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 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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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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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출신의 전 축구 선수. 풀네임은 로이 모리스 킨으로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 중 한 명이자 EPL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중 한 명. 애칭은 "키노"이다. 로이 킨의 라이벌로는 주로 아스날 FC의 파트리크 비에라를 꼽는다. 당시 둘은 그라운드에서 상당한 설전을 벌였다.[3]'''패배한 변명을 나에게서 찾으면 패배의 이유가 되지만, 남에게서 찾으면 변명일 뿐이다.'''
'''로이 킨'''
로이 킨이 본격적으로 한국에 알려진 것은 2005년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 부터인데, 이 영향인지 전형적인 홀딩인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로이 킨은 공수를 겸비한 다재다능하고 중원 장악과 빌드업에도 상당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중앙 미드필더의 선수였으며[4] ,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EPL과 유럽 축구를 호령하던 중원 사령관으로 명성을 떨쳤다.[5]
참고로, 파트리크 비에라부터 프랭크 램파드 및 로이 킨 에다가 폴 스콜스 등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들을 모두 상대해 본 스티븐 제라드 역시 모두 자신과 비슷한 레벨이라고 보면서도 로이 킨만은 한 차원 다른 레벨의 선수로 평가할 정도였다.[6]
2. 클럽 경력
2.1. 코브 램블러스
축구 선수로서의 출발은 초라해서 아일랜드 정부가 실시한 공공근로사업 중 축구 분야에서 일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안습한 초창기를 보냈다.
2.2. 노팅엄 포레스트 FC
어쨌든 코브 램블러스에 재적 중에 한 스카우터의 눈에 띄여서 그의 도움으로 노팅엄 포레스트에서 선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역시 엄청난 성질머리로 유명한 명장 브라이언 클러프[7] 의 지도를 받으며 성장했다.[8]
점차 실력을 키우며 상위권 클럽들의 관심을 받던 킨은 본래 케니 달글리시가 지휘하던 블랙번 로버스 FC로의 이적에 합의했었지만, 이적 서류에 실수가 발견되어 이적이 지연되는 사이 알렉스 퍼거슨의 전화를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로의 이적을 결정했다. 사실 블랙번도 이 실수를 발견했는데, 실수를 발견한 게 금요일 오후인 데다 주말에 사무실이 닫는 관계로 월요일에 이적을 확정짓기로 구두합의를 한 상태였지만 퍼거슨은 킨을 잡기 위해 토요일에 모든 서류를 완비해 킨에게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히는 데 성공했다. 당시 이적료는 영국 기록인 375만 파운드.
2.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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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여름에 킨이 유나이티드에 입성했을 당시 유나이티드의 중원을 구축한 핵심 멤버는 브라이언 롭슨과 폴 인스의 듀오였는데, 이 듀오는 리그 우승의 주축이 되었던 터라 킨이 주전을 확보할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팀의 레전드인 롭슨은 당시 이미 36세의 노장인 데다 부상에 계속 시달리고 있었던 덕분에 킨은 점차 출장 기회를 늘려가며 선발 멤버로의 위치를 확고하게 굳힐 수 있었다. 그렇게 첫 시즌부터 주전으로 자리잡은 킨은 프리미어리그 타이틀과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하게 된다.
94-95 시즌은 맨유와 킨 모두에게 아쉬운 시즌이었다. 일찌감치 챔스는 조별리그 탈락하고 리그 타이틀은 블랙번 로버스에게 승점 1점차로 내준 데 이어, FA컵에서는 준결승 크리스탈 팰리스 전에서 맨유에서의 첫 퇴장을 당하며 결승 출전이 불가했고, 결국 결승에서 에버튼에게 1-0으로 패배하며 무관으로 시즌을 마치고 만 것이다.
95-96 시즌에는 폴 인스와 브라이언 롭슨 등이 팀을 떠나고, 데이비드 베컴과 폴 스콜스, 니키 버트 등 퍼거슨의 아이들이라 불리는 선수들이 본격적으로 맨유에서 주전으로 자리잡게 된다. 팀 내 미드필더 중에서 그나마 경험이 많은 킨은 팀의 허리에서 중추 역할을 했고, 맨유 데뷔 시즌에 이어 프리미어리그와 FA컵 타이틀을 거머쥐며 더블을 달성했다.
96-97 시즌에도 굳건한 주전이었으나 무릎 부상으로 인해 결장한 경기가 꽤 많았다. 그리고 특유의 성질 머리로 인해 출전 징계도 많았던지라 중요한 경기에서 출전이 불가했던 경우가 많았던지라 킨의 빈 자리가 컸던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와의 챔피언스 리그 4강 2차전. 그래도 리그 타이틀을 거머쥐며 결과적으로 괜찮은 시즌을 보냈다.
