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진보신당연대회의

새진보통합연대
사회당

시민통합당
(개별 합류)
[image]
'''진보신당'''
'''영문 명칭'''
New Progressive Party
'''표어'''
평등, 평화, 생태, 연대[1]
'''창당일'''
2008년 3월 17일
'''해산일'''
2012년 4월 12일
'''당 색'''
빨간색 (#E62020)
'''정치적 스펙트럼'''
중도좌파 ~ 좌파
'''이념'''
사회민주주의, 생태주의, 평화주의, 여성주의
'''해산 전 대표'''
홍세화
'''해산 전 주소'''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국회대로70길 19
대하빌딩 801호 (여의도동)
'''해산 당시 국회의원'''
0석 / 299석[2]
'''강령'''
진보신당 연대회의 강령
1. 개요
2. 로고
3. 역사
3.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3.2.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
3.3. 2010년 지방선거
3.4. 통합파들의 탈당
3.5. 등록 취소 및 재창당
4. 역대 지도부
5. 역대 선거 결과
6. 여담
7. 둘러보기


1. 개요


2008년~2012년까지 존재했던 대한민국의 진보정당. 노동당정의당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정당이다. 노동당은 진보신당의 강령과 역사(진보신당연대회의)를 이어받았으며, 정의당은 직계 후신은 아니지만 진보신당 출신의 인물(새진보통합연대, 평등사회네트워크)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2. 로고


[image]
바람개비 형상의 로고를 사용했다. 바람개비에는 평등(빨강), 생태(초록), 평화(파랑), 연대(노랑)를 상징하는 4가지 색상을 넣었다.
로고에 대한 아이디어는 서울 강남 지역의 당원들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레디앙 기사

3. 역사



3.1. 민주노동당 분당과 진보신당 창당


민주노동당 분당의 근본적인 이유는 노선에 따른 구조적 차이였다. 민족해방파(NL)의 경우 지도자 1인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를 구축한다. 강력한 집권층에게 선거로 권력을 위임하고, 일단 위임했으면 끝까지 밀어주는 것이 NL의 방식. 그러나 이러한 체제는 당연히 지도부가 거의 모든 권력을 누리게 되므로 많은 병폐를 낳을 수밖에 없다. 반면 진보신당 및 민중민주파(PD)는 지도부를 정책 실행을 위한 하나의 도구로 인식하며,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 인물보다는 노선과 정책이 중요하여, 인물이 노선과 정책에 어긋나는 행동을 할 경우 당연히 노선과 정책을 우선시한다. 이런 성격상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고 있으나, 의견 하나 내는 데 시간을 다 잡아 먹는 안습한 상황이 종종 벌어진다(...)
민주노동당의 NL계는 NL과 PD의 동거만으로 한국 진보정치를 낙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당내 PD계는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과거의 운동 노선을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제기된 구호가 바로 '''"보다 적색으로, 보다 녹색으로!"'''였다. 사회민주주의를 시도하면서도, 생태주의와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태주의뿐만 아니라 여성주의, 평화주의, 소수자 운동과 결합하는 것이 주요 과제로 제기되었다. 이른바 전통적인 자민통(NLPDR)노선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평가할 수 있다. 자민통 계열인 NL계는 민주당계 정당과의 선거 연대를 통한 자주적 민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평등파인 PD계는 좌파의 재구성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니 PD계가 민주당과의 선거 연대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이렇듯 민주노동당의 분당은 단순한 감정 대립이나 헤게모니 투쟁 때문이라기보다는, 확연히 구분되는 노선의 차이에 기인한 것이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종북주의[3]를 비판하며 탈당했던 진중권이 진보신당에 입당하여 당원으로 활동하였고, 그 외 유명인으로는 언론인 홍세화, 박노자 교수, 영화감독 박찬욱, 영화배우 문소리 등이 있다. 참고로 이들은 모두 이전부터 민주노동당 당원이었으며, 분당 과정을 거치며 이적(?)한 케이스.
진보신당 창당발기인 및 창당준비위원 명단

