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용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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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휘는 외(廆), 본명은 혁락괴(弈洛瑰) 혹은 약락외(若洛廆). 선비족 모용부의 군주이다.
모용선비의 영웅으로, 그가 통치하던 모용선비의 세력은 중원의 혼란을 틈타 급속히 성장하였다. 모용외가 죽은 후에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모용황은 아버지가 축적한 기반을 토대로 모용선비 최초의 왕조인 전연을 건국하고 오호십육국시대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다. 이후로 한동안 모용선비는 관동 일대 및 요서, 요동 일대를 아우르는 강대한 세력을 형성한다. 이 때문에 비록 전연의 초대황제는 모용황이었으나, 그 실질적인 창업시기는 모용외 시대로 거슬러 보는 시각도 있다.
모용외는 어려서부터 미남이었고 몸집이 우람했다고 한다. 성품이 용맹했을 뿐 아니라, 중국의 학문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실제로 세력을 일으킨 후에는 전란을 피해 동쪽으로 피난해온 한족의 인구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사대부들을 대거 받아들여 중국의 사상과 문화 및 관직체계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토지 개간과 농업 진흥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2. 생애
269년 선비족 모용부의 대인 모용섭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283년 모용섭귀가 사망하자 모용섭귀의 동생인 모용내가 그 자리를 찬탈했다. 모용외를 죽이려하니 모용외는 요동으로 도망가 2년간 떠돌이 생활을 하며 살아났다. 285년 국인(귀족)들이 모용내를 죽이고 모용외를 옹립했다.
모용외는 우문 선비를 공격하기 위해 진나라(서진)에 표를 올려 허락을 구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화가 난 모용외가 진나라의 요서를 침략해서 살육을 벌였다. 그러자 진나라에서 군대를 보내 모용외를 공격하자 모용외가 대패했다. 그 이후로 모용외는 진나라에 대한 노략질을 그치지 않았다.
285년 동쪽으로 부여를 공격하였다. 부여왕 의려는 대책없이 공격당하자 자살했고, 모용외가 그 국성을 함락하고 10,000여 명을 포로로 잡아 귀환했다. 진나라가 가침을 보내 의려의 아들 의라를 맞이해 왕으로 즉위시키려하자 모용외가 손정을 보내 기병으로 이를 요격했다. 가침이 이를 막아내고 손정을 베어 부여를 회복시켰다.
결국 모용외는 진나라와의 대립에서 힘이 부치자 “나는 선공 이래 대대로 중국을 받들었으며 또한 화예(중화와 오랑캐)가 서로 다스림이 다르고 강약이 실로 차이나니 어찌 진나라와 더불어 다투겠는가? 어찌 불화하여 내 백성들을 해롭게 하겠는가!”라며 정신 승리성 발언을 하고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 항복했다.
이로써 모용외는 진나라에 의해 선비도독에 봉해졌다. 이때 모용외가 진나라 동이교위부의 하감을 찾아갔는데 하감이 무장을 한 채 그를 맞이하자 그도 군복을 입고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묻자 모용외는 “주인이 예의로써 대하지 않는데 손님 또한 어찌 예의를 차리겠소!”라고 말했다. 이에 뻘줌해진 하감은 모용외에게 경탄했다.
선비족 우문부와 단부는 모용부가 날로 성장하자 모용부와 왕래하며 이를 경계했다. 모용외는 이들을 후하게 대접해주며 경계를 허물도록 했다. 289년 중심지를 청산으로 옮겼다.
293년,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그 군세가 매우 강하여 고구려 왕인 봉상왕마저 도읍을 떠나서 신성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모용외는 달아난 봉상왕을 추격하여 거의 잡기 직전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때 신성에서 북부소형의 벼슬을 지내던 고노자가 기병 500기를 거느리고 봉상왕을 맞이하기 위해 왔다가 봉상왕의 행렬을 추격해오던 모용선비군을 발견하고는 이를 공격하였다. 결국 모용외는 고노자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294년에는 대극으로 중심지를 옮겼다. 농사와 누에치기를 보급하고 법제를 진나라의 것과 같게 했다.
이후 296년, 모용외는 다시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하였는데, 서천왕의 무덤[4] 도 도굴하였다.
그러자 봉상왕이 창조리의 말에 따라 고노자를 서쪽의 요충지인 신성의 태수에 봉하였고, 고노자가 신성태수가 된 이후로 모용외는 다시는 고구려를 침략하지 못하였다.
301년 진나라의 연 지방(유주)에서 물난리가 나자 모용외가 식량을 보급하여 이를 구제했다. 이에 진나라 측에서 관복을 하사하며 사의를 표했다.
서진에서는 드디어 팔왕의 난이 일어났고, 모용외는 이를 틈타 주변 세력을 소탕한다. 대표적으로 302년 ~ 303년 우문부의 우문막규가 동생 우문굴운을 보내 진나라 변경의 성을 침탈하고 굴운의 별수(별장) 대소연이 여러 부를 공략하자 모용외가 직접 이들을 공파했다. 대소연이 분노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모용부의 수도인 극성을 포위했다.
그러자 극성은 공포에 휩싸여 맞서려는 자가 없었다. 모용외는 이렇게 말했다. “소연이 비록 개나 양, 개미떼처럼 많이 모였으나 군에 법제가 없고 이미 우리의 계책 속으로 떨어졌도다. 제군은 다만 힘껏 싸우면 될 뿐 걱정할 것 없다.” 그리고는 무장하여 직접 성밖으로 달려나가 소연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그들을 백여 리에 걸쳐 추적해 10,000여 명을 참획했다.