97-98 시즌은 맨유 입단 후 가장 불운했던 시즌이었다. 에릭 칸토나의 은퇴로, 주장 완장을 물러받은 시즌이었으나 당시 리즈 유나이티드에서 뛰던 알프잉에 홀란[9] 와 후술할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십자인대 부상을 입은 것이다. 결국 이 부상으로 인해 잔여 경기를 모두 날리게 된다. 맨유는 킨의 부재로 인해 후반기에 아스널에게 선두자리를 내줬고, 결국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내줘야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트레블을 이룩한 98-99 시즌에서의 활약상은 엄청났다. 직전 시즌에서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시즌을 거의 날린 아쉬운 모습을 뒤로 하고, 시즌 총 55경기에 나서는 어마어마한 체력을 보인 것이다. 또한 중요한 상황에서의 활약도 뛰어났다. 특히 유벤투스 FC와의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2차전에서는 전반전 초반부터 2-0으로 뒤지면서 팀 분위기가 침체될 상황에서 24분에 코너킥 찬스 때 헤더로 만회골을 넣으며 재빨리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역할을 했다. 결국 맨유는 킨의 골을 시작으로, 34분에 드와이트 요크가 동점골을 기록하며 합산점수에서 원정다득점으로 우세를 잡게 되었고, 84분에는 앤드루 콜이 쐐기골을 박으면서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그러나 킨은 이 경기에서 전반 33분에 지네딘 지단에게 강한 태클을 날려 넘어뜨리면서 옐로 카드를 받고 경고 누적으로 인해 결승에 출전이 불가했다.[10][11] FA컵 결승에서는 전반 9분만에 부상으로 아웃되었지만 팀은 2-0 승리를 따냈으며,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는 킨과 스콜스의 부재로 팀이 어려운 경기를 펼쳤지만 후반 추가시간에 2골이 나오면서 바이에른 뮌헨에게 극적인 2-1 승리를 거둬 트레블을 이뤄냈다. 대회의 피날레에서는 각각 부상으로 인한 교체와 카드 트러블로 인한 결장으로 아쉽게 마무리했지만, 팀이 모두 우승을 차지하며 트레블을 달성한 최고의 시즌이 되었다.
99-00 시즌에는 맨유와 재계약을 체결하였으며, 포지션이 중앙 미드필더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즌 45경기에서 12골을 넣는 등 엄청난 활약상을 보이며 2년 연속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동시에 PFA 올해의 선수상과 FW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며, 지난 시즌에 이어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00-01 시즌에는 맨체스터 더비에서 알프잉에 홀란에게 가한 태클로 인해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항목 참조. 이 사건과는 별개로 활약은 여전했고, 3년 연속으로 프리미어리그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실력 뿐만 아니라 불굴의 정신과 성공에 대한 열망,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했으며 알렉스 퍼거슨 경은 그를 함께 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였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 불같은 성격과 자기 자신이나 남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고 과격한 언행 때문에 충돌을 여럿 빚기도 했다.[12][13]
2005년 2월 5일에는 버밍엄 시티 FC 전에서 맨유 소속으로 50번째 골을 기록했다.
로이 킨 특유의 성격이 제대로 터져나오게 된 대표적인 사건이 2005/06 시즌 맨유가 미들즈브러 FC 원정에서 1-4로 대패하자[14][15] 킨은 맨유TV와의 인터뷰[16] 에서 미들즈브러전 패배의 원인이 된 5명의 선수[17] 들을 직접 겨냥하여 능력이 없으면 팀을 떠나라는 식으로 독설을 퍼부었고, 추가로 리오 퍼디난드에게는 12만 파운드의 높은 주급[18] 을 받는데 스타도 아닌 놈이 거드름이나 피운다며 맹비난까지 했다. 이 영상을 본 퍼거슨 감독과 데이비드 길 단장은 인터뷰의 내용이 팀 매니지먼트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것이다고 판단하여 맨유TV 편성에서 곧바로 제외하고 킨의 발언이 외부 언론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맨유가 프랑스의 릴에게 0-1로 패배하여 조별리그 꼴지로 탈락하자 데일리 미러는 이 인터뷰를 공개했고, 일명 “키노게이트”로 불린 이 사건은 영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퍼거슨 감독은 로이 킨이 주장에 걸맞지 않게 팀 내 기강을 해치고 선수단의 갈등을 일으킨다고 판단[19] , 더 이상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결정하여 결국 2005년 11월 18일 상호 계약 해지로 맨유에서 방출되었다. 그러나 프리미어 리그에서는 맨유 이외의 팀에서는 뛰지 않겠다며 2006년 1월, 스코틀랜드의 셀틱 FC에 입단하여 시즌을 마무리하고 현역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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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팀에 큰 공헌을 한 레전드에 대한 예우에서인지 셀틱 FC는 맨유를 킨의 은퇴 경기 상대팀으로 잡았고, 2006년 5월 올드 트래포드에서 열린 은퇴 경기에서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으며 맨유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캡틴의 마지막 모습을 배웅해주었다.[20]
로이 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번의 EPL 우승과 4번의 FA컵 우승, 1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4번의 FA 커뮤니티 실드 우승 등을 경험하며, 총 480경기 51골을 기록했다.
3. 국가대표 경력
1991년에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고, 1994 FIFA 월드컵에도 활약했다.
2002 FIFA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본선 진출을 이끌게 된다. 그러나 본선을 앞두고 실시한 전지 훈련에서 당시 아일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믹 매카시의 훈련 방법에 불만이 있었고, 훈련 내내 말싸움을 하며 불화가 이어지게 된다. 결국 매카시 감독이 킨을 돌려보내면서, 킨은 대표팀을 떠나 홀로 귀국하면서 2002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했다. 이후 국가대표에 소집하고 있었는데, 2004년 5월에 맥카시가 사임하고 브라이언 커가 새로 부임하였다. 그렇게 브라이언 커가 이끄는 대표팀에 다시 복귀하였으나, 아일랜드 국가대표팀이 2006 FIFA 월드컵 독일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게 되자, 2005년 10월 15일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4. 플레이 스타일
일단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경기장 전체를 종횡무진 누볐다. 90분 내내 지치지 않는 체력으로 돌아다니며 맨유에 있던 시간 동안 팀의 중심으로 있었다. 전술 이해도가 매우 높아서 항상 적재적소의 위치에 있었으며, 뛰어난 리더십으로 팀을 휘어잡았다.
