의 대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억일심으로 만민익찬의 신체제를 강조하는 이 시기, 천주교 신자로서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하기 위해...” (1940년 매월 첫째 주일을 ‘교회 애국일’로 지정하며 이를 설명한 노기남 대주교 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