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얼 퀸
1. 개요
아일랜드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축구경영인.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선덜랜드 AFC 단장을 맡았다.
그는 아일랜드 출신 톱클래스 스트라이커로서 EPL에 이름을 남겼다. 그의 인생이 제일 꽃을 피웠던 시기는 다름아닌 선덜랜드에서 활약할 때였다. 그는 비록 선덜랜드에서 별다른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했지만 팀의 대들보로서 많은 업적을 남겨 선덜랜드 팬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이후 그는 선수 인생을 정리한 뒤 선덜랜드의 감독, 구단주, 단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최선을 다해 헌신해 팬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았다.
2. 특징
나이얼 퀸은 선수 시절은 물론이고 구단주로서 선덜랜드를 위해 모든 것을 헌신했다. 선덜랜드 팬들은 당연히 이런 그를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를 위한 응원가도 많이 만들었다. 그런데 실은 맨시티에서 먼저 그를 위한 노래를 만들었다. 노래의 제목은 '나이얼 퀸의 디스코 팬티'. 1992년 맨시티가 이탈리아의 페놀라로 프리시즌 투어를 갔을 때, 퀸은 팀동료 스티브 맥마혼과 함께 붉은색 셔츠와 매우 짧아서 팬티처럼 보이는 바지를 착용한 채 춤을 췄다. 맨시티 팬들은 그런 그들의 행동을 목격하고 이를 노래 제목으로 삼아 신나게 부른 것이다. 이후 퀸이 선덜랜드로 이적한 후, 선덜랜드 팬들도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고 현재까지 축구팬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응원가로 길이 기억되고 있다.
3. 선수 경력
"나는 아스날에서 내 트레이드[1]
를 배웠고 맨체스터 시티에서 축구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 진정한 내 반신을 찾았다. 나는 선덜랜드를 사랑한다."
3.1. 클럽
3.1.1. 초창기
초창기엔 아일랜드식 축구인 게일릭 풋볼 선수로 활동했다. 그는 12살에 더블린의 로버트 에미츠 클럽에 입단해 게일릭 풋볼 선수로서 한동안 활동하였고 1983년 7월엔 더블린 대학 GAA 팀의 주장으로서 오스트레일리아 투어에 참가해 한 달간 활동하기도 했다. 16살 때, 퀸은 All-Ireland Minor Hurling Championship 대회 결승전에 참가해 좋은 모습을 보였고 그런 그를 주목한 몇몇 팀들이(오스트레일리아식 축구 룰을 적용한 팀들이었다.) 오퍼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잉글랜드 풋볼에 몸을 들이기로 결심하고 1983년 아스날에 입단함으로서 본격적인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3.1.2. 아스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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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처음부터 아스날 FC 선수가 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처음에는 풀럼 FC에서 트라이얼을 받았는데 불합격 처분을 받자 아스날로 방향을 돌렸고 겨우 입단을 허락받았다. 그는 아스날에서 중앙 공격수로 활동했지만 그저 리저브 팀에서만 뛸 뿐 1군 기회는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1985/86 시즌 전반기에 리저브 매치에서 18경기 18골을 기록하는 눈부신 활약을 보여준 후, 퀸은 비로서 1군 무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그의 데뷔전 첫 상대는 리버풀이었다. 퀸은 리버풀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하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후 퀸은 11경기에 더 출전했지만 골을 더 이상 넣지 못했다.
이후 1986년 여름, 지난 시즌 도중에 성적 부진으로 물러난 돈 하우 감독의[2] 후임으로 아스날에 부임한 조지 그레이엄은 퀸의 잠재력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그 결과 퀸은 로테이션 선수로 종종 출전해 리그 35경기에 출전했고 8골을 기록했다. 이때 퀸은 리그컵 결승전에서 리버풀을 상대로 출전했고 아스날은 2:1로 승리해 우승컵을 획득했다. 그러나 아스날이 앨런 스미스를 영입하고 이 선수를 새로운 타켓맨으로 삼게 되자, 퀸은 아스날에서 더 이상 경기에 뛰지 못할 위기에 직면했다. 이후 퀸은 3시즌 동안 겨우 20경기만 출전하여 5골을 기록하는데 그쳤다. 결국 퀸은 더 많은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다른 팀으로 이적하기로 결정했다.