리더십, 활동량과 함께 킨의 장점으로 들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수비 능력이다.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로서 요구되는 모든 수비 능력을 최고 수준으로 갖췄다. 태클 능력 또한 기가 막혔다. 상대 선수의 드리블 상황을 효율적으로 끊어냈고, 공중볼 경합에 언제나 적극적으로 가담해 대부분 우위를 가졌으며, 파트리크 비에라 같은 피지컬이 훌륭한 선수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고 자신의 플레이를 펼쳤다. 이러한 점은 항상 당당하고 근성 있게, 때로는 거칠게 플레이해서라도 언제나 이기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도 드러난다. 덕분에 그가 주장으로 있을 때, 팀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폴 스콜스와 같은 파트너 미드필더가 공격적으로 침투하면 로이 킨 본인은 후방 빌드업을 전담할 정도로 패싱력과 개인 기술도 상당히 높은 수준으로 갖췄다. 국내 축구 전문가 한준희 해설위원도 4-4-2 포메이션에서 가장 이상적인 중앙 미드필더로 로이 킨을 항상 첫손에 꼽았다.
눈에 띄는 약점이랄 것은 없지만, 체구가 크지 않다는 것이 약점으로 볼 수도 있다. 엄청난 스태미너를 제외하면, 킨은 주력, 점프력, 가속을 붙이는 능력 등 신체적인 능력이 평범한 수준이었으며, EPL의 특성상 이것을 킨의 약점으로 볼 여지는 충분하다.[21] 하지만 비교적 평범한 신체 조건에 비해 굉장히 몸싸움을 잘 했으며, 소위 말하는 단단한 타입의 선수[22] 였다. 선술했듯이 승부욕이 매우 강해 항상 적극적으로 플레이했기에 플레이가 거칠기도 했다. 성격은 딱 EPL 최적화. 사실 선수로서 축구자체만 따졌을때는 딱히 약점이 없었고 가장 큰 약점은 그놈의 성질머리이다. 이성의 끈을 놓고 달려들다가 퇴장을 당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는데, 이는 팀 입장에서 당연히 엄청난 손해이고 경기 도중에도 상대팀의 타겟이 되기 쉬운 요소이다. 실제로 앨런 시어러는 경기 내내 씩씩거리는 킨을 보고 일부러 슬쩍 한 번 도발해봤는데 킨이 홀라당 도발에 넘어가 폭력을 휘두르다가 퇴장을 당한 적도 있다. 커리어 통산 레드카드를 무려 13번(...)이나 받았다.
동시대에 활약한 비에라와 비교했을 때, 빌드업 상황에서 패스 전개 능력이나 팀 내 플레이메이커로서의 다재다능함 면에서는 비에라보다 킨을 한 수 위로 평가하는 경향이 높고, 중원 장악 능력과 수비력에서는 일반적으로 피지컬이 더 좋은 비에라가 우위로 평가받는다. 전체적으로 보면 [23] 압도적인 수비력, 준수한 볼 컨트롤 및 패싱 능력, 악바리 근성과 팀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리더십까지 지닌 당대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이자 주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맨유가 킨과 함께한 시간 동안 얻어낸 수많은 우승 트로피들이 이를 입증한다.[24]
5. 지도자 경력
선수 은퇴 이후 06/07 시즌에 잉글리시 챔피언십 리그(2부)의 선덜랜드 AFC의 감독을 맡아 프리미어 리그로 팀을 승격시켰다. 재미있는게 이 때 선더랜드의 구단주 컨소시엄의 대표가 니얼 퀸[25] 이었다. 07/08 시즌은 다소 고전했으나 그럼에도 인상적인 경기력을 몇 번 선보여 팀을 프리미어 리그에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08/09 시즌 중반, 성적부진으로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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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이 되면서도 그 거친 성격은 못 버렸는지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선수들에게 욕설을 퍼붓거나 주변 집기들을 부쉈다고 한다. 그런데 선수들도 문제가 있었던 게 경기에서 졌는데도 라커룸에서 ABBA의 Dancing Queen을 틀어놓고 춤을 췄다고 한다. 물론 감독에게 들켜서 얻어 터졌다. 심지어 리저브 팀이 경기를 할 때 라커룸으로 찾아가 "1군에 올릴 선수가 있나해서 왔는데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면서 리저브 팀 선수들의 사기마저도 꺾었다. 이 때문에 그가 사임하자 선수단은 환영의 의사를 밝혔고 심지어 축하파티를 벌였다는 루머까지 흘러나온...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열심히 파티를 했다.
2부리그 구단인 입스위치에 부임했을때 선수들이 군기가 빠졌다면서 선수들을 군대캠프에 보내서 굴렸으나 성적은 더 하락하고 본인은 잘렸다. 선수로서는 일류였지만 감독으로서의 재능은 좀 없는 듯. 동료 선수도 그가 감독직에 대한 이해나 준비가 없는 거 같다고 평했다.