3.2. 진보신당 창당과 총선


한국사회당과 노선이 비슷해서 합당 이야기가 자주 나왔다. 창당 당시에도 한국사회당과 합당을 추진하였으나 무산되었다.# 이후 한국사회당은 등록이 취소되었지만 사회당으로 재등록하였고, 다시 합당이 논의되었다.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사태로 인한 촛불시위 이전에는 존재감이 흐릿했지만, 진보신당에서 운영하는 아프리카TV 개인방송인 '칼라TV'로 점점 존재감을 알리는 동시에 인터넷상에서 어느 정도 세력 확장을 하였다.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두자릿수 지지율과 비례대표 6번까지 당선을 목표로 선거에 임하였다. 그러나 노회찬, 심상정이 여론조사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낙선하였고, 봉쇄조항 3%에 '''0.06%'''라는 근소한 차이로 미치지 못하면서 한 명의 의석도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래도 정당 존속 요건인 2%를 넘긴 만큼 해산은 면했다.[4][5]
2009년 3월 당원 목수정이 정명훈과의 사건에서 많은 논란을 사기도 했다. 문서 참조.
2009년 4월의 2009년 재보궐선거에서 울산광역시조승수 의원이 당선되었다. 이를 통해 '''첫 원내진입에 성공하였다.'''
이명박 前 대통령이 진보신당 창당식 및 진보신당 창당 2년차때 축하 화환을 보내서 축하의사를 표하기도 했다. 이명박 前 대통령은 민주노동당과는 친분이 없다시피 했지만, 진보신당 창당의 주축인 노회찬, 심상정과는 상당한 친분이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3.3. 2010년 지방선거


2010년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 등에서 각종 통합 떡밥이 나돌았지만 전반적으로 정서가 비판적이었다. 제대로 이혼한 부부에게 재결합하라는 강요에 대한 반응이라고나 할까. 자신들과 이념이 다른 민주당과의 연대에 대한 각 당의 갈등도 있는 상황에서, 모든 잘잘못을 덮고 통합을 강요하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민주노동당 임시대의원대회에서는 단독 후보 발의안이 부정되고 선거 시 진보대통합을 추진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상황에서 노회찬 대표는 2009년 12월 16일, 통합정당은 선거 이후에 논의하더라도 민주당을 제외한 진보대연합으로 선거 연합을 하자고 제안하였다. 국민참여당은 크게 반발하였다. 민주노동당에서는 통합정당 논의를 왜 선거 이후에 하느냐고 노회찬을 까고 있다. 결국 노회찬은 민주계와 민주노동당 양쪽으로부터 비판받게 되었고, 5당 + 4시민단체 회의의 파행 끝에 선거 연대는 민주당과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치러지게 되었다.
결국 일부 지방을 제외하고는 선거 연대 없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치렀다. 이 선거에서 진보신당은 광역의원 3명과 기초의원 22명을 배출했다. 하지만 경기도지사로 출마했던 심상정 후보는 선거 하루 전에 유시민 후보를 지지하고 사퇴하였다. 서울시장으로 출마했던 노회찬 후보는 선거를 완주하며 3.3%를 득표하였다.
한명숙 민주당 후보가 예상밖의 선전으로 오세훈 한나라당 후보를 거의 따라잡았으나 단일화를 거부한 노회찬 때문에 오세훈의 재선을 막지 못했다며 까였다.(...) 하지만 민주당은 사전에 단일화를 제안한 적도 없으며,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진보신당에 돌리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진보신당 홈페이지나 노회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는 엄청난 수의 악플들이 달렸다. 사실 이 자체는 해프닝에 가까웠던 것이나, 어쨌거나 이는 후에도 정의당과 민주당의 사이가 험악해지면 단골로 나오는 레퍼토리(…)가 되었다

3.4. 통합파들의 탈당


[image]
(탈당한 통합파들.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 이른바 '노심조'.)
2011년 5월, 지도부는 민주노동당과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5월 27일 1차적으로 협상이 결렬되었으나#, 6월 1일 새벽까지 계속된 재협상 끝에 합의안이 통과#되었다.
6월 19일 고양시 일산신도시 킨텍스에서 열린 민주노동당 정책 당대회에서 조승수 대표가 지난 분당 과정에서의 자신의 발언과 행동에 대해 사과를 기초로 한 축사를 발표하였다. 22일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도 17대 대선과 분당 과정에 대해 사과하였다.

진보신당은 2011년 9월 4일 오후 서울 삼전동 송파구민회관에서 개최된 당대회에서 통합 합의안을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재석 대의원 410명중 찬성 222명, 반대 188명. 찬성이 반대보다 우세하긴 하였으나 정족수의 2/3(274명)을 넘지 못하여 '''통합 합의안은 최종 부결'''되었다.
9월 5일 통합을 추진하던 지도부가 사퇴하였고, 11월 1일 진보진영의 명망가들이건 '노심조'를 비롯해 윤난실 전 부대표 등 많은 당원들이 탈당한다. 이들은 '새진보통합연대'를 결성한 후 국민참여당, 민주노동당과 통합하여 통합진보당을 결성한다. 이 이후의 진보신당은 사실상 다른 역사로 보아야 한다.
여담으로 결국 노회찬과 심상정을 비롯한 통합파들은 통합진보당에서 한국 진보정치 사상 가장 스펙터클일들겪은 후, 다시 탈당하여 진보정의당을 창당한다. 이 당은 현재 정의당의 전신이다.