3.1.3. 맨체스터 시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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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3월, 퀸은 8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맨체스터 시티 FC로 이적했다. 그는 첼시와의 경기에 선발 출전해 데뷔골을 기록하며 팀의 1:1 무승부를 이끌었다.이후 퀸은 1990/91 시즌에 22골을 기록하며 팀내 최다 득점자에 선정되었고 이후 6년간 245경기에 출전해 78골을 기록했다. 그러던 중 1993/94 시즌에 '십자인대 염좌'라는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시즌 전체를 날려버렸고 이후 다음 시즌에 복귀해 35경기에 출전해 8골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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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맨시티 생활에서 가장 눈부신 장면을 꼽자면 1991년 4월 20일 더비 카운티와의 경기일 것이다. 이 경기에서 맨시티 골키퍼 토니 코튼이 상대 선수를 막다가 그만 페널티킥을 허용한 데다 퇴장을 당하고 말았고 교체 자원을 다 썼기에 그가 대신 골키퍼를 맡아야 했다. 이젠 다 틀렸구나 싶었던 순간, 뜻밖에도 퀸이 상대의 페널티킥을 막아내는 기적을 연출했다! 이에 기세가 확 올라간 맨시티는 더비 카운티를 2:1로 제압했고 더비는 이 믿을 수 없는 패배로 큰 충격에 빠졌는지 그 후 얼마 안가 강등되고 말았다.(...) 또 한 가지 눈부신 장면을 꼽자면 1993년 11월 7일 맨체스터 더비를 들 수 있다. 이날 그는 전반전에 2골을 기록하며 맨유 팬들을 절망에 빠뜨렸다. 그러나 맨유는 그걸 뒤엎는데 성공해 퀸의 활약을 무색하게 만들어버렸다. 이 경기는 EPL 역사상 최고의 경기 중 하나로 종종 선정되기도 했다.
1994/95 시즌, 퀸은 주전 경쟁에서 밀려 출전 기회가 저조해지자 팀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스포르팅으로 이적하려 했다. 그러나 스포르팅 리스본은 퀸이 원하는 급료를 지급하는 데 동의하지 않았고 결국 이적은 실패했다. 이후 퀸은 주전 자리를 되찾고 1994년부터 1996년까지 2년간 총 84경기에 출전해 21골을 기록한 후 1995/96 시즌에 팀이 2부 리그로 강등되자 선덜랜드로 이적했다.
3.1.4. 선덜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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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8월, 퀸은 피터 리드 감독에 의해 13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프리미어리그에 막 승격된 선덜랜드 AFC로 이적했다. 이후 그는 비록 첫 시즌에서 무릎 부상으로 인해 여섯 달을 날려버렸지만, 부상에서 회복한 뒤 데뷔전인 노팅엄 포레스트 전에서 2골을 기록하며 팀의 4:1 승리를 이끌었다. 그러나 퀸이 빠져 있는 동안 선덜랜드는 크게 부진했고 이후 퀸이 돌아와 활약했지만 결국 팀은 강등을 면치 못했다. 이후 1997년, 케빈 필립스가 선덜랜드에 입단했다. 퀸은 필립스와 투톱으로서 파트너십을 가지게 되었고 곧바로 환상적인 호흡을 맞추며 1999년에 팀을 EPL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후 퀸은 1999/2000 시즌 종합 21골(리그 18골, 컵 대회 3골)을 기록해 선덜랜드 팀 내 한 시즌 최다 골 기록을 경신하며 선덜랜드 팬들이 뽑은 올해의 선수 상을 수상했다. 퀸은 선덜랜드에서 1996년부터 2002년까지 6년간 203경기 61골을 기록하며 선덜랜드의 레전드로 거듭났다. 그러나 2002/03 시즌, 그는 노쇠화로 인해 선수 생활을 정리할 시간이 왔음을 느꼈고 2002년 10월 19일 웨스트 햄과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인생을 은퇴했다.