2013년 아일랜드 축구 국가대표팀의 수석 코치로 영입되었다. 그런데 감독이 '''마틴 오닐'''.
2014년 아스톤 빌라의 수석 코치로 임명. 국가대표 수석코치와 겸직인듯. 아일랜드 대표팀에 집중하기 위해 2014년 11월 28일 아스톤 빌라의 코치직에서 사임하였다.
2018년 11월, 아일랜드 대표팀 수석 코치에서 물러났다.
이후 아일랜드 수석코치 시절의 감독인 마틴 오닐 사단에 들어가서 2019년 1월 31일 노팅엄 포레스트 FC의 수석 코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마틴이 성적부진으로 경질되면서 같이 사임하였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1.1. 선수
- 노팅엄 포레스트 FC (1990~1993)
- 풀 멤버스 컵: 1992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3~2006)
- 프리미어 리그: 1993-94, 1995-96, 1996-97, 1998-99, 1999-00, 2000-01, 2002-03
- FA컵: 1993-94, 1995-96, 1998-99, 2003-04
- UEFA 챔피언스 리그: 1998-99
- FA 커뮤니티 실드: 1993, 1996, 1997, 2003
- 인터콘티넨탈 컵: 1999
- 셀틱 FC (2005~2006)
- 스코티시 프리미어 리그: 2005-06
- 스코티시 리그컵: 2005-06
6.1.2. 감독
6.2. 개인 수상
- PFA 올해의 팀: 1992-93, 1996-97, 1999-00, 2000-01, 2001-02
- PFA 올해의 선수: 1999-00
- PFA 세기의 팀[26] : 2007
- FWA 올해의 선수: 1999-00
- ESM 올해의 팀: 1999-00
- 프리미어 리그 10주년 베스트 XI (1992-93 to 2001-02)
- 프리미어 리그 20주년 베스트 XI (1992-93 to 2011-12)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8년 10월, 1999년 12월
- FIFA 100: 2004
- RTE 올해의 운동 선수: 1999
- 맷 버스비 올해의 선수: 1998-99, 1999-00
- 아일랜드 올해의 신인 선수: 1993, 1994
- 아일랜드 올해의 선수: 1997, 2001
- 잉글랜드 축구 명예의 전당: 2004
7. 킨에 대한 말, 말, 말
'''지금까지 함께 한 선수 중 로이 킨이 단연 최고이며, 그는 자신이 열정적으로 경기하는 모든 곳에서 축구 선수와 맨유에 영감을 불러 일으키는 존재다.'''
'''모두가 킨을 진정한 리더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는 또한 믿을 수 없는 기량을 갖춘 선수기도 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는 오늘날 어느 팀에서도 활약할 수 있다.'''
'''나는 로이 킨을 보고 배웠다.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일단 그가 그냥 좋았다. 지금도 좋아한다. 정말 훌륭한 리더이자, 환상적인 선수였다. 퍼스트 터치는 다른 그 누구보다 훌륭했다. 킨과 함께 피치로 걸아갈 때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게 리더십이다. 그게 내가 이 클럽에 있는 선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로이 킨은 이 라인업[27]
에 들 자격이 있다. 나는 그의 광팬이었다. 그의 박스 투 박스 플레이를 공부했고 그라운드에서 많은 싸움을 즐겼다. 그는 최고의 선수이다.'''
'''주장 로이 킨은 모든 책임을 다 짊어질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다.'''
'''난 로이 킨을 상대로 뛰는 것을 좋아했다. 우리는 같은 경기에서 열정을 공유했고, 그는 맨유의 좋은 주장이자 리더였다. 그를 상대할 때는 항상 어려운 것을 알았다. 그는 위너다.'''
'''내가 어렸을 때 로이 킨은 내가 사랑했던 선수였다.'''
8. 기타
- 성격이나 인격에 좀 문제가 많다. 오죽하면 해외에선 맨유팬을 제외하곤 로이 킨을 응원하는 팬들이 없다고 라이벌 팬들이 조롱할 정도. 그 유명한 키노게이트 사건은 물론이고 감독 시절엔 특유의 성깔로 욕설과 함께 선수들을 몰아붙이는 행동을 많이 할 정도였다. 입스위치 시절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하자 선수단이 킨의 경질 파티를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 2002 한일 월드컵 직전 감독과 마찰을 일으키며 귀국해서 논란이 빚어졌다. 근데 이 부분은 킨 쪽에서 어느정도 일리가 있는것이 사실은 월드컵 예선 때부터 아일랜드 축구협회의 선수단에 대한 대우[28] 에 불만이 많아 개선을 요구하여 개선에 대한 언질을 받았으나 본선 직전까지도 막장스러운 모습[29] 을 보여주자 분노가 폭발했는데 그걸 구실로 감독이 명단에서 빼버린 것. 원래 킨은 끝까지 대표팀에 남아있으려 했으나 선수 시절부터 사이가 안 좋았던 믹 맥카시 감독, 그리고 감독 편을 드는 고참 니얼 퀸의 주도로 일종의 추방을 당한 셈. 정작 다른 선수들은 로이 킨 편이었다.[30]
- 파트리크 비에라와의 앙숙관계는 이미 전설로 불린다. 둘의 앙숙 역사는 이 동영상으로 정리되는데, 로이 킨은 자신의 두 번째 자서전에서 비에이라와 대치할 때 속으로는 무척 겁을 먹었다고 고백했다. 만약 비에이라가 폭발한다면 자신은 비에이라의 상대가 되지 못할거라고. 그리고 앙숙 사이와는 별개로 서로의 실력은 인정하는 편이다. 은퇴 이후에는 같이 인터뷰도 할 정도로 관계가 많이 호전되었다.
