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 교치
1. 개요
313년 낙랑군이 미천왕에게 축출된 뒤, 요서지역으로 이동한 사건이다. 치소가 여러 차례 이동된 현도군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편.
이는 한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군을 설치할 때부터 요서지역에 있었다는 낙랑군 요서설[1] 과는 구분해서 봐야한다.
2. 낙랑군의 이동
2.1. 모용선비 ~ 북연 시기(313년 ~ 436년)
十四年, 冬十月, 侵樂悢郡, 虜獲男女二千餘口.
14년(313년)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략하여 남녀 2천여구를 포로로 잡았다.
十五年, 春正月, 立王子斯由爲太子. 秋九月, 南侵帶方郡.
15년 봄 정월, 왕자 사유를 태자로 삼았다. 가을 9월, 대방군을 침략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中
313년, 고구려 미천왕은 낙랑군을 공격했으며 이듬해인 314년 대방군까지 공격하게 된다. 당시 낙랑군과 대방군을 지배하고 있던 인물은 장통이었는데, 낙랑인 왕준의 설득으로 모용외에게 투항하면서 낙랑태수로 임명되었다.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 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 連年不解. 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 廆爲之置樂浪郡, 以統爲太守, 遵參軍事.
건흥(建興) 원년(313) 4월 요동 사람 장통(張統)은 낙랑(樂浪)과 대방 두 군을 점거하고 고구려왕 을불리(미천왕)와 해를 이어 서로 공격했지만 해결하지 못했다. 낙랑인 왕준(王遵)이 장통을 설득해서 그 백성 1000여 가구를 통솔해서 모용외(慕容)에게 귀부하니 모용외는 낙랑군을 설치해서 장통을 태수로 삼고 왕준을 참군사(參軍事)로 삼았다.
자치통감 권 88 ‘진기’(晋紀)10
313년에 평양의 낙랑군이 고구려에 의해 멸망당한 후 낙랑군 유민들은 모용외가 다스리는 영역으로 이주하게 된다. 모용외는 이 유민들을 위하여 '''요서'''에 낙랑군을 이전시켰다.[2] 이를 교치(僑置)라고 한다. 이 요서의 낙랑군은 이름만 있는 낙랑군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가 존재하는 실재하는 낙랑군이었다.
장통을 시작으로 모용외 시기부터 후연 시기까지 4세기 ~ 5세기에 걸쳐 배외(裴嶷), 국팽(鞠彭), 유선(游鱓)이 낙랑태수로 임명되었다. 또한 조선령(朝鮮令) 손영(孫泳)[3] 이 확인되는 점으로 볼 때, 명목상 군현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행정적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4]
2.2. 북위 - 동위 시기(436년 ~ 550년)
연화(延和) 원년(432)...9월(九月) 을묘일(乙卯), 가마가 돌아왔다. 영구(營丘), 성주(成周), 요동(遼東), 낙랑(樂浪), 대방(帶方), 현도(玄菟) 6군의 백성 3만가를 유주로 이주시켰다. 창고를 열어 진휼했다.
延和元年...九月乙卯, 車駕西還. 徙營丘·成周·遼東·樂浪·帶方·玄菟六郡民三萬家于幽州, 開倉以賑之.
-위서(魏書) 권4(卷四) 상(上) 세조기(世祖紀)
북평군(北平郡)은 2개의 현을 거느린다...조선현(朝鮮)은 전후한(二漢)·진나라(晉) 대 낙랑(樂浪)에 속했다가, 후에 없어졌다. 연화(延和) 원년(432년) 조선민(朝鮮民)을 비여에 이사시켜 다시 설치했다.
北平郡...朝鮮 二漢·晉屬樂浪, 後罷. 延和元年徙朝鮮民於肥如, 復置, 屬焉.
-위서 권106 상(上) 지(志) 제5(第五) 지형(地形) 지(志) 상(上) 中
432년에는 북위 세조가 낙랑군 백성을 유주로 옮겨버렸다. 이때쯤 모용선비가 설치했던 새로운 낙랑군은 쇠락해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520년 대 중반[7] 다시 북위에서 영주에 낙랑군을 설치했다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없어졌고 537년에 또다시 요서의 남영주에 낙랑군이 설치됐다.낙량군은 전한의 무제 때 설치했으며 전한, 후한과 진나라 대에는 낙랑으로 불렸으나 후에 바뀌었다 폐지되었다. 정광(520년 ~ 525년) 말에 되돌렸는데 연성(連城)을 치소로 삼고 2개의 현을 거느린다. 호(戶)는 219, 구(口)는 1800이다. 영낙(永洛)[5]
대방(帶方)[6]樂良郡 前漢武帝置 二漢、晉曰樂浪 後改 罷。正光末復, 治連城 領縣二, 戶二百一十九, 口一千八. 永洛 <正光末置。有鳥山> 帶方 <二漢屬 晉屬帶方 後罷。正光末復屬。>
-위서 권106 地形志 營州.
북위 시기 확인되는 낙랑태수들로는 왕장(王萇)[8] , 조외(趙隗)[9] 가 있다. 그 외에도 낙랑중정(樂浪中正)[10] 을 지낸 왕온(王溫)이 있다.[11]
3. 기타
어쨌든 몇차례의 변화는 있었지만 313년 이후의 새로운 낙랑군은 요서에 있던 것이다. 그런데 한나라가 세운 기존의 낙랑군이 요서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요서 낙랑군에 대한 기록들을 기존의 낙랑군에 대한 기록인 듯이 왜곡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려 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서에 명확히 교치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후세 연구가들이 기사를 보고 추측하고 있는 것이 전부다.
평양에 있던 낙랑군의 자체적인 정부는 멸망했지만 지역 자체는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 평양성으로서 남았고, 이는 고려시대의 서경과 현재 북한의 수도 평양직할시로 이어진다. 현재 평양에서 낙랑군의 흔적은 락랑구역에 남아있다. 낙랑에서 이름을 따온 지명인데, 낙랑군 관련 유적이 많이 발굴되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다만 현재의 평양 중심부에서는 다소 떨어져 위치해있고, 또 바로 다음시대인 고구려의 안학궁 유적이 있는 대성구역은 정반대로 평양 동북쪽에 위치해있어 같은 평양이어도 두 유적지는 거리가 멀다.[12]
한편 진서 지리편에 기록된 낙랑군, 대방군의 인구가 각각 6현 3700호[13] 와 7현 4900호[14] 인 점을 보면 3세기 말 시점의 낙랑군과 대방군의 인구는 후한 말기의 혼란의 여파로 주변으로 인구가 흩어지거나 폐현되면서 급격히 쇠락한 것으로 보인다. 1호를 5명으로 본다면 각각 1만 8500명, 2만 4500명 정도가 된다. 둘이 합쳐도 4만 3천 명에 불과한데 한서 지리지에 기록된 낙랑군이 인구 40만이라고 하므로 크게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1세기 당시랑 비교하면 낙랑군의 크기가 축소된 점[15] 을 고려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