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직

 

金后稷
1. 개요
2. 생애


1. 개요


신라 진평왕 시대의 충신. 지증왕의 증손이다. 중국 신화에 나오는 제곡의 서자 및 요임금의 서형제이자 주나라의 시조인 후직과 한자까지 같다는 점을 생각하면 신분은 왕의 차남 이하 아들로 추정되고, 지증왕의 손자 항렬 중에서 국왕에 등극한 사람은 진흥왕 뿐이다.

2. 생애


진평왕 시대에 병부령으로 있었는데, 왕이 너무 사냥을 좋아해서 보다 못해 자리잡고 간언한다.

옛날 임금된 이는 반드시 하루에도 만 가지 정사를 보살피매 깊이 생각하고 멀리 고려했으며, 주위에 바른 선비를 두고 그들의 직언을 받아들여 부지런히 힘쓰느라 감히 멋대로 즐기며 놀지 않았습니다. 그런 다음에라야 도덕과 정치가 순수하고 아름다워져 국가를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날마다 정신 나간 이들이나 사냥꾼을 데리고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기 위하여 산과 들로 뛰어다니는 것을 스스로 멈추지 못하고 계십니다. 『노자(老子)』는 ‘말달리며 사냥하는 일은 사람 마음을 미치게 한다.’고 하였고, 『서경(書經)』에는 ‘안으로 여색에 빠지거나 밖으로 사냥에 탐닉하는 일, 이 중에 하나만 있어도 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보면 사냥이란 안으로 마음을 방탕하게 하고, 밖으로 나라를 망치는 것이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를 유념하여 주소서.

그러나 씨알도 안 먹히자 한 번 더 간언했는데 그래도 안 고쳐졌다. 이후 후직이 병들어 세상을 뜰 때가 되자 세 명의 아들에게 유언을 말했다.

내가 신하된 자로 임금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아주지 못하였다. 대왕께서 놀고 즐기는 일을 그치지 않아 패망하게 될까 두려우니 이것이 내가 근심하는 것이다. 죽어서라도 꼭 임금을 깨우쳐주려 하니, 나의 뼈를 대왕이 사냥 다니시는 길 옆에 묻어라.

이후 진평왕이 또 사냥하러 가는데 그의 무덤 앞을 지나갈 때 무덤 속에서 사냥을 관두라는 소리가 들렸다...
결국 진평왕은 눈물을 흘리며 다시는 사냥을 안 하겠다고 맹세했다고 한다.[1] 오늘날에도 경주에는 '간묘(諫墓: 간언하는 묘)'라고 불리우는 김후직의 묘로 전해지는 무덤이 남아 있는데(경상북도 기념물 제31호), 실제 김후직의 묘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무덤에 묘비를 세운 건 조선 숙종 때이다. 아직 이 무덤은 발굴이 이루어진 적이 없어서 조사가 필요하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문선에 김후직의 상소문이 들어갔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이 상소문을 좋아한듯 하다.

[1] 이상 삼국사기 김후직 열전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