- 2011-12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FC 바젤에게 패해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리그에서 탈락하자 12월 초부터 신랄한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선수들의 미숙함과 실력을 비난하다가 마침내는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디스하기 시작했다. 팀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팀을 운영한다는 둥, 이제 팀을 떠난 선수한텐 어떻게 못할 거라는 둥... 디스하는 내용으로 봐서 그냥 성적 부진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뭔가 개인적인 감정도 느껴지는 듯. 이후 추이를 지켜봐야 할 듯하다.
- 두번째 자서전을 발매하면서 맨유를 떠난 것에 대한 후회는 더 일찍 떠나지 않은 것 뿐이라고 서술한 걸 보면 내쳐지는 과정에서 퍼거슨에게 제대로 감정이 상한 것으로 보인다.(...) 퍼거슨이 대단한 감독이라는 사실과 그와 맨유에서 성공적이었던 시절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자기가 경험해본 감독중 최고는 브라이언 클러프라고 얘기하거나 퍼거슨을 용서할수 없다고 얘기하는 등 퍼거슨을 공개적으로 디스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서전에서 이미 2005년 키노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이전부터 퍼거슨과 알게 모르게 대립이 있어왔다고 했다. 그게 키노게이트로 인해 완전히 폭발한 것.[31] 사실 킨은 키노게이트 때문에 자기의 맨유 커리어가 끝날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 자기가 맨유에서 감독, 코치, 구단에게 참아오고 갈등도 쿨하게 넘어갔던 것에 비해 감독과 구단은 이 사건 하나로 자기를 완전 내쳐버리는 식으로 대우[32] 를 하는 것에 화가 났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킨은 "나는 브라이언 롭슨, 스티브 브루스가 맨유를 떠나는 과정도 직접 봤는데 그들이 맨유 커리어 말미에 받은 대우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퍼거슨의 선수 관리가 뛰어나다고 많은 이들이 속고 있다. 퍼거슨이 팀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한다는 말은 헛소리다. 그의 아들은 운좋게 맨유에서 뛰면서 우승 메달을 얻을수 있었다. 그의 형[33] 은 오랫동안 맨유의 수석 스카우트였다. 그의 부인이 클럽 스탭으로 있지 않은게 놀라울 뿐이다. 대런 퍼거슨이 프레스턴 감독직을 잃으니까 거기에 있는 맨유 어린 선수들을 다시 복귀시켰다. 이게 맨유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건가?"라며 퍼거슨을 실랄하게 디스했다.[34] 퍼거슨 감독은 그 사건 이후로 비록 킨과 사이가 전보다는 멀어졌지만 그래도 맨유의 주장이자 레전드였기에 은퇴경기까지 열어주고 신경도 썼지만, 자서전에서 킨이 맨유 구단과 퍼거슨에게 신랄한 디스를 가해버렸기에 둘의 사이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현역 은퇴 이후 감독 생활 중에는 퍼거슨의 고충도 어느정도 이해했다고 했는데 그 이후 자서전을 발매하고 여러 인터뷰를 하면서 다시 사이가 벌어진 것이다. 나중에 베컴이 한 번 유니세프 자선 경기에서 둘의 화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킨은 거절했다.[35]
- 주제 무리뉴도 굉장히 싫어한다. 모예스는 선수들이 부진해서 경질된거라 선수들을 비난했고, 반 할은 코치부임설까지 돌았을 정도라 옹호했던 편인데 무리뉴의 경우 부임소식이 들릴때부터 개인적으로는 싫다고 하더니 틈만 나면 무리뉴에 대한 비판을 일삼고 있다. 맨유의 공격축구가 사라졌다고 비판하는거까지야 정상참작이 가능하다만 맨유가 실제로 살인적인 일정을 걷고 있는데도 무리뉴가 엄살을 부린다고 말한다던가[36] , 스페셜 원은 무리뉴가 아니고 과르디올라라고 인터뷰하는 등 맨유 팬들도 좀 도움이 되는 말 좀 내뱉으라고 짜증을 낼 정도의 무리뉴까기를 시즌 내내 시전했다. 시즌 종료가 임박한 가운데 스페셜 원이라 주장했던 과르디올라는 감독 커리어 사상 최초의 무관, 모예스가 맡은 선더랜드가 강등당하고 무리뉴가 유로파 결승에 진출한 시점에서, 로이 킨은 팀이 처한 상황은 생각도 안하는 걸 보면 정말로 감독 감은 아니었구나 하는 싸늘한 반응만 남은 상태이다. 현지에서도 레전드는 레전드라도, 제발 입 좀 닫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반응.[37]
- 성질머리랑은 별개로 아이들이랑 찍은 사진을 보면 경기장에서 있던 사람과 같은 사람인지 의심갈 정도로 온화해보인다. 피치 내외적으로 보이는 거친 언행과는 달리 사생활은 깨끗한 편이며 97년도에 결혼한 부인 사이에 아이를 5명이나 두고 있다.