304년에 흉노족 사람인 유연이 자립해 한나라를 세우고, 311년에는 진나라의 수도 낙양을 함락했다(영가의 난). 이러한 배경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많은 유민이 발생했고, 이들이 모용부로 귀부했다. 모용외는 진나라에서 귀부하는 유민들을 거부하지 않았고 모용부가 성장하는 자원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태자 모용황을 진나라에 입조시켜 진나라의 선진 학문을 배우게 했고 진나라에서 배우고 온 모용황은 모용외에게 진나라의 학문을 가르쳤다. 모용부는 진나라의 문물을 수입하여 더욱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307년 ~ 313년 모용외는 선비의 대선우를 자칭했다. 선비족 소(희)련, 목(환)진이 해마다 요동군을 침탈했다. 이에 많은 유민이 발생하여 모용부에 망명했다. 모용외는 아들 모용한의 건의로 소련, 목진을 격파, 함락시켰다. 이들을 극성으로 옮기고 요동군을 복구했다. 진나라에서 모용외에게 관직을 내렸으나 모용외는 무시했다. 313년 ~ 317년에는 진나라가 모용외에게 관직을 하사하는 데 성공했다. 317년에는 더 업그레이드된 관직을 내리려했으나 모용외가 사양했다.
서진이 망하고 동진이 확실히 건국되었으나 요동 등에는 진나라 세력이 남아있었다. 진나라 평주 자사 최비는 유민들이 자신의 휘하로 오지 않고 모두 모용부로 흘러들어가자 이를 질투하여 고구려, 우문부, 단부와 손을 잡고 모용부를 분할하려 했다. 318년 ~ 321년에 고구려(미천왕), 우문부, 단부가 손을 잡고 모용부를 공격하여 수도 극성까지 포위하나 모용외가 이들을 교란시켜 우문부가 모용외와 한 편인 것처럼 의심하게 하여 이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했다.
이에 우문부의 군주인 우문실독관이 단독으로 모용부를 격파하려 덤벼들었으나 모용외에게 대패했다. 결국 최비의 작전은 완전히 실패해버렸다. 최비는 모용외가 자신을 해칠까 두려워 그의 승전을 축하했으나 모용외가 “항복하는 것이 상책이고 달아나는 것이 하책이다.”라고 최비에게 경고하자 최비는 혼자서 고구려로 도망갔다. 모용외는 최비가 남기고 간 가족들을 극성으로 옮겼다.
320년 고구려가 요동을 공격했으나 모용외가 격퇴했다. 미천왕과 모용외는 일진일퇴하였으나 성과는 없었고, 고구려의 요동 정벌과 전성기는 이렇게 100년을 미루게 되었다.
단부의 단말파의 세력이 아직 방비가 되어있지 않아 모용외가 모용황을 보내 단부를 습격했다. 단부의 땅인 영지에 침입해 명마와 보물을 약탈해왔다. 후조의 석륵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모용외는 거절하고 사신을 붙잡아 진나라(동진)의 건업으로 보냈다. 325년 석륵이 분노하여 모용외를 공격했으나 모용황이 격퇴했다.
모용외가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는데,
그리고는 자신의 유교에 대한 견해를 담은 수천 자로 된 가령(家令)을 저작했다.
333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인 모용황은 자립하여 연왕을 칭했으며, 손자인 모용준이 전연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고조(高祖) 선무제(宣武帝) 혹은 무선황제에 추증했다.
3. 기타
3.1. 한국에서의 모용외
'''역사상 최초로 한민족이 세운 나라를 침략하여 한민족 vs 북방 유목 민족 간 대립 구도라는 스타트를 끊은 인물'''
한국에서는 한국 고대사에서 부여를 대대적으로 말아먹고 고구려와 충돌한 인물로 소개되어 있다. 즉 선비족의 부여 침략을 시작으로 병자호란에 이르기까지 무려 1300여 년이 넘는 '''한민족과 북방 유목 민족간의 질긴 악연'''이 이 사람부터 시작되었다.[5] 물론 그쪽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나 잘 알지, 대중적인 인지도는 꽝이다. 그래도 최근에는 대중 매체에도 꽤 등장해서 《근초고왕》, 《광개토태왕》 등의 사극에서 전연과 후연이 각각 조연으로 등장하였고, 또한 김진명의 소설 《고구려》에서 모용외가 주인공 미천왕의 라이벌로 등장하여 인지도가 꽤 상승했다.
근데 사실 그래봤자 모름지가 현실은 시궁창이었다. 김진명의 《고구려》는 《가령》이라는 유학서를 저작했다는 모용외의 지식인 포스를 싸그리 날리고 완벽한 야만족 우두머리를 연출하고 있다.[6] 게다가 미천왕과 삼각 관계에서 주인공 보정에 걸려 시궁창... 대신 아들이 미천왕의 아들에게 철저히 복수해버리지만, 어차피 끝은 다시 시궁창으로 마치게 되어 있다. 그 손자가 있으니까.
[1] 모용준에 의해서 추존 된 것이다.[2]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향년을 적용.[3] 자치통감 기준, 진서의 재위 기간을 적용.[4] 고구려 서천원에 있었다고 한다.[5] 어디까지나 기록상 최초의 북방 민족과 한민족 간 충돌이다. 그 이전 고조선 때 유목 민족과의 충돌이 있었는지는 사료가 없어서 알 수가 없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과 흉노는 한무제의 침략 이전에는 동맹 관계였던 것 같은데 그 이전 고조선이 동호나 흉노 등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현재로썬 알 길이 없다.[6] 우문 선비를 몰살시킨다든가 심심해서 낙랑을 털어버리고 못생긴 여자를 구해오지 못한 사람들을 던져버리는 등 개념이란게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