3.2.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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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아일랜드 U-17 멤버로 차출되어 북아일랜드와의 친선경기에서 국가대표로서 데뷔전을 치뤘다. 이날 퀸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데뷔전때부터 자신의 진가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러나 당시 퀸의 소속팀이었던 아스날은 퀸이 1985 FIFA 월드컵 유스 챔피언십에 차출되는 것을 거부했고 결국 퀸은 더 이상 17세 이하 청소년 대표팀 멤버로 뽑히지 못했다.
이후 퀸은 잭 찰튼 감독에 의해 1986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교체 멤버로 뽑혔고 이때부터 2002년까지 아일랜드 국가대표 선수로 뛰었다. 퀸은 유로 1988 때 멤버로 뽑혀 잉글랜드를 상대로 교체 선수로 투입되 팀의 1:0 승리에 기여했다. 이후 퀸은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 차출되어 아일랜드의 간판 공격수로 활약했다. 당시 아일랜드는 월드컵 조별 예선에서 잉글랜드, 네덜란드와 한 조가 되어 월드컵 본선 진출이 어려워보였다. 실제로 아일랜드는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1:0 으로 밀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퀸이 동점골을 터트렸고 이에 힘입어 아일랜드는 극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했다. 이후 아일랜드는 16강전에서 루마니아를 격파하고 월드컵 사상 첫 진출에 8강까지 가는 대박을 터트렸다. 비록 8강전에서 이탈리아에게 1:0으로 패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월드컵 8강은 아일랜드 축구 역사상 최고의 기록으로 남아 있다.
퀸은 2002 한일월드컵 지역 에선에서도 뽑혀 그의 35번째 생일날 키프로스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했다. 아일랜드는 퀸의 활약에 힘입어 2002 한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고 조별예선에서 독일과 함께 16강에 진출했다. 그리고 스페인과의 16강에서 전반 8분 만에 페르난도 모리엔테스에게 선제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90분에 로비 킨이 극적으로 페널티 킥 동점골을 넣고 연장전으로 끌고가나 승부차기에서 패해 결국 아일랜드는 탈락했다. 이후 2002년 10월, 퀸은 대표팀 소속으로서 92번의 경기를 출장하고 21골을 기록한 뒤 대표팀 은퇴를 선언했다.
4. 축구경영인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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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 킨과 함께
퀸은 선수 생활을 정리한 뒤 선덜랜드에서 코치 연수를 받았다. 또한 그는 방송국에 종종 출연해 스카이 스포츠와 BBC에서 축구 패널로 나와 시청자들을 즐겁게 했고 아일랜드에서 사업가로서 성공해 갑부로 거듭났다.
그러던 2006년, 선덜랜드가 재정 적자로 파산 위기에 처하자 퀸은 구단을 인수한 후 클럽의 회장 겸 감독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시즌 개막 후 4연패를 당하고 리그 컵에서마저 베리에게 2:0으로 패하자, 퀸은 자신에게 감독으로서의 재능이 없다고 판단하고 로이 킨에게 감독 자리를 맡겼다. 사실 선수 시절 로이 킨과 나이얼 퀸은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선덜랜드에서는 퀸이 적극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감독을 도왔고, 로이 킨은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선덜랜드를 EPL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후 퀸은 선덜랜드가 새로운 선수를 영입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적극 지원해주며 선덜랜드를 위해 헌신하다가 2008년 앨런 쇼트에게 구단을 팔고 단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그는 2012년까지 선덜랜드 홍보 단장 역할을 하다가 2012년 2월 6년간 헌신했던 선덜랜드를 떠나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에서 편안히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이후 그는 가족과 함께 아일랜드에서 조용히 야인으로서의 삶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