- 김남일의 별명인 남일 킨은 이 선수에게서 나온 것이다.
- 흔히들 맨유하면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스콜스를 떠올리지만, 로이 킨은 스콜스보다도 훨씬 더 맨유의 중심이었다. 하지만 당장에 네이버 스포츠 뉴스만 봐도 스콜스에 비해 지나치게 저평가 받고있다. 박지성이 맨유를 가고 EPL이 대중화 되기 전에 활약하여, 보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명백한 맨유의 중심이었던 선수다. 한 시즌마다 EPL 최고의 활약을 펼친 선수들한테 수여되는 PFA 올해의 선수상을 받은 것만 보더라도 전성기때의 그는 월드 클래스급의 활약을 보여준 미드필더이다.
-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이후에 자서전에서는 자신의 인생 월드클래스 선수로서 긱스, 스콜스, 호날두, 에릭 칸토나 등을 뽑았는데, 로이 킨이 언급되지 않아 말이 오가기도 했다. 물론, 왜 안뽑았는지 우리는 다 알고 있지만...다만 퍼거슨은 만약 1:1 종목 경기에 역대 맨유 선수 중 한명을 내보낸다면 자신은 로이 킨을 내보낼 것이라 언급했다. 그만큼 개인으로서의 재능과 능력은 압도적이었다고.
- 반대로 로이킨이 뽑은 자신의 동료들중 월드클래스는 긱스, 마크 휴즈, 스콜스, 어윈, 칸토나였다. 가장 중요한 기준은 일관성. 9년에서 11년간 꾸준히 활약한 선수여야 한다고.
- 더러운 성격과는 별개로 자기자신에 대해서는 굉장히 겸손한 인물이다. 당대 최고의 선수 중 한명이었으나 본인은 그저 평범한 기량에 운이 좋은 선수였을 뿐이라고 답하기도 했고 바르셀로나, 바이에른뮌헨 같은 유럽의 일류 팀들을 상대할땐 아직 갈길이 멀다고 느껴졌다고 한다.
- 본인이 직접 상대했던 선수들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선수로 지네딘 지단을 뽑았다. 지단의 피지컬적으로 거칠면서도 기술적으로 화려한 플레이가 굉장했다고 한다.
- 선수들의 정신적인 면을 상당히 강조한다. "자동차, 문신, 여자친구, 에이전트에 신경쓸 시간에 축구나 해라. 그런건 은퇴하고 나서 해도 된다", "사람들이 축구선수한테 축구 외적인 관심사가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난 동의 못한다. 축구선수라면 당연히 축구가 제일 우선순위에 있어야 한다"와 같은 발언을 자주 한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선수 시절에도 축구 외적인 활동이 매우 많았던 데이비드 베컴에게는 늘 축구가 그의 삶에서 제일 우선순위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부업으로 무엇을 하던 별로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 축구 패널로 방송에 출연하면 시니컬한 발언을 많이 한다. 골키퍼가 멋진 세이브를 해내도 그저 자기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하거나[38] 아스톤빌라가 잔류에 성공하고 라커룸에서 선수들이 환호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 오버한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도 했다.
- 어렸을때는 토트넘 홋스퍼 FC의 팬이었다.
8.1. 알프잉에 홀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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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에서는 알프잉에 홀란[39] 과의 일화가 복수극으로 왜곡되기도 했다. 알프잉에 '알피' 홀란이 로이 킨을 부상입힌 뒤 "별 것도 아닌 게 까불고 있어!"라고 외쳤고, 이를 기억하고 있던 로이 킨이 5년 후 알피 홀란을 부상입히고, 홀란이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는 이야기인데, 전부 사실이 아니다.
첫째, 로이 킨은 홀란에게 백태클을 시도하다 부상당한 것이다. 둘째, 홀란이 로이 킨에게 말했다는 "별 것도 아닌게 까불고 있어" 또한 사실이 아니다. 로이 킨이 백태클에 실패하고 필드에서 뒹굴고 있었는데, 홀란이 "다친 척 하지 말고 일어나."고 말한 것이 왜곡된 것이다. 셋째, 알피 홀란이 로이 킨의 태클로 당한 부상은 경미한 타박상이었다. 홀란은 끝까지 경기를 소화했고, 며칠 뒤엔 국가대표 경기에도 출전했다. 넷째, 알피 홀란은 로이 킨을 고소 하려했으나 실제로 하지는 않았다. 다섯째, 로이 킨은 알피 홀란을 노린 태클을 두고 개인적인 복수라고 말하지도 않았다.[40] 마지막, 로이 킨과 알피 홀란은 그 이후에도 3~4번이나 만난 적이 있다.