3.5. 등록 취소 및 재창당


통합파들의 탈당 이후, 새로운 4기 지도부가 구성되었다. 11월 26일 홍세화한겨레 기획위원이 대표 후보로 독자 출마해 찬반형식을 거쳐 당선되었다. 부대표는 김종철, 심재옥, 김선아, 강상구.
홍세화 후보는 야권 통합에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내면서, '''필요하다면 사안에 따라 연대는 하겠지만 통합은 부정적'''이라고 천명하였다. 반면 좌파정당인 사회당, 녹색당과는 통합을 추진할 것을 시사하였다. 녹색당은 연대는 가능하지만 합당은 불가하다는 입장을 피력하였고, 2012년 3월 사회당과 합당에 성공하였다.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지역구 후보 23명, 비례대표 후보 7명을 입후보시키고 경상남도 거제시김한주 후보의 당선과 비례대표 3% 돌파에 주력하였다. 학벌사회 반대의 논지로 출마자들의 학력을 표기하지 않았고, 비례대표 명단에는 박노자 교수도 있었다. 울산과학대학교의 청소노동자였던 김순자[6]가 1번, 홍세화 대표가 2번으로 3%를 넘길 시 당선권이었다.
그러나 4월 11일 뚜껑을 열어본 결과 비례대표 정당투표 1.13% 를 얻는 데 그쳤으며, 기대했던 거제시 김한주 후보는 새누리당 후보를 제치고 33.0%(30,457표)의 득표율을 보이며 선전했으나 무소속 김한표 후보에 패하고 말았다. 결국 '의석을 얻지 못하고 유효투표 총수의 2% 이상을 얻지 못한 정당은 등록을 말소한다.'는 정당법 규정에 의해, 등록취소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등록 취소 이후 진보신당은 재창당하였으나, 당시 규정에는 이전의 정당 이름은 쓰지 못하는 관계로 일단 진보신당연대회의라는 이름으로 창당하였다.[7] 그로부터 1년 뒤인 2013년에 노동당으로 바뀌어 오늘날로 이어진다.[8] 이후의 역사는 해당 항목 참조.

4. 역대 지도부



  • 2기 대표단(2009.3 ~ 2010.9)
    • 대표: 노회찬
    • 부대표: 정종권, 이용길, 박김영희, 윤난실
  • 비상대책위원회(2011.9 ~ 2011.11)[9]
    • 위원장: 김혜경
    • 위원: 김윤기, 이건수, 허윤영, 박육남, 이근선, 전원배, 정상천
  • 4기 대표단(2011.11 ~ 2012.4)[12]
    • 상임대표: 홍세화[10]
    • 공동대표: 안효상[11]
    • 부대표: 강상구, 김종철(권한대행), 심재옥, 김선아

5. 역대 선거 결과



6. 여담


진보신당이나 그 후계 정당인 노동당의 지지자들을 얕잡아 부르는 비칭으로 진신류가 있는데 진신류의 '진신'이 바로 진보신당을 줄인 말이다.

7. 둘러보기



[1] 로고에서 빨간색은 평등, 파란색은 평화, 초록색은 생태, 노란색은 연대를 뜻한다.[2] 당의 유일한 의원이었던 조승수 의원이 통합진보당으로 옮겨 갔다.[3] 일심회 사건[4] 이때 2%를 넘겨 해산을 면한 또 다른 정당은 기독사랑실천당이 있다.[5] 총선 때 2% 미만을 득표한 정당을 해산한다는 조항은 2014년에 위헌판결을 받았다.[6] 이후 김순자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출마한다.[7] 같은 이유로 녹색당도 녹색당더하기라는 이름으로 창당한 사례가 있다.[8] 이후 이들은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던 녹색당청년당과 함께 이 규정에 대하여 헌법소원을 냈고, 결국 2014년 이 규정에 대해 위헌 결정이 내려졌다.[9] 조승수 대표 사퇴 이후 김은주 부대표가 권한대행을 맡았으나, 얼마 후 물러나고 비대위 설치.[10] 사회당과의 합당 이후 상임대표. 일신상의 이유로 2012년 10월 사퇴.[11] 사회당과의 합당 당시 사회당 대표로 합당 이후 공동대표 취임. 2012년 11월 김순자 대선후보 출마 문제와 관련하여 사퇴.[12] 이후 진보신당연대회의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