대한민국 내에서 부풀려진 복수극 자체는 사실이 아니지만, 로이 킨이 알피 홀란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은 사실이다. 일련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로이 킨은 홀란을 여러번 비난했는데, 킨이 홀란을 걷어찼을 때 다른 시티 선수들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았는데, 그건 홀란이 머저리이기 때문이며, 홀란이 머저리라는 건 시티 선수들도 전부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이 정리된 글
9. 관련 문서
[1] 중앙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2] 09/10 시즌 중도 취임, 10/11 시즌 중도 해고.[3] 터널에서 비에이라가 게리 네빌을 위협하다가 킨에게 반격당한 사건이 대표적으로 당시 맨유와 아스날을 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라이벌 관계로서 양 팀 주장인 킨과 비에이라는 경기장에서 만나기만 하면 살벌한 신경전을 펼쳤다. 하지만 두 선수 모두 팀을 떠난 이후에는 서로를 존중해주는 듯한 인터뷰도 하면서 정작 둘의 사이는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는 듯하다. 2012년에는 BBC에 패널로 나란히 등장해 경기의 논평을 하기도 했다.[4] 실제로 2000년대 초반 세계 최고의 미드필더였던 베론이 맨유에서 부진했던 이유 중 하나로 로이 킨이 베론의 역할까지 모두 소화해서 붕 떠버린 것이 꼽힐 정도이다.[5] 물론 박스 투 박스형 중앙 미드필더들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꽤나 많다. 예시로는 로타어 마테우스, 마이클 에시엔, 젠나로 가투소, 상기한 파트리크 비에라 등등이 있다.[6] 출처[7] 중소 구단인 노팅엄 포레스트의 역대급 최전성기를 이끈 감독. 기존 선수단의 역량을 한계치로 끌어올리고, 자신의 전술로 융합해 유러피언컵 2회 우승을 이끌었으나 이 후 노팅엄은 자금난과 전력 약화로 하부리그로 강등(...).[8] 여담이지만 킨은 FA컵에서 치명적인 실수를 해 골을 헌납하고 팀이 탈락하는 빌미가 됐었는데, 라커룸으로 돌아온 킨에게 클러프가 '''주먹을 날려''' 그대로 뻗게 만든 적이 있다고 한다(...).[9] 엘링 브라우트 홀란의 아버지이다.[10] 베컴에 의하면 킨은 경기 끝나고 결승전에 뛰지 못하는 사실에 낙담했다고 한다. 다른 선수였으면 경기 도중에 심리적으로 크게 동요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다는 점 때문에 이 경기를 로이 킨 커리어 최고의 경기로 뽑는 사람이 많다. 물론 킨 본인은 자기 할 일을 했을 뿐이고 팀 전체의 업적이라며 겸손하게 반응한다.[11] 로이 킨의 부재로 당시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는 팀의 가장 연장자이자 오랜 기간동안 몸 담고 있던 골키퍼 피터 슈마이켈이 주장 완장을 대신 차게 되었다.[12] 맨유 시절 동료로 인간성 좋고 선량하기로 정평이 난 솔샤르도 훗날의 인터뷰에서 로이 킨은 선수와 감독 양쪽 다 깠다. 좀 돌려말하긴 했지만 이름을 지목해서 유독 로이 킨한테만 그런 걸 보면 일화가 많기도 한 모양. 또한 마인드가 군인 마인드인데 과거 감독 시절 선수들을 경기력 향상과는 상관없는 병영캠프에 보내기도 했다.[13] 프로 선수로서 축구를 대하는 마인드가 굉장히 빡세다. 18-19시즌 맨유와 리버풀의 더비 경기 시작전에 양팀 선수들이 터널에서 서로 포옹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전쟁에 나가는데 포옹이 웬말이냐. 상대를 쳐다도 보지 말아야 한다"며 대차게 깠다.[14] 당시 퇴물대접을 받던 스페인 전 국가대표 가이즈카 멘디에타가 맹활약을 펼친 경기로도 유명하다.[15] 사실 이 경기를 망치게 된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는 그 경기가 맨유 통산 1000번째 골을 앞두고 있었던 상황이었는데, 이 때문에 영국의 언론은 1000호골의 주인공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기사가 연일 이어졌으며 심지어는 한 맥주회사에서 1000호골의 주인공에게 거액의 상금을 주겠다고 하기까지 했던 상황이었다. 이런 외부적인 상황으로 맨유 선수들이 전반적으로 골을 넣기 위해 경기 본연에 집중하지 못해 더 큰 참사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많다. 참고로 이날 넣은 1골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1000호골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경기내외적으로 완패를 당했기 때문에 이 1000골에 대한 화제는 곧 사그러들었다.[16] 사실 원래 이 인터뷰는 게리 네빌이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킨의 부상 때문에 서로 스케쥴을 조정하게 되면서 킨이 맡게된 것.[17] 일명 로이 킨의 “맨유5적”으로 불렸는데, 리암 밀러, 키에런 리차드슨, 앨런 스미스, 존 오셔, 대런 플레처가 집중 포화 대상이었다.[18] 사실 킨은 퍼디난드의 주급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선수 개개인의 급여에 관심도 없다고 한다. 12만 파운드는 그저 그를 비난하기 위한 랜덤한 액수였을 뿐.[19] 그런데 킨의 주장에 의하면 정작 맨유에서 그와 같이 뛰었던 선수들은 그 문제의 인터뷰를 크게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구단은 킨에게 5000파운드 벌금을 내라고 했는데, 그동안 이것보다 더한 벌금도 문제 없이 내던 킨은 무슨 이런 문제로 벌금을 내야하냐며 벌금 내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킨은 이 벌금 납부 거부가 그가 맨유에서 내쳐진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20] 경기 끝나고 관중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자리에서 "별로 할 말 없습니다. 경기 보러와주신 맨유, 셀틱 팬들 감사합니다. 한 시즌동안 맨유, 셀틱 선수들 고생하셨습니다. 딱히 더 말할거 없습니다. 오늘 즐거우셨으면 좋겠고요. 제 남은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입니다. 행운을 빕니다."라며 정말 쿨하고 짧게 마무리했다.[21] 피지컬의 어느 부분에서도 킨에게 밀리지 않는 파트리크 비에라, 비에라만큼은 아니지만 최상급의 피지컬을 가진 스티븐 제라드, 그들보다 느리지만 그것을 빼면 그들과 비슷한 수준의 피지컬을 가진 프랭크 램파드가 EPL 역사상 최고의 중앙 미드필더로 지금까지 불리우는 것에서 과거 EPL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다. 신체적인 점에서 타 선수들에 비해 불리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곧 영국 팀에서의 실패를 의미했다. 어느 리그라도 피지컬이 우수하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는 유리하겠지만.[22] 현역 선수로 예를 들면 황희찬, 은골로 캉테, 제르단 샤키리 같이 다부진 체형을 가진 선수.[23] 국내에서는 킨의 전성기 시절 영상을 라이브로 본 세대가 극히 적고 해외축구의 본격적인 태동기인 2000년대 초반이 비에이라의 전성기였기에 그 당시 30대 초반에 접어들어 하락세로 넘어가는 킨이 저평가를 많이 받는다. 또 국가대표 활약상에서 비에이라는 월드컵 우승 및 준우승과 유로 우승의 커리어를 가졌고, 킨은 94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이외에는 아일랜드의 전력상 한계가 있기에 대표팀 커리어로 들어가면 킨이 많이 불리해진다. 다만, 해외에서는 국대 활약상을 제외하면 오히려 킨을 더 쳐주는 경향이 있다.[24] 다만 알렉스 퍼거슨은 자서전에 본인이 생각하는 월드 클래스 선수에 로이 킨을 포함시키지 않았는데 정말 많은 논란거리가 되었다. 피터 슈마이켈과 함께 퍼거슨이 월드 클래스라고 평가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가장 논란이 되었던 선수.[25] 둘의 악연은 2002 월드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26] 1997~2007[27] 제라드가 선정한 역대 유럽 축구선수 베스트 11.[28] 식단에 패스트푸드가 나왔으니 말 다했다.[29] 훈련시설이 전혀 준비가 안되어있는 사이판에서 훈련을 했다! 훈련용 공, 콘, 골키퍼 장갑조차 없었고 운동장은 떡잔디여서 부상위험이 컸다.[30] 정작 불화가 있었던 니얼 퀸은 훗날 선덜랜드에서 감독과 구단 수뇌부로 다시 재회하게 된다. 게다가 아일랜드는 킨 없이도 16강에 올라갔다.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서 열린 16강 스페인전에서도 1:1로 비겼으나 승부차기로 패해 아쉽게 탈락. 이겼다면 한국의 8강전 상대가 되었을 것이다.[31] 게리 네빌은 둘 다 자기 주장이 강하고 고집이 세고 절대 지기를 싫어한다는 점에서 둘을 서로의 거울같았다고 표현한다. 그래서 둘의 사이가 좋게 끝나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둘의 비슷한 성향 때문에 키노게이트 이전부터 미묘한 긴장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키노게이트 사건이 터지고 그걸로 인한 팀 미팅(참고로 이 미팅은 정말 끔찍했다고 한다)까지 열리는 순간 둘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을거라 직감했다고 한다.[32] 이 과정에서 당시 맨유의 단장이었던 데이비드 길은 로이 킨에게 주는 구단 성명서에 11년 반 동안의 헌신에 고맙다고 하는 오류도 범했다. 로이 킨은 맨유에서 12년 반을 뛰었다.[33] 마틴 퍼거슨[34] 퍼거슨이 영국 축구계, 그리고 세계 축구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을 생각하면 이정도로 대차게 까는 인물은 정말 드물다.[35] 퍼거슨과는 달리 베컴과 킨의 사이는 상당히 좋은 편이다. [36] 평소 로이 킨이 하는 발언을 보면 아무리 힘들어도 별말없이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스타일을 선호하는 것으로 보인다.[37] 그런데 18/19 시즌 과르디올라의 맨체스터 시티는 승승장구하면서 도메스틱 트레블을 달성한 반면 무리뉴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이전과 달리 급격히 부진하고 무리뉴가 시즌 도중에 경질당하면서 의외로 킨의 말이 맞았다는 드립도 간간히 나오고 있다.[38] 이러한 시니컬한 모습 때문에 의료진이 코로나 백신을 만들어도 걔네들은 그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할 양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많다.[39] 엘링 홀란의 아버지다.[40] 로이 킨의 자서전에는 "공 가져가는 건 좋은데, 다신 나한테 엄살 피우지 말라고 하지 마라", "알피 홀란은 정당한 대가를 치른 것" 이라는 내용이 있긴 하다. 그러나 언급한 '정당한 대가'라는 게 엄살피우지 말라는 홀란의 말에 대한 것인지, 홀란이 입은 부상 자체를 의미하는 지는 명확하지 않다. 로이 킨 또한 인터뷰에서 부상을 입힐 의도로 홀란에게 백태클을 한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단, 로이 킨 답게 홀란을 아프게 할 의도는 있었